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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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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1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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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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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라는 제목을 받아 놓고 나는 문득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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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를 잊어버린 지 벌써 몇해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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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꼽아보니 가을달이 우렷하게 밝은 밤 기러기가 나는 것을 쳐다본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기러기가 논에 내린 것을 쫓아가본 기억은 더욱 까마득하다. 기러기는 떼를 지어서 사람 인 자를 그리고 날아가다가, 한 패에서 떨어져서 길을 잃으면 산에나 논에 내리는 것인데, 갈 방향을 잡지 못해 그 기러기는 영영 땅 위를 기어다니든가, 낮게 떠서 산 위를 빙빙 돌다가 그대로 추운 겨울을 만나, 다시 하늘가에 날아보지 못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에 들었다. 논도 없고 산과 밭뿐인 내 고향에선, 중천에 높이 뜬 기러기가 가을마다 한두 차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뿐으로, 한 번도 눈익혀 보아온 적이 없었다. 그것도 어른들 틈에서 말참례를 하다가, 하늘에서 우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면 문을 차고 마당에 나 앉아서, 쳐다보았지, 일찌감치 잠이나 들어버린 때에는 기러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이튿날 웃누이한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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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기러기가 지나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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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이야기를 얻어들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일년 치고 기러기가 나는 것을 우러러보지 못한 적이 수두룩한 것이다. 그렇던 기러기니,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앞 집 차손네 게사니만 한지, 그렇지 않으면 갈갈거리고 마당귀로 몰려다니는 집오리만 한 것인지, 도시 알 수가 없었고, 가까이서 우는 소리가 얼마나 큰 지 작은 지도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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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인가 그 때에도 아마 지금처럼 백곡이 무르익은 가을이었던가 보다. 아니 지금보다도 훨씬 늦가을이어서 이제 벼나 조를 마악 베어들이게 되었을 그런 무렵이었던 것 같다. 보통학교에서 하학을 하고 돌아오다가, 우리들은 향교 솔밭 넘어서 얼마 안 되는 논에 기러기가 내렸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보았다. 오리보다는 크고, 게사니 만큼 채 크지 못한 날짐승이 논 가운데 서성대로 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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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 남쪽으로 떼를 지어 날아가다가 도중에 큰구름장을 만나든가, 준령을 넘다가 길을 잃어, 저렇게 인가 근처에 내린 것이라고 우리는 들은 풍월로 지껄여대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까이 가도 기러기는 알라가지 않으리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이 논두렁 옆에 모여 서서 재재거리는 것을 낯설게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기러기는, 우리가 그의 앞으로 두어 발자국 가까이 갈 때에, 몸을 떨치더니 끼기덕 소리를 내며 날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결코 낯설지 않았으나 달 밝은 밤에 중천에서 울려오던 기러기 소리와는 아주 듣는 품이 달랐고, 또 나래를 허우적거리며 날라가는 것도, 도무지 사람 인자로 고옵게 줄을 지어 나아가는 중천에서 보는 그런 기러기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날개가 상한 것처럼 목을 오므라치고, 공연히 커다란 나래죽지만 허우적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기러기가 아닐 게라고 한참 야단이었으나, 금방 기러기가 날라간 곳으로부터 나뭇짐을 지고 오는 박서방에게서 물어, 겨우 그것이 틀림없는 기러기라는 것을 알고 퍽 낙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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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이 언제였던가,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적어도 20년전, 아무래도 그만한 햇수는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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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부터 비교적 도시 생활을 해오면서는 기러기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또 속취(俗趣) 분분한 나는 기러기를 잊은 지도 오래였었다. 그러던 나에게 꼭 한 번 그 기러기가 한이 없이 나를 상심케 한 적이 있었다. 지금부터 7년 전 가을엔, 내가 불행히 서대문 밖 미결감 독방에 누워 있었다. 봄은 늦게 찾아오고 가을은 곧 겨울이 되는 것이 그 곳 계절이다. 그러므로 늦은 가을이 그 곳에는 벌써 초겨울이었다. 일찌감치 두꺼운 이불에 눌리어서 나는 잠이 들었다가, 몇 시나 되었는지 밤중에 눈이 떴다. 눈이 뜨면, 나는 그것이 내 집이 아닌 것을 먼저 발견하고, 마음이 선뜻하는 것을 맛본다. 희미한 전등, 컴컴한 천정, 그런데 창문이 파랗게 맑다. 그 곳으로부터 전등불을 누를 듯한 맑은 달빛이 방안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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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 누운 채 그 창문을 우렷하니 바라보며, 달은 보이지 않으나 아마도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에, 둥그런 달이 뜬 것이라고 생각해보며, 그 좁은 창문이 넓은 바다나처럼 상상해보고, 오늘이 며칠인데, 음력으론 보름이 어젠가, 내일인가, 10월이 올 텐데…… 이런 걸 두루 생각해보고 있었다. 복도를 사분사분 걸어 다니는 간수의 발자취 소리도 고요하다. 나는 다시 이룰 수 없는 잠을 청해볼 염도 안 하고, 이 정적에 함뿍 뼛속까지 젖어 보면, 어떻게 마지막에는 오히려 마음이 즐겁고 행복스러워지는 것을 가벼웁게 생각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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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나의 귀에 희미한 기러기 소리가 들여왔다. 금화산 쪽에선가 인왕산 쪽에선가 알 턱이 없다. 몇 마리나 떼를 지어 가는 것인지 알아볼 길도 없다. 기러기 소리는 바로 내가 누운 지붕 위를, 높직이 떠서 지나가는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온다. 나는 가슴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물술레처럼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격정에 가까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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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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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직히 입으로 중얼대고야 그리고 나의 목소리가 좁은 방안에서 두터운 바람벽에 가느다랗게 반향도 없이 되들려오는 것을 듣고야, 가슴속의 끓어오르던 느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기러기 소리는 다시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아무리 귀를 세우고 들어도 영 들려오지 않으리만큼 하늘가에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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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게 한숨을 짚고 가만히 가슴 위에 손을 얹어 내 가슴의 동계(動悸)를 고스란히 향락해 보면서 눈을 감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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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발연으로, 기러기를 다시 내 생활 속에서 적지않이 감격적으로 느껴보고도, 그 뒤 번잡한 세속 생활이 다시 계속되매, 그것은 나의 눈과 머리와 가슴에서 다시 떠오르지 않는 인연 없는 신화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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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러기라는 제목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기러기를 읊은 그 많은 시인과 유행가수, 그들로 하여 우리는 기러기에 어떤 염증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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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쳐다보니 오늘은 방공연습도 아닌데 탐조등이 굵은 밧줄 같을 불줄기를 하늘가에 뻗치고 있다. 고사포를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소리가 난다. 이런 밤엔 기러기가 뜰 리도 없고, 또 기러기를 생각할 수도 없다고 거듭 생각해보았다. 기러기는 인제 우리에겐 아무 인연도 없고 볼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옛날의 전설처럼 되어가고 말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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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8년 11월호, ‘만추수필’ 특집)
【원문】안(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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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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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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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