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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 정리(整理)에 대한 사의(私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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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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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조선사] 整理[정리]에 대한 私疑[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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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사람이 되어 조선사(朝鮮史)를 알아야 할 것은, 무슨 기다란 이유의 설명과 사실(事實)의 증거를 기다릴 것 없이 누구나 다 명지(明知)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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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양 유학(留學)이나 혹은 교제를 위하여 구미로부터 오는 인사를 만난즉, 혹 서양 학자들이 조선 사람보다 조선사를 더 잘 알더라는 이도 있으며, 혹은 서양 사람이 조선사를 물을 때에 대답할 말이 없어서 땀을 흘리었다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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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양자를 갈라 말하면, 후자는 곧 조선사에 아주 몽매한 사람이 외국인에게 조선사 강의를 들은 자이니, 이는 자가의 부명(父名)을 인인(隣人)에게 배우는 셈의 소화(笑話)요, 전자는 비록 비교상 후자보다 좀 낫게 조선사 1,2절을 안다 할지나, 또한 그 아는 바가 역대 제왕의 명호(名號), 을지문덕(乙支文德)ㆍ강감찬(姜邯贊) 등 위인(偉人)의 성명, 임진란(壬辰亂)ㆍ병자호란(丙子胡亂) 등 대사 같은 것뿐이다. 돌연히 서양에 학식 있는 인물을 만나 조선 민족의 유래나 조선 지리의 정치상 고금 변경 같은 것을 물으면, 이것도 불과 조금 역사적 상식 있는 자는 넉넉히 대답할 말이지만, 원래 그 아는 바가 개꼬리만밖에 못한 고로 할일없이 머리를 숙이고 도리어 그 힐문(詰問)하던 외국인에게 다시 내 나라 역사를 배우게 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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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양 학자가 아무리 사학(史學)이 풍부하다 한들 제 어찌 조선사를 알리요. 서양 근세에 동양연구에 유명한 학자들이 많아 인도를 연구한 인도학(印度學)의 학자도 있고, 중국을 연구한 중국학(中國學)의 학자도 있으나, 아직 조선을 연구한 조선학(朝鮮學)의 학자는 산출하지 못하였다. 산출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아직 포태(胞胎)할 시대도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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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 서양 학자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조선사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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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서(古書)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조선열전(朝鮮列傳) 같은 데서 고거(考據)한 것이 아니면, 근일 일본인의 문자에서 수습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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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자가 다 적확한 기록이 되느냐 하면, 중국의 민족적 특유한 병적 심리인 자존성(自存性)과 근대 일본의 악랄한 정치적 학욕(壑慾)이 일부러 조선을 모멸(侮蔑)하였다느니보다, 그 고착(錮着)한 색안경이 정확한 조선의 관찰을 불허하므로 그들의 진술한 조선은 거의 10의 8,9나 무록(誣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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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이 그 무록에 의거하여 아는 조선이 어찌 ‘참조선’이리요. 이제 조선 사람이 되어 ‘참조선’ 아닌 조선의 이야기를 듣고도 반박할 능력이 없으니, 어찌 가련치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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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某友:그 姓名[성명]은 摘出[적출]하지 않음. ── 原註[원주])가 불란서 학자 베르그송을 만나매 “조선이 고래부터 약국이 아니냐”하는 오단(誤斷) 있거늘 “조선이 이씨조 이전에는 곧 강국이라”는 반답(反答)을 주었노라고 나에게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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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의 모호가 문의 오류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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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20년 이전의 조선에는 중국사를 아는 조선 사람은 많으나, 조선사를 아는 조선 사람이 적었고, 20년 이래의 조선에는 서양사를 아는 조선 사람은 있으나, 조선사를 아는 조선 사람이 없으니, 조선의 목하의 조선 됨이 이것도 그 원인의 일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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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한 말은 마치 ‘서양 사람의 밥 먹으러 오라’는 것을 온 사회에 광고하고 다니는 셈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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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이면 마땅히 반드시 물을 것도 없이 조선사를 알아야 하겠다 할 뿐이거늘, 구태여 머나먼 서양을 끌어다가 댐은 무슨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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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망도 들을 만하다마는, 나라가 있으나 없으나 외교는 없지 못하겠다할 만치, 외교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매양 역사상 조선의 문답으로 외국인에 곤란을 당하였다는 소화(笑話)가 한둘이 아니므로 감상담을 씀에 불과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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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하여야 참조선의 조선사라 하겠느냐. 조선 민중(民衆) 전체의 진화(進化)를 서술한 것이라야 참조선의 조선사가 될지나, 그러나 민중을 표준하는 20세기에 맹아(萌芽)한 자니 이는 너무 사치한 선택이러니, 나의 말한 참조 선사는 곧 조선적 조선을 적은 조선사이거나, 위인적(偉人的) 조선을 적은 조선사이거나, 다만 조선을 주체로 하고 충실히 적은 조선사를 가리킴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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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이 아는 바, 즉 중국인과 일본인이 적은 조선사는 중국이나 일본을 주체로 하고, 그 주체를 위하여 조선을 무록한 것이 많은 고로 참조선의 조선사가 아니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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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참조선의 조선사는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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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냐. 『삼국사기』는 삼국 일대의 사(史)니, 완전한 조선사가 아닐뿐더러, 또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공구(孔丘) 『춘추(春秋)』의 존화양이 를 (尊華攘夷) 배워 왕왕 중국을 위하여 조선을 양(攘)한 것이 많아 이십사사(二十四史)의 동이열전(東夷列傳)과 다름없으니, 조선사라 할 가치가 전무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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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삼국유사(三國遺事)』냐. 『삼국유사』는 그 저자 일연(一然)이 조선의 불교(佛敎) 원류를 기술한 것이니, 이는 조선 종교사의 일부분이 될 뿐이라, 참조선을 알게 된 조선사가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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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양저 이외에 일대의 사(事)를 특기한 『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등도 있고 각대의 사를 역술(歷述)한 『동국통감(東國通鑑)』『동사강목(東史綱目)』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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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들이 혹 문체의 미악(美惡)과 고증의 정조(精粗)는 다를지언정 그 주지(主旨)는 『삼국사기』의 범위에 벗어날 것이 없고, 오직 이조 정조 때에 명유(名儒) 수산(修山) 이종휘(李鍾徽)가 참조선의 조선사를 쓸 만한 백력(魄力)이 있었던 듯하나, 그러나 그 「부여기(扶餘記)」「삼한기(三韓記)」등 한두 단편이 후인의 기망(飢望)을 충족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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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조선에 지금까지 조선사가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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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의 고국(古國)이라 칭하는 조선으로 지금까지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없느냐. 이는 외구(外寇)ㆍ내란(內亂)ㆍ학술전제(學術專制)ㆍ사회타락(社會墮落) 등이 조선 문화의 강철(强鐵)이 되어, 이미 저작한 조선사는 없이하고 차차 산출되려는 조선사는 못 나게 한 까닭이다. 그 대강을 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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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北扶餘)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수도로 자손이 세수(世守)하던 것이 진수(陳壽)와 배송지(裴松之)의 붓에도 그 문물과 은부(殷富)를 찬탄한 바인즉, 그 장치(藏置)한 도서도 적지 않을지나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의 분략(焚掠)을 만나 터무니도 없이 되니, 이에 조선사가 ‘1망’하고, 삼국은 고조선 문명의 결정시대라, 저작한 역사서류도 『유기(留記)』『신집(新集)』『서기(書記)』『고사(故事)』등 다종이 있었거늘, 고구려와 백제가 당(唐)에게 망하여, 당장 이적(李勣)은 평양에서, 소정방(蘇定方)은 부여에서, 여(麗)ㆍ제(濟) 양국의 6,7백년 문적(文蹟)을 소훼(燒毁)하니, 이제 조선사가 ‘재망’하고, 삼국의 뒤에 신라ㆍ발해(渤海) 동북 양국이 대치하였는데, 양국 문명은 혹 삼국보다 돌과(突過)하였던 듯하도다. 그러나 북국(北國)은 제1차 거란(契丹)에게 정복을 당하고, 제2차 여진(女眞)에게 이민을 당하여 인종이 거의 전멸하였으니, 문헌의 존망은 물을 여지도 없거니와 동국의 문헌은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가져갔다가 후백제가 망할 때에 모두 소화(燒火)되어, 동북 양국의 문헌이 이렇게 결과하니, 이에 조선사가 ‘3망’ 하고, 강(降)하여, 고려 중엽에 미치매 낭(郎)ㆍ불(佛)ㆍ유(儒) 삼가가 병립하여, 삼가가 각기 자가의 이상으로 조선을 개조하려 하여, 정치상뿐 아니라 언론ㆍ문장의 유도 내 것을 더 선전하려 하니, 윤인첨(尹鱗瞻)은 낭(郎)의 대표요, 묘청(妙淸)ㆍ정지상(鄭知常)은 불(佛)의 대표요, 김부식(金富軾)은 유(儒)의 대표니, 유는 곧 조선을 중국 문화의 속령(屬領)으로 보는 가장 비조선적이다. 그러나 그 경쟁한 결과 묘청은 망하고, 윤인첨은 퇴하고, 김부식의 독무대가 되어 그 이상의 표현으로 『책부원귀(册府元龜)』에서 초록(抄錄)하고, 그 반문(半文)의 사적 가치의 『삼국사기』를 지어 관력으로 민간에 분포하고 낭ㆍ불 양가의 작을 몰수하니, 이에 조선사가 ‘4망’하고, 여조 원종(元宗) 이후에 누십년 몽고 철마의 유린을 입어 문화상에 미친 악영향이 많을뿐더러 말래(末來)에 내정까지 간섭하여 송경(松京)을 제경(帝京)이라, 군주를 천자(天子)라…… 하는 등을 고쳐, 왕경이라 국왕이라 하게 하며, 심지어 팔관회악부(八關會樂府)의 ‘일인’까지 금하고 왕궁에 비장한 사책(史册)을 가져다가 조선에 자랑할 만한 사실이거나 자존한 구어가 있으면 모두 도말(塗抹) 혹 개찬(改竄)하니, 이에 조선사가 ‘5망’하고, 이조가 창업하매 북방 대륙에 다시 몽고제국 같은 큰 위력자(偉力者)가 없으나, 다만 반도 군신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웅재(雄才), 최영(崔瑩)의 혈성(血性)을 가진 이가 없고, 오직 구차 투안(偸安)으로 장책(長策)을 삼아, 득래(得來) 대문예(大門藝) 등의 유훈(遺訓)이 호국의 성경(聖經)이 된지라, 이에 독립 자존의 주의로 산출된 사책으로 몽고의 화에 행면(幸免)된 자가 있으면, 왕명으로 압수하여 경복궁 내의 내각(內閣: 奎章閣[규장각] ── 原註[원주])에 심장(深藏)하고 민간에 유행을 불허하더니,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일거(一炬)의 재가 되고 말았으니, 이에 조선사가 ‘6망’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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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니 조선에 어디 조선사가 있게 되었느냐. 있다 하면 조선사라 할 수 없는 조선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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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과거는 그렇다 하려니와 이조 519년이 또한 짧은 세월이 아니거늘, 그 사이에 어찌 한 사학자(史學者)가 못 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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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이북의 강역(疆域)을 전실(全失)하여 중고 이전의 조선지리가, 매양 어두운 밤에 무엇을 더듬는 것같아 역사적 지리가 모호함이 1인(一因)이요, 춘추(春秋)ㆍ강목(綱目)의 세력이 반도 사학계를 위압하여 그 구린내 나는 존화양이(尊華攘夷)ㆍ포충토적(褒忠討賊) 등 제목에 어긋나는 사실의 기록이나 의견의 진술은 한마디도 쓰게 못됨이 ‘2인’이요, 여조 초엽에 화랑취사(花郞取士)의 법은 피하고 한시(漢詩)ㆍ한문(漢文)으로 대신하니, 한시ㆍ한문은 만일 중국 전고(典故) 이외에 본국 전고를 쓰면 그 전아(典雅)를 상하는 글이라, 그러므로 한시ㆍ한문이 성행할수록 본국의 전고는 모르게 되며, 따라서 조선 역사는 울 너머에 던지게 됨이‘3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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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래로 유교가 전국에 풍미(風靡)하여 중국화되지 않은 조선의 조선사는 이적(夷狄)의 고사(故事)로 보아 입에 올리기를 싫어하므로 유자광(柳子光)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계획할새, 혹이 간하여 가로되, “후세의 사필(史筆)이 무섭지 않느냐” 자광이 가로되 “누가 『동국통감』을 읽나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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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를 읽는 이가 없는데 어찌 조선사를 짓는 이가 있으리요. 이것이 ‘4인’ 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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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한구암(韓久菴)ㆍ안순암(安順菴)ㆍ정다산(丁茶山)ㆍ이수산(李修山) 제선생이 나서 후인의 역사와 사상을 편책(鞭策)함은 무한 감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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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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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의 역사서류는 거의 저자만 있고 독자는 없는 것 같다. 자구가 와오(訛誤)한들 교정(校正)이 있는가? 문사(文辭)가 의오(疑誤)한들 주해(註解)가 있는가? 남들은 『산해경(山海經)』같은 무가치의 책도 주자(註者)ㆍ소자(疏者)가 10가나 20가가 되는데, 조선의 고서는 설혹 민멸(泯滅)을 면할지라도 진애(塵埃)의 상중(箱中)에 심장(深葬)하였을 뿐이니, 어찌 이다지 불행하뇨. 그러나 이 까닭으로 조선의 사학계는 미개간의 진황지(陳荒地) 같아서 노력하는 대로 수확이 증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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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지층하 누만년 전의 일편 고골(枯骨)을 얻어, 그 생물의 전체를 안출(案出)하고, 인하여 그 생물의 시대상황을 추단하여 프리 히스토리 즉 유사(有史) 이전의 사(史)를 성립하는데, 이제 누백년래 저렇듯 지리(地理)가 문란하고 사실이 오류(誤謬)하여, 두목을 찾을 수 없는 역사의 밭을, 그대로 임치하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냐. 그 연구의 방법은 각인 각자에 맡길지나 나의 의견은 대개 아래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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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人[인]ㆍ地[지]ㆍ官[관] 등 각 名詞[명사]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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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무슨 명사든지 혹 한자(漢字)의 자음으로 쓴 것도 있고 이두문(吏讀文)으로 쓴 것도 있나니, 가령 신라에 ‘비치’란 대왕(大王)을 ‘비처(毗處)’라 쓴 것은 한자의 음으로 한 글자요, ‘소지(炤智)’라 쓴 것은 이두문이니 ‘소(炤)’ 는 ‘조(照)’ 와 같으니 그 뜻의 초성을 취하고 ‘지(智)’ 는 고음(古音)의 ‘치’ 니 그 음의 전성(全聲)을 취함이며, ‘거칠우’ 란 대신을 ‘거칠부(居柒夫)’, ‘고음 우’라 쓴 것은 한자의 음이요, ‘황종(荒宗)’ 이라 쓴 것은 이두문이니 ‘황(荒)’ 에서 그 뜻을 취하고 ‘종(宗)’ 에서 그 뜻의 중성을 취함이다. 인명ㆍ지명ㆍ관명이 거의 이렇게 쓴 것이 많으니, 비록 번쇄(煩瑣한 듯하나 이들에 주력하면 비상한 문란도 정돈되며, 비상한 대사건도 발견되나니, 예를 들건대 평양(平壤)ㆍ낙랑(樂浪)ㆍ패수(浿水) 등의 위치는 동양사가의 대송안(大訟案)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먼저 그 음의(音義)부터 ‘펴라’란 일수(一水)를 삼종으로 각서(各書)한 줄을 발견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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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壤)’ 은 고음에 ‘랑’이니 평(平)과 양(壤)을 그 음의 초중성만 독하면 ‘펴라’가 되며, ‘락(樂)’ 의 뜻은 ‘풍류’니 ‘풍류’ 의 풍(風)의 초성과 ‘랑(浪)’ 음의 초중성이 또한 ‘펴라’ 가 되며, 옛날에 대수(大水)를 ‘라’ 라 하였으니, ‘패(浿)’ 는 ‘펴’ 의 음이요, ‘수(水)’ 는 ‘라’ 의 뜻이니, 패수(浿水)도 또한 ‘펴라’ 로 읽을지니, 삼자가 글자는 다르나, 독(讀)은 같은 자라 ‘펴라’ 가 수(水)의 이름이면 어찌 또 도성(都城)의 이름이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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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公主)의 ‘버드내’가 수(水)의 이름이지만, 그 수변(水邊)의 촌도 ‘버드내’ 이며, 청주(淸州)의 ‘깡치내’ 가 수의 이름이지만, 그 수변의 촌도 ‘깡치내’ 니, ‘펴라’ 의 도성은 곧 ‘펴라’의 수에 임한 고로 명칭이 된 자다. 다만 한자로 쓸 때에 분별의 편리를 위하여 ‘펴라’의 물은 패수로 쓰고, ‘펴라’ 의 성(城)은 평양(平壤) 혹은 평나(平那)라 쓰고, 그 전체 속현을 포함하여 낙랑(樂浪)이라 쓰며, 수(水)ㆍ성(城) 전체 속현이 서로 분리 못할 관계를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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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고려사』에 황해도 저탄(猪灘)을 패수(浿水)라 하였으나, 저탄의 옆에 평양의 지명이 없은즉 저탄이 패수가 될 수 없으며, 『동사강목』에 위만(衛滿) 평양을 지금 한양(漢陽)이라 하였으나, 한수(漢水)가 패수(浿水)의 칭이 없은즉 한양이 평양 되지 못할 것이며, 근래 일본학자 백조고길(白鳥庫吉) 등이 압록강의 상하부를 갈라 상부는 마자수(馬訾水)요, 하부는 위만이 건넌 패수(浿水)라 하였으니, 압록강변에 평양이 없은즉 이도 또한 위증(僞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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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오직 남ㆍ북의 양지니, 일은 개평현(蓋平縣)이니, 헌우락(蓒芋濼)이 고명 패수(浿水)니 이는 북‘펴라’ 곧 북평양이요, 이는 지금 평양이니, 대동강이 고명 패수(浿水)니 이는 남‘펴라’ 곧 남평양이다. 그 외에는 중국인이 혹 ‘펴라’의 물도 없이 낙랑(樂浪) 즉 평양을 교설(僑設)한 일이 있지만 조선에는 없는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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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왈, 근일 독사계(讀史界)에 마한(馬韓)의 마(馬)가 머리의 뜻이라는 등, 고구려의 ‘구려’가 뱀〔蛇〕의 뜻이라는 등, 석혁산(錫赫山)이 동경산(東京山)의 뜻이라는 등 얼토당토않은 괴설이 백출하는데, 이제 그대의 소위가 더욱 이들의 폐습을 장려함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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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단(武斷)을 피하고 각 방면의 증거를 구하므로 그들과 대이(大異)하니, 전술한 평양ㆍ낙랑ㆍ패수 삼자의 ‘펴라’ 된 발견도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다. 이를 약서(略敍)하자면
 
45
① 평양립(平壤笠)을 ‘펴라이’라 하니, 아마 평양의 본음이 ‘펴라’인가 하는 가정을 얻으매, 패수와 낙랑도 또한 ‘펴라’의 별역(別譯)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46
② 역대 이래의 지리서를 읽으매, 량(良)ㆍ양(壤)ㆍ나(那)ㆍ라(羅)ㆍ야(邪)ㆍ야(耶)ㆍ노(奴)ㆍ루(婁) 등은 매양 동음(同音)으로 쓴 가슬라(迦瑟那)를 가서량(迦西良)ㆍ가슬량(迦瑟壤)ㆍ가슬라(迦瑟羅) 등으로, 순나(順那)ㆍ관나(灌那)를 순노(順奴)ㆍ순루(順婁), 관노(灌奴)ㆍ관루(灌婁) 등으로, 가야(加耶)를 가라(加羅)ㆍ구야(狗邪)로, 안라(安羅)를 안야(安邪)로 쓴 것 같은 것을 허다히 보고, 이에 낙랑(樂浪)의 ‘浪[랑]’과 평양(平壤)의 ‘壤[양]’을 이두문에는 동일히 ‘라’의 음으로 읽는 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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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삼국사기』의 국양왕(國壤王) ── 일명 국천(國川), 소나(素那) ── 일명 금천(金川)을 인하여 고어에 ‘내’를 ‘라’라 함을 발견하였었다. 다만 조선어에 ‘라’의 초발성이 없으므로 아직 단정하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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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박연암(朴燕巖)과 한대연(韓大淵)의 조선 고어에, 국(國)을 ‘라라(羅羅)’라 하였다는 말을 어느 단편 중에서 보았으나, 박ㆍ한 양 선생도 근세의 사람이라 양 선생의 말로 어찌 금어의 ‘나라’가 고어의 ‘라라’이던 것을 증명하리요.
 
49
최후에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처용가(處容歌)」로 적힌 고려 정과정(鄭瓜亭)의 시에 ‘남 ── 타인’을 ‘람’이라 쓰는 것을 보고 고어의 초성에는 ‘라’의 발음이 있으며, 금어 초성의 ‘나’가 ‘라’로부터 변한 것이 많으며, 금어의 ‘내(川)’는 고어의 ‘라’라 하여 이에 패수(浿水) 평양, 낙랑(樂浪)이 다 ‘펴라’의 역(譯)이라는 확증을 얻으니라. 이두문이 불행히 정칙(定則)이 없어, 예컨대 신라 관명의 ‘소뿔한’ 하나가, ‘각(角[각] ── 소뿔)한(干)’이라, ‘서발(舒發── 소뿔)한 (翰)’, ‘서울(舒弗── 소뿔)한(邯)’ 등의 각양 사법(寫法)이 있으니, 만일 다른 좌증(左證)이 없이 자신의 음의(音義)만 고집할진대 1자의 명사에 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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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이하] 脫落[탈락]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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