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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山)이 깨드린 로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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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7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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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깨드린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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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강서(江西)군 수산(水山)면 오이(烏耳)리 ─ 지금도 이 주소만은 똑똑히 기억에 있다. 10년 전 이 주소의 주인공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의 친구 ○군이 대를 이었으나 그는 고향을 버리고 평양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에 황해도 석탄(石灘)으로 이사를 해버렸다. 아무 친척도 안 사는 이 곳에 ○군이 가끔 찾아가는 일이 있다면 조상을 찾아 성묘하는 때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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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로 가는 평남선을 타고 기양(岐陽)이라는 작은 정거장에서 차를 버리고 한 20여 리 걸어간다. 지금은 차가 놓였는지 자동차의 편이었는지 자세히 모르나 강서 고분을 옆으로 보면서 걸어가는 신작로의 어떤 지점에 이 주소는 있었다. 작은 부락이다. 10년 전엔 평화란 부락인 것 같았으나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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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고보 5학년 때 그러므로 내가 열여덟 나던 해 가을 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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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조선일보의 평양특파로 있는 H군과 셋이 『월역(月域)』이라는 잡지로 동인인 관계상, 소년의 감상주의를 이 부락에서 털어보자는 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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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대수 한 시간을 집어치우고 우리 셋은 하숙을 떠나서 남포가는 기차를 탔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이 시절의 감상주의는 차중 침묵을 고가(高價)한 것으로 여기었다. 한 시간 가량의 차중에서 말 한마디를 나누지 않고 ○군은 담배만 피우고 나는 차창만 내여다보고 H군은 멍하니 사람들의 떠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기양역(岐陽驛)서 내려서 냉면을 먹고 신작로를 걸어 들어간다. 나는 새로 지은 편상화(編上靴)가 발뒤꿈치에 대여서 맨발을 벗고 걸었다. 한참 가면 넓은 벌판에 강서고분(江西古墳)이 왼쪽으로 보인다. 저물어가는 이등도로(二等道路)를 덤덤히 우리는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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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어두워서야 우리는 마을 어귀에 당도하였다. 달이 맑은 하늘에 뚱그렇게 떠올라서 마을은 달 그림자에 은은히 비추인 채 아름답게 누워 있었다. 개가 컹컹 짖는 가운데서 비로소 발을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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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을 보아두게 이야기는 밤에 하고 산에는 내일 오르세마는 어쨌건 지금 저 산만 보아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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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매 그리 큰 산도 아니고 아름답게 생긴 산도 아니다. 평범한 나즈막한 흙으로 된 산이라 달빛에 우뚝 앉아 있는 산을 나도 묵묵히 바라보고 그의 가는 길을 좇아서 부락으로 들어가 그의 집마당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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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씻고 간 지은 저녁을 먹은 뒤에 우리는 다시 마당귀에 멍석을 깔고 나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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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이 이야기 하나를 가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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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서 ○군이 들려준 이야기란 대충 이러하다. 산이름도 잊었고 또 자상한 디테일도 잊어버렸다. 줄거리만 추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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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을 넘으면 이런 부락이 또 하나 있는데 그 마을에 처녀가 있었고 이 마을엔 총각이 있었다. 처녀의 이름이 무언지 총각의 이름이 무언지 ○군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또 그 때의 우리 문학소년들은 ‘어떤 마을에 한 초동(樵童)이 있었다’ 식으로 막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우리들도 그것을 자상하게 물으려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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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의하여 이 처녀와 이 총각은 연애를 하였다. 무슨 이름있는 명절 때 윷놀인가 무슨 놀인가를 하다가 알아다던가 또는 꼴을 베며 산에 갔다가 나물을 캐러온 처녀와 서로 알았다던가. 이 둘 중의 하나가 원인이 되어서 두 사람은 알았고 또 두 사람이 모두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어서 서로 상사(相思)의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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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두사람의 아버지들이 견원(犬猿)처럼 의(誼)가 나빴다니 그 원인이 옛적부터 내려오는 전래의 것이라면 영락없는 강서판(江西版)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얼마 전에 술을 먹고 무슨 토지매매건으로 대판 싸움을 한 것이 이 불화의 원인이라니 세익스피어의 걸작보다는 말할 수 없이 저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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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이 어버이 사이의 불화를 알고 있는 이들 처녀총각은 사전에 벌써 자기네들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설정해 버리고 애끊는 마음을 안타까이 숨겨버리는 데 여념이 없었더라고 한다. 그러나 처녀는 대문 안에 숨은 채 마음을 간직해 둘 수 있다 쳐도 마음대로 나다니는 총각은 이보다 능동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 앞을 배회하거나 이러저러한 계책을 대어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나이는 겨우 저 산에 밤마다 올라가 피리를 불어서 처녀의 가슴에 억센 사랑의 통신을 전하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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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을 듣다가 가만히 ○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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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조가 뭐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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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더니 그는 “강서(江西) 메나리)하고 수심가(愁心歌)랬다네” 한다. 강서 메나리라면 늘어지게 가슴을 잡아끊는 애조가 흠뻑 들이숨은 민요이어서 이 곳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까지 곧잘 그 독특한 맛을 읊어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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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 년을 두고두고 하는 동안 이 총각은 하루 아침 밭으로 씨를 뿌리려다가 아무 장식도 없는 상여 하나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좀 이야기는 맹랑하나 그 상여가 처녀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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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야기하고 나서 ○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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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소설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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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H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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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몰라도 시극(詩劇)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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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소설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어딘가 가장(假裝)이 있는 것 같아 싱겁고 또 상세한 조건을 알아야 할 것인데 이 때의 우리들의 습관으로 그런 것을 물으면 재능의 부족을 폭로하는 것으로 되어 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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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사실에 지나치게 의거하는 것은 사도(邪道)라 했다. 그 다음 돌아와서 나는 그것을 원고지에다 소설이라는 명목 밑에 적어보았는데 제목이 가관이다. 「저 산을 넘으면」그 때에 한창 유창하던 ‘오버디힐’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것을 써서 회람을 시켰더니 ‘지나친 애상은 문학을 연약하게 만들 두려움이 많을 터이다’ 하는 평언을 받았다 미상불 요시다 겐지로(吉田絃二郞[길전현이랑])의 감상문과 흡사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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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가 뒤틀리지만 그 날 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는 그 총각이 밤마다 산에 올랐다 하니 낮에 가는 것보다 밤에 올라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안(案)이 나왔다. 나는 맨발을 벗고 30리 가까운 길을 걸은 탓에 어지간히 발이 아프고 몸이 피곤하였으나 이러한 제안에 반대하는 것은 문학 지원자의 수치라 하여 아무 말도 안하고 그들의 뒤를 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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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경사가 심한 산은 아니다. 큰 나무도 없고 잔잘분한 관목(灌木)이 뒤엉켜 있는 가운데를 달빛은 희게 작은 가르마 같은 길을 비춰준다. 산마루 턱에 오르니 작은 바위가 있고 그 밑이 웅덩이가 졌다. 으악새와 왕굴이 무성하여 으쓱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우리는 그 가운데 펼신하니 물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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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저 마을을 내려다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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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지는 않으나 우렷한 달빛 가운데 십여 호의 집이 누워 있다. ○군이 더벅더벅 뛰어서 저 편 가당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려 H군은 나의 귀에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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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말한 것이 바로 제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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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우리는 ○군에게 무슨 그럴듯한 연애사건이 있던 것을 막연하게 눈치챘던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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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부는 초동이니 어쩌니 하는 건 조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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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도 H군의 이약기에 찬성하였다. ○군이 가끔 하숙에서 단소를 불면 노 메나리와 수심가를 불렀던 때문이다. 이러고 있는데 저 편으로 간 ○군의 목소리로 구슬픈 수심가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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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몽혼으로 행유적이면 문전석로가 반성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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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과 나는 반듯이 드러누워서 하늘만 쳐다보며 양껏 애상에 파묻혀서 어린 감정을 향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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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8년 7월호, ‘산에서 바다에서 얻은 이야기’ 특집)
【원문】산(山)이 깨드린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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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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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