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여자의 손 일기첩을 펴고 일기를 적다.
5
하루의 일기면 볼통 안에 글자로 차지다. O.L.
8
먼 ─ 바닷가 모래펄에는 벌써 흔하지 않은 늦여름 해수욕 남녀의 두서너 쌍 혹은 서고 혹은 앉고 혹은 물에 잠기다.
9
• 해수욕장과는 멀리 떨어진 모래언덕 위로 발자욱 길게 뻗치다. 발자욱을 쫓아가는 여자의 다리.
15
언덕 위로 발자욱은 아직도 멀게 뻗쳤다.
16
남숙 구두를 벗어 들고 맨발로 숨차게 달린다. 이윽고 언덕 위까지 달려 올라간 남숙, 숨이 차서 언덕 너머로 굴러 쓰러진다. 모래언덕은 별안간 문득 끊기어서 그 너머는 굽스러운 경사가 진 것이었다.
17
• 언덕 너머로 쓰러진 남숙은 공교롭게도 모래 위에 누워 있는 철민과 얼굴이 거의 마주칠 지경으로 가깝게 서로 대하게 되었다. 빛나는 두 사람의 눈. (멀리 해수욕장 풍경 아련히)
19
철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철민이라구 부르래두요.”
21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이 두 사람의 눈 한참이나 마주쳐 움직이지 않다.
24
남숙의 손 한 장의 일기를 다 적으니, 그 장 넘어가다.
25
아직 일기 적히지 않은 다음날의 일기면. O.L.
26
• 바다 위로 갈매기 한 마리 외로이 날다.
27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펄에 앉은 철민과 남숙.
28
철민 “갈매기같이 외로운 사나이. 집도 없고 절도 없고 갈 곳도 올 곳도 없는 외로운 사나이. 친구들과 여름 바다를 찾았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동무를 얻었죠.─ 알고 보면 옛 중학교 교장 어른의 무남독녀 ─ 얼마나 놀랐는지.”
30
철민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한 가지 기억이 있어요. ─ 하루는 장난을 치다가 안교장께 호되게 뚝밤을 맞았소……”
33
남숙 “집에선 그렇게 부드러운 어른이 학교에선 그렇게 엄하셨나요. 제겐 아버지같이 인자한 분은 없어요. 지금까지 세상엔 아버지같이 인자한 분이 있는 줄을 몰랐어요. ……어릴 때 ─ 학교에 갈 나이 때까지두 일상 저를 업어 주셨죠. 따뜻하던 등의 기억이 지금도 가슴 속에 흐르는 것도 아버지의 그 유별스런 사랑을 갚아드릴 도리가 제겐 있을 상싶지 않아요. 그 아버지의 사랑만이 큰 줄 알았더니 지금 와 보면 또 하나……”
36
아직 적히지 않은 다음날 일기면. О.L.
39
새 풀숲에 철민과 남숙. 남숙 철민의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41
(바이올린 소리 흐르는 동안 바다, 달, 구름, 마을 나무숲, 철민과 남숙의 표정 등의 장면 적당히 몇 커트 삽입)
42
곡조 끝났을 때, 남숙의 얼굴 갈등에 넘친다.
43
두 사람 곧 자리를 떠나 모래펄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걸으면서 이야기.
45
철민 “전 지금 말할 수 없소. 행복스러우나, 한편 불행한지두 몰라요.”
47
철민 “쉬이 동경으로 건너가게 될 듯하니요.”
49
두 사람의 걸어가는 뒤로 남겨지는 모래 발자욱.
50
(이하 발자욱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며 말소리만 들리다.)
51
철민 “날탕인 제게야 무에 있나요. 동무들이 후원회를 조직하구 기어이 떠나라는 권고이군요.”
53
철민 “바이올린 없는 생활은 제겐 생각할 수없는 것예요. 음악과 평생을 지내려는 것이 천상에 외롭게 제겐 한 인연인가 봐요.”
55
철민 “한 삼년 공부하면 그래도 무에 되겠죠.”
59
이제 가급하게 외치며 철민에게 흙을 던지는 남숙.
64
• 해변의 이곳저곳을 거니는 철민과 남숙.
65
• 바닷가에 솟은 바위 위 저녁때. 철민 혼자 바위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
68
남숙 숨차게 다가와서 급스럽게 바위를 기어올라 반석 위 철민에게로 달려가다.
72
남숙 “아버지가 별안간 병으로 누우셨데요.”
74
남숙 “경영문제로 시비가 많더니 아마도 폐교가 되나 봐요. 아버지같이 청구학교를 생각하시는 분이 또 있겠어요. 상해에서 실패를 하시고 돌아오신 길로 손에 잡은 것이 그 학교. 최후는 그 학교를 위해서 마치시겠다고 늘 그러셨는데. ─ 아마도 뇌심하신 끝에 누우셨나 봐요.”
75
철민 “학교 일이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요.”
76
하면서 철민 자리를 내려서 남숙과 같이 바위를 내려오다.
77
남숙 “서울 학교도 개학날이 가깝고 ─ 어떻든 밤으로 떠나야겠어요. 철민씨는 언제쯤……”
78
철민 “저도 동무들과 함께 쉬 우선 평양으로 갈까 합니다.”
79
남숙 “동경으로 가시기 전에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요.”
80
남숙 험한 바위 기슭을 급하게 내려가다 빗디디고 바위 아래로 쓰러진다.
81
철민 속히 뛰어내려 붙들다. 치마폭 찢어지고 다친 다리에는 피가 내베인다. 철민 손수건으로 피를 닦고 일으켜 세운다. 남숙 일어는 섰으나 발을 절으면서 걷기가 거북한 양. 철민, 사방을 휘돌아보고 남숙의 의향을 떠본 후 다짜고짜로 남숙을 등에 업으려 한다. 남숙 주저하다가 결국 업히운다.
83
남숙 부끄러운 양 등에다 얼굴을 묻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보재 속에서 새어 나오는 듯이 가늘다.
84
남숙 “아버지 등에 업혔을 때와도 같어요.”
86
남숙 “세상에 꼭 두 분. 어느 분이나 똑같이 귀중한 두 분. ——아버지와 ……”
87
남숙 얼굴을 더욱 깊이 묻는 까닭에 다음 목소리 안 들린다.
88
• 황혼의 해변을 멀리 남숙을 업고 걸어가는 철민의 뒷모양.
90
철민 절름거리는 남숙을 붙들고 별장 앞 돌층계에 이르다. 철민은 층계 아래에 머물러 섰고 남숙 혼자 층계를 올라가 침대에 서다. 아래와 위에서 말없이 마주 한참이나 대하고 섰는 두 사람. 좀체 서로 떠나기 어려운 양.
91
• 애끊는 두 사람의 표정. (오랫동안) О.L.
95
아버지(안영만) 침대에 누워 있다. 옆 의자에 남숙 앉아 아버지를 위로 한다.
96
남숙 “너무 걱정 마세요. 그까진 학교 아무렇게 되건 말건.”
98
남숙 “아버진 세상에서 학교가 제일 중하죠.”
101
아버지, 딸이 말하는 뜻을 알지 못하는 듯이 남숙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103
아버지 “그래 ─ 내겐 학교가 하늘님같이 좋아한다……”
104
이번에는 남숙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 볼 차례다.
105
아버지 “어서 넌 걱정 말고 네 공부나 해라. 개학도 가까우니 밤차로 올라가도록 하구.”
107
•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능금나무에 익기 시작한 능금 송이송이 달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 간들거리는 열매.
109
들어찬 손님들. 이야기소리. 웃음소리. 그릇 소리. 소녀들이 음식을 들고 식탁 사이로 휘돌아치다.
110
창 기슭에 한 분. 창으로 바라보이는 도회의 하늘.
114
안병희와 천재일 마주앉아 식사를 하다 가까이 온 여급에게 안병희(사십이 넘은 대머리신사) “차 두 잔”을 분부하니 여급 물러가다.
115
송 “그래 그렇게 되면 정말 될 듯싶소.”
116
천 “그야 당사자의 말은 아직 듣지는 못했으나 ― 그 일만은 제가 담보하리다."
117
송 “……강필호란 분은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남숙을 마음 속에 치부해 두었던가요.”
118
천 “발이 넓은 사람이라 여자전문학교 선생들도 대개는 아는 처지에 ─ 언젠가 교내 음악회 때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남숙의 독창에 마음을 뺏겼던 모양이죠.”
120
천 “본부인과 이혼은 했을망정 같이 동경서도 지내왔지만 인품은 훌륭합니다 . 음악회가 있은 후부터 어떻게도 절 졸라대는지.”
121
송 “어떻든 곧 교장과는 의론해 보죠. 그러나 원체 교장은 고집 센 어른이래서……”
122
송 “어떻게 해서든지 일만 되게 해 주시오. 난 나대로 힘써 볼게. 한가지라도 우리 일 우리가 해야잖우.”
123
여급이 차를 날라 온 바람에 두 사람 말을 그치고 차를 젓는다.
125
• 창으로 내다보이는 늦여름 오전의 맑은 하늘.
129
평퍼짐한 잔디언덕 위에 서 있는 역사 오랜 학교. 군데군데 우거진 백양나무와 구름 뜬 맑은 하늘과의 대조 아름답다.
130
언덕 아래 운동장에서는 흰 유니폼의 학도들 풋볼을 차는 것이 나무그늘사이로 엿보이다. 볼이 맑은 하늘에 가볍게 솟아오르며 탄력있는 소리 아름답게 울리다.
134
탁자 위 화병에서 꽃잎 하나 탁자에 떨어지다.
135
늙은 손 가만히 나타나 그 꽃잎을 집어 든다.
136
• 교장 안영만,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병 위에 전과 같이 얹어 두다.
137
병석에서 일어난 얼굴 아직도 수척하다. 불시에 늙은 듯한 흰머리.
138
권연을 피워 물고 연기를 뿜다. 연기 서리서리 피어오르다.(오랫동안)
139
전화기 종소리에 교장 정신을 차리고 책상 위 수화기를 든다.
140
교장 “……누구? 음, 남숙이냐. 왜 또 왔니. 음 음, 허나 공부하는 애가 그렇게 번번히 토요일마다 ― 뭐? 애비가 보고 싶어서…… 오냐 곧 가마.”
141
수화기를 놓고 인자스런 웃음을 쓸쓸히 웃고 일어서려 할 때문에 노크소리 들리다.
143
들어온 것은 교무주임 안병희. 서울서 막 돌아오는 길인 양 한손에 여행용 가방이 들리다.
145
송 “지금 차로 내렸는데. 공교롭게도 남숙이가 서울서부터 동행이 되었습니다.”
148
교장 “바로 그저께.─ 그래 가셨던 일 어떻게 되었소.”
149
송 “웬만한 재벌은 모조리 찾아보았습니다만, 그렇게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웬 있나요. 간혹 있다 하더라도 대개는 제 이름 내걸고 제 속 차리려는 것이지 진정으로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있어야죠.”
151
송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시 침통한 침묵을 지키다가,
154
송 “여쭙기 황송하나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마지막 수단으로 말씀드려 보렵니다. ……사실인즉 절망이라면 절망이나 교장선생의 의사에 따라서는 일루의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157
송 “남숙이를 출가시키실 뜻은 없으신지요.”
158
교장 “남숙이를…… 지금 공부하는 몸이요. 또 아시다시피 내 슬하에 혈육이라곤 그 애밖에 없지 않소. 그리고 그 애와 학교와 무슨 관계가……”
159
송 “학교를 살리는 덴 그 길밖엔 없습니다.”
161
송 “여러 방면으로 교섭해 보던 중 우연히 강필호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 몇 해 전에 동경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던 길로 오십여 만원의 재산상속 받은 것이 원체 위인이 눈이 밝은지라 광산을 그의 사업으로 지금은 한 백만 원은 좋이 되는 모양입니다. 동경서 나오던 길로 본 부인을 물리고 지금은 새사람을 찾는 중인데……”
162
교장 “하하하, 그래 딸을 후취로 보내란 말요.”
164
교장 “이래뵈도 예조판서의 피를 받아 내려오는 집안인데 외딸자식을 후취로 ― 말이 됐소.”
166
교장 “돌아오는 이사회나 기다립시다.”
172
강 “성사만 되면 자네 그대로 버려 두겠나.”
174
강 “내 이 계획이 불측한 것은 아니겠지. 세상에 흔한 소위 교환조건이 아니고 손을 대려는 사업과 밀접한 인연을 맺으려는 것뿐이니까.”
176
강 “문제는 남숙씨 의사 여부인데 ― 그만 승낙한다면야 다시 더 문제될 것이 있겠나. 곱게 자라난 그에게 딴 생각이 있을 리는 만무할게고……”
177
강 일어서서 탁자 있는 곳으로 가서 고여 놓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179
• 천재일도 가까이 가서 사진을 들여다보며,
181
• 강필호 서랍 속에서 조그만 사진기를 내서 보이면서,
194
남숙 부르다 못해 문께로 가까히 가서 문을 두르리면서,
196
바이올린 소리 그치며 문이 열리고 철민 얼굴 나타나 놀라다. О.L.
198
청류벽 아랫길을 철민과 남숙 걸어간다.
199
가을을 재촉하는 듯한 능라도 버들 그림자 물 위에 어리운다. 멀리 배두어 척 떠 있다.
201
철민 “편지나 주실 줄 알었더니 이렇게 또 오셨어요.”
204
철민 “내 동경 간 후엔 어떻게 지내실 작정이요.”
205
남숙 “신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끝없는 베나 짤까요. ― 풀었다 짰다 풀었다 짰다.”
207
남숙 “밑 없는 독에다 물이나 길어 부을까요.”
208
철민 열정에 타는 낯으로 남숙을 녹일 듯이 바라보다. О.L.
209
• 멀리 강이 바라보이는 수풀 속을 나란히 걸어오는 철민과 남숙의 아련한 뒷모양.
213
동섭 “어떻게 해서나 자네 하나야 끝까지 못시키겠나.”
214
철민 “한편 생각하면 너무 어림없는 짓 같아서.”
217
동섭 “자네 형편 잘보아서 다시 떠날 날이나 속히 작정해 놓게.”
221
십여 명 이사들이 탁자를 앞에 하고 둘러앉아 있다.
223
교장 “제것도 제 힘으로 못 길러 나가는 ―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요.”
225
교장 “시작은 하고도 끝을 여밀 줄 모르는 ― 이것이 우리의 길이란 말요. 이십여 년 동안 길러온 것을 이제 와 구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요. 청구학교의 마지막 날에 이것을 걸머지고 나설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요. 이십년의 운명이 마지막 날 ― 임종의 날……”
226
애끓게 부르짖으며 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다.
230
남숙 “무슨 일이게 기별도 없이 아닌 때 이렇게 올라오셔요.”
231
철민 “당분간 이것이 아마두 마지막 상면이 될 것 같소.”
232
남숙 “그럼 당장 떠나시게 됐단 말에요.”
233
철민 “동무들의 알선으로 수일 후 떠나게 됐소.”
239
어디서인지 하모니카의 소리 은은히 들린다.
240
철민 “누구나 말하는 낡은 투 같으나 삼년 동안 기다려 주겠소.”
241
남숙 “새삼스럽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어요.”
242
철민 “마음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요.”
250
고요하던 교정에 학생이 흩어져 교문으로 나간다.
251
• 텅 빈 교실 안에 남숙의 그림자 외롭다.
253
• 학생들 그림자 드물어지고 볼 동안에 고요해지는 교정.
257
일기첩을 펴들고 장을 넘기며 군데군데 읽다.
258
때때로 시선을 옮겨서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다.
259
모르는 결에 눈에 눈물 고여 일기첩 위에 떨어진다.
260
복도를 걸어오는 인기척소리 나더니 교실 문이 열리다.
261
남숙 급히 눈물을 씻고 일기첩을 덮다.
264
• 전화실을 나오는 남숙 수심에 싸이다.
268
차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남숙.
273
남숙은 어머니와는 비스듬이 앉아 벌써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금이 간 눈치다. 남숙의 옆에 사진 한 장 놓였다.
274
어머니 “고집만 피우지 말고 잘 생각해 봐라.”
275
남숙 “꼭 한마디 하지요. ― 어머니 전 싫어요. 인물두 재산두 다 싫어요.”
279
어머니 “……지각두 없다. 집안일도 좀 생각해 봐야지. 요새 아버지의 애쓰는 꼴두 네 눈엔 안 뵈니.”
280
남숙 “……그럼 결국 절 이용물로 쓰자는 생각이야요.”
281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냐.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니.”
282
남숙 “……또 한번 말씀드리겠어요 ─ 전 싫어요.”
285
• 청구학교 교장실. 안교장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감았던 눈을 힘없이 뜬다.
286
문이 열리며 급사가 차를 가져다 놓고 나가다.
287
교장 담뱃불을 끄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를 일어서다. 탁자의 화병을 굽어보나 꽃이 다 떨어져 버린 꽃묶음에는 잎새 몇 잎 애잔하게 달렸을 뿐이다.
291
• 군데군데 회가 떨어진 복도 벽에 교장의 외로운 그림자 쓸쓸히 어리우다.
295
• 교정에 교장의 그림자 외롭게 움직이다.
298
• 교정을 거니는 교장의 얼굴. 눈을 스르르 감다. 아찔하며 금시에 쓰러질 듯한 자세.
301
환호에 싸인 빈 방안. 피아노 앞에 남숙 홀로 앉아 있다. 생각에 잠긴 쓸쓸한 자태.
302
• 창밖 가을 나뭇잎 새 바람에 한 잎 두 잎 떨어지다.
303
• 피아노 흰 건반 위에 남숙의 손이 떨어지다.
304
• 미칠 듯이 피아노를 치는 남숙. 곡조는 한참 동안이나 어지럽게 울리다.
305
마지막 귀절을 탕 치고는 건반 위에 그대로 얼굴을 묻다.
306
• 엎드린 남숙의 등에 황혼의 그림자 점점 짙어가다.
309
• 남숙의 얼굴 눈물자취에 어지럽다. 손수건을 내서 씻다.
310
• 음악실. 문께 소녀급사 “면회예요” 전하고는 나가 버린다.
311
남숙 얼굴을 수습하고 피아노 앞에서 일어서다.
313
• 응접실 문을 여는 남숙의 손 떨리다.
315
남숙 들어와서 소파에 앉은 아버지를 발견하고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316
“아버지” 외치며 아버지의 무릎에 가서 왈칵 쓰러지다.
319
아버지 “이렇게 찾아온 애비를 용서해라.”
321
아버지 “애비는 기어코 졌다. 모든 것 잃어버렸다.”
323
아버지 “네가 날 따르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너 아니냐. 그런데 네게 ―”
325
아버지 “―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될 줄을 뉘 알았겠니.”
327
아버지의 주름잡힌 얼굴 돌같이 굳어진다.
328
남숙 손안에 얼굴을 묻다. 울음소리 터지다.
330
•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리어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다.
335
일기첩의 한 군데가 펼쳐 있는 옆에는 편지지 위에 단 한마디 “철민씨” 라고 적혀 있을 뿐.
337
• 편지지 위에 눈물방울 떨어져 글자 흐려진다.
338
• 남숙 얼굴에 눈물방울 흘러내리나 씻을 생각도 하지 않다.
339
• 흔들리는 유리창.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О.L.
343
• 언덕 아래 운동장에서는 흰 유니폼의 학도들 풋볼 차는 것이 나무그늘 사이로 엿보이다.
344
볼이 맑은 하늘에 가볍게 탄력 있는 소리 아름답게 울리다.
345
• 교실에서 합창소리 흘러나오다. О.L.
347
• 맑은 하늘에 솟은 교회당. 종소리 낭랑히 울리다.
348
• 탑 위 시계 오후 두 시를 가리키다.
350
수십 대의 자동차 늘어섰고 수많은 사람들 현관 층계로 몰려 들어가다.
352
‘강필호 안남숙 결혼식장’ 의 현판 걸리다.
356
남숙의 동무인 조영자, 김애라, 정숙자, 김명희 몰려서서 수군덕거리다.
357
영자 “……결국 늘 있는 격식 그대로야. ― 원수 놈의 돈 때문에……”
358
애라 “사실 장하긴 해. ― 한 몸 희생해서 아버지 구하고 학교 살리구 ……”
359
명희 “사랑과 아버지, 몸과 학교……”
360
영자 “……‥대체 그이가 알면 어떻게 될까.”
370
• 신랑 신부 걸어 들어와 주례 앞에 서다.
377
• 플랫폼. 열차 가버리고 사람의 그림자 드물다.
378
한편 벤치에 하염없이 앉은 사나이. 철민이다. 얼굴 수척하고 꼴 초라하다. 생각에 잠기다.О.L.
380
막 떠나려는 차 속에 철민의 얼굴 보이다. 폼에는 그를 보내는 동섭, 영호 등 십여 명의 동무들. 그 속에 남숙의 자태도 보이다.
382
• 기적과 함께 기차 움직이기 시작하니 남숙 문득 고개를 들고 떠나온 철민을 바라보다.
383
모두들 입에서 “이철민 만세!” 소리 새어 나오다. 철민 손을 흔들다.
384
• 곧은 폼 저편으로 멀리 사라지는 열차의 뒷모양. О.L.
386
벤치에 하염없이 혼자 생각에 잠기는 철민.О.L.
387
• 거리를 걸어가는 철민 (남대문을 배경으로). О.L.
388
• 또 다른 거리를 걸어오는 철민. О.L.
389
• 교회당 결혼식장 문 앞. 벌써 군데군데 찢어진 ‘강필호 안남숙 결혼식장’ 현판 앞에 철민 발을 멈춘다.
390
• 교회당 뜰 앞에는 사람의 그림자 드물다. 결혼식은 이미 끝난 것이다.
392
• 식당. 거기에도 사람의 그림자 흔치 않고 휑뎅하게 어지럽다.
394
문간 탁자 위에는 노트가 놓이고 남은 몇 사람이 나가면서 그 위에 축하의 서명을 한 것이 보이다.
396
• 노트 놓인 탁자께로 철민 걸어가다. 힘없이 펜을 들어 노트에 서명하는 철민.
398
• 문 앞 돌층계에 철민의 그림자 외롭다.
399
• 거리의 가로수 아래를 걸어가는 철민.
400
• 교외의 길을 걸어가는 철민 멀리 보이다.
404
• 강가 둑 위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는 철민. 그의 몸은 간들거리는 새풀 속에 묻힌다. 황혼 속에 그의 자태 점점 어두워 가다.
407
• 식당차. 찻그릇만이 놓인 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필호와 남숙.
416
필호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겐 애낄 것이 없소.”
419
그래도 돌부처같이 잠자코 말없는 남숙을 위로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427
험한 길을 오를 때는 필호 남숙의 손을 잡고 부축해 주다.О.L.
428
• 절벽에 걸린 폭포 멀리 소리 요란하다. 필호와 남숙 폭포 근처에 나타나는 것이 보이다.
429
• 반석 위에 서서 폭포를 바라보는 필호와 남숙.
430
폭포 아래는 검은 소. 물방울이 두 사람 있는 데까지 날아온다.
431
남숙 두려운 생각에 별안간 몸을 으쓱하니 필호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붓들고 같이 반석 위에 앉다.
434
필호 “왜 대답이 없소. 슬픈 얼굴만 지니구.”
436
필호 “이것이 즐겁다는 신혼여행이오.”
438
필호 남숙의 손을 들어다 자기의 볼에 대어보다.
439
필호 “이렇게 마음이 기쁜데 남숙이는 왜 그리 처량한 얼굴만 한단 말요.”
441
필호 “잠자코만 있지 말구 무엇이든지 한마디만 말해 주시오. 한마디만.”
442
하며 남숙을 안으려 할 때 남숙 그의 팔을 빠져서 폭포 있는 쪽으로 달아나다. 필호 기급을 한듯이 뛰어서 그를 붙든다.
446
• 산봉오리 위에 오른 필호와 남숙 까맣게 우러러 보이다.
447
• 필호와 남숙이 산봉우리에서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첩첩한 봉우리들 깊은 산골짝들.
448
• 하늘이 활짝 열리고 동쪽으로 멀리 바다가 바라보이다.
450
남숙 어마어마한 아래를 내려다보다. 문득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에 포개인다.
451
필호 등뒤에서 고요히 남숙의 두 팔을 붙들다.
452
• 그 자세대로 봉우리 위에 까맣게 우러러보이는 필호와 남숙.
455
줄 위를 활이 미친 듯이 더듬으며 어지러운 곡조가 요란하다.
461
• 바이올린 줄 위에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462
• 소리 문득 끄치며 철민의 손에서 바이올린 힘없이 떨어지다.
464
철민 의식 없이 머리를 쥐어뜯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빛나는 눈.О.L.
467
철민, 동섭, 영호, 세 사람 탁자를 둘러싸고 앉다.
468
여급들 소파에 각각 고요히 앉아 있다. 레코드 노래.
469
동섭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471
영호 “사랑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뜻인가.”
472
동섭 “적어도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애.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람을 따라서 각각 다를 것이요.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네만.”
474
동섭 “……가령 사랑을 잃었을 때에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 같지만 사랑 속에 있을 때엔 사랑은 벌써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밖에 그 무엇이 절실히 필요하고 벌써 마음은 사랑 속에서만 헤매는 것이 아니야. ― 사랑이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야.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철민 자넨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475
하고 철민에게 술을 권하니 철민 컵을 들고 노란 술을 노려본다.
476
• 말없이 컵을 노리는 철민. (오랫동안)
477
• 철민의 손아귀에서 별안간 컵이 와싹 부서지며 술이 흐른다.
478
동섭과 영호 문득 놀라 자리를 일어서다.
481
꼭 쥔 주먹에는 피가 흘러 탁자 위에 떨어지다.
482
• 동섭 철민의 팔을 붙들고, 여급들 어쩔 줄 모르고 설렌다.
484
• 나뭇잎도 거의 떨어져 버린 늦가을의 뜰.
486
어느 때까지나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표정. 나뭇잎 하나 떨어져 얼굴 위를 스쳐가다. 가볍게 주름잡히는 물결에 얼굴의 모습 이지러졌다가 이윽고 고요해진 물결 속에 얼굴로 고요하다. 한참 있다 얼굴을 다시 이지러졌으니 이번에는 낙옆의 장난이 아니고 남숙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댄 까닭이다. 손수건 속에 묻힌 얼굴 푹 숙여지고 어깨 가볍게 떨리다.
487
• 큰 체경 속에 비친 얼굴에 그림자가 깊다. 왼손에 쥔 촛불이 이리저리 움직임을 따라 얼굴의 음영과 인상이 변하다. 바른손, 얼굴을 어루만지다. 여윈 볼을 만지다. 모르는 결에 눈에 눈물이 고여 두 볼을 흘러 내리다.
490
남숙 은근히 주위를 살핀 후 책상 앞에 앉아 열쇠로 서랍을 여고 문갑을 집어내다. 다시 열쇠로 문갑을 여니 속에서 한 묶음의 편지와 일기첩과 노트 나오다.
491
• 책상 위에 널려진 편지들 ― 물론 모두 철민에게서 온 것. 남숙의 손 편지의 한 장 한 장을 손아귀에 꼬옥꼬옥 쥐어 보다.
495
•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일기첩. О.L.
497
열 시부터 바늘이 한꺼번에 돌아가 열두 시를 가리킨다.
498
• 일기첩에 얼굴을 묻고 책상위에 엎드린 남숙의 뒷모양.
499
별안간 놀란 듯이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다.
502
• 남숙 안심한 듯이 가슴에 손을 대고 이번에는 방문께로 가서 문밖을 살며시 내다보고는 문을 닫고 다시 책상 앞에 와서 앉아 숨을 내쉬다.
503
일기첩을 덮고 편지를 다시 묶어서 문갑 속에 수습하고 노트를 들척거리다.
504
• 남숙의 눈 문득 노트 위 한 곳에 머무르다. 낯빛이 금시에 변하고 입이 감동에 열리다.
505
• 노트 위 한 곳에 ― 이철민 ― 이라고 적혀 있다.
506
• 남숙 “그럼 이곳으로 오셨든가” 젖히며 노트 위에 다시 쓰러지다. О.L.
508
열두 시를 넘은 바늘이 돌아 새로 한 시를 가리키다.
510
밤의 정적을 깨트리고 자동차 굴러와 현관 앞에 서다. 필호 내려서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516
필호 그 앞에 머물러 서서 노크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두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다.
518
필호 들어와 문을 살그머니 닫고 남숙에게로 와서 그의 두 어깨에 두 손을 가볍게 대었다가 열린 문갑을 보고 편지 묶음과 일기첩을 무심히 집어내다.
519
• 필호 편지의 봉투를 읽고 놀라며 일기첩을 들척거리다. 더욱 놀라다.
520
• 남숙 문득 고개를 쳐들고 필호의 그 거동을 발견하고 기급을 할 듯이 일어나 그의 손에서 일기첩과 편지 묶음을 채어내다.
521
필호 처음에는 노기가 등등하였으나 금시에 풀리며 의자에 주저앉는다.
522
남숙 일기첩과 편지 묶음을 안고 소파에 가서 쓰러지다. 느껴 울다.
524
필호 “……그것이 우울의 원인이었었구려.”
526
필호 “결혼하기 전부터 벌써 그런 사람이 있었단 말요.”
527
• 남숙 듣기 싫다는 듯이 자리를 불시에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 버리다.
530
(이하 사경(四景)을 통하여 반드시 나무 선 풍경임을 요함.)
532
낙엽이 날리기는 하나 아직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니다.О.L.
533
• 나무 서 있는 강 언덕을 걸어가는 철민.
534
나뭇잎 다 떨어지고 휘추리만 남다.О.L.
536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눈이 희끗희끗하다.
537
철민의 옷자락 바람에 몹시 날리다.О.L.
539
나뭇가지는 눈 속에 함빡 가리워 흡사 크리스마스 트리와도 같이 아름답게 보이다.
541
• 체경 속의 남숙. 화려하게 화장하였다.
543
남숙 화장을 마치고 자리를 일어나 의걸이를 열어젖히고 이 옷 저 옷을 벗어 몸에 걸어보다가는 다시 던져 넣고 문을 닫다.
544
의걸이 서랍을 열고 수많은 반지를 내서 손가락에 차례차례 끼어 보다가는 그것도 도로 집어 넣는다.
545
• 자기를 스스로 비웃는 남숙의 얼굴.
549
등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속에서 난로불만이 뚜렷하게 불그스름하다.
551
남숙 책상에 가서 서랍 문갑 속에서 편지 묶음과 일기첩을 꺼내 가지고 난로 앞으로 가서 앉다.
553
남숙 난로 문을 여니 이글이글 타는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취이다.
554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 이윽고 눈을 뜨고 편지 묶음을 풀고 한 장을 난로 속에 집어넣다. 이어서 또 한 장 두 장……. 난로 안에는 불꽃이 피어오르며 더 한층 환하게 밝아지다.
555
•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문 남숙의 얼굴.
556
•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아베 마리아」의 바이올린 솔로가 흐르기 시작하다.
557
• 서글픈 멜로디는 남숙의 슬픈 마음의 반주인양 편지를 마저 사르고 나중에 일기첩을 불 속에 던지고는 애달픈 마음을 참을 수 없는 듯이 자리를 일어나 외면하면서 창 있는 데로 걸어가다. 창을 활짝 열자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날리다.
561
가로등 아래로 철민 비틀거리며 걸어오다.
563
철민 (머뭇거리다) 비틀비틀 들어가다.
565
요란한 분위기 속에서 여급 나와 철민을 따라가 한편 자리에 앉히다.
566
• 철민 취곤을 못 이겨 탁자 위에 엎드리다. 여급 철민의 등의 눈을 털어주며,
567
여급 “또 어디서 이렇게 취하셨어요.”
571
하며 밀치는 바람에 여급은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가다.
572
철민 속에 닿은 쥐이는 것이 있다. 철민이 고개를 든다.
573
• 손에 닿는 것 ─ 타다 남은 담배. 그 담배 놓인 신문지가 타다.
574
• 철민 신문을 집어들고 불을 끄다가 문득 정신이 번쩍 들며 그의 눈 한 곳에 못박히다.
576
백만장자 전 부인. 수수께기의 실종. 안남숙 여사 돌연 행방불명의 기사가 야단스럽게 크다.
578
• 철민 정신없이 한참이나 신문을 내려읽다 탁자 위에 던져 버리다.
579
돌같이 굳어진 표정 속에서 눈만이 빛나다.
580
여급 술을 가져다 놓고 따라서 권하다.
581
철민 굳은 표정 그대로 한 곳을 노린 채 술을 들어 단모금에 마시다.
582
여급이 다시 따른 술을 또 단모금에 마시다.
583
여급이 다시 따른 술을 또 단모금에 마시다.
590
• 앙상한 나뭇가지에 아침 햇빛이 걸치다.
593
문을 열고 들어가 성당에 이르다.(이동)
595
높고 넓은 엄숙한 맞은편에 제단이 있고 단 위에 수많은 촛불이 삼엄하다.
596
아침 예배가 막 시작되려는 때, 검은 옷 흰 두건의 수녀들이 점점 모여 들어 당 안에 차지다.
598
흰 둥근 기둥이 늘어선 넓은 복도 동편 창을 향하여 한 사람의 수녀 나오며 벽을 보고 서 있다. 다른 수녀 성당으로 가는 길에 지나다가 그 수녀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걸치고 “요안나” 하고 동행을 청하는 듯이 재촉하다.
599
요안나라고 불리운 수녀 고개를 돌리다.
602
• 다른 수녀 남숙을 남기고 먼저 가다.
604
남숙 성당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히 움직이다. 맞은편 벽 아래에 까지 가 서서 벽을 우러러보다.
606
“이곳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로다. 내가 스스로 이곳을 찾았으매 ─ 이로부터 영원히 이곳에 살리로다.”
607
• 액을 우러러보는 남숙의 얼굴. 원망스러운 듯도 하다.
611
주인 없는 빈방에 모든 것이 전과 그대로 놓이다.
613
체경 속에 어리우는 그림자조차 없고 병의 꽃 시들어 버리다.
616
천 “……아무리 그러기로서니 석 달이 넘도록 가만히만 있단 말인가. 수색원이라도 내보라우.”
619
천 “철민이란 사람의 동섭과 영호에게 알아봤더니 그들도 모른다네.”
621
강 “……어떻게 해서든지 그 철민을 찾아 주게.”
623
강 “꼭 만나야겠어. ― 그 사람의 마음도 지금은 나와 똑같은 것일테지.”
624
천 “부인은 찾을 생각 안하고 엉뚱한 철민을……”
625
강 “그런 결심을 가지고 떠난 사람을 찾아선 무엇하나. ― 어떻게든지 해서 철민을 꼭 만나게 해주게 그것이 지금의 나의 소원일세.”
629
한참이나 말없이 쓸쓸한 얼굴로 서로 한숨만 짓다.
630
안 교장 “……내가 잘못이었지. 내 손으로 내 딸의 앞길을 꺾어 버릴줄야.”
631
어머니 “……학교구 무에구 집안을 온통 망쳐 놓았으니……”
639
이른봄 오전. 유성기에서는 고요한 민요의 멜로디 흐르다.
640
철민과 필호. 두 사람이 앉아 있을 뿐.
641
필호 그때 “…… 마침 광산 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 그런 일이 생길줄야 꿈엔들 생각했겠소. 전보를 받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간곳없고 편지 한 장이 있을 뿐이죠. “가는 길을 찾지 말라”는 간단한 편지. 형의 이름은 그전에 대강 짐작은 했었으나 그렇게까지 마음 깊이 박혔을 줄은 몰랐소.”
643
필호 “사실이지 두 분의 관계를 진작 알았던들 결혼을 강행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반드시 사업과 사랑을 교환하려고 한 그런 타산적 인간은 아니었었소. 설혹 남숙이가 아니더라도 나는 청구학교 하나만은 키워 볼 작정이었고 ― 그 증거로 앞으로 가지고 있는 전부를 학교에 바칠 생각이오. 그것이 남숙이의 뜻을 이루어 주는 바도 될 것이니까.”
645
필호 “생각하면 이렇게 고요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할 수있는 것이 우습잖소. 칼부림이라도 할 처지에 이렇게 화목하게 앉아 있는 것이 생각할수록 우스워요. ― 이것도 남숙이에게 대한 내 마음이 아직도 살아있는 탓인가도 합니다만……”
647
• 잠자코만 있는 철민 애수에 넘치다.
653
• 늦게 풀린 얼음 한 덩이 강물에 떠서 흐르다.
654
• 철민 강물에서 시선을 옮기고 활개를 펴고 하늘을 우러러보다. 개운한 마음 얼굴에는 미소조차 떠오르다.
658
철민의 시야에서 기차의 모양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철민의 얼굴 그 어떤 결심으로 긴장되어 힘차게 발길을 돌리다.
666
햇살이 들어와 둥근 기둥을 비취이다. 합창소리 크게 울리다.
670
• 침대 옆 벽에는 ‘철민’ 의 낙서 이곳저곳에 지저분하다.
675
문이 열리며 신부와 수녀들 들어오다. 엄숙하면서도 불안스런 그들의 얼굴.
676
남숙 일어나려다 그대로 쓰러지다. 신부 가까이 가서 그를 안정시키다.
677
• 남숙의 핼쑥한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메마른 입이 그 무엇을 구하여 움츠리다.
679
남숙 “……신부님 저를 저 세상으로 도로 놓아 주세요.”
680
신부 “요안나, 주의 사랑 버리고 어디서 그대의 사랑 구하려 하오. 주의 광명 떠나서 어디서 그대의 빛 찾으려 하오. 어둠에서 어둠으로 흐르는 저 세상 죄악의 폭풍이 그칠 줄 모르는 저 세상에 그대는 주를 떠나 어디 가려 하오. 그대 어둠과 죄악의 바다에서 헤어나 이제 주의 밑에 구원을 받았거늘 어찌 이단의 슬픈 길을 다시 가려 하오.”
681
남숙 “……어둠도 죄악도 좋아요. 다시 저 세상으로 놓아 주세요. 신부님 놓아 주세요.……”
682
신부는 설레는 남숙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침대 밑에서 묵도를 드리다.
690
산, 들, 마을, 시내 위에 황혼이 짙다.
694
황혼 속에서 남숙 꿈에서나 깨날 듯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다. 설레며 주위를 휘돌아보다.
695
차차 흥분이 가라앉음을 따라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다시 고요히 눈을 감다.
696
• 생각에 잠기는 핏기 없는 남숙의 얼굴.
697
• 남숙의 방에 철민 나타나 침대 곁으로 가까이 오다.
698
두 사람 손을 마주 쥐다. 남숙의 얼굴에는 생기가 흐르며 별안간 철민의 몸에 뛰어들려는 듯이 또 몸을 벌컥 일으켰으나 모르는 결에 철민의 자태 사라져 있다. (이 컷의 남숙의 포즈는 아까 벌떡 일어섰을 때의 그 자세와 꼭 일치되다.)
706
차창에 의지한 철민의 얼굴 열정에 빛나다.
711
금시에 까맣게 멀어지다.(오랫동안) F.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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