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릇 이 한국 13도 내에 시서(詩書)를 말하고 공맹(孔孟)을 받드는 유림동포 제군아.
3
한국 본조 5백년래로 국민 중 제일위에 처하였던 자가 제군이 아닌가.
4
선비는 사민(四民)의 머리며 국가의 원기(元氣)라 하여 유림의 장석(丈席)이라 일컫는 사람은 군주도 감히 부르지 못하며 재상도 감히 벗하지 못하며 세족(勢族)이 감히 교만떨지 못하며 호리(豪吏)가 감히 겨루지 못하고 온나라 인심이 미연(靡然)히 그 하풍(下風)에 떨어져 모선생(某先生)이라 말하였으며, 성균관 유생이 어깨 위에 남루한 도포를 걸치고 겨울날 차디찬 구들에 벌벌 떨고 있는 기상이 보기에 매우 딱하니, 그가 어떤 권력이 있으리요마는 권당(捲堂)하여 재(齋)를 비우고 숭례문(崇禮門:南大門[남대문])에 나오면 임금께옵서 임금 의자에서 내려앉으신다는 미담도 있으니, 이로써 조정에서 선비를 특별히 대우하는 예절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5
그러나 선비가 이같이 특별한 대우를 두려이 받음이 아니다. 또한 국가사상이 깊고 두터워 평시에는 도덕과 학문으로 임금의 계책을 도와서 보충하며, 난세에는 백의(白衣)로 종군하여 침략한 도적을 물리쳤으니, 임진왜란에도 8도 의병장이 열에 여덟아홉이 다 유림(儒林) 가운데서 나온 인물이 아닌가.
6
조정에서 유림 대우함은 저와 같고 유림이 천하에 자재함은 이와 같아 해외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 유생이라면 대단히 존경 흠모하는 바러니, 몇십년래로 유림 예우하는 풍기(風氣)도 조금 쇠하였지마는 유림도 자기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함도 크게 심하도다.
7
도학가(道學家)는 독선주의로 눈감고 가만히 앉아 있고 공령가(功令家)는 벼슬살이에 바빠 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여 마음과 정신을 썩어빠진 예설(禮說)에 다 탕진하며, 수염과 머리털은 허황한 시문(詩文)에 희어져서 그 밖에 또 시국이 대변하고 풍조가 진탕(震蕩)하되 유가 문중에서는 한꿈이 예와 같으니, 아, 이 나라에 예로부터 상류 인물로 지칭하던 유림의 사상이 이에 이르러 끝나매 이 나라의 슬픈 운명도 더 깊어졌도다.
8
성인의 도가 광대하여 육합(六合)을 포용하였으니, 무슨 이치를 탐구하지 못하며 무슨 뜻을 강구치 못하리요.
9
그러므로 공자도 노자(老子)에게 예를 물으시며 순자(荀子)에게 음악을 물으사 박학명변(博學明辨)으로 주를 삼되 도가 같지 아니한 이단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거든, 지금 새로운 학문, 새로운 학설의 옳고 그릇됨도 알지 못하고 눈을 가리고 반대하는 자가 어찌 잘못이 아니며, 또한 충군애국(忠君愛國)과 구세행도(救世行道)는 유교의 본뜻이다. 그러므로 오(吳)나라가 노(魯)나라를 침략하매 공자가 말하기를, 부모의 나라를 어찌하면 구할 것인가 하시고 자공(子貢)을 보내사 제(齊)·오(吳)를 유세하고, 겁○자(刦○者) 3백인에 공자 문하의 이름난 제자 유약(有若)이 참여하였으며, 또 천하에 도가 있으면 누가 그것을 바꾸려 하겠느냐 하시고, 제·초(楚)·노·위(衛)의 임금을 찾아가 보지 않음이 없어 광(匡) 땅에서 액을 만나고 진(陳)·채(蔡)에서 위태로움을 겪으시며 도의지심을 크게 실천함을 게으르지 않고 주유천하를 그만두지 않으셨거늘, 이들 성스러운 교훈과 자취는 일찍이 지나쳐 묻지 않고 다만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못하고,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어지러운 나라에서 살지 않는다”는 등의 구절로 몸을 깨끗이 가지고 살다 죽음을 화두(話頭)로 삼으니, 이는 선성(先聖)이 한때 필요에 따라 말한 어구요, 저것은 유문(儒門)의 만세토록 일관된 강령이거늘,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취하지 않는 것은 또한 역시 치우치고 어긋난 것이 아닌가.
10
전에 명나라의 명유(名儒) 고헌성(顧憲成) 씨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선비는 하늘의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도무지 모른 체하고 다만 강학(講學)만 한다” 고 슬피 탄식하더니, 현재 한국 선비가 불행히 이 병에 걸린 자가 많도다.
11
비록 그러나 나는 지금으로부터 닥치는 한국 부흥 여부는 오로지 유림에 있다 하노니, 대개 유림 말류(末流)의 폐단은 없지 아니하나 현재 본령이 굳세고 확실하여 심지(心志)가 안정된 자가 누구냐 하면 오직 유자뿐이며, 도덕을 존중 숭상하여 명리(名利)에 물들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면 오직 유자뿐이며, 말을 믿고 행동을 독실히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오직 유자뿐이며, 위세와 무력에 굴복하지 아니하며 부귀에 흔들리지 아니할 자가 누구냐 하면 오직 유자뿐이요, 비분강개한 선비도 유자 중에 가장 많으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사람도 유자 중에 역시 가장 많으니, 유자가 나온 연후에야 부패한 사회도 개혁할 것이며, 유자가 나온 연후에야 완미(頑迷)한 국민을 깨우칠 것이며, 유자가 나온 연후에야 문명·학문도 수입할 것이며, 유자가 나온 뒤에야 의뢰하는 창귀(倡鬼)도 꾸짖을 것이거늘, 슬프다, 참된 유자는 산림에 높이 누워 굳게 닫고 나오지 않으며, 나오더라도 시세를 잘못 이해하여 지방 소요에나 투입하고, 사회에 출현하는 자는 노몽호피(驢蒙虎皮)한 거짓 유자뿐이다.
12
금일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지방에서 횡행하는 자가 태반이나 전일 삼강록 (三綱錄)·성적도(聖蹟圖)로 협잡 무쌍하던 자이며, 금일 대동학회(大東學會) 회원으로 일본과 결탁을 힘껏 외치는 자가 태반이나 전일 엎드려 원수를 갚자는 소청(疏廳) 안에서 방장(方丈)한 의기로 원수 일본이라 큰소리로 외치던 자이니, 슬프다, 호장귀두(狐腸鬼肚에 화심(禍心)을 품고 아침에는 양(梁)나라 저녁에는 초(楚)나라에서 기산(奇算)을 띤 자가 유자의 문에 큰 수치를 잉태하는도다.
13
세상 일이 이와 같되 산림 유자는 한결같이 물러나 엎드려 있으려는가. 그렇다면 특별히 대우하던 나라 은혜도 등지며 세상을 경륜하는 성인의 도에도 거스름이다.
14
깨어나라, 유자여. 머리를 돌이키라, 유자여. 제공이 시세도 이용하며 시무(時務)도 연구하면 유림의 다행함이요 국가의 다행함이거니와 만일 이와 같이 고등 지식이 있고 상류사회 최다수 부분에 있는 유림이 이제도 깨어나지 못하면 한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은 외국인의 날뜀이 더욱 심해지고, 걸(桀)을 도와 학정(虐政)을 하는 거짓 유자가 기염이 더욱 퍼져 끝내 나라와 종족은 멸망하는 경우에 이를 것이니, 이와 같이 되면 제공들은 어느 곳에서 종교(宗敎)를 보존하려는가. 국가를 위하여 머리를 돌이킬지어다. 동포를 위하여 머리를 돌이킬지어다. 자손을 위하여 머리를 돌이킬지어다. 종교를 위하여 머리를 돌이킬지어다.
15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0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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