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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문학의 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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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9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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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문학의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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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론에 대한 약간의 검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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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작가들이 현재 만들어내고 있는 소설의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음미나 구체적인 반성이나는 벌써 퍽 전부터 되풀이되면서 기도되어 왔다. 이 방면에 있어서의 비평가와 작가의 협력에 의한 이러한 기도는 문학이 처하여 있는 현재의 환경에 비치어 일층 더 치열히 요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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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형동이나 협력이 작가와 비평가의 작업의 독자성의 확립과 이것의 존중에 의하여 아름답게 성수(成遂)될 것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자의 노력이 서로 침투되고 합치되는 길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두 작업은 교섭할 줄 모르는 양단(兩端)이 되는 것으로 머물러 버릴 것이다. 이것은 지금과 같은 사정 밑에서는 극도로 피하여야 할 불유쾌한 상태의 하나이다. 그러나 곤란은 양편 쪽의 어느 곳에도 가로누워 있다. 작가가 어떠한 결함을 자기의 창작태도에서 발견하였다고 하여도 작품 세계의 개변이나 표현방법의 새로운 획득은 결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계관을 바꾸어 가지는 것보다도 일층 더 곤란한 일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평가나 문예평론가가 자기의 의견을 수정하거나 분석에 대하여 반성을 가지는 것보다도 수배나 곤란한 작업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황차(況且) 비평가가 자기의 분석이나 제창에 대하여 반성을 가질 아량에 인색하고 초조히 자신의 이론의 성급한 결실만을 희구하여 절망론을 되풀이함에 이르면 양자의 협력은 더욱 힘들어지고 드디어 문학은 수습할 수 없는 내부 파괴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최근 처처(處處)에서 발견하는 절망론이 이러한 내부 파괴의 선동자가 아니기를 바라서 마지 않는 바이나 여하튼 그것이 가지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에 대하여 음미함이 없이 작가는 씨 등의 분석에 경청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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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소설의 상태에 대해서 절망을 표시하고 있는 논자들이 각자의 분석에서 도달한 결과를 추려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열거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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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신의 기피, (2) 적극적 주인공의 상실, (3) 구성력의 결여가 즉 이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소설은 정신을 기피하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결과로 그들의 작품에서는 한 사람의 적극적인 성격도 주인공다운 인물도 발견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태는 드디어 소설로부터 구성력을 빼앗아버렸고 형식적 완미(完美)에 대한 노력을 제거해버렸고 마지막으로 소설의 본질에서 떠나버리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소설 아닌 소설이 현 작단을 풍미하고 있다. - 이것이 절망론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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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게 한 (前揭) 세 개의 조목을 살피고서 그러한 분석이 현재의 작단에 대한 정곡(正鵠)을 얻은 반성 자료인가를 검토하기 전에 논자가 의거하고 있는 소설의 미학에 대하여 우선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적극적 주인공이나 또는 구성력 같은 것이 사회의 문학형식인 소설의 미학적인 본질로서 전혀 부당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신의 기피라는 것도 논자와 같이 정신을 어떤 협소한 소주관으로 지칭하는 한에 있어서는 역시 소설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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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확실히 정신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소설의 독자적 표현 양식에 의한 정신의 표현이었다. 어떤 특정한 사상의 전성기(傳聲機) 적은 소주관의 제시에 의하여 정신의 표현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내적 진행의 모순을 제출하는 데 의하여 당해 사회의 정신의 표현이었다. 씨 등이 말하는 것과 같이 어떤 일(一) 작중인물의 입을 통하여 사상을 대변시키거나 일 주인공의 사상을 통하여 정신을 방송(放送)하는 것과 같은 류의 정신의 표현을 기피하는 것은 소설문학의 아니 장편소설을 통하여 리얼리즘을 관철하려는 문학적 태도에 있어 하나의 본질적인 요소이었다. 왜냐하면 시민사회의 본질의 제시는 여하한 시민적인 인물을 적극적 주인공으로 이상화하는 문학 태도에 의하여서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要)는 한 사람의 인물을 통하여 정신을 방송시키느냐 각 계층의 대표자가 각자의 생존권을 늘리고 신장시키기 위하여 맹렬한 생존경쟁을 거듭하는 풍속도를 통하여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느냐의 차이에 있다. 그러므로 논자가 전자의 입장에 서서 후자의 소설문학을 볼 때 정신의 기피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는지 모르나 이러한 경우에 반성하여야 할 것은 오히려 작가보다도 평자에게 있음을 단언하여 마지 않는다. 만약에 현재의 소설이 반성하여야 한다면 후자의 입장에 서서 비평가들이 권하는 소주관의 방송을 철저히 거부하지 못하는 그의 모순을 전체 채로 제시하는 데 그의 본령이 있었고 이것에서 멀어져서 어떤 특정한 주관을 방송하거나 이상화한 일 인물을 주인공으로 창조하려고 애쓰는 태도 속에서 진실한 정신과 이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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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 설 때에 소설이 적극적 주인공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은 소설로서 하등의 부끄러워할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다. 소설이 그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은 피치 못할 사태의 하나다. 왜냐하면 현재는 산업자본주의의 앙양기(昻揚期)도 시민사회가 진보성을 가지고 있던 시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루카치의 말은 지극히 교훈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가 시민사회의 모순을 보다 깊이 폭로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리고 시민사회의 위선에 대하여 무자비하여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적극적 주인공의 창조의 요구는 실행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중략) 적극적 주인공을 그리되라는 요구는 19세기의 상인 시민에게 있어서는 일층 변호적인 요구 즉 작가가 모순을 폭로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호도(糊塗)하고 화해하라는 요구로 되어 있었다.” 리얼리즘의 방향과 적극적 주인공의 창조의 방향과는 시민사회의 난숙기나 말기에 있어서는 화해할 수 없는 양개(兩個)의 대립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 소설이 적극적 주인공을 가지지 못한 것이 논자의 말하는 바와 같을진대 그것은 하등의 정신의 기피도 아무것도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 주인공의 문제는 성격 창조의 문제를 그것만으로써 전부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적극적 주인공 다시 말하면 성격의 ‘피라미드’와는 별개로 성격의 창조는 언제나 소설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소설은 성격을 창조하고 성격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자신의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문학형식이다. 각 계층의 대표적 성격의 창조, 하나의 성격의 생장과 발전의 전개, 이것은 장편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본질적 특권이다. 이미 부여된 성격의 상호갈등과 운명적인 충돌의 제시는 극의 본령이었다. 장편소설은 연극에서 출발한 거대한 형식인 데 자본주의의 대표적 문학형식으로서의 특질이 있었다. 성격의 발전, 사회의 계층성을 각층의 전형을 통하여서 다양적으로 제출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성격 문제에 있어서 극이 가질 수 없는 장편소설의 특권이었다. 그러므로 현 작단이 반성할 점이 있다면 적극적인 주인공의 상실에서가 아니라 각 계층의 타입 발견에 있어 불철저한 문학적 방법의 측면에서 행하여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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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장편소설이 가질 바 미학적인 본질을 이상과 같이 보아 온다면, 구성력의 문제 같은 것은 스스로 와해되고 말 것이다. 장편소설에는 그의 본질에 합당하는 구성력만이 요망되어져야 하며 주관의 전성(傳聲)이나 주인공론과 연관되는 다분히 연극에서 빌려온 것 같은 구성미에서는 하루 바삐 이탈해버려야 할 것이다. 장편소설이 가진 바 모든 문학적 본질의 제시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낡은 구성력은 소설의 미학에서 잠영(潛影)하여야 한다. 19세기 이래 20세기의 우금(于今)까지 어떠한 위대한 장편 작가도 그의 작품 가운데서 희곡과 극이 가지는 구성미를 발휘한 자는 없었다. 도박에서 짊어진 부채의 청산을 위하여 연재소설을 의식적으로 연장한 톨스토이, 생활의 자(資)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장편소설의 종말을 늘인 도스토예프스키, 채무에 쪼들려서 다량의 작품을 집필한 발자크 - 남작(濫作)을 변호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러한 거장들의 회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장편소설에는 논자 제씨들이 불모지를 경작하고 있는 우리 작가들에게 강권하여 마지않는 구성미란 것이 터럭만큼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하여 특히 우리는 고전적 장편 작가들의 삽화를 돌아보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구성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폴 부르제가 그를 미완성의 천품이라고 말하였다고 하여도 「안나 카레리나」의 작가에게 있어 그것이 어떠한 손색(遜色)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타방(他方) 이러한 폴 부르제를 공박하여 구성력의 파기는 장편소설의 미학적 본질이라고 단정한 아르베르 티보데의 존재도 기억하는 것이 비평가의 아량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우리들이 지금 친히 애독하고 있는 「티보 일가」나 「붓덴부르크 일가」등이 어떠한 구성미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전체성의 제시, 다양성의 포용, 이것과 모순되고 질곡을 느끼게 하는 여하한 구성도 장편소설의 줄거리를 둘러싸지는 못할 것이다. 소설의 본질과 정신의 유지, 이것과 상부(相副)치 않는 구성은 여하한 의미에 있어서이든 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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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술(述)한 바 절망론자는 자신의 미학에 대하여 반성함이 없이 소설의 현상에 대하여 아무러한 반성도 제출하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작단은 엄숙히 반성할 시기에 처하여 있으나 무사려한 절망론에 대한 반성의 요망도 또한 정확히 보류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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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40년 9월호, ‘조선문학의 재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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