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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영전 (英英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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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전(英英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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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사동기(想思洞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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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연간(弘治年間, 1488~1500)에 성균관 진사인 김생(金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잊었으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인품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그는 글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농담에도 능통했으니, 참으로 세상의 기이한 남자라 할만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풍류랑(風流郞)이라 일컬었다. 약관의 나이에 진사 제일과에 급제하여 이름이 서울에 널리 알려졌으며, 높은 벼슬아치와 지체 좋은 가문에서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그에게 사랑스런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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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반궁(泮宮)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주막의 파란 깃발이 푸른 버드나무와 붉은 살구나무 사이에서 은은히 비치었다. 김생은 봄날의 흥취에 젖어서 목이 마를 정도로 술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흰모시 적삼을 전당잡히고 진주 빛이 나는 홍주(紅酒)를 사서 꽃무늬가 그려진 자기(磁器) 술잔에 따라 마셨다. 술에 취해서 술집 누각 위에 누워 있는데, 꽃향기가 옷에 스미고 대나무 이슬이 얼굴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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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석양이 산마루에 가로 걸치고 새들이 숲 속으로 날아들자, 하인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였다. 김생은 일어나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길에 오르니, 백사장이 원근에 펼쳐져 있고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가 냇가에 드리워져 너울거렸다. 노닐던 사람들도 점차 집으로 돌아가 길거리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김생은 흥에 겨워 낮게 시를 읊조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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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陌看花柳  동쪽 두렁에 꽃과 버드나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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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騮驕不行  자류마는 교만스레 가려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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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處玉人在  아름다운 임은 어느 곳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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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花無恨情  복사꽃 흐드러지니 임 그리는 마음 끝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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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이 읊기를 마치고 취한 눈을 반쯤 들어 올리는 순간 한 미인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 정도 되었는데, 사뿐사뿐 걷는 고운 발걸음에 길가의 먼지마저 일지 않았다. 허리와 팔다리는 가냘프고 어여뻤으며, 몸매가 매우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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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인은 가다가 멈추는가 하면, 동쪽으로 향하다가 서쪽으로 걷기도 하고, 기와조각을 주워 꾀꼬리를 희롱하는가 했더니,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옥비녀를 풀어 윤이 나는 검은 머릿결을 가볍게 흔들자, 푸른 소매는 봄바람에 나부끼고 붉은 치마는 맑은 냇가에 어리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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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이 크게 흔들리어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말채찍을 재촉해 달려가 곁눈으로 흘끗흘끗 바라보니, 고운 치아와 아름다운 얼굴이 참으로 국색(國色)이었다. 김생은 말을 빙빙 돌려 그 주위를 맴돌면서 때로는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뒤를 좇으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주시하였다. 그는 끝까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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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김생이 감정을 억제치 못함을 알아채고, 부끄러운 나머지 눈썹을 내리깐 채 감히 바라보지를 못했다. 여자가 점점 멀리 나아가자, 김생도 계속 그 뒤를 좇아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까지 따라가 보니, 그녀는 마침내 상사동(相思洞) 길가에 있는 몇 칸짜리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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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어쩔 줄 몰라 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우두커니 섰는데, 마음이 쓸쓸하고 처량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원통한 마음으로 되돌아 왔으나, 멍하니 정신을 잃고 술에 취하거나 바보가 된 듯하였다. 깊은 밤이 되어 머리를 베개에 얹었으나 잠자리는 불편하기만 했다. 밥상머리에 앉아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으며, 먹더라도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몸은 고목(古木)처럼 초췌해지고, 안색은 다 타버린 재처럼 참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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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평소 김생을 따르던 막동이란 자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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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처럼 호방하신 분이 이렇게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계시니,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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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막동의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막동은 이야기를 들으며 빙긋이 웃다가 김생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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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라면 근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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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이라고 너마저 그런 소릴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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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제게 좋은 계교가 있으니 쓸데없이 애를 태우지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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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이냐? 그래, 내가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겠느냐? 네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다. 어서 말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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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이 성급하게 채근하자 막동은 웃음부터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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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김생의 눈을 보고 정색을 하더니 계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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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도련님께선 좋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셔서 그 집에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멀리 떠나는 벗을 전송하는 사람처럼 그 집주인에게 방 한 칸을 빌리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술자리를 만드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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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동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두웠던 김생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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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은 생각이다! 어째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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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막동의 계책을 칭찬하며 하인들에게 서둘러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김생은 여인이 들어갔던 집을 찾아가 방 한 칸을 빌었다. 그리고 미리 약속한 대로 막동에게 손님을 청해 오라 하였다. 막동은 한참 동안 어디를 다녀오는 것처럼 한 후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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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지금 온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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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손님께선 오늘 많이 취하셔서 내일 오겠다고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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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서운한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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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하구나. 그 사람이 가기(佳期)를 그르쳐 좋은 술을 버리게 생겼으니, 이 집 주인을 불러서라도 한잔 마시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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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부르니 칠십 정도 된 할머니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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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는 편히 앉으소서. 손님을 전송하러 나왔다가 허탕을 쳤지만 좋은 술이 아까우니 주인과 한잔하고 싶어 불렀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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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막동에게 술과 안주를 들이라 하고 그 노파에게 술을 권했다. 이날 김생 과 노파는 취하도록 마셨고, 마치 친한 벗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 날 김생은 여인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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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김생은 좋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또 그 집으로 갔다. 그 날도 역시 막동이 왔다 갔다 하였고, 손님 대신 노파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김생이 똑같은 준비를 하고 노파를 청하자 막동의 예상대로 노파는 과연 의심이 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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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근 어느 집도 손님을 전송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인데 도련님께선 어찌하여 하필 누추한 저희 집을 골라 사흘씩이나 은혜를 베푸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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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오지 않아 이렇게 된 것뿐 무슨 다른 뜻이 있겠소? 또 할머니와 더불어 술을 나누는 것은 손님과 주인 사이에 당연한 것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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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그렇게 노파를 안심시켰다. 그 날도 두 사람은 술이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김생은 빨간 보자기를 풀어 비단 적삼 하나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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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할머니를 괴롭히고도 갚을 것이 없어 걱정했는데 이것이라도 제 정성으로 아시고 받아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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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김생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근심이 되었다. 노파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로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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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과부 되어 살아온 지 오래지만 이웃 사람조차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 도련님께서 소망이 있으시다면 비록 죽는 일이라도 말씀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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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김생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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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소? 제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한 낭자를 보았습니다. 나이 어린 협기(俠氣)로 뒤를 좇아왔더니 그 낭자가 들어 간 곳이 바로 이 곳이었소. 그런데 그 낭자를 본 뒤부터 마음이 취한 듯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그 낭자만 생각하니, 애끊는 괴로움이 벌써 여러 날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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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김생이 여인을 본 날짜와 여인의 복장을 물었다. 노파는 짚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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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께선 제 죽은 언니의 딸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 애의 이름은 영영(英英)이라 하는데 정말 탐스러운 아이지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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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란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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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노파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파는 김생 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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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은 그 애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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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슨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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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회산군(檜山君)의 시녀입니다. 궁중에서 나고 자라 문 밖을 나서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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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에 내가 본 날은 어인 나들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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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마침 그 애 부모의 제삿날이라 제가 회산군 부인께 청하고 겨우 데려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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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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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은 자태가 곱고 음률이나 글에도 능통해 진사(회산군)께서 첩을 삼으려 하신답니다. 다만 그 부인의 투기가 두려워 뜻대로 못 할 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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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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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늘이 나를 죽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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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김생의 병이 깊은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노파는 그렇게 김생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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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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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 그것이 무엇이오? 빨리 말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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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가 한 달이 남았으니 그 때 다시 작은 제사상을 벌이고 부인에게 영아를 보내 주십사고 청하면 그리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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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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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말대로 된다면 인간의 오월 오월은 곧 천상의 칠석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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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과 노파는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영영을 불러낼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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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노파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김생은 날이 밝기도 전에 그 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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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어떻게 되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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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아침도 먹기 전에 달려온 그가 우스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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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께 간절하게 부탁하였더니 처음에는 거절하셨습니다. 진사께서 영아의 출입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 제가 다시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진사께서 출타하실 일이 있으니 그 때라면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영아가 오긴 오겠지만 진사님 출타 시간을 알 수 없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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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노파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영영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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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해가 거의 오시(午時)가 다 되어도 나타나는 그림자가 없었다. 김생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일어서서 부채를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그 노파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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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고, 근심하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행인들이 가까워졌다가 곧 다른 데로 가니, 그 때마다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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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면 감천이라니, 도련님은 좀 안정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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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데 먼 데서 신을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김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발소리는 점점 노파의 집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김생이 창으로 달려가 바라보니 과연 오는 사람 은 꿈에도 그리던 영영 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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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기뻐 손뼉을 치는데 마치 어머니를 본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은 문 앞 버드나무에 붉은 말이 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을 살피며 머뭇거리면서 들어오지 않았다. 노파는 영영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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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들어오너라. 여기 도련님은 우리 집에서 손님을 전송하러 오신 분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늦었느냐? 네가 못 오는 줄 알고 네 부 모 제사를 그냥 지냈구나. 어서 들어오기나 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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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파는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김생과 더불어 잔을 들고 서로 권하였다. 몇 잔 술이 오갔을 즈음 김생은 미소 지으며 영영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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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자도 이리 가까이 앉으시오. 내가 잔을 채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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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영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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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깊은 궁중에서 자라 세정(世情)을 알지 못한다지만 술 권하는 예의조차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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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그렇게 말한 뒤에야 영영은 잔을 받아 들었다. 김생이 영영에게 술을 부어 주었고, 그녀는 주저하다가 술잔을 잠깐 입술에 대기만 했다. 잠시 후 그 노파는 술에 많이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영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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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네가 잠시 도련님을 모시고 있거라.”
 
81
노파가 자리를 피해 주어 김생과 영영만 남았다.
 
82
“삼월에 홍화문 앞길에서 서로 본 적이 있는데 낭자는 그 때를 기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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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기억하오나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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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말만 못하오?”
 
85
“말은 보았으나 사람은 보지 못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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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자는 나를 놀리는구려. 비록 얼굴이 파리하고 몸이 말라서 그 때와 다르긴 하지만 설마 날 모르겠소? 하기야 낭자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된 것인지 알 까닭이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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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안타까운 눈으로 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영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분명 김생을 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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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낭자는 내가 아닌데 어찌 이 마음을 알겠소?”
 
89
“도련님은 제가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을 아시리오?”
 
90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영영은 다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91
“한 번 멀리서 바라보고 그리워한 지가 이미 달이 지났는데 이제야 만나 보게 되다니,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소. 낭자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내 목숨은 오늘을 기다려 겨우 살아남았소.”
 
92
김생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러나 영영은 김생의 말이 끝날 무렵 일어서야 했다.
 
93
“진사님께서 돌아오시면 먼저 저를 찾으십니다. 그만 가야 합니다.”
 
94
김생은 영영의 말에 금방 시무룩해졌다.
 
95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벌써 작별할 때는 다가왔고 다시 만나기는 어려우니…….”
 
96
영영이 다시 눈을 들어 김생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97
“이 달 보름밤에 진사님은 밖에서 다른 왕자님들과 달을 감상하신다 합니다. 그 날 궁의 무너진 담 쪽으로 오십시오.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무너진 담 옆의 작은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그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있사오니 도련님께선 거기에 계십시오.”
 
98
김생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영영과 작별하였다. 김생은 노파의 집에서 나와 멀어져 가는 영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었다.
 
99
宮門深處鎖嬋娟  깊고 깊은 저 궁 안에 고운 님 갇혀 있네
100
一別音容兩杳然  손을 놓아 작별 후로 서로 소식 아득하여라
101
此日難忘情態度  이 날도 잊지 못해 예쁜 얼굴 알뜰한 사랑
102
前身應結好因緣  하루 속히 서로 만나 좋은 인연 맺었으면
 
103
心勞往事愁如雨  지난 일을 생각하니 수심은 비가 되고
104
若待佳期日似年  가기(佳期)를 고대하니 하루 해가 한 해 같네
105
正欲尋芳三五夜  십오야 달 밝은 밤 고운 님 찾고지고
106
登樓看月幾時圓  다락 올라 달을 보며 그 옛날을 다시 찾네
 
107
김생이 약속한 날짜가 되어 가니, 과연 궁궐 담이 무너져 이가 빠진 것처럼 문이 되어 있었다. 좁고도 깊은 담구멍을 따라 들어가자, 이내 조그만 문이 나타났다. 시험 삼아 밀어보니 과연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동쪽으로 내려가자 영영의 말대로 과연 별실이 나타났다. 김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108
“난향이 나를 속이지는 않았구나.”
 
 
109
이어서 김생은 별실로 들어가 영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밝은 달이 막 솟아오르고, 서늘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다. 그러자 계단 위의 뭇 꽃들은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뜰 앞의 푸른 대나무는 맑고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110
갑자기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쪽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다. 김생은 영영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옷 향기가 엄습해 왔다. 김생이 눈을 뜨고 바라보니 곧 난향이었다. 김생은 어둠 속에서 나와 영영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111
“그대의 사랑 김모(金某)가 이미 여기에 와 있소.”
 
112
영영이 말했다.
 
113
“낭군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선비입니다.”
 
114
영영이 즉시 김생의 손을 이끌어 가까이 앉히고 안부를 묻자, 김생이 대답했다.
 
115
“만 번 죽을 고생을 견디고 넘어가는 숨을 겨우 보존하고 있을 뿐이오.”
 
116
영영이 물었다.
 
117
“무엇 때문에 그리 되었습니까?“
 
118
김생이 말했다.
 
119
“땅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기 때문이오.”
 
120
이렇듯이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김생이 밝은 달을 쳐다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121
“내가 처음 올 때는 이 달이 동쪽 하늘에 있었는데, 지금은 하늘 한 가운데 떠 있소. 밤이 절반쯤 지나가 버렸으니, 이 시간에 동침을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란 말이오?”
 
122
김생이 즉시 영영의 옷깃을 붙들고 벗기려 하자, 영영이 말리면서 말했다.
 
123
“낭군은 어찌 저를 뽕나무밭에서 노는 여자처럼 대하십니까? 별도로 침실이 한 곳 있으니 그 곳에서 좋은 밤을 편안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124
김생은 머리를 흔들면서 거절하여 말했다.
 
125
“나는 이미 법을 어기고 또 죽음을 탐하여 어렵사리 이곳에 왔소. 한 번 오는 것도 이렇듯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기다릴 수 있겠소? 무릇 일을 처리할 때는 삼가 만전(萬全)을 기해야 하오. 만약 당돌하게 멋대로 행동한다면, 우리 일만 누설될까 두렵소.”
 
126
영영이 말했다.
 
127
“일 누설되고 안 되고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으니, 낭군께서는 공연히 애태우지 마십시오.”
 
128
그리고 나서 김생의 손을 이끌어 감싸 안고 들어가자, 김생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김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몸을 구부리고 살금살금 걸어가는데, 문안으로 들어갈 때는 깊은 연못을 굽어보는 듯 두려웠으며, 땅을 밟을 때는 엷은 빙판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걸었다. 매번 한 발을 옮길 때마다 아홉 번이나 넘어지고, 땀이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려도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영영을 따라 굽은 계단을 오르고 회랑을 빙빙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두세 번 문을 지나서야 커다란 안채에 도달하였다.
 
129
궁인들은 모두 잠이 깊이 들어 뜰과 방은 고요했다. 오로지 깁을 바른 창에서 맑은 등불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곳이 부인의 침소임을 알 수 있었다. 영영은 김생을 어떤 방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130
“낭군은 여기에 조금만 앉아 계십시오.”
 
131
그런 다음 영영은 즉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김생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여 자리에 앉거나 눕는 등 안절부절 하였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중문으로 달려 들어와 아뢰는 소리가 들리었다.
 
132
“나리께서 들어오십니다.”
 
133
그 소리와 함께 등불이 뜰 가득히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시녀와 하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대군을 받들어 모시고 들어왔다. 대군은 취해서 뜰 가운데 눕고서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으며, 코고는 소리도 점차 깊어갔다. 이때 영영이 부인의 명을 받들고 와서 아뢰었다.
 
134
“차가운 땅바닥에 오래 누워 계시면 풍상이 들까 두려우니, 어서 왕자님을 일으켜 안으로 모시랍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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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람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불빛도 꺼졌다. 이윽고 영영이 오른손으로는 옥등(玉燈)을 잡고, 왼손으로는 은병(銀甁)을 붙들고 나와 김생이 숨어 있는 방문을 열었다. 김생은 벽에 붙어서 두 발을 포개고 서 있으면서,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영영이 웃으면서 김생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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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군께서는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제가 위로하고자 따뜻한 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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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영영이 금으로 된 연꽃 모양의 술잔에다 술을 따라 김생에게 권하니, 김생이 받아 마셨다. 영영이 또 한 잔을 권하자, 김생이 사양하며 말했다.
 
138
“마음이 정(情)에 있지, 술에 있지 않소.”
 
139
김생은 즉시 술을 치우게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물건은 없고, 오직 붉은 책상 위에는 두초당(杜草堂)의 시집 한 권이 흰 구슬로 글을 새긴 낭간에 눌려 있었으며, 탁상 위에는 줄이 짧은 거문고가 하나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김생은 즉시 두 구를 지어서 먼저 불렀다.
 
140
琴書瀟鮮淨無塵  거문고와 책은 맑고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으니,
141
正稱空房玉一人  바로 쓸쓸한 방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것이리.
 
142
영영이 이어서 읊었다.
 
143
今夕不知何夕也  오늘밤은 어떠한 밤인가?
144
錦衾瑤席對佳賓  비단 이불 구슬 자리에 고운 님과 마주 앉았네.
 
145
이윽고 김생과 운영은 서로 이끌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가 비로소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다. 밤이 다 끝나갈 즈음에 새벽닭이 꼬끼오 울며 날 밝기를 재촉하고, 멀리서 파루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왔다. 김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챙겨 입고 탄식하며 다급히 말했다.
 
146
“좋은 밤은 괴로울 정도로 짧고 사랑하는 두 마음은 끝이 없는데, 장차 어떻게 이별을 하리오? 궁궐 문을 한 번 나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터이니, 이 마음을 어떻게 하리오?“
 
147
영영은 이 말을 듣고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더니, 고운 손으로 눈물을 흩뿌리면서 말했다.
 
148
“홍안박명(紅顔薄命)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비단 미천한 저에게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서 이렇듯 이별하니, 죽어서도 이렇듯이 원통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굳이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낭군은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남아인데, 어찌 소소하게 아녀자를 염려하다가 성정(性情)을 해쳐서야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낭군께서는 이별한 뒤에는 제 얼굴을 가슴속에 두어 심려치 마시고, 천금같이 귀중한 몸을 잘 보존하십시오. 또 학업을 계속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운로에 올라 평생의 소원을 이루시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149
이어서 영영은 토끼털로 만든 붓을 뽑고 용꼬리를 새긴 벼루를 연 다음, 난봉전(鸞鳳牋)을 펼쳐 놓고 칠언율시(七言律詩)를 한 수 지어 이별에 부치었다.
 
150
幾日相思此日逢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하다가 오늘 만났던고?
151
綺窓綉幕接手容  깁 바른 창 수놓은 휘장 안에서 손잡고 마주하였네.
 
152
燈前未盡論心事  등불 앞에선 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153
枕上施驚動曉鍾  베갯머리에선 새벽 종소리에 놀라 일어났네.
 
154
天漢不禁烏鵲散  은하수는 오작이 흩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니,
155
巫山那復雲雨濃  언제 다시 무산의 비구름 짙어질 것인가?
 
156
遙知一別無消息  한 번 이별한 뒤 아득히 소식은 알 길 없고,
157
回首宮門鎖幾重  겹겹이 잠긴 궁궐 문을 되돌아보기만 하네.
 
158
김생은 영영의 시를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즉시 붓을 적셔 화답(和答)하였다.
 
159
燈盡紗窓落月斜  등불 꺼진 사창(紗窓)에 달이 이우니,
160
乖離牛女隔天河  견우와 직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이별하네.
 
161
良宵一刻千金直  좋은 밤의 일각 천금만큼 귀하니,
162
別淚雙行百恨和  두 줄기 이별 눈물에 온갖 한이 사무쳤네.
 
163
自是佳期容易阻  이제 아름다운 기약 용이치 않으리니,
164
由來好事許多魔  참으로 호사에 다마로구나.
 
165
他年縱使還相見  먼 훗날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166
無限恩情奈老何  한없는 은정(恩情)에 늙은들 어떠하리.
 
167
영영은 김생의 시를 펼쳐 놓고 보려고 하였으나 눈물이 글자를 적셔 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생의 시를 거두어 품속에 넣고 묵묵히 말을 못한 채 손을 잡고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 새벽 등불은 희미해지면서 동창이 밝아오려 하였다. 이에 영영은 김생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무너진 담장 밖에서 전송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흐느끼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니, 죽어서 이별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였다.
 
168
이윽고 김생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넋을 잃어 물건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소리를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일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사동의 노파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다시 편지를 부칠 길마저 없는지라, 김생은 희망을 잃고 헛되이 몽상(夢想)에 젖어 있기만 했다.
 
 
169
그러나 세월은 천연히 흘러가고 광음은 돌연히 바뀌어 온갖 근심 속에서도 삼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음이 일에 따라 변하듯 영영에 대한 그리움도 점차 줄어들었다. 김생은 다시 학업을 일삼아 경전(經典)과 서적(書籍)에 침잠하고 힘써 문장을 닦았다.
 
170
홰나무 꽃이 누렇게 물드는 시기가 되어 김생은 과거 시험장에서 나라 안의 모든 선비들과 함께 자거를 다투었다. 그는 시험을 치를 때마다 거듭 합격하여 마침내 뭇 사람들 가운데서 장원으로 뽑히었다. 이로 인해 김생의 이름은 널리 빛나 당대(當代)에는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171
삼일 동안의 유가에서 김생은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고 손에는 상아(象牙)로 된 홀을 잡았다. 앞에서는 두 개의 일산이 인도하고 뒤에서는 동자들이 옹위(擁衛)하였으며, 좌우에서는 비단옷을 입은 광대들이 재주를 부리고 악공들은 온갖 소리를 함께 연주하니, 길거리를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김생을 마치 천상의 신선인 양 바라보았다.
 
172
김생은 얼큰하게 술에 취한지라, 의기(意氣)가 호탕해져 채찍을 잡고 말 위에 걸터앉아 수많은 집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갑자기 길가의 한 집이 눈에 띄었는데 높고 긴 담장이 백 걸음 정도 빙빙 둘러 있었으며, 푸른 기와와 붉은 난간이 사면에서 빛났다. 섬돌과 뜰은 온갖 꽃과 초목들로 향기로운 숲을 이루고, 희롱하는 나비와 미친 벌들이 그 사이를 어지러이 날아 다녔다.
 
173
김생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곧 회산군(檜山君) 댁이라고 하였다. 김생은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짐짓 취한 듯 말에서 떨어져 땅에 눕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궁인(宮人)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나오자, 구경꾼들이 저자처럼 모여들었다.
 
 
174
이때 회산군은 죽은 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며, 궁인들은 이제 막 상복(喪服)을 벗은 상태였다. 그 동안 부인은 마음 붙일 곳 없이 홀로 적적하게 살아온 터라, 광대들의 재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녀들에게 김생을 부축해서 서쪽 가옥으로 모시고, 죽부인을 베개 삼아 비단 무늬 자리에 누이게 하였다. 김생은 여전히 눈이 어질어질 하여 깨닫지 못한 듯이 누워 있었다.
 
175
이윽고 광대와 악공들이 뜰 가운데 나열하여 일제히 음악을 연주하면서 온갖 놀이를 다 펼쳐 보였다. 궁중 시녀들은 고운 얼굴에 분을 바르고 구름처럼 아름다운 머릿결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주렴을 걷고 보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영영이라고 하는 시녀는 그 가운데 없었다. 김생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녀의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낭자가 나오다가 김생을 보고는 다시 들어가서 눈물을 훔치고, 안팎을 들락거리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는 바로 영영이 김생을 보고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차마 남이 알아 챌까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176
이러한 영영을 바라보고 있는 김생의 마음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어두워지려고 하였다. 김생은 이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177
“이곳이 어디입니까?“
 
178
궁중의 늙은 노비인 장획(藏獲)이라는 자가 달려와 아뢰었다.
 
179
“회산군 댁입니다.”
 
180
김생은 더욱 놀라며 말했다.
 
181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습니까?“
 
182
장획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김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부인이 술로 인한 김생의 갈증을 염려하여 영영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하게 되었으나,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단지 눈길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영영은 차를 다 올리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떨어뜨렸다. 이에 김생은 얼른 편지를 주워서 소매 속에 숨기고 나왔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뜯어보니, 그 글에 일렀다.
 
 
183
박명한 첩 영영은 재배하고 낭군께 사룁니다. 저는 살아서 낭군을 따를 수 없고, 또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해만이 남은 숨을 헐떡이며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어찌 제가 성의가 업어서 낭군을 그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은 얼마나 아득하고, 땅은 얼마나 막막하던지! 복숭아와 자두나무에 부는 봄바람은 첩을 깊은 궁중에 가두고, 오동에 내리는 밤비는 저를 빈방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래도록 거문고를 타지 않으니 거문고 갑(匣)에는 거미줄이 생기고, 화장 거울을 공연히 간직하고 있으니 경대(鏡臺)에는 먼지만 가득합니다. 지는 해와 저녁 하늘은 저의 한을 돋우는데, 새벽 별과 이지러진 달인들 제 마음을 염려하겠습니까? 누각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 구름이 제 눈을 가리고, 창가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면 수심이 제 꿈을 깨웠습니다. 아아, 낭군이여!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또 불행하게 그 사이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어 편지를 부치고자 하여도 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헛되이 낭군의 얼굴 그릴 때마다 가슴과 창자는 끊어지는 듯 했습니다. 설령 이 몸이 다시 한 번 더 낭군을 뵙는다 해도 꽃다운 얼굴은 이미 시들어 버렸는데, 낭군께서 어찌 저에게 깊은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낭군 역시 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요?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진다 해도 저의 한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아, 어찌하리오! 그저 죽는 길밖에 없는 듯합니다. 종이를 마주하니 처연한 마음에 이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184
편지 끝에 다시 칠언절구(七言絶句) 5수가 씌어 있었다.
 
185
好因緣反是惡緣  좋은 인연이 도리어 나쁜 인연이 되었으나,
186
不怨郞君只怨天  낭군은 원망스럽지 않고 하늘만 원망스럽네.
187
若使舊情猶未絶  만약 옛 정이 아직 끊이지 아니하였다면,
188
他年尋我向黃泉  먼 훗날 황천(黃泉)으로 날 찾아오소서.
 
189
一日平分十二時  하루는 균등(均等)하게 열두 때로 나뉘었으니,
190
無時無日不相思  어느 날 어느 때인들 님 그리지 않았으리.
191
相思何日期相見  언제나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시름타가,
192
深恨人間有別離  깊은 한 맺힌 채 이 세상을 이별하네.
 
193
柳憔花悴若爲情  사랑하는 마음은 버드나무와 꽃처럼 시들어,
194
鏡裡猶憂白髮生  거울 보면 근심으로 백발만 자란다네.
195
自是佳人無好事  이제 고운 님에게 좋은 일 없으리니,
196
墻頭晨鵲爲誰鳴  담장머리의 새벽닭은 누굴 위해 울거나?
 
197
別來忍掃席中塵  이별한 뒤 마지못해 방석의 먼지 털려는데,
198
愛有郞君坐臥痕  낭군이 앉은 자취 애틋하기도 하구나.
199
寂寞深宮消息斷  깊고 적막한 궁궐에 소식은 끊어지고,
200
落花春雨掩重門  봄비에 지는 꽃은 겹겹으로 닫힌 궁문(宮門)을 가리네.
 
201
欲寄音書寄得難  편지를 보내려 해도 부치기 어려워,
202
幾回呵筆綠窓間  푸른 창가에서 몇 번이나 언 붓을 녹였던고.
203
空敎別後相思淚  쓸쓸히 이별한 뒤 님 그리워 흘린 눈물,
204
點滴花牋一班班  꽃무늬 종이에 방울방울 떨어져 아롱지네.
 
205
김생은 다 읽은 뒤에도 오랫동안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으며, 영영을 그리는 마음은 예전보다 두 배나 더 간절하였다. 그러나 청조가 오지 않으니 소식을 전하기 어렵고, 흰기러기는 오래도록 끊기어 편지를 전할 길도 없었다. 끊어진 거문고 줄은 다시 맬 수가 없고 깨어진 거울은 다시 합칠 수가 없으니, 가슴을 조리며 근심을 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 이룬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06
김생은 마침내 몸이 비쩍 마르고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니 김생은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김생의 친구 중에 이정자(李正字)라고 하는 이가 문병을 왔다. 정자는 김생이 갑자기 병이 난 것 을 이상해 했다. 병들고 지친 김생은 그의 손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정자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말했다.
 
207
“자네의 병은 곧 나을 걸세. 회산군 부인은 내겐 고모가 되는 분이라네. 그 분 은 의리가 있고 인정이 많으시네. 또 부인이 소천(所天)을 잃은 후로부터, 가산과 보화를 아끼지 아니하고 희사(喜捨)와 보시(布施)를 잘 하시니, 내 자네를 위하여 애써 보겠네.”
 
208
김생은 뜻밖의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병든 몸인데도 일어나 정자의 손이 으스러져라 꽉잡을 정도였다. 김생은 신신 부탁하며 정자에게 절까지 하였다. 정자는 그 날로 부인 앞에 나아가 말했다.
 
209
“얼마 전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문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차리 지 못한 것을 고모님이 시비에게 명하여 사랑으로 데려간 일이 있사옵니까?”
 
210
“있지.”
 
211
“그리고 영영에게 명하여 차를 올리게 한 일이 있사옵니까?”
 
212
“있네.”
 
213
“그 사람은 바로 저의 친구로 김모라 하는 이옵니다. 그는 재기(才氣)가 범인 (凡人)을 지나고 풍도(豊道)가 속되지 않아, 장차 크게 될 인물이옵니다. 불행하게도 상사의 병이 들어 문을 닫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은 지 벌써 두어 달이 되었다 하더이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문병하는데, 피부가 파리해 지고 목숨이 아침저녁으로 불안하니, 매우 안타까이 여겨 병이 든 이유를 물어 본 즉 영영으로 인함이라 하옵니다. 영영을 김생에게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14
부인은 듣고 나서,
 
215
“내 어찌 영영을 아껴 사람이 죽도록 하겠느냐?”
 
216
하였다. 부인은 곧바로 영영을 김생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꿈에도 그 리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생은 기운을 차려 다시 깨어나고, 수일 후에는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김생은 공명(功名)을 사양하고, 영영과 더불어 평생을 해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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