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직도 십 리는 될 걸. 아니다. 이제는 오마장밖에는 아니 남았으리라. 오기도 퍽 많이 왔건마는, 나의 고향은 멀기도 너무 멀다. 가을의 소리인가, 가을의 바람인가. 솨 ─ 하는 싸늘하고도 쓸쓸한 소리가, 아침 안개를 머금은, 밤동산 나무숲으로 휘돌아다닌다. 무슨 무서운 권세이냐. 이 나무 저 나무의 서리 물든 가랑잎들, 아무 힘도 없이 아무 앙살도 없이, 한 잎 두 잎 느른이 떨어져 흩는구나. 상수리 주우러 다니는 어린 아가씨들의 맨발뿌리가, 앙상한 가랑잎을 죄없이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뒤적거릴 제마다, 바시락 바시락. 애처로울손, 여기에도, 쓸쓸한 가을의 한 자락 구슬픈 그림자가, 가락가락이 서리어 있고나.
3
아무도 아니 보는 어두운 밤에, 이 길을 걸으려고 하였더니만, 팔자 사나운 천덕구니의 이 세상 일이라, 그나마도 뜻과 같지 못하여, 아직껏 입시도 못한 부인 속으로, 행색이 초라하게, 아침길을 이렇게 걷는다. 어렴풋이 지나간 옛적 일을, 을씨년스럽게 몇 차례인지 거슬리어 회상하면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논두렁 밭뚝 고개마루턱이 산비탈길로, 큰길보다는 십 리나 거의 더도는, 이 소로를 일부러 찾아서 온다.
4
여기가 어디이냐, 나의 고향으로 가는 길거리이다. 고향! 고향! 나의 고향은, 그 동안에 얼마나 달라졌는가. 먼 곳에 있을 적에 소식만 들어보아도, 우리 시골 역시 시원치 못할 경장(景狀)은 보지 않아도 본 듯하지만은……. 어저께, 청량리 정거장에서 듣고 보고 하던 일이, 시방 다시금 눈에 밟힌다.
5
사람이 극경(極境)에 빠진 뒤에야, 고향인들 무엇하며, 타관에들 별 수가 있으랴마는 정들은 고토(故土)에서도 살 수가 없어서, 낯설은 딴 나라 서북 간도(西北 間島)로 유리(流離) 해 가는 이들과, 한편에는 간도에서도 살 수가 없어서, 변변치는 못한 살림이나마 다 ─ 털어버리고, 고원(故園)을 다시 찾아돌아오는 이들이, 정거장 대합실 안과 밖에 여러 백 명이었다.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 가더냐, 물어볼 것도 없거니와, 어째서, 그렇게 오는 것인지, 일부러 알려고 할 까닭도 없었다. 물은들 무슨 대답이 있으며, 대답인들 무슨 그리 시원한 사설이 있으랴. 물어보지 아니하여도, 때묻은 흰 옷에 걸머진 보퉁이는, 끝없는 설움이 어룽졌으니, 아무가 보더라도 떠돌아다니는 무리 그들이 분명하지 않으냐. 넋들이 푸념 대신에 눈물이 앞을 서며, 울음도 하염없이 그칠 줄이 없거든, 여윈 얼굴에 헐개 늦은 입술이, 아무 말없는 그 가운데에도, 저절로 네나 내나 모두 한겨레의 청승스러운 하소연을, 서로서로 느긋이 주고받고 한다.
6
“간도(間島)도, 이제는 도무지 살 수가 없어요” 하는 말을, 간도서 못살고 온다는 이가 할 때에, “우리가 어디를 간들 별 수가 있겠소마는, 그래도 그 곳이 여기보담은 좀 살기가 낫다고 하기에” 함은, 여기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가는 이의 말이다.
7
그런데 거기에도, 한 가락 더 한 층의 속깊은 설움이 서리어 있으니, 그들의 차디찬 웃음과 무딘 눈치는, 아무나 서로 만날 제마다, 제각각 미더운 일에도 의심을 품고, 정다운 일에도 고마운 줄도 모르는 듯하다. 그리해서, 아내는 남편을 의심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동안에, 굳게 얼리었던 한겨레는, 그만 하염없이 풀리어 흩어져버렸던 것이다. 아! 옛날에 벌써, 사랑의 품에서 쫓기어난 그 백성들은 어리고 곱던 넋이 찬 바람 모진 비를 모두 겪을 그 적에, 참된 마음이나 싹싹한 느낌까지도, 그만 어디다가 다 ─ 잃어버리고, 이제는 고치기도 어려운 무서운 병이 깊이 들어버리었느냐, 그리고서 인정도 모르는 불쌍한 무리들이, 또다시 어느 나라 인정도 없는 그 땅으로, 헤매이러 가려하느냐. 그러한 일 저러한 일을 모두 휘둘쳐 생각해보니, 시방 내가 가는 우리의 시골인들 그 동안에 무슨 그리 이렇다 할만한, 시원한 일이나 마뜩한 꼴이, 있으랴.
8
마음 답답한 나무숲, 발 무거운 산길이다. 서낭당이 고개 비탈길을 내려와, 장승 모롱이에 나서니, 깊고 넓은 고라실이다. 논두렁이 넘도록 우거져 된 벼포기는 찬 이슬을 머금어 무거운 듯이, 황금의 이삭을 드리워 있다. 골짜기마다 다복다복한 초가집에서는, 아마나 아침밥을 짓는가, 고운 연기가 흰 깊나북같이, 여기저기에서 스르르 떠오른다. 어쩐 일인가, 닭의 소리도 없고, 개소리도 들리지 아니한다. 그나마, 그 억세이고 세차게 찧고 나서던, 네 눈이 검둥이 누렁이 산개 떼도, 요사이 흔한 야견박살(野犬搏殺) 통에, 모두 때여가버리었는가. 아무튼 모든 것이, 잠들은 듯 조는 듯한, 평화스러운 아침이다. 거칠은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아침이다.
9
저 오막살이들의 싸리짝 문을 열어 제뜨리면 얼마나 어지러운 풍파가 감추였으며, 불안하고도 비참한 생활이 드러날른지 모르겠으나, 잠잠한 마을을 겉으로 보아서는, 매우도 고요한 풍경이다. 아니다. 고요하다는 것보다도, 끝없이 쓸쓸해 보인다. 도리어 시름스러운 적막(寂寞)이, 퇴쇠(頹衰) 해가는 농촌을 그대로 그리어 놓는다.
10
축동 오리나무 밑길로, 물동이 인 아낙네가, 비루먹은 재강아지를, 하나 앞세우고 나온다. 누구의 아내인가, 새로 시집 온 새색시인지, 분홍치마에 행자치마, 흰겹저고리 팔뚝을 걷어접은 바른팔 진동에는, 잔살의 고운 때가 가뭇가뭇이 묻었다. 오리알에 제 똥 묻었다는 격으로, 수수하고도 고운 새 색시이다. 다행히 평화스러운 집안이면은, 새 시집의 첫사랑살이도, 아마나 즐거웁겠지. 부끄러운 듯 수줍어하는 듯, 붉으레한 두 볼은, 아리따운 청춘의 끝없는 즐거움을, 느긋이 이야기하는 듯. 아지 못게라, 이렇게 늙은 나라 낡은 시골에도 푸른 봄 그것은, 잊지 않고 찾아와서, 뜨거운 가슴의 붉은 피를, 물결쳐 주는가. 젊은이들의 뜨거운 입술은, 아직껏 꿀 같은 즐거움을, 그대로 마음껏 누릴 수 있는가. 그래도 든든할 손, 웃음을 잃어버린 거친 들에도, 꽃 피는 그 시절은, 가시지 아니하였구나.
11
나는 시장한 까닭인가, 목이 몹시나 마르다. 이 편 지렁길로 들어가면, 향나무 밑에 구기자(枸杞子) 덩쿨 우거진 옹달우물이 있는 것을, 전일(前日)에 보아 알았다. 나는 아낙네의 뒤를 실실 따라, 우물길로 갔다. 아낙네는, 물동이를 내려놓으며, 곁눈으로 나를 힐끗 돌아다볼 때에, 나는 무슨 말을 하여야 좋을른지 몰라서, 잠깐 주저주저하였다. 말도 없는 눈치 수작만이, 어느덧 서로 오고가고 하는 동안에, 그는, 깨끗한 물바가지로, 우물물을 한 바가지 헤치어 떠서, 넌지시 우물뚝에 놓으며, 또한 아무 말도 없이 다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고개만 반쯤 돌이킬 뿐이었다. 나는 시원한 냉수를, 한숨에 들이키었다. 그리고, 그의 은근하고도 친절한 은혜를, 입으로 일컫지는 못하였으나마, 다만 마음으로라도 감사를 드리었다.
12
그것이, 내가 고향의 흙을 밟으면서, 첫번으로 받은 대접이었다. 아 ─ 그는, 어찌하여서 그렇게도 나에게, 고마운 웃음을 끼치어 주었는가. 집을 등지고, 고향을 저버리고, 떠돌아다닌 지가 일곱 해 만에 아무러한 공도 없이, 아무러한 보람도 없이, 이렇게 멋없이 돌아오는 이 몸을, 거짓말장이를, 천덕구니를……. 나는 도리어, 고마움을 받을 때에, 괴로운 느낌이 가슴을 내려안게 한다.
13
이름도 모를 풀벌레들의 소리는, 아직도, 길섶의 거친 풀이며 벼포기 밑에서, 가을의 소곡(小曲)을 읊조리고 있다. 저희들의 목숨이 얼마 안 있어서, 모질은 눈보라에, 꺼질 것도 모르고, 흥이 겨워하고 즐거운 듯이, 아침 햇빛에 이슬에 무저진 조그마한 노래를, 제로라 아름다이 읊조리고 있는, 그의 티없이 개끗한 마음에는, 애련의 느낌을, 느릿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14
쟁기지고, 누렁 황소 “어듸여 듸여” 몰고가는 농군은, 가을 보리를 심으러 가는 일꾼인가, 길 위에는, 예전에 없던 새로 지은 집들이, 여기저기에 귀딱지 모양으로, 어리어 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어떤 집은, 짓기도 전에 허물어질 듯이, 반쯤은 찌그러졌고, 또 어떠한 집은, 부엌은 중방만 들이고, 방은 외가지가 보이는 황토(黃土) 흙벽에, 검은 걸음이 걸었는데, 문짝도 없고 사람도 없이, 깨어진 질부둥거리 쪼각만, 비인 봉당에 흩어져 있으니, 집임자를 살 수가 없어, 또 어디로 떠돌아 나가버리었는가. 울타리도 없이 상두막 같은 담집 지붕에는, 답사리나무가 어웅하게 났다가, 그래도 말라버리었는데, 거적문 달은 방 안에서는, 어린애들의 울음 소리가, 한참 어지러이 볶아친다. 아마나 먹을 것은 없는 집안에, 자식들은 많이나 놓은 듯.
15
저 집들이 있는 터전은, 옛날에 우리집에서, 원두 놓고 원두막을 지었던 밭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 원두막에 가서, 지렁풀잎을 뜯어, 각시장난이나, 정없이 송낙도, 많이 많들었고, 밭둑에서 글방 아이들 하고, 말달리기는 얼마나 많이 하였던가. 그런데 시방은, 시방 나는, 얼마나 많이 이렇게 달라졌느냐. 시절이 바뀌고, 물건은 어떻게도 몹시 변혁되었느냐. 어리었을 그 적에는, 아무것도 아지 못하는, 다만 행복이라는 그 그늘 속에서, 수수께끼 같은 알 수 없는 큰 세계를, 꿈꾸고 있었더니만…….
16
저 자라뫼[山名] 미륵당(彌勒堂) 이의 돌부처는, 여전히 평안하신가. 어렸을 적에는, 그 앞으로 지나다닐 제마다, 몇 번인지 모르게 소원을 빌고, 정성을 들이며, 미래의 꽃다운 희망도, 퍽 많이 하솟거리었고, 단단한 언약도 많이 하였건만은, 내가 어리석었음인가, 돌부처가 나를 속이었음인가. 글방에서 도강(都講) 할 때에는, 강(講)을 순통하게 해달라고 절을 열 번이나 하였고, 천자문을 갓떼이고 책씻이 할 때에는, 떡과 과율을, 집안 사람들 몰래 가지고 가서, 장래의 무엇을 혼자 빌은 일도, 있었다. 동경과 선망과 기원에, 안타까운 좁은 그 가슴에다, 든든하게 채울 양으로, 기껍게 할 양으로, 많은 쾌락을, 그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장래에다, 그 장래를 실어놓은 한 세계에다, 차디 차고 우둥퉁하고 딱딱한 그 돌부처에게다, 빌고 바라고 또 기다리기는, 얼마나 많이 하였던가. 그런데 나는, 시방 돌아온다. 요모양이 되어서 돌아온가. 이렇게 다시, 그 넓은 세계에서 돌아오려고 한다. 너무도 많이 무너진 희망과, 여지없이 허틀어진 계획을 거두어 가지고, 이렇게 다시 고향으로, 낯익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거짓말만한 그 돌부처가, 여태껏 그대로 있는지 없는지, 만일에 내가 그 동안에, 과연 그리 아무 잘못도 없을 것같으면, 아마나 밉살스러운 그 돌부처는, 낯이 없어도 고개를 숙이고 돌아앉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도망이라도 갔으리라. 모든 것이 애끊는 설움을 품었다가, 돌아오는 이 몸을 마지하자마자, 울리려고만 할 뿐이로구나.
17
내가 이 땅을 시방 다시 밟는 것은, 일곱 해 만이다. 일곱 해라는 긴 ─ 세월은, 어느 곳에서 허비해 버리고, 이제서야 귀향이든고. 일곱 해를 별러서 오늘에야, 내 고향에 돌아온다. 정다운 매가(妹家)에를 찾아서 온다. 아니다, 나의 생가(生家),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니를, 만나 뵐려고 오는 이 길이다. 어머니께서는, 아마나 퍽 많이 늙으셨겠지, 내가 처음에 집에서 떠날 때에는 “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머니 생전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올 터이니, 보십시요.” 하고 어머니의 흘리시는 눈물을 더 내리게 하였더니만……. 그런데 내가 시방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오는 것인가, 그대로 어머니께서는, 아마 이제도, 훌룽히 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시겠지.
18
새로이 된 마을을 지나니, 길 아래는 커다란 방죽논이다. 물심 좋고 걸차고 버렁 넓은 저 논을, 해먹는 사람들은, 참 행복한 이일 것이다. 자기의 소유를 잃어버리지 않고 지니고 잘 사는 이며은, 쇠잔해지는 시골에서는, 매우 복많은 사람들이이 아닌가. 이 고라실논이 모두 열두 섬 열엿 말지기……. 몇 해 전까지도 모두가, 이 시골의 사람들이 임자였었건마는…….
19
저 은행나무 밑을 지나면, 매가(妹家), 곧 나의 생가(生家)이다. 우리의 집이 있는 곳이다. 나는, 새로금 다시 마음이 무엇하여서, 걷던 걸음을 잠깐 머뭇거리었다.
20
나는, 이제 분명히 고향에 왔다. 꿈에만 그리웁게 오던 그 고향 아니라. 예전에 보던 청산녹수 그대로의, 낯익은 내 고향에. 이렇게 왔다. 이제는 집안 사람이나 동네의 사람들도, 곧 만나볼터이지. 그러나, 무슨 낯과 무슨 염치로, 그들을 만나보나, 무슨 공을 이루고 왔으며, 무슨 자랑거리를 지니고 왔다고…….
21
나의 허물만도 아니요, 남의 죄만도 아니며, 또, 시세(時勢)나 운명의 탓만도 아니건마는, 어찌어찌 하다가 조선(祖先)의 유산으로 이 시골에서는 큰 부자라 하던 그 많던 재물을, 다 ─ 없애버리매, 고향에 그대로 있기가, 낯도 없고 또 부끄러워서, 시집 가 있는 누이를 불러서, 할머니와 어머니와 집안 일을, 모두 부탁하고, 어지러운 세상 거칠은 물결에, 떠돌아다닌지가, 그럭저럭 일곱 해가 되었다.
22
일곱 해 동안에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살아왔느냐. 모군꾼, 전차운전수, 석탄광부. 그러나 그것도 모두, 뼛심을 들이여 죽도록 벌어야, 한 몸뚱아리 먹고 입을 치닥거리도, 마음대로 넉넉하게 잘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그것도, 간 곳마다 나중에는 번번히 모두, 주모자 또는 선동자라는, 창피스러운 지목을 받고, 쫓기어 나게 되니, 그제는, 일을 하려고 하나 일할 곳도 없어서, 한 달 동안이나 벌이도 못하고, 공연히 공밥만 치이고 있었었다. 그러는 동안에, 몇 푼 아니되는 주머니의 돈도 다 ─ 털어버리니, 이제는, 오도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되어버리었다.
23
아무튼, 그리운 고향에나 한 번 가보아야하겠다고, 며칠 전에, 어느 동무에게 신세를 끼쳐서, 간신히 원산서 기차를 타고, 그럭저럭 어제 아침에, 청량리역까지는 와서 내리었으나, 먹으며 굶으며 오는 길이니, 수중에는 노랑돈 한 푼인들 있을 까닭이 없다. 그래, 거기에서 왕십리까지 걸어오다가, 길가에서 시장 시루떡 파는 데를 보았다. 배는 몹시도 고픈 판에, 먹을 것을 보니까, 눈이 뒤집히어 나닿는 마음이, 걷잡을 수가 없을만치도 되었지만은, 그래도 남의 것이라, 억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잠깐 마음을 돌리어 생각하는 동안에, 한 마디의 거짓말을 생각해 꾸미었다. 그것은 청량리역에서 보아 얻은 광경을 얼른 어렵지 않게, 거짓말로 둘러 꾸미었음이다. 거기에다가 또, 떡 파는 늙은이의 어련무런한 눈치도 보아 이용하고, 그의 그럴 듯한 심리도 언뜻 대강 짐작해 가미하였다.
24
“십 년 전에 나가신 우리 아버지를 찾아서, 서북 간도(西北 間道)를 휘돌아 오는 길인데, 중간에 그만 노자가 떨어져서, 아무 것도 못먹어 배가 몹시 고픕니다.” 그러한 뜻으로, 죽는 시늉을 하며 갖은 표정을 다 ─ 해서 한 마디하였더니, 그것이 용하게 바로 들어맞았던지, 그 할머니가, 잠깐 무슨 생각을 하다가, “매우 장 ─ 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연방 내놓으며,
25
“아이 딱해라, 배가 오죽이나 고플라고, 어머니도 계시우, 어머니가 그 말을 들으시면 오죽 놀라시고 가엾어 하실까, 너나 할 것 없이 자식 둔 이들 마음에야……. 나도 당신과 같은 아들이 있어서 날마다 공장벌이로 먹고 살더니, 그만 기계에다 발을 다쳐서, 벌써 두 달째나, 내가 이 노릇을 해서 간신히 입에다 풀칠을 해간다오.” 그러한 말을 하는 동안에, 벌써 떡 한 덩이와 씨레기국 한 그릇을 주어서, 해롭지 않게 요기는 잘 하였다. 만일에 그 때 그가, 말이라도 첫마디가 빗나갔거나, 떡이라도 아니 주었더면, 나는 무슨 짓을 했을른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아주 아귀(餓鬼)였으니까……. 그래, 배가 든든해지니, 고마웁기도 하였거니와, 그의 하던 말을 들어보니, 눈물이 나고 뼈가 아팠다. 더구나 그렇게 고마운 이를 거짓말로 속이기까지 하였음이랴. 아무튼 이제는, 몹쓸 시방 세상에서는 거짓말만 잘하면 장한 사람도 될 수 있고, 장한 사람이 그렇게 훌륭히 되면, 남한테 동정도 많이 받고, 나의 배도 부르게 되는, 묘한 이치를 알뜰히 깨달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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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에서 떠나, 육칠십 리나 거의 걸어오다가, 해는 떨어지고, 배는 또 고파서, 하는 수 없이 또 그러한 떡 얻어먹던 수단으로, 큰사랑집에 들어가, 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하룻밤을 드새는 둥 마는 둥 새벽부터 길을 떠나서 오는 것이, 시방 이 길이다. 그러니, 시방 이렇게, 오느라 오는 것이, 자랑보다도 부끄러움뿐이며, 반가움보다도 마음 아픈 것이 앞서 느끼어짐이랴.
27
단풍 든 앞뒷동산이, 찌그려놓은 듯이, 빼곡이 소담스러웁게 영근 논과 밭을, 에둘러 휩싸였다. 예전에 김장 심던 텃밭에는, 새로이 집을 지었고, 예전에 집있던 터전에는 고추를 심어 가꾸었다. 집집마다 지붕마루에는, 널어 말리는 붉은 고추가, 한창 가을빛을 시새워한다. 전에 있던 연자마(燕子磨) 간은, 그래도 있는지 헐어버리었는지, 한 뙈기의 수수밭이 가리여 알 수가 없다. 바르던 길은 외어졌으며, 무성하던 숲나무는 다 ─ 베어 없어지고, 몇 나무 양버들의, 노랑물이 들어 엉성한 휘추리가 아침볕살에 휘어적 휘어적 할 뿐이다.
28
따라서, 동네 사람들의 파리한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만치 달라졌다. 모르건대 그것은, 시골에만 세월이 빨리 달아난 까닭이냐. 근심 걱정이 그렇게 늙게 하였음인가. 배가 고파서 그렇게 여윈 것인가. 그 몹쓸 영양부족이, 아마 그들을 그렇게 몹시, 어려운 병을 들이어 놓은 것인가.
29
집 앞길로 들어서기 전에, 건너 동산의 아버지 산소를, 한 번 건너다 보았다. 그 많던 묘목은 누가 베어먹었는지 다 ─ 베어 없어졌고, 군데군데 사태 날린 곳마다, 황토 북덕이가 벌겋게 드러났다. 나무를 깎아 발가벗은 산이, 모진 바람과 궂은 비가 오락가락 할 제마다, 얼마나 임자 못 만난 설움을, 구슬피 하소연하였을 것인고. 그런데 산기슭에, 보지 못하던 새 무덤이, 또 하나 생기었다. 누구인가, 누구의 무덤인가, 누가 또 죽어 없어졌는가. 이 동네의 누구가, 하염없이 저 무덤 속에 누워 있게 되었는고. 아무튼, 그 동안에 다시는 볼 수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간 이도, 여러 사람이 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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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밭에서, 고물개로 보리밭고랑을 밀어덮고 있는 일꾼은, 먼 ─ 발치로 보아도 매우 낯이 익다. 그렇다, 그의 원고 바지에 옷입은 모양이나, 몸 쓰는 것이 한학자 그대로 게으른 것이나, 뒷갈기머리가 늘어진 채로, 맨상투에다 갓만 들어 얹은 꼴이나, 모든 것이 갈 데 없는 매부이다. 또는 저 밖이, 우리 집 판 셈할 적에, 간신히 돌리어 빼어놓았던 텃밭이니까, 아마나 나의 많은 발자취는, 아직도 저밭, 어느 귀퉁이에든지, 더러 간직해 지니고 있을 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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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부! 매부와 비슷한 일꾼 ─. 아무튼 그는, 그 동안 일곱 해를 먹고 묵어왔어도, 아직껏, 옛 허물을 벋지 못한, 철늦은 동물이다. 그것이 얼마나 딱하기도 하고, 불쌍도 한 것이랴. 그이는 어느 틈에 멍 ─ 하니 서서, 내가 오는 쪽을 바라도 본다. 아무튼, 복색이 다른 외처 사람들의 출입이 적은 시골마을이라, 보지 못하던 낯설은 사람이, 별안간에 나타나니까 보는 사람의 이상한 눈초리를 모아 끌 수밖에 ─.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눈에 뜨이기가 싫었다. 남의 말을 잘 하는 시골 사람들에게, 가뜩이나 잊어버리었던 옛일을, 시방 다시 깨우쳐 주어서, 쓸데없이 미리 짐작으로, 군 이야기 겸 잔소리가 나오는 것이, 실없는 말거리가 되어서, 뭇입술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 뼈가 아프도록 진저리치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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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빨리 하여, 얼른 옛집을 찾아 들어가니, 대문 간채에서는, 누가 살림을 하는가, 우뚝이 외따로 떨어져 딴 집이 되었고, 사랑 앞 긴 ─ 담 아울러 큰사랑채는 헐어버리어서, 두두룩이 비인 터만 남았는데, 깊은 자락은 소두엄 구덩이를 만들어서, 전에 석창포(石菖蒲) 심었던 자리에는, 누렁 암소가 모로 드러누워 게으르게 양을 삭이고 있다. 예전 중문이, 이제는 큰대문 행세를 하게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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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들이 장난을 한 것인가. ‘한성주(韓成柱)’라 쓴 문패(門牌)에다, 쇠똥칠을 누렇게 해서, 거꾸로 돌려 놓았다. 안마당에서는 까만 암캐가, 콩콩 짖으며 나닿는다. 제(第)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크게 하고, 문지방 안에다 발을 들여 놓으니, 서먹서먹하던 가슴이,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누이가, 부엌문 앞에서 어리둥절해, 우두커니 바라다만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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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 네가 어쩐 일이냐.” 하며, 와락 뛰어 내달아 맞으면서, “어머니, 얘가 왔어요.” “얘가 오다니, 누가 와.” “경결(敬烈)이가 왔어요.” “응 경렬이가 ─ .”어머니가, 안방에서 마루로 뛰어나오신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엎어질 듯이 고개를 숙이고 안기었다. 울음 반 웃음 반으로…….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에게 휩싸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께서는,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 보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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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떻게, 이렇게 왔니.” “어떻게도 옵니까. 그저 이렇게 왔지요.” “얼굴이 아주, 야위다 못해 늙었구나. 나는 너를 다시는 못 보고, 죽을 줄 알았구나. 어쩌면 그러냐, 그래 이 늙은 어미도 보고 싶지 않더냐.” 어머니는, 눈물을 지으신다. 누이도, 눈이 그렁그렁해, 울듯이 찌푸리고 있다. 나도, 가슴이 뻐개지는 듯이 아프건마는, 아무 대답할 말도, 위로할 말도, 찾아낼 수가 없어서, 다만 잠잠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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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물라볼만치 아주 퍽 늙으셨다. 그렇게 풍부하던 살결이, 인제는 검푸른 주름살로만, 바꾸어졌다. 누이도, 나이로 보아서는 매우 바스러졌다. 아마, 가난한 살림에 너무 쪼들린 까닭인지. 그 동안에 어린애는 둘을 낳아서, 하나는 홍역에 죽고, 나중 낳은 사내애만이 살았다 한다. 아마 불행한 집안에는, 짖궂은 몹쓸 불행이, 몇 겹씩 더 잇대어 둘러싸 오는 것인가. 그 동안에,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많은 식구가, 하나 둘 차차 모두 흩어져버리었으니, 더욱이나 집안은, 쓸쓸하여 졌을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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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모양은, 그리 달라진 것은 없으나, 세간도 없이 휑덩그렁한 방에, 묵고 찢어진 벽 도배가, 꺼름과 거미집으로 수를 놓은 것이, 속 깊이 묵고 큰 집의 쇠퇴와 빈궁을, 이야기한다. 두 살 먹었다는 누이의 아들은, 아랫목에서 누워자다가, 눈을 떠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으아 ─’ 하고 울며 일어나, 저의 어머니에게로 기어간다. 나는, 어린 아기에게 왜떡도 조금 못 사다가 준 것이, 섭섭하기도 하고 또 한심스러웁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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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이 설어서 ─, 너의 외삼촌 아저씨란다.” 하며, 누이는, 귀여운 아들을 얼싸안는다. 암만 낯은 설더라도, 왜떡이나 좀 사다가 주었더면, 외삼촌 된 꼴에 얼마나 좋았을까 ─. 누이는 웃으며 “아가는 날마다, 나하고 왜(倭) 말만 하는데.” “왜말이라니요.” “한종일 밤새도록 지저거리고 나서 보면, 그것이 모두 무슨 말을 한 것이지, 한 마디도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었지.” 하며, 아가를 추석추석하고 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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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가가, 아직 말을 못 해요.” “응 아직 ‘엄마, 젖 좀’ 하는 소리 밖에는 모두 못 알아 들을 왜(倭) 말뿐이야, 그래 아가가 왜(倭) 말을 하면, 나도 왜(倭) 말만 하지.” 못 알아 들을 왜(倭) 말이라는 말이, 퍽 우스웠다. 어머니도 웃으시며 “그래도 그놈이, 어떻게도 영약한지 ─ .” 밖에 나갔다는 매부가, 벌써 아까 알아보았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들어온다. 벌써 앞니가 하나 빠져서, 청춘은 이제 다 ─ 지나갔다는 듯이, 말소리도 가끔, 헛김이 섞인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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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새도 매형, 약주를 그렇게 잘 잡수셔요.”하고 물으니까, 누이가 얼른, 말끝을 채어 “그럼 먹구 말구, 요새도 날마다 술타작이란다.” 하며, 원망하는 듯이 놀리는 듯이, 또 호소하는 듯이, 한 마디로 부르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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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일가권석이 배는 고프지 않은지, 어찌 술만 그리 많이 먹는다노.” 매부는, 헛입맛을 다시며, “그래 그 동안에, 재미가 어때, 아무래도 집에 있느니만은 못했을테지.” 하며 곰방대를 빼어, 순썰이 담배를 부비질러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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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이 반가운 인사인가, 비웃는 웃음인가. 어떻든 이 세상은, 도무지 더러움과 밉살스러움뿐이다. 내가 어찌하여서, 그 동안에 집에 있지 못하였는가. 집에도 붙어 있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게, 누가 만들어 놓았는가. 그러하면서도, 사람마다 겉으로만 좋은 말로 못된 이면 치례가 거짓 서로 오락가락한다. 아 ─ 몹쓸 자여 ─, 악한 세상이여 ─. 매부는, 나의 그 동안 지내인 경력이며, 현재의 생활이며를, 반가운 듯이, 가장 차례로 묻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나앉아서, 그의 물은 말을, 차근차근히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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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가 전일(前日)에는, 일향(一鄕)의 일류 토호였었건마는, 오늘날은, 일개의 순수한 육체 노동자가 되기까지에 겪은 경력을, 그래서 거기에서 우러나온 현재의 주의(主義)와 생활을, 어떻게 다 ─ 이루 말할 수 있으랴. 다만 혼자만 태고의 태평시절로, 망건을 도토리같이 쓰고 다니는 일민(逸民)으로, 자기의 전답을 자기의 힘으로 잘 ─ 평안스러웁게 경작해 먹고 살아왔던 행운의 귀동자라, 우물 파마시며 밭갈아 먹는다는 옛 글 구절을, 취흥에 섞어서 소리쳐 읽고 있는 천둥벌거숭이이니, 그것을 중심 하여서 자기가 보는 꿈속의 조그마한 세계로, 넓은 세상 모든 것을, 마음껏 멋대로 쉽게 단정해버리는 단순한 생활자에게, 힘들이어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공연히 소귀에 경 읽는 격이 아니면, 도리어 모욕(侮辱)만 받을 뿐이지……. 그렇지 않아도, 나는, 모든 것이, 비웃는 듯이 놀리는 듯이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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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소위 행복이라는 그것도, 얼마나 부랑자와 같이 믿을 수도 없고, 밉살머리스러운 것이었던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스러운, 우연이라는 휘청거리는 외나무 사다리 위에다, 행복이라는 그 알 수 없는 보물을, 올리어 놓았던 것이던가. 운명이라는 한 허깨비가, 한 번 발길로 그 사다리를 툭 차버리면, 평화와 행복을 한꺼번에 깨트려 버리고 다만 목놓아 울 뿐이니, 그 때에 “그것이 무슨 창피스러운 짓이냐, 못생기게 허둥대지만 말아라, 너희들의 소위 행복이라는 그것이, 한바탕의 실없는 장난이었던 것을, 너희들은 모르느냐.” 하는 비웃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수수께끼같이 알 수 없는 행복을, 어둡게 바라는 것보다는, 내가 사는 힘이 있다. 힘이 있다. 나는 나의 힘을, 밝게 헤아리고 있다. 진리를 곧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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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하겠다.” 하며, 누이가 아침 밥상을 들여 온다. 밥상에는, 꽁보리 밥과 된장 한 그릇뿐. “너도 그 동안에, 이런 밥 더러 먹어보았니, 나는 일곱 해 동안을, 이 거친 꽁보리로, 살았다. 아마 뱃속도 껄끔껄끔할 거야, 거친 것만 많이 먹어서” 하며, 숟가락을 잡으신다. 어머니가, 늙기에 고생만 하시게 된 것이, 모두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매, 가슴이 점점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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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굶는 것보다는 얼마야. 이거라도 많이만 있으면서야 ─. 아마 퍽 시장했겠다.” 하시며, 자꾸 어머니의 진지를, 내 밥그릇에다 더 먹으라고 덜어 놓으신다. 나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북받치는 느낌이 목을 메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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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을, 그럭저럭 눈물에 섞어서, 한 그릇 다 먹었다. 남이 보기에는, 죽일 놈이요 몹쓸 자식이라도, 어머니의 사랑 아래에는, 모진 것도 없고 거친 것도 없이, 다만 웃음이요 눈물뿐이었다. 눈물에 뒤섞인 옛이야기 중에도, 할머니께서 병환이 들었을 때에, 나를 퍽 보고 싶으셔서, 나의 이름을 날마다 부르셨으며, 또 쌀밥이 잡숫고 싶으셔서 ‘쌀밥 쌀밥’ 하시며, 밤낮으로 쌀밥 노래였었건마는, 가난이 원수가 되어서, 변변히 잡수어 보지도 못하고, 이내 돌아가셨다는, 구슬픈 구절도, 한두 마디가 아니다. 어머니께서는, 한숨 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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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불효가 아니야. 남의 집 외아들이요, 또 장손이 되어서 ─. 너의 아버지까지는, 우리집이 대대로 예문(禮文)과 범절이 놀라웠었건만…….” 그리해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적에도, 별안간에 산지도 구할 도리가 없어서, 아버지 산소 옆에다 할머니의 산소를 모시었다는 말씀도 있다. 아까 올적에 보던 그 새 무덤이, 할머니의 산소이었던 것을 이제 짐작해 알겠다. 이러한 말 저러한 말 많은 이야기 끝에, 미안도 하고 불쾌한 느낌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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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요, 그러한 예절은, 거룩한 예문가요 또 배포도 부드러웁고 속도 든든한, 매형이, 이렇게 있는데요, 무얼.” 하고, 어리광 섞어서 한 번 웃었다. “너의 집 일에, 매형은 무슨 죄며, 무슨 까닭이냐. 또 에미는, 이렇게 늙어죽을 때까지, 장 ─, 매형만 바라고 사니, 이제는 죽을 날도 머 ─ 지 않았는지, 나날이 기운도 전만 아주 못하고……. 어떻든 너도, 이제 장가나 어떻게 들어서, 좀 재미있게 살아나보다 죽잤구나.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된 것이, 애녀석으로 그렇게만 있으면 어떻게 하니, 온 무슨 재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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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그것도 무슨 재미로 그러겠습니까.” “그러면.” “아이 참 어머니도……, 그저 그렇게 좋은 형편이 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요. 누가 일부러야 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어머니 ─, 왜 제가 그렇게 불효가 되고 예절도 모르고, 가난도 해졌고, 어머니도 그렇게 고생만 하시게 된 것인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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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모두, 네가 잘못한 탓이지.” “네 ─ 옳습니다. 그것은 모두 제가 잘못한 탓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잘못만 되었는지, 그 근본 이치는, 아마 자세히 모르시겠지요. 아무라도, 처음부터야 잘못만 할려고, 일부러 별러서 하지는 않았겠지요. 다만, 나중에 지나간 일을 헤아려보니까, 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애써 잘하려고만 하였건만은, 모두가 잘못만 된 것은 무슨 일입니까. 그것은, 그 잘 하려고 하는 그 근본 이치를, 그만 헛되이 그릇 본 까닭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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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쓸데없이 소소한 일에 걸리어, 잔소리만 하지 말고 하루라도 바삐 어느 날이든지, 그 그릇된 일의 근본 이치를 밝게 보고 바로잡아 사는 날이라야 그 때가 정말, 우리들의 잘 살아 본다는 날이지요. 아무튼 이제는, 잘 되었어요. 우리집이 망한 것도 잘 망하여졌고, 가난한 것도 잘 가난해졌어요. 그래야, 배도 고파 보고 추워도 보고, 힘도 들이여 보고 고생도 해보고, 남에게 괄시도 받아보아서, 쓴 것 단 것, 이 세상의 온갖 지독한 맛을, 다 ─ 맛도 보고 겪어도 본 뒤에라야, 제가 살려고 하는 부지런도 생기고, 제가 시방 어떠한 형편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깨달을 것이요, 또 어떻게만 하여야 잘 살 수가 있다는 마련이나 생각도, 나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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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앉아서, 그 냄새나는 예절은 다 ─ 무엇이며, 되지 못한 부자는 다 ─ 무엇입니까. 그렇게, 잠꼬대같이 허튼 수작이거든, 모두 얼른 깨트려버리고, 나날이 점점 배가 고파져서 눈깔이 뒤집힌, 이 백성들에게는, 한시 바삐 먹고 살 방법이나, 깨달아 알어야지요. 고목나무의 곰삭은 삭정이가, 불이 붙은들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나무가 병이 들어 속이 비었거든, 썩은 뿌리의 삭은 등걸이 되기 전에 얼른 조기어 불이라도 때이면 불보이나 있겠지요. 어머니 ─, 썩은 등걸에서, 빛없고 힘없이 팔락팔락하는 꽃보다는 새 공기에서, 새로 접한 새 나무에서, 새로 열린 새 과실이, 새로이 귀여웁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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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흥분이 되었었다. “너 지껄이는 것은, 무슨 개소린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면 어느 날이나 좀, 잘 살아보누.” “반드시, 잘 살아볼 날이 오지요” “어느 때 꿈에나, 내가 죽은 뒤에나, 아무튼 나 죽은 뒤에라도, 너희들이나 잘 살기만 한다면서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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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염려 마십시요, 어머니 생전에 잘 살아 볼 터이니 ─. 우선 급한대로 무엇보담도, 누님은 길쌈을 하시오. 매형은 밭을 갈고, 어머니는 저 아가나 보아주시다가, 저 아가가 자라서 말이나 좀 할 줄 알거든, 나는 아가에게 글을 가르치지요. 그리고 나도,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내가 일을, 어떻게 세차게 잘 하는데요. 이 손을 좀 보십시요, 영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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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들,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짓니 ─. 또, 이제 이 지경이 되어서는, 풍년이라도 어려울 터인데 더구나. 해마다 흉년만 들지 ─. 또 하인배나 동네 사람의 인심들도, 이제 전과는 아주 딴판이다. 시속 인심(時俗人心)은 나날이 모두 달라지는데, 내 것이 있어서 양반도 좋지, 삼한갑족(三韓甲族)이면 무엇 하니. 내 것이 없어진 다음에야, 모두가 아니꼬움과 없는 덕임뿐이지. 요새도 날마다, 전에 부리던 것들이나 땅해 먹던 것들이 모두, 문이미었게 들어와서, ‘어쩌자고 저의가 하던 그 땅마저 팔아잡수셨어요.” 하고, 울며 불며 야단이란다. 가을이 되니까, 농장도지(農場賭地)를 치뤄주고 나면은, 먹을 것은 한 톨도 아니 남는다나. 뼛심들이여 일 년 내 농사라고 지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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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연 저런 사설로, 원망도 있고 사랑도 있어, 아무튼 즐거운 하루의 해를, 지웠다. 어찌하였든, 우리는 한시 바삐, 모두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하겠다. 그리워서라도 가엾어서라도, 또 내어버리기가 원통해서라도 ─. 그리해서, 거기에서 그대로 살 방법도 생각하고 깨달아서, 빛바래인 묵을 시골을 붙들어, 우리가 살 새 시골을, 만들어야만 하겠다. 우리를 낳고 병들은 시골을 모른 척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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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부터, 서남풍이 몹시 불더니, 나중에는, 비바람이 뿌리치는, 근심스러운 밤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드러누으셔서 “아마 우박이 오나보지.” “아니오. 빗소리가, 바람에 섞이어, 그리 요란스러운가 봅니다.” “아마, 이 비가 온 뒤에는 추워질 걸, 뒷밭에 목화를 못 다 따서 또 비를 맞히는군. 또 지붕의 고추도 못 내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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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어머니는 잠이 드신 모양이다. 오늘부터 내가, 이 집의 임자 ─. 매부와 누이와 어린애는 건넌방으로 건너가고, 나는 어머니를 뫼시고, 오래간만에 이 안방에서 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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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라도, 시집만 가면 남이다, 더구나 사위야, 더 말할 것이 무엇 있으랴, 어머니께서 노래(老來)에 남에게만 얹혀 고생만 하시게 된 것은, 아무튼 딱하여 견디어 뵐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할 터인데, 아마 어머니의 말씀처럼, 내가 장가를 들어야 할 터이지. 장가 ─ , 장가 ─. 그러나 장가를 들려면은, 어떠한 색시를 고르나, 아까 오다가 보던 그러한 색시한테로 ─. 그러나, 그렇게 무던하고 고마운 색시를, 어디서 만날 수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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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내가 죽더라도, 너만 잘 된다면…….” 하시는, 뼈가 아픈 말씀을 하실 때에도, 나는 어찌하여서, 무엇이라고 하든지,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나 ─. 대답을 드릴만한, 아무러한 말도 갖지를 못한, 몹쓸 자식이 되었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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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넌방에서는, 매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인가. “이건 다 ─ 무어야. 마뜩치 않게, 죽일 놈들 ─ .” 그 목소리는, 매우 거칠게 들린다. 옳다, 나는, 저의 술주정하는 그 속을, 대강은 짐작하겠다. 저것은, 술주정이 아니라 심술이다. 불평을 제깐은 부르짖는, 어리석은 심술이다. 이제 이 집의 임자가 왔으니까, 이 집과 울 뒤의 텃밭을 아니, 하늘처럼 두터웁게 바라던 든든한 행운을, 온통으로 털어내어 놓게 되니까, 제 딴은, 영화스러운 행복이, 꿈결같이 담박에 무너져 버리는, 이 마당이라, 그것을 서러워하는 못생긴 심술이, 술기운을 빌어서 일부러 하는 불쌍한 술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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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저런 소리도 못 들으시고 잠이 드셨나 ─ . 방 안은 캄캄하다. 외로움과 쓸쓸한 느낌이 괴로웁게도 어린 이 넋을 흐느적거린다. 비는, 한결같이 세차게도 퍼붓는다. 나는, 알 수 없는 설움에 잠기어, 어떻게나 하였으면 좋을른지 모를만치, 애가 녹는 듯 한 두 줄 눈물이, 하염없이 내리어, 옅은 베개가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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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의 울음 소리 ─. 매부의 거친 목소리가, 잠깐 끊이는 동안에, 누이의 훌쩍거리며 느끼는 소리가 구성지게 들린다. 지붕 처마의 낙수물 소리, 낙엽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모든 소리가, 더 다시, 이 밤의 외롭고 구슬프고 청승스러운 이 넋을, 시들하게 하여 죽일 듯이, 엄습해 든다. 새로이 저 쪽에서는, 어린애의 ‘으아 ─’하고 지질어 우는 소리가, 귓결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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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심술 ─, 욕심의 부르짖음 ─, 그것이 남편과 아내의 싸움이요, 피와 고기의 서로 으드등 대어 미워 물어뜯는 소리인가. 아 ─ 철 모르는 어린애 ─, 깨끗한 아가 ─. 그 아가의 눈에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웠을가. 얼마나 고약해보였고 변(變)만스러워보였을까. 아무 더러운 때도 없고 죄도 없는, 어린 아가는, 애처로웁게도, 침침한 방 한 편 구석에 끼어서, 발발 떨기만 하고 있을 모양이, 눈에 선 ─ 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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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르는 겨를에, 견딜 수 없는 느낌에 부딪혀서, 눈과 입을 꼭 다물고, 한번 부르르 떨었다. “내가 집에 돌아온 까닭인가, 그러면 내가 떠나가자. 누이를 위하여, 매부를 위하여, 아니 그들이 믿어오던, 그 무식한 행운을, 조금 더 늘이여 주기 위하여, 내가 이 집을 또 떠나가자.”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나돌은다. 나는, 어찌도 이리 간 곳마다, 쓸쓸함과 외로움뿐인고. 고향의 보금자리에서나,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도, 애끊는 눈물이 아니면, 넓은 잠자리도 얼리어지지 않는구나. 그러나, 내가 또 이 집을 떠나가면, 늙으신 어머니께서는 어떻게나 되나. 또 남의 손에 구메밥을 잡수실 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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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넌방에서, 매부와 누이 둘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 높게 울리어 들린다. 성난 목소리와 처량한 울음 소리가, 방을 울리고, 벽을 울리고, 가을밤 마저 우는 빗소리까리, 한 데 어우러져서, 청승스러웁게도, 어둠 속의 온 집안을, 휘돌아 퍼진다. 그러나 이중에도, 가장 아프게 괴로워 우는 설움은, 소리도 없이 가만히 우는 나의 울음일 것이다. 매부는 이제, 쓰러져 잠이 들었는가. 누이의 울음 소리만이, 점점 더 느끼는 듯이 들린다. 저 방에서는 큰 울음으로, 이 방에서는 가만한 울음으로, 그렇게 서로 울음이 아니면, 풀어볼 길이 없는 어려운 일은, 과연 서로 무엇무엇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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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어머니와 누이는, 정말 죄없이 불쌍한 이들이다. 그리고, 배부도 불쌍한 사람이다. 나도 퍽 불쌍한 사람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이, 누이와 매부에게 너무 미안해 못견디겠다. 만일에 다른 까닭은 없이, 다만 내가 돌아온 그 때문뿐이라면, 나는 또다시 나가버리자, 멀리멀리 아주 끝없이 달아나버리자. 그런데, 내가 또 그렇게 되면,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시나 ─.
69
바람이 또 이는가 ─ . 굵은 빗방울이, ‘후두뚝’하고 뒷문 창풍지(窓風紙)를 훌치여 때린다. 나는, 눈물 젖은 베개를, 둘러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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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폭풍우인가, 폭풍우 ─. 폭풍우 ─. 거만한 폭풍우 ─. 들레이는 폭풍우─. 아 ─ 고향에 온 이 몸이, 잠들기 전에, 이 밤의 불안도 잠들 수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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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불교]』 53호, 193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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