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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장의 음성 여하로써 나는 그날 판결을 대개 예측할 수 있었다. 변호를 많이 해온 경험에서다. 더욱이 R 재판장의 재판에는 벌써 다섯번째나 변호를 맡았었고, 나의 예측한 형기에서 벗어나본 예가 별로 없었다. 특히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긴 변론을 호감으로서 들어주는 것처럼 내게는 느끼어졌었고, 다른 심판관들의 태도도 대체로 오발로 인한 사건에 3년을 구형한 검찰관에 도전한 나의 변론에 많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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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1년? 1년은 무릴까? 1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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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기로 보아 최고 1년 반 이상은 절대로 넘어갈 리 없다고 나는 자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1년쯤으로 떨어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무기 취급에 대해서는 유달리 엄격한 P 대위가 검찰관이면서도 3년밖에 구형을 하지 않았다는 그 자체가, 비록 전우를 죽이기는 했다지마는 불가항력인 오발로 인한 과오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번 오발 사건 때는 불구자는 되었을 망정 죽기까지는 않았는데도 5년을 구형한 P 대위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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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한테는 무기가 즉 생명인데 생명인 무기를 소홀히하는 놈은 제 생명의 가치를 인정치 않는 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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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평소부터의 P 대위의 지론이었다. 국가를 수호할 군인으로서 제 생명의 가치를 인정치 않는 군인이라면 동정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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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놈들한테 무기를 맡겨두었다간 오발로 전우를 상하는 것쯤은 약과고, 적한테 빼앗길 위험성도 있거든… 그런 놈들은 보촐 세워놓으면 총대 메고 잘 놈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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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P 대위가 검찰관이란 말에 변호인인 나는 요새 말쪼로 떨었었다. 생명에는 이상이 없는 사건에도 8년을 구형한 P 대위니 오발이라고는 하지마는 피해자가 생명까지 잃었고 보니 하불하 10년이요 어쩌면 더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사건을 맡은 그 당시에는 단념하다시피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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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서 피해자와 피고는 중학 일년급부터 동창일 뿐만 아니라, 입대도 같은 날이요 가장 친한 동무였다는 것이요, 그날 부서의 단체 야유회에서 따로이 단둘이서만 노루를 쏘러 가면서도 손을 맞잡고 올라가는 것을 여럿이 다 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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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둘은 참 사이가 좋아. 바늘에 실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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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누군지가 이런 소리까지 했었다는 것이다. 피고 일조 박진학에게 또 한 가지 유리한 증인이 있었다. 야유회에서 대원들과 함께 구경도 하고 심부름도 하다가 노루잡이 간다는 바람에 뒤따라 산에 올라갔던 두 소년이다. 기실 이 사건을 피고보다도 먼저 내려와서 보고해준 것도 이 소년이었었다. 소년이라지만 한 소년은 열여덟이나 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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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보고는 피고와 피해자는 한 간통쯤 떨어져서 병진하며 산비탈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약 오백 미터 앞에 노루 두 마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노루는 이쪽으로 넘어 오는 길이었다. 막 고개를 넘어서서 이쪽에 사람이 있는 것을 오두마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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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지 피해자인지 이렇게 소리를 친 순간이었다. 피고가 무엇에 걸렸는지 나가동그라지면서 총소리가 났고 총소리와 함께 피해자도 넘어지더라는 것이다. 두 소년은 약 천 미터 떨어진 맞은편 산허리에서 마주 건너다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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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둘이 다 엎드려서 노루를 쏘는 줄만 알았어요. 총소리가 났기에 우린 노루만 보고 있었습니다. 총소리가 났는데두 노룬 고대루 한참이나 오두마니 섰더니만 넘어온 고개로 되넘어갔어요. 그래도 둘은 끌어안고만 있기에 이상해서 쫓아가 보았더니 둘 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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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희들이 뛰어갔을 때는 저 해군은 어떻게 하고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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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에 맞은 사람을 업으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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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총 맞은 해군이 뭐라고 말을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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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린지 ‘안다, 안다’그러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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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해군은 피가 묻은 손수건을 가슴에다 대고 칡으로 칭칭 동이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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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손이 와들와들 떨리기만 하고 잘 동여지지 않았어요. 두 번이나 동이다가 안 되니까 우릴 보구서 부축을 해달라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다가 손짓을 보고서야 우린 눈치를 채고 총 맞은 사람의 양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저이 등에다 업혀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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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총 맞은 사람은 의식, 정신이 있어 보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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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잘 모르겠어요. 허지만 정신이 있긴 했나봐요. 그랬기에 자꾸 내려놓으라구 그랬지요. ‘내려, 내려’죽은 이가 자꾸 그러더군요. 그러니까 저 해군이, ‘가만있게, 참아, 참아.’이렇게 달래면서 비탈을 내려갔어요. 우리는 무서워서 따라가지도 못하구 이만큼서 보구만 있자니까, 업은 사람을 내려놓더니만 얼굴을 들여다보고 자꾸 소릴 지르고 있었어요. 네? 아마 총 맞은 사람의 이름인가봐요. 암만 불러도 대답이 없는지 양쪽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또 부르고 있더군요. 그래도 대답이 없으니까 죽은 사람의 가슴에다 얼굴을 묻고서 이름을 부르면서 울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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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년의 증언은 완전히 합치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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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사건을 들은 그 누구나가 일단은 오발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의심도 했고, 그래서 물이 못 나게 추궁도 해보았던 것이고, 피고도 극력 부인했지만 의심을 해볼 근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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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사관에서는 피고를 계획적인 살인자로 간주해놓고서, 이를 입증해줄 만한 자료를 구하느라고 무려 십여 명의 동료가 불리어졌었다. 이들의 증언은 그 전부가 피고는 피해자를 살해할 아무런 감정도 없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증언은 되레 둘 사이의 눈물겨운 우정을 인정하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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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한 사람만, 즉 함정에 같이 타고 있던 일이 있는 유 병조장이 피고에게 매우 불리한 발언을 했었다. 한번 피고가 후갑판 포대 뒤에서 피해자 멱살을 잡고서 구타하는 장면을 본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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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봄이라고 기억됩니다. 아니, 이른 여름이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아서 갑판으로 올라갔더니만, 어디선지 은근히 위협하는 소리가 들려서 가만히 그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피고가 피해자를 포대 뒤에다 몰아넣고 멱살을 잡고는 주먹으로 뺨을 치고 있었습니다. 전부터 둘은 사이가 퍽 좋은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 가만히 엿듣고 있었습니다. 정말 몹시 구타를 한다면 제지시킬 생각으로 몸을 숨기고 엿듣자니까. 피고의 말이 ― 말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주 없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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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주 없을 줄 알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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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을 줄 알라는 데 억양을 주면서 검찰관은 또 한번 반복을 시켰던 것이다. 없다는 말은 죽는다는 언어로 씌어지고 있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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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유 병조장의 최후의 증언은 검찰측을 완전히 농락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두세 번을 얻어맞은 피해자는 갑자기 피고의 가슴에다 얼굴을 파묻고는 “고맙다! 고맙다.”하면서 흑흑 느끼어 울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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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피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하자 피고도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 또한 “고맙다!”고 하며 서로 얼싸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얼마를 보고 있는 동안에 저 자신도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물론 그때 내용을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으로 보아 무엇인가 피해자가 잘못한 것을 피고가 깨우쳐준 것 같습니다. 매를 맞고도 얼싸안고 감사를 하는 그 마음씨, 매를 때려가면서까지 동료를 올바르게 권고하는 우정 ― 둘의 우정 앞에 저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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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후에도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를 몰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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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고는 싶었지만 둘의 아름다운 우정에 파고드는 것 같아서, 그저 아름다운 우정이라는 것으로 만족하고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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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고에게 살의가 있었다고 인정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수사관도 검찰관도 의혹을 풀었고, 피고에 대한 죄명은 ‘오발로 인한 피살 사건’으로 낙착을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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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이렇게 홱 뒤집힐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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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관들이 심의를 하고 있는 동안이란 변호인한테도 피고 못지않게 초조한 시간이다. 일종의 승벽도 있었지만 오직 자기에게 일생을 맡기고 있는 피고의 신뢰가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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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사람이 실오라기라도 붙잡으려듯, 오직 아무 권한도 없는 변호인한테 전생명을 내어걸고 무한한 신뢰와 애원으로 가득찬 피고의 눈을 쳐다보고 앉아 있는 순간이란 실로 괴롭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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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만은 실로 마음이 평탄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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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심의가 끝나고 법관들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찰관의 호령으로 일동은 일어나서 부동 자세로 그들을 맞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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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을 위시한 법관의 착석이 끝나기를 기다리어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앉고 재판의 속개 선언에 뒤이어 판정문을 낭독하기 위해서 재판장이 일어섰다. 재판장은 법의 존엄성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될수록 엄숙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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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이 이렇게 지시를 하자. 피고는 다소곳이 재판장 앞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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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은 소학생이 상장을 받듯이 팔을 쭉 뻗쳐 판정문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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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님! 잠깐만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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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이 제지를 시켰고, 재판장도 못 들은 체 다시 읽기를 시작하려는데 피고는 실로 중대한 발언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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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재판장님! 저를 다시 심의해주십시오. 이번 사건은 오발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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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는 갑자기 소란해졌다. 검찰관이 딱 부릅뜬 눈을 돌리자 물 친 듯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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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판정문을 든 채였다. 팔도 뻗친 채다. 그의 눈은 애원하는 피고의 눈을 꾹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속에서 진실을 찾자 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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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정신 상태를 정상적이라고 피고 자신 믿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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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정도가 아니라 제 일생을 통해서 이 순간만큼 피고의 정신 상태가 건실한 순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완전한 정신 상태로써 전우박 하사관을 치사케한 것은 오발에 의한 과오가 아니라, 피고의 자의적인 살인에서 행해진 범죄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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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이 고백을 들은 나는 피고의 정신 상태는 역시 정상적이 아니라고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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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피고는 자기를 위해서 변호해 준 은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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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께는 죄송합니다마는 피고의 정신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재판장님을 위시한 심판관님들께선 피고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죄에 해당한 아니 정당한 벌을 받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저에게는 무죄로 석방해주시는 것보다도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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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피고한테 묻는데 피고의 정신 상태에 조그마한 이상도 없다고 피고 자신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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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이라면 피고의 형은 최소 무기요, 응당 사형이 될 것을 피고도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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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속이고 일평생 괴롬을 받는 것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수월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발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시고서 무죄로 석방해주신다면 그것은 달게 받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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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이 말에는 재판장도 놀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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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도 피고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는 어찌 할 수 없는 눈치다. 그는 법관들을 좌우로 둘러본다. 대부분이 재심의를 하자는 의견 같다. 그는 법무사와 상의를 했다. 검찰관도 불리어갔다. 결론을 얻었는지 재판장이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오더니 이렇게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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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본 사건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이를 연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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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찰관과 협의하고 군의관으로 하여금 피고의 정신 상태를 감정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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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데 거의 확신이 있었다. 너무 지루한 영창 생활과 거듭되는 심문에 못견디어 정신에 이상이 생겼느니라고 단정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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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군의관의 보고는 피고의 정신 상태는 절대로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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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못해 나는 피고를 집에까지 데리고 왔다. 위법이요 전례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의 심정을 타진해보겠다는 나의 특청을 법무와 헌병 책임자는 허락을 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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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는 불도 피우고 고기에 술도 한 병 마련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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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나의 하는 일에 일종 경계를 하는 눈치였지만 차차 이야기하는 동안에 우리들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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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별로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나의 술잔도 받았다. 나이 스물일곱이나 되면서도 잔을 드는 양이 몹시 어색하다. 담배만은 즐기는지 익숙도 했고 많이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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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위님 보시기엔 제가 퍽 우스운 놈으로 생각되실 겝니다. 저도 그걸 잘 압니다. 알 뿐만 아니라 저 자신 저란 놈을 미친놈이라고 생각됩니다. 생각하면 우스운 놈이지요. 세상 사람이 다 제 죄를 가볍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원칙이겠는데, 가볍게는 커녕 일년이나 이태쯤밖에 안 되게 된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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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뚝 끊었다. 그러더니 중대한 그 무슨 사무 처리하듯이 전어의 가시를 발려서 한입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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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님 말씀대로 가벼워야 무기요. 십상 팔구는 사형이 될지도 모를 큰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다면 누구나 정신 감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허지만 아닙니다. 저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완전합니다. 어떻습니까? 박 대위님, 아직도 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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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술을 자작 반 컵이나 따라서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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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위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신다면 모든 것을 말씀하겠습니다.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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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그의 고백이 진실한 것인데 나는 그의 총살형에 입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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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라리 그가 미쳐 있기를 빌었다. 그러나 슬픈 일은 나는 그의 언행에서 그가 미친 징후를 무엇 하나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또 차라리 그가 입을 봉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짓궂게도 그것을 고백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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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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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와의 사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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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와 피해자는 중학 1년부터 같은 반이었다. 둘은 친했었다. 친했었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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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을 하고 내 얼굴빛을 한 번 살피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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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로 말한다면 그는 교활한 성격이었지요.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고 인색하고, 옛날에 ‘네 주머니 돈이 내 쌈지 돈이요 내 주머니 돈이 내 쌈지돈’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그런 아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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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근한 예를 든다면 음식을 같이들 먹을 때도 괭이처럼 맛난 것만 골라서는 먹어칩니다. 남이야 먹든 못 먹든. 한동안 셋이서 같은 하숙방에 있던 일이 있었는데 누가 좀 늦게 들어오면 간장만 남겨놓습니다. 셋이 같이 먹을 때도 그래요. 밥상이 들어오면 눈이 빨개서 맛나는 것만 싹 먹어칩니다. 언제 이쪽 젓가락이 갈 새가 없어요. 간식을 해도 자는 척하구서는 이불 속에서 오물오물 혼자만 먹습니다. 그런 아이였으니 남의 것을 소중히 알 리가 없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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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차 공동물이나 국가 재산이나, 자랑이 아니라 전 안 그랬습니다. 그가 늦어질 땐 우린 될수록 맛있는 걸 남겨두었다 먹였고. 분량이 적을 땐 우리가 배를 곯으면 곯았지, 절 위해서 남겨두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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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모르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허나 이상한 건 이렇게 염치없이 구는데도 전 역시 그 녀석이 좋았어요. 한태란 동무는 두 번이나 그의 볼을 후려친 일도 있었어요. 저도 욕도 하고 싸움도 하면서도 하루만 못 보아도 그가 살뜰히도 보고 싶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군요. 왜 발길로 탁 차버리지 못했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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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안 때부터 만 일년 후에 피고와 피해자는 갈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의적이 아니라 그럴 계제였다고 한다. 피해자는 학비 관계로 청주 중학으로 전학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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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만 오 년 동안 그들은 한 번 서신 왕래도 없이 서로 잊고 말았었다. 그들은 서로 그런 동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었다. “만 사 년 됩니다. 그 해 전 생각한 바 있어서 해군 사관 학교에 지원을 했었습니다. 마침 외육촌이 진해에 있기에 진해에서 시험을 치기로 했었어요. 외육촌이 고급 장교시고 또 교관으로 계셨습니다. 실력도 부치는 터라 외육촌한테 던정을 좀 대려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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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러 인천으로 왔었어요. 배를 알아보니 내일 아침 아홉시에 떠난대서 여관을 찾아들어가다가 대문간에서 그와 딱 마주쳤었어요! ‘아니, 장수봉! 너 웬일야? 참 오래간만이로구나!’‘정말’우리는 얼싸안듯이 반가웠습니다. 정말 반가웠어요! 전에 그 얄밉던 생각도 싹 잊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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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제가 물으니까 장수봉은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33
참 뜻밖이었습니다! 수봉이도 저와 같이 해사에 시험을 치러 가는 길이요, 배가 내일 떠난다 해서 저녁을 먹고 구경을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박 대위님! 저는 눈물이 나게 반가웠습니다. 그래 영화를 같이 보고 밤참도 같이 사먹었어요. 불고기 집이었습니다. 그날 불고기 집에서부텁니다. 수봉이 같은 인간이 그대로 장성한다면 원균이 같은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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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말을 듣고 나니 나도 그의 그때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 그는 피해자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순간이었다면 나란 인간도 피고만큼 고결한 사람이었다면,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불고기가 들어오기 전에 변소에를 갔다 왔더니만 벌써 삼분의 이는 싹 먹어치웠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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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참 맛있다, 야’이런 소리를 해가며 오물오물 고기를 먹는 그 입을 본 순간, 전 사 년 전의 그 밉살스럽던 생각이 왈칵 되살아오고 말았어요! 그래도 전 참았습니다. 참고서 겨우 고기 두 점에 국밥을 먹고 여관으로 돌아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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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이었어요. 전 수봉이한테 정말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하소연을 했었어요. ‘오늘 이 순간부터 너와 나는 한 배를 탄 사람이다. 네가 탄 배가 내가 탄 배니, 너만 살고 나만 죽어지지도 않고, 너는 죽는데 나만이 살 수도 없지 않으냐, 너와 나는 벌써 한 몸뚱이나 진배없다. 네가 왼손이라면 나는 오른손이요, 네가 왼 눈이라면 나는 바른쪽 눈이다. 이 순간부터 너도 죽고 나도 죽었다. 너와 내가 죽어서 우리가 되었다. 우리 ─ 그렇다, 이것이 너의 이름이요, 또 나의 이름이다.… 너와 나는 ─ 아니 우리는 생사를 같이할 전우다. 대한민국의 해군이다.’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울었어요. 제 손을 아스러져라고 쥔 채 저도 그와 함께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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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또 말했습니다. ‘수봉이! 우리는 충무고 이순신 장군은 못 될 값에 죽어도 원균이만은 되지 말자 .’기실 제가 해군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우연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결한 인격, 불타는 애국심, 지(智)와 용(勇)과 덕, 청년기에 든 저의 감격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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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사를 뒤지어 장군에 관한 책이면 다 사서 보았습니다. 특히 감명이 깊었던 것은 춘원 선생의 소설「이순신」이었어요.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이 되고 그 갖은 악형을 받으시면서도 단 한 마디 원균의 죄를 입밖에 내지 않으시는 그 위대함, 더구나 수사로서 일 졸병이 되시어서 백의 종군을 하시는 장면에서는 흑흑 느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인가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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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생각했습니다. 이런 어른의 뒤를 따르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갈 길이라고. 저는 결심하고야 말았어요. 나도 해군이 되자!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유덕을 배우리라! 이 장군에 대한 존경과 감격 대신에 간신이요 배신자요 이기주의의 화신이다시피 한 원균에게 대한 분노와 저주는 컸었습니다. 원씨란 성만 보아도 전 치가 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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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 딱 마주친 수봉이의 행동에서 전 원균을 보았던 것입니다. 원균의 개랑개랑한 음성과 웃을 때의 옥니를 수봉이한테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싹 먹어치운 불고기 접시가 눈앞에 핑핑 돌고, 그 접시 속에서 삼백육십 년 후인 오늘날 다시 태어난 원균 그대로의 수봉이를 보았던 것입니다. ‘죽일 놈’전 이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수봉이 같은 놈은 장성할수록 원균이를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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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박진학 일조의 흥분을 식히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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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생선 토막을 한입 털어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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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이, 아니 원균에 대한 증오는 이튿날 밤에 가서 최고조에 달하고 말았어요. 이튿날 아침에 우린 밸 탔습니다. 그러나 떠난 것은 저녁때였어요. 왼종일 굶던 끝에 자정 가까워서야 겨우 주먹밥 한 덩이씩 소금과 함께 배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전 깜박 잠이 들었어요. 잠이 깨인 때는 모두들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내 밥은?’전 수봉이한테 물었습니다. 수봉이는 손가락에 붙었던 밥풀을 빨아먹으며 태연스럽게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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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천치야. 네 몫을 받았더라면 나라도 먹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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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와 피해자 사이에는 이러한 알력이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피고 박진학은 피해자 수봉에게서 원균을 발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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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육십 년간 민족의 혈관 속에서 가증하게도 교묘히 스미어 흘러내려오며 민족을 좀먹고, 급기야는 민족과 강토를 팔아먹게까지 한 원균의 더러운 피를 피고는 피해자의 살빛에서 보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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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다 해사에는 불합격이 되던 날, 피해자 수봉이는 살짝 술 두 병을 사들고서 피고의 외육촌인 교관을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수봉이가 옆에만 있다면 대매에 때려죽이고 싶기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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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놈! 저런 놈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피는 그 전부가 원균의 피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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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행히 며칠을 기다리어 신병 훈련소에 입대가 되어 석 달 교육도 같이 받았다. 이 석 달 동안에 피고는 피해자를 저주하지 않을 수 없는 수 많은 원균적인 사건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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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놈은 기회만 있으면 죽여 씨를 없애야 한다고 제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 한 것은 6·25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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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희들은 진동에 출동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똑같은 장소에 같은 근무였어요. 우리는 오십 미터 간격을 두고 감시 근무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참호를 파고 몸을 숨기었습니다. 그는 저의 오른편이었고 박숭수 하사관이 저의 왼쪽 참호였습니다. 삼 번 교대를 하러 왔을 때입니다. 놈들의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박 병조가 외마디소리를 치고 쓰러졌습니다. 박 병조 참호 앞에 쌓아두었던 뗏장이 반은 없어졌어요. 떼를 떼자면 오리나 가야 했습니다. 그 떼를 그의 참호에서 발견했을 때의 격분은 이가 딱딱 마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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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병조는 급기야 불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배신행위는 거의 상투적이었습니다. 이루 다 들 수는 없습니다만, 남의 관품으로 살짝 점검을 받고는 죄없는 동료가 처벌을 받아도 싹 모른 척하기가 일쑤요, 이쪽 말을 저쪽에 가서 하고, 저쪽 말을 이쪽에 해서 이간붙이기가 일입니다. 잘못은 싹 동료한테 밀고 저만 잘했노라고 공로를 탐내던 것이 다 제가 소설에서 본 원균 그대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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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까지는 그래도 좋았어요. 제 비위에 틀리는 사람이면 중대한 서류나 물건 같은 것을 없애어 꼭 처벌을 받게 합니다. 저만은 그걸 알았어요 그러나 차마 폭로를 못했었어요. 그를 살짝 불러다가 문책을 하면 눈물을 쭉쭉 흘리면서 사과를 합니다. 마치 패전을 하고 순신장군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던 원균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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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전 그의 얼굴만 보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면 그는 또 웁니다. 울면서 그런 버릇을 고치겠다고 또 맹세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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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맹세도 불과 며칠을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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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장성하면 원균이가 될 게다. 제 공명을 위해서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급기야는 국가와 민족을 왜장한테 팔아먹은 원균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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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머릿속에는 늘 이런 생각이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충무공의 정신에 살고 충무공의 정신에 죽자는 해군으로서의 수련을 쌓아갈수록, 피고의 눈앞에서 민족의 적이요, 국가의 암인 원균으로서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피해자를 바라보고만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옳음으로서 살려는 그에게는 벌써 커다란 고통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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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놈을 죽이는 것도 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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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머릿속에는 늘 이런 생각이 떠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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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이렇게 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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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미끄러져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넘어지는 체하고 피해자를 쏘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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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습니다. 넘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노루가 퍼뜻 보이어 앞만 바라보느라고 아래를 못 봤더니 솔부리에 걸려 넘어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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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오발은 분명한 오발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만히 생각할 때 그때 넘어진 것은 물론 본의도 아니요, 저 자신 넘어진 후에야 알았고, 총이 쏘아진 것도 전혀 우연한 과오였지만 저런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나 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고 보니, 물론 그 순간의 제게는 그런 의사가 없었다 하더라고 그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한 잠재의식이 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는지도 모른다고 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가끔 잠재의식이 . 무의식중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의 저는 물론 그를 죽일 살의는 없었지만, 오래 두고서 기른 잠재의식이 저 자신도 모르게 행동을 취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 순간엔 의식도 계획도 없었다고 해서 긴 잠재의식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은 양심상 견딜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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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 본다면 오발에 대한 책임만으로 벌을 받는 것이 가벼울 것입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제딴에는 남의 허물까지를 당신이 쓰신 충무공을 본받겠다고 자처한 저로서는 이 비겁한 행동을 묵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이나 저는 충무공을 꿈에 뵈었습니다. 공께서는 두 번 다 저를 몹시 꾸지람하셨습니다. 비겁한 놈이라고 크게 노하십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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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이상 더 괴로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 받는 하루의 영창생활보다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종신 징역이 훨씬 더 가벼울 것입니다. 전 더는 이 괴로운 순간과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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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일조 박진학은 두손을 얼굴로 가져가더니만 온 얼굴을 폭 가리고서 느끼어버리는 것이었다. 참느라고 애를 쓰나 자꾸만 울어지는 그런 울음이다. 억지로 참던 울음소리는 막혔던 물처럼 탁 터지고야 만다. 그는 벌써 아무에게도 꺼리지 않았다. 그의 울음은 엉엉 울어대는 사나이의 울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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