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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밟게 되는데 이 자국을 밟게 된 연유가 있다.
5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시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 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도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 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6
이 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 금납구(禁納區)였다.
7
만일 강심장의 여인이 있어 불의의 침입이 있다면 우리들의 호기심을 저윽이 자아내었고 방마다 새로운 화제가 생기곤 하였다.
8
이렇듯 수도생활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하였던 것이다.
9
사건이란 언제나 큰 데서 동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작은 데서 더 많인 발작하는 것이다.
11
동숙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 시간 남짓한 문안 들어가는 차시간까지를 낭비하기 위하여 나의 친구를 찾아 들어와서 하는 대화였다.
13
"조용한 게 공부하기 자키나 좋잖은가?"
14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분줄 아나?
15
전차간에서 내다볼 수있는 광경, 정거장에서 맛볼 수 있는 광경, 다시 기차 속에서 대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생활 아닌 것이 없거든, 생활 때문에 싸우는 이 분위기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겠는가.
16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인생이 어더렇니 사회가 어더렇니 하는 것은 16세기에서나 찾아볼 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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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문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18
한테 하는 권고는 아니었으나 이 말에 귀틈이 뚫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19
비단 여기만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 한낱 오락이요, 오락이매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으매 이 또한 죽은 공부가 아니랴.
20
공부도 생활화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내심으로 단정해 버렸다.
21
그 뒤 매일같이 이 자국을 밟게 된 것이다.
22
나만 일찍이 아침거리의 새로운 감촉을 맛볼 줄만 알았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의 발자욱에 포도(鋪道)는 어수선할 대로 어수선했고 정류장에 머물 때마다 이 많은 무리를 죄다 꾸역꾸역 자꾸 박아싣는데 늙으니, 젊은이,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꾸러미를 안 든 사람은 없다.
23
이것이 그들 생활의 꾸러미요, 동시에 권태의 꾸러민지도 모르겠다.
24
이 꾸러미를 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뜯어보기로 한다.
25
늙은이 얼굴이란 너무 오래 세파에 찌들어서 문제도 안 되겠거니와 그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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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면 열 다 우수(憂愁) 그것이오, 백이면 백 다 비참 그것이다.
28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 창백하다.
29
혹시 숙제를 못해서 선생한테 꾸지람을 들을 것이 걱정인지 풀이 죽어 쭈그러뜨린 것이 활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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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 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모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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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써 요사하였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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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로 하고 단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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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감벽 위에 펼친 하늘을 쳐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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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하늘과 성벽 경계선을 따라 달리는 것인데 이 성벽이란 현대로서 팜플라지한 옛 금성(禁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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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으며 어떤 일이 행하여지고 있는지 성 밖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알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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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만 한 가락 희망은 이 성벽이 끊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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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언제나 크게 가질 것이 못되어서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관(參考館), 체신국, 신문사, 소방조,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 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 놈을 눈 내린 겨울에 빈 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름에 올리어 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高等)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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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즈음 아이스케이크 간판 신세를 면치 아니치 못할 자 얼마나 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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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케이크 간판은 정열에 불타는 담서가 진정코 아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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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느라면 한 가지 거리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률이란 거추장스러운 의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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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녀석이 눈을 딱 감고 버티고 앉아 있다고 손가랄질 하는 것 같아야 번쩍 눈을 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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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가차이 자선할 대상이 없음에 자리를 잃지 않겠다는 심정보다 오히려 아니꼽게 본 사람이 없으리란 데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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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단성 있는 동무의 주장이지만 전차에서 만난 사람은 원수요, 기차에서 만난 사람은 지기(知己)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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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어디서 내리시나요?"쯤의 인사는 주고 바을 법한데 일언반구 없이 뚱- 한 꼴들이 작히나 큰 원수를 맺고 지나는 사이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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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상냥한 사람이 있어 요만쯤의 예의를 밟는다고 할 것 같으면 전차 속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이상자로 대접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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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을 서로 바꾸고 고향 이야기, 행방(行方)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주고받고 심지어 남의 여로를 자기의 여로인 것처럼 걱정하고 이 얼마나 다정한 인생행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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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있어 "자네 매일같이 남대문을 두 번씩 지날 터인데 그래 늘 보곤 하는가"라는 어리석은 듯한 멘탈테스트를 낸다면 나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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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본달 것 같으면 늘이 아니라 이 자국을 밟은 이래 그 모습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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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나의 생활에 긴한 일이 아니매 당연한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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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수가 너무 잦으면 모든 것이 피상적이 되어 버리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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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는 관련이 먼 이야기 같으나 무관한 시간을 까기 위하여 한 마디 하면서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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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서는 내노라고 하는 양반이었던 모양인데 처음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배운 서울 말씨를 섣불리 써가며 서울 거리를 손으로 형용하고 말로써 떠벌여 옮겨 놓더란데, 정류장에 턱 내리니 앞에 고색이 창연한 남대문이 반기는 듯 가로 막혀 있고, 덩구숭의 옛 궁전이 회포를 자아냈고, 화신 승강기는 머리가 힝- 했고, 본정엔 전등이 낮처럼 밝은데 사람이 물밀듯 밀리고 전차란 놈이 윙윙 소리를 지르며 지르며 연달아 달리고 -- 서울이 자기 하나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우쭐했는데 이것쯤은 있을 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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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南字), 대자(大字), 문자(門字) 하나하나 살아서 막 꾸믈거리는 것 같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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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로나 서울 자랑하려는 이 양반으로서는 가당한 대답일 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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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에게 가현동 고개 막바지에, -아니 치벽한 데 말고,- 가차이 종로 뒷골목에 무엇이 있던가를 물었더면 얼마나 당황해 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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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요,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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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순간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묻는 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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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휴머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해 낸다는 재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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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픈 데를 나로서는 측량한다는 수가 없는 까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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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 횟수가 잦은 데와 양이 많은 데는 너무나 쉽게 피상적이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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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 자기 하나 간수하기에 분주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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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한 차도 아니건만 공연히 가슴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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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차는 느릿느릿 가다 숨차면 가정거장(假停車場)에서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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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웬 여자들인지 주룽주룽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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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마다 꾸러미를 안았는데 예의 그 꾸러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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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방년된 아가씨들인데 몸매로 보아하니 공장으로 가는 직공들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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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들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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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망스럽게 유리창을 통하여 미인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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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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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찌개논 듯이 한다든가 이마를 좁다랗게 한다든가 코를 말코로 만든다든가 턱을 조개 턱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악희(惡戱)를 유리창이 때때로 감행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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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을 내리는 자에게는 별반 이해관계가 없다손 치더라도 판단을 받는 당자에게 오려던 행운이 도망갈는지를 누가 보장할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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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아무뤼 투명한 꺼풀일지라도 깨끗이 베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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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터널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데 거리 한 가운데 지하철도 아닌 터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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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널이란 인류 역사의암흑시대요, 인생행로의 고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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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미구에 우리에게 광명의 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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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을 벗어났을 때 요즈음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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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첫차에 나갔을 때에도 일하고, 저녁 늦차에 들어올 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시작하여 언제 그치는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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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육중한 트럭을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한 데 있어 트럭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新京行)이니 북경행이니 남경행이니 라고 써서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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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고력(苦力)에 위안이 안 된다고 누가 주장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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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곧 종시(終始)를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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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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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도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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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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