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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海印寺)의 풍광(風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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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8
나혜석
나혜석이 1938년 해인사를 둘러본 기행 작품으로 해인사의 시초와 역사적 배경, 불교적 심상과 불가의 경내와 일상생활을 둘러보고 체험한 것을 보고 적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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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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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친우의 권유로 봄에 와서 한 여름을 해인사에서 나게 되었다. 경부선을 타고 대구에서 내려 역전에 있는 자동차부에서 해인사행 자동차를 타면 고령(高靈), 야로(冶爐) 등지를 거쳐 약 3시간 만에 홍류동(紅流洞) 동구에서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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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 입구 우편 석벽(石壁)에는 우리 사상에 유명한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홍류동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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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미친 듯이 첩첩이 쌓인 바위를 치며 산을 울리어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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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는 말을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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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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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길로 산을 완전히 에워싸게 했네 故敎流水盡聲山[고교류수진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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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새겨 있고, 좌편 계변(溪邊)에는 고운선생의 농산정(聾山亭)이 있고, 그 앞에는 ‘고운 선생 둔세지(孤雲先生遯世地)’라 각조(刻彫)한 석비가 있으며, 좌편 높이 고운선생의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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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은 실로 진외(塵外)의 선경(仙境)이다. 바위와 돌, 돌과 바위의 사이와 사이로 유유히 흘러내려 농산정 앞 높은 석대 위에 떨어지는 웅장한 물소리, 무성한 나무, 흉금을 서늘케 하고 머리를 가볍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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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온 짐을 지우고 그 뒤를 따라 지팡이를 동무 삼아 5리나 되는 계곡을 끼고 어치렁어치렁 걸어가니 연일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개이매 봄 하늘은 맑다 뿐이랴. 가지마다 푸릇푸릇 싹이 돋고 풀냄새가 향긋이 뿜어 들어온다. 산회수영수영산회(山回水縈水縈山回)이다. 물구비마다 수려(水麗) 아닌 곳이 없고 산 모롱이마다 산명(山明) 아닌 곳이 없다. 산이 진(盡)하였는가 하면 다시 산이요, 수(水)가 궁(窮)하였는가 하면 다시 물이다. 물이 많을수록 싫지 않으며 산모롱이가 거듭할수록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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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옥류정에 이르렀다. 이 정자는 환경(幻鏡) 법사가 건립한 것이라 한다. 정각(亭閣) 내외에는 내외국 명사의 현판이 다수 걸렸다. 거기 올라 잠깐 쉰 다음에 다시 나와 사자문(獅子門)을 거쳐 삼림 사이로 들어서 꼬부랑꼬부랑한 길을 따라 숨을 몰아 쉬어 언덕을 올라 서니 산 중에 제일 보기 싫은 함석지붕 하나가 나타난다 . 이것이 해인사 지정 여관 홍도여관이다. 방 하나를 청구하여 행장을 풀고 나서 여관 1, 2층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니 도회지에서도 볼 수 없을 만치 설비가 되어 있으며 만원 될 때는 2, 3백씩 수용하고 있다 한다. 반찬이며 그 외 대우가 놀라웠다. 피곤한 일야(一夜)를 지내고 아침 산책으로 해인사를 찾아갔다. 홍랑문을 들어서니 괴걸(魁傑)한 고(古) 범궁(梵宮)이 수풀 간에 은영(隱映)하고 있다. 이것이 해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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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불교계에 4대 명사(名寺)가 있으니 영취산(靈鷲山) 질찰(佚刹) 통도사(通度寺), 조계산(曹溪山) 승찰(僧刹) 송광사(松廣寺), 금정산(金井山) 선찰(禪刹) 범어사(梵魚寺), 가야산(伽倻山) 법찰(法刹) 해인사가 시(是)이다. 그 중 해인사는 명찰일 뿐 아니라 법지종가(法之宗家)요,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중보(重寶)인 고려장경판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대장경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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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창건(刱建)된 유래의 전설은 이러하다. 서역 인도 고승 제납(提納) 박행존자(博幸尊者) 지공(指空) 선사께서 당토(唐土 : 당나라)에서 불법을 선포하여 교화 중생하시었는데, 이 지공 선사가 일찍 조선 전국을 편답(徧踏 : 편력)강산 하실 때 가야산 해인사지(址)를 지나시다가 장차 이곳에 범찰(梵刹)이 건립되리니 해인사로 명명되어 법계에 대복 전지(大福田地)가 될 것이라 하시고 해인사 창건 시 사용키 위하여 철와(鐵瓦) 3천 개를 주조하여 못에다 매치(埋置)하여 두었다 한다. 그 후 즉, 신라 제40대 애장왕 당시, 거금 1200년 전에 신라 고승 화엄종주 의상(義湘)조사의 법(法) 증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양 대사가 당토(唐土)로 지공선사를 친관(親觀)하기 위하여 수륙 수만 리를 도보로 입당할 새 벌써 선사께서는 열반에 드신 지 오랜지라. 그 유골을 탑 중에 모시었으니 선사께서 열반에 드실 임시 제자께 유언을 남겨 말씀하시기를, “오(吾) 열반 후 조선서 순응, 이정 두 사미(沙彌라는 것은 인도 말이니 한역하면 息慈[식자]이다. 즉 息惡慈行[식악자행]의 뜻이니 20세 미만된 젊은 승려를 칭함)가 올 터이니 오거든 이 유서를 전하여라”[라는] 그 유촉이 계시었는데, 과연 그 유촉과 같이 순응, 이정이 도착하매 제자는 선사의 유언을 말하고 유서를 전하니 이에 순응, 이정 양사는 유서만으로서 만족치 않고, “범부(凡夫)를 벗어나신 선사의 법신경상(法身境上)에야 생사거래(生死去來)에 따르지 않으시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하시리니 우리의 지극한 정성으로서의 탑 중에 계시는 선사 법신을 친근하리라.”하고 드디어 양사는 탑전에 합장 궤좌(跪坐 : 꿇어 앉다)하여 입정(入定), 7일 7야간(夜間) 불음불식(不飮不食)으로 용맹 정진하니, 7주야(晝夜) 만에 탑문이 스스로 열리어 불한불열(不寒不熱)한 반야장(般若藏) 중에 광명으로 장엄하시고 사자좌상(獅子座上)에 결초질좌(結草跌坐)하신 선사의 형체가 나타나 거수초지 (擧手招之)하사 입래(入來)를 허하시니 양사가 환희 용약(踊躍)하여 입거순례(入去順禮)하니 선사께서, “그대들의 정성이 이와 같이 장하냐”고 매우 칭찬하신 후 다시금 전자 유서를 갱시(更示)하사 해인사의 창건을 지시하시고 감로차(甘露茶)를 양사에게 시여(施與)하니, 양사 음필(飮畢)에 7주 7야간 불음불식에 말랐던 형체가 즉시에 회복되어서 선사께 배사(拜謝)하고 출정(出庭)하니, 선사의 제자 등이 약료(藥料)를 준비하여 [주니] 양사는 선사께 주신 감로차로써 심신이 쾌활하여 원기왕성한지라, 약료의 불필요를 말하니 그 제자 등이 더욱더욱 경앙(敬仰)을 마지 아니하여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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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양사는 유서의 지시를 좇아 조선으로 나와서 가야산으로 들어와 토굴(방금 극락전 후변에 양사 토굴 기지가 현존함)을 정하고 입정 유희(入定遊戱)로 시기 도래를 기다리니 양사의 입정 중에는 이상한 광채가 양사 두상으로부터 방사하여 허공에 뻗쳐서 만력(萬力)의 엄연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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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애장왕 왕비께서 중환 중에 계셔 천하 명의를 초빙하여 진찰하되 그 효과를 볼 수 없어 궁중이 우울에 싸였더니 어떤 학자의 진언으로 ‘이 중환은 도인(道人)의 힘을 가자(假藉)치 않으면 도저히 완쾌치 못하리니 도인을 찾아서 왕비의 중환을 다스리소서’ 하매 왕께서 그 말을 종(從)하여 팔도에 금부도사를 명하여 도인을 찾게 하니 금부도사 칙명을 받들어 가야산 하(下) 20리 허(許)에 월광리(月光里, 이곳은 현재도 월광리이며 자동차로 해인사로 들어오면 야로서 10리쯤 되는 지점에 바로 月光樹[월광수]라고 새긴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서 건너편 노다(野田) 중에 古塔[고탑]이 있으니 이것이 옛날 월광태자께서 월광사를 지으시고 공부하시던 곳이다)에 이르매 난데없는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서 앞 길을 인도하는지라. 금부도사가 그 여우 뒤를 따라가서 가야산 숲속으로 들어서니 홍류동 9곡을 거쳐 산명수려의 신비한 선경을 당도하니 여우는 간 곳 없고 금부도사만 홀로 남아 사면을 살펴보았다(이 여우 없어진 곳을 여우바위 거리라 하여 아직도 그 옛날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래서 그때 금부도사가 생각하기를 ‘아마 이곳에 도인이 있으므로 신명(神明)이 지시함이라’ 하고 기뻐하여 사면을 살피다가 어떤 한 초부(樵夫)를 만나서 이곳에 도인이 없느냐고 물으니 그 초부 대답하기를, “이 위에 도인이 둘이 앉아서 공부합디다” 하는지라. 금부도사는 반가워 그 장소를 가보니 순응, 이정 양대사가 입정하여 공부하고 있는데 상서(祥瑞)의 광명이 두상으로부터 허공에 방사하니 엄연한 기품에 자연 위압을 느끼어 저두(底頭) 경례하고 왕명을 전달하여 왕궁까지 가서 왕비의 간병(看病)을 간청하니, 양대사는 왕궁까지 갈 것 없다 하고 전자 입당시에 지공선사께서 유서와 동시에 받아온 오색사 (당사실)를 내어주며 이 실의 한 끝으로는 왕비의 팔목에 매고 한 끝으로는 궁전 앞에 고목이 있을 터이니 그 고목에 매어두면 왕비의 병환이 완쾌하리라 하거늘 금부도사가 왕궁에 돌아와서 그 말대로 왕께 주달하고 양대사의 분부대로 시행하니 이상하게도 왕비의 병균이 그 오색사를 타서 궁전 앞 큰 고목으로 옮기매 그 고목은 그 자리에서 말라 죽는 동시에 왕비의 중환은 즉시 완쾌되셨다. 그리하여 애장왕께서는 크게 기뻐하사 친히 가야산으로 행행(行幸)하시와 순응, 이정 양대사의 소원을 물은 즉, 이때 양대사는 지공선사의 유서에 의하여 이곳에 범찰을 건립하여, 법계에 무상대복전지(無上大福田地)가 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대희(大喜)하사 허지(許之)하시고 범찰을 세워 해인사라 액(額)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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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海印)’ 2자의 문구는 화엄경 중에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나온 문구이니 순응대사가 신라 고승인 화엄종주의 의상조사의 법손(法孫)인 까닭에 화엄종찰(華嚴宗刹)로 된 것이다. 초창 당시에 대중은 천여 명의 승려가 지주(止住)하였고 그 후 고려 왕건 태조의 왕사이신 희랑조사(希郞祖師)가 이 해인사에서 나셨으니 왕건 태조가 신라의 뒤를 이어 고려 통일을 도(圖)할 제, 백제로 더불어 성주(星州)에서 크게 싸우다가 왕건이 패하여 해인사로 들어와서 희랑 조사를 친근(親勤)하고 법력으로써 고려 통일의 대업을 성취케 하여 달라고 간청하니 희랑 조사께서 응낙하시고 화엄신중단(華嚴神衆壇)에 분향 고축(告祝)하매 화엄신장 용적대신(華嚴神將勇敵大神)이 화엄성중(聖衆) 탱화(幀畵)에서 목전에 몸을 나투어(나타내어) 허공에 화검(火劍) 휘둘러서 백제를 위협하니 백제군이 그 위광에 눌리어 물러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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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연으로 왕건이 희랑 조사께 귀의하여 왕사(王師)로 삼으시고 전(田) 5백 결지(結只[계척], 今[금] 町步[정보]와 如[여]함)를 해인사에 헌납하는 동시에 인근 각 군수에게 명하여 해인사를 수호케 하였으며 이조에 이르러 이태조께서 고려장경을 강화도로부터 해인사에다 이안(移安)하고 법지종가(法之宗家)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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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니 범종각(梵鐘閣)이 있고 동서 명미(東西冥迷)한 전각(殿閣), 요사(寮舍)가 즐비하게 보인다. 정중(庭中)에 3탑이 있으니 개산(開山) 당시 건립한 신라 미술품 중의 하나로 탑 중 구존금불(九尊金佛)이 봉안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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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大寂光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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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대적광선이 보이니 본전은 화엄종의 본존(本尊)이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본당으로 개산 이래 6백여 년간 비로전(毘盧殿)이라고 칭하였으나 성종(成宗)때 학조(學祖)대사 중창 후 대적광전이라고 개칭하였다. 당내에 들어가 정숙히 3배를 하고 돌아보니 방미간(放眉間) 백호상광(白毫相光)하사 조미방(照未方) 만팔천세계(萬八千世界)하사 미불주편(靡不周遍)하시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이며, 고색 찬연한 탱화(원문은 泰畵), 조석(朝夕)으로 목탁소리를 듣고 있는 수 백 개의 위패,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당(堂) 출입구로 나서면 신축한 노전(爐殿)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높직이 장경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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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 동(每棟) 30칸으로 된 상하 2대 동의 거하(巨廈 : 큰집)이다. 상하 2동 60칸에는 국간 경판(國刊經版), 우 양동(右兩棟) 4칸에는 사간(寺刊) 경판을 봉안하여 있다. 소위 세계 30종 장판(藏版)중 성가(聲價)가 높은 것은 고려장판이다. 그 체재의 굉실(宏實)과 교정(校正)의 엄밀과 부질(部秩)의 완비는 세계 장판 중 제1위를 점한 무비(無比)의 보물이다. 국간판과 사간판이 있어 국간판은 고려 제33주 고종 24년 정유에 시역(始役)하여 이태조 무인 7년에 본사(本寺)로 이장하였다. 사간판은 고려 중엽에 주조(雕造) 법화(法華), 능엄(楞嚴) 제경과 조선시대 주조한 사분율(四分律) 등 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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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간판수 81,258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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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판수 4,74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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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合) 86,00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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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간경부수 1,5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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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경부수 5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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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1,57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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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간권수 6,79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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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권수 35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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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7,1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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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고물(貴重古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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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깊은 해인사라 귀중한 고물이 다수이었던 건 물론인데 누차 화재로 인하여 요행히 유존(遺存)한 것을 대정 8년(1919년)에 비로소 수집하여 장치한 것인데 그중 상탑(象塔) 향로는 신라 개산 당시 유물지(之) 최고 역사를 말하고 그 미술적 가치는 전문 학자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그 외에 옥으로 만든 조화(造花), 김홍도(金弘道)그림 병풍 백복수수병(白福壽繡屛), 화조수병 등은 수만 (花鳥繡屛) 원 가격에 달한다고 장삼을 입은 중이 긴 막대기로 가리키며 엄숙히 설명을 하고 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일시에 통일이 되어 감탄함을 마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씩 열고 닫는 기물장(器物藏)이건마는 다시 아니 열듯이 큰 자물쇠로 덜컥 닫고 또 큰 문을 덜컥 닫을 때 어쩐지 모르게 쓸쓸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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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구선전(九先殿), 심검당(尋劍堂), 궁현당(窮玄堂)을 보니 거기에는 추레한 장삼을 입은 노장들이 힘없이 앉아서 나무아비타불 관세음 보살을 부르며 징을 울리고 북을 치고 있다. 사운당(四雲堂) 즉 종무소(宗務所)에는 책상을 앞두고 의자에 걸터앉은 직원들이 사무를 보고 있다. 씨레한 명월당(明月堂) 즉 강습소에는 5, 60명 되는 아동이 와글와글 한다. 교사 1인이 복식 교수를 하고 있었다. 퇴설당(堆雪堂) 즉, 선방(禪房)에는 마침 참선 시기이라, 누렇게 뜬 중, 말갛게 밝은 중, 노랗게 꽃이 핀 중, 늙은 중, 젊은 중, 뚱뚱한 중, 빼빼 마른 중, 무릎을 꿇고 벽을 향하여 눈을 말뚱말뚱 뜬 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 대체 선방이란 곳은 교주(敎主) 석가모니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전하여 대대로 계계상승하여 서역의 제28대조 달마대사(達摩大師)에게 이르러서 이 정법안장을 당토에서 전할 때 불법은 이심(以心)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부르짖었고 그의 골수를 당나라 제2대조인 혜가대사(惠可大師)에게 전하였으며 승 찬도(燦道), 신호인(信弘忍)으로 역전(歷傳)하여 당토 제6대조 혜능(惠能)대사에 이르러서 문하에 무수 도인을 낸 것이 즉 선가의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설문종(雪門宗), 위앙종(僞仰宗), 법안종(法眼宗)의 5종 가풍이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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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일본 내지의 불교계에는 이 선종 중에 5종 가풍이 그대로 현전하여 있는 것 같아 방금 명사(名寺) 촌찰(寸刹)의 선방이라는 곳에서 이 석가모니의 정계통인 정법안장을 투득(透得 : 막힘이 없이 환하게 깨달음)하기에 수행하고 있다. 이 정법안장을 투득하는 날이면 범부(凡夫)의 형체로서 성현의 역(域)에 드는 날이며, 불법 묘리를 통달하여 인천 삼계(人天三界)에 대도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졸고 앉아 있는 것만이 참선함인가? 눈만 멀뚱멀뜽 뜨고 앉았는 것이 참선인가? 어(語)인가? 묵(默)인가? 동(動)인가? 정(靜)인가? 정도 아니며 동도 아니며 어도 아니며 묵도 아니며 조는 것도 아니며 성성(醒醒)히 눈만 멀뚱멀뚱하고 앉은 것도 아니다. 비동비정(非動非靜)이면서 즉동즉정(卽動卽靜)이며, 비어비묵(非語非默)이면서 즉어즉묵(卽語卽默)이라 하니, 그러면 동이 아니면서 곧 동이며 정이 아니면서 곧 정이며, 어도 아니면서 곧 어이며 묵도 아니면서 곧 묵일지니 과연 묘(妙)하며 불가사의한 것이다 말로써 말할 . 수 없고 형용으로써 형용할 수 없는 이 경계를 가자(假藉)하여 선(禪)이라고 하는 것이니 선이란 심행처(心行處)가 멸하고 언어도(言語道)가 단(斷)함이니 이 선의 묘리를 투득하면 즉시 정법안장이 이시별물(以是別物)일까. 촌보도 옮기지 않고 곧 그곳에서 체험하여 맛보는 것이다. 이 선의 묘리를 투득하기 위하여 고인이 참구(參究)하는 결과라, 방편을 베풀었으니 조정(祖庭) 문하에 소위 1700공안(公案)이 있어 선의 묘리를 참구하여 일체 번뇌, 망상, 분별을 쉬고 정신의 통일을 단련하여 가는 화두(話頭)라는 것이다. 이 선을 참구하는 참남(參南)이란 것은 조만(早晩)이 없으며 남녀노소 없어서 누구든지 대신근(大信根)과 대의단(大疑團)과 대분용(大奮勇)으로 정진한다면 순목지간(瞬目之間)에 이 묘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추호의 차위(差違)로서 혹은 무량겁(無量劫)을 지내어도 투득치 못하나니 승려에게 참선이 없었던들 승려될 아무 흥미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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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庵子)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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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 후에 근처 암자 구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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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은 성종 19년 무신(서기 1488), 거금 448년 전 계진공(戒眞公)의 중건(重建) 영각(影閣)이요, 주벽(主壁)에는 부휴(浮休) 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전(殿) 남으로 석정(石井)이 유(有)함은 신라 애장왕의 어용수(御用水)요, 동방에 농음천의금(濃陰川衣襟)을 녹염(綠染)함은 종루기봉야(鐘褸奇峰也)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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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나와서 북으로 뚫린 좁은 길로 조금 내려가 도랑을 건너 한참 올라간다. 올라가다가 숨을 쉬고 숨을 쉬어 올라가니 낭떠러지에 조그마한 기와집 암자가 있다. 이것이 희랑 조사가 기도하던 희랑대(希朗臺)이다. 대 뒤에는 천년이나 된 보기 좋은 소나무가 있어 일견(一見)에 남화(南畵)의 격을 이루고 있다. 산신각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올라가 바위 위에 앉아 일망(一望)하니 해인사 전경(全景)이 보인다. 우리 일행 11인 중에는 쾌활하기로 유명한 여사와 법사가 있다. 뒤에서 누가 “C시님, 시조 하나 하십쇼”하니 K가 “시님, 그거요 그거 말이에요” 일동은 와 웃었다. 그리고 모두 한 마디씩 “시님, 그거요 그거” 한즉 C스님은 점잖이 “내가 할 줄 아오”하고 기어히 아니하고 말았다. 그럴 동안에 참선처로 유명한 백련암(白蓮菴)에 다다랐다. 이 암자는 서산(西山 : 서산대사) 문인 소암(昭菴) 대사가 창건한 후 송운(松雲) 대사, 일헌(一軒), 공수(功需), 여찬(如贊), 쌍휘(雙暉) 등이며 획광(獲光), 도봉(道峰), 월파(月波) 제씨가 유공(有功)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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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조당 누각(祖堂樓閣)에서 진미(珍味)에 불공 밥을 먹고 좌담이 일어났다. 때마침 구미에 갔다 온 사람이 3인이다. 들거니 놓거니 유럽 풍속 이야기가 난다.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였다. 잡담 중에는 해인사 말사(末寺) 중 어느 절에는 변소가 세 길이나 된다고 하여 어느 분이 그 변소에 갈 때는 만일을 염려하여 허리에 새끼를 매고 가야겠다고 한즉 일동은 와하고 웃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우스운 이야기가 많아 자못 유쾌하였다. 흐르는 때는 우리에게 더 시간을 주지 못하고 황혼이 되어 왔다. 우리 일동은 백련암 감원(監院)에게 후의를 사(謝)하고 내려오며 두어 군데 쉬며 좌담 잘 하시는 환경 법사의 해인사 민요(民謠)에 대한 설명 이야기가 있었다. 가던 길을 돌처와 중로에서 산산히 나눠진 후 여관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니 유쾌한 맛이 음식에까지 나탄나다. 오늘 들은 우스운 이야기를 혼자 드러누워 웃으면서 하루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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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큰 절 서북편에 있는 영자전(影子殿)을 찾았다. 이 암자의 일명(一名)은 홍제암(弘濟菴)이라고 하는데 350년 전에 선조 대왕께서 창건하셨는데 사명대사가 강화 전권대사로 일본내지를 다녀와서 일체 작위를 나라에 환상(還上)하고 해인사에서 수도하다가 임종하겠다는 원에 의하여 선조께서 특히 사명대사에게 홍제존자(弘濟尊者)의 시호를 내리시고 홍제암을 건설하신 것인데 그 후 서산(西山), 사명, 기허(奇虛) 3화상(和尙)의 영자(影子)를 모시었기 때문에 영자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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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구조는 현재 조선 목공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각처에서 목공이 와서 도본(圖本)을 그려가는 일이 많다고 한다. 유화(油畵)의 재료로도 훌륭하다. 이 암자 주인공으로 계신 환경 스님의 재미있는 좌담(坐談)을 듣고 나니 11시 절 점심 때라, 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못다 듣고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여관 동북에 있는 국일암(國一菴)을 찾아갔다. 건설 연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고건물이다. 사람도 그리 없는 듯하여 쓸쓸하였다. 정문 앞에는 고목의 괴목이 있어 역시 유화 재료로 훌륭하였다. 그 앞으로 조금 내려오면 5, 6호(戶)의 토굴이 있고 조그마한 암자가 있으니 이것이 여승방 약수암(藥水菴)이다. 약수암은 건설된 지 40여 년이요, 정원에 약수가 있음으로 약수암이라고 한다. 여승이 30여 명이 있어 공동 밀소(密所 : 벌집) 모양으로 다 각각 방 한 칸, 부엌 한 칸씩 차지하고 자치생활을 한다. 원래 가난한 살림들이라 그 절용(節用) 절식(節食)이란 말할 수 없으며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을 나가서 전전 푼푼이 모아가지고 들어와 겨우 연명을 하고 산다. 해인사에는 여승방이 둘이 있으니 약수암 외에 삼선암(三仙菴)이 있다. 이 암자 건설은 45, 6년 되었다 하며 삼선(三仙)이 내려와 암자 뜰에 있는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었다고 하여 삼선암이라고 한다. 계곡가에 있어 물소리 적이 한가하며 조그만큼씩한 신중들이 이방 저방에서 들락날락하는 것을 볼 때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선하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처량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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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암 (大善菴)을 찾았다.이 암자는 2, 3년 된 새 건물 경색 좋은 높직한 곳에 청아하게 있는데 청소년시에 화류계에서 놀던 부인이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한적한 곳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사유재산으로 사후(死後) 사중(寺中) 건물로 될 이 집을 가지고 있다. 부인의 능한 수완으로 어여쁘고 능한 기술을 가진 부인들을 끌어 여름 한 철이면 해인사에 꽃이 피고 만다. 그 길로 올라가기 자못 숨이 찬 높직이 있는 원당(願堂)으로 올라갔다. 여기에는 인물 명물인 96세 된 임 상궁(林尙宮) 마마가 계시고 여기 감원 스님으로 계신 노장님은 유자 생녀(有子生女)하고 오복이 구존한 분으로 자녀들이 눈물로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떼치고 나와 수도하는 분이었다. 이 당은 신라 제40대 애장왕이 해인사를 창건하고 이어 3년 간 여기 계셔서 복을 빌었다 하여 애장왕의 기복지(祈福地)라 한다. 그 외에 보지 못한 곳이 청량암(淸凉菴)이나 멀어서 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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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로는 봉천대(奉天臺), 회선대(會仙臺), 첩석대(疊石臺), 제월담(霽月潭), 책옥포(嘖玉瀑), 완재암(完在岩), 광풍뢰(光風瀨), 음풍뢰(吟風瀨), 자조암(泚肇岩), 취적봉(翠積峰), 칠성대(七星臺), 무릉교(武陵橋), 수화천(遂花川), 갱멱원(更覓源), 그 외 여름 한철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고목 느티나무 있는 학생대(學生臺), 놀기 좋은 불이정(不二亭), 수박, 참외 물에 담궈놓고 닭찜 하고, 돼지고기 굽고, 갖은 나물에 점심을 해다가 신선이 바둑을 두던 너른 바위 위에서 수십 인의 우인으로 더불어 발을 벗고 윗통을 벗어 젖히고 젓가락, 숟가락을 치우고 물에 씻어 가며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일종의 원시 만찬회를 하고 사계에 전문가들이 노랫가락, 육자배기, 시조, 춘향가, “좋다 좋다”소리에 슬슬 넘어가고 이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노세 젊어서 놀아 늙고 병들면 못 노나니 좋다 얼씨구나 절씨구” 조선 춤, 양(洋)춤, 일동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춘다. 여기가 놀기 좋은 자하동(紫霞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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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伽倻山) 상봉(上峰)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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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 10인은 점심을 한짐 해지우고 아침 일찍이 나섰다. 풀이 우거진 좁은 길로 가다가 길을 잃고 방황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한다. K여사의 떠들썩하는 소리로 떠들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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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은 옛적 가라(伽羅) 연방의 요부(要部)로서 가라를 전음(轉音)하여 불교적으로 변칭한 것이다. 혹은 우두산(牛頭山), 중왕산(衆王山), 지항산(只恒山), 영산(靈山)이라고도 한다. 차(此) 산은 대덕산(大德山)의 기맥(岐脈)으로서 성주(星州), 고령(高靈), 거창(居昌), 합천(陜川) 4군 사이에 반용(盤聳)하여 산고(山高) 해발 4,719척이요, 면적이 3,328정보로 천연의 오엽송(五葉松), 적송(赤松), 단풍, 활엽수 등이 울창하고 기암괴석이 용립하여 명쾌기려(明快奇麗)한 산이다. 전면으로는 남산 제1봉이 중중(重重) 포위하고 있다. 특히 상봉 우비정(牛鼻井)과 백운성(白雲城) 하 관음석상은 탐승객의 목적지가 되어 있다. 얼음 깨다가 사이다 담궈 먹고 우비정 물로 상추쌈을 싸서 먹으니 그 진미 말할 수 없으며 먹고 난 후 다 각기 바위 위에 걸터앉어 목침돌이(여러 사람이 목침을 돌려 차례에 당한 사람이 옛이야기나 노래 따위를 하며 즐기는 놀이) 창가를 하니 개미허리가 되다시피 웃었다. 여름 해도 얼마 안 남아 돌아오는 길에 풀이 우거진 칠불암(七佛菴) 터를 찾았다. 이곳에는 1900년 전에 김수로왕의 8왕자 중 1왕자는 태자를 봉하고 7왕자가 여기에 와서 견성(見性) 득도하고 그 후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 : 원문은 赫溪寺[혁계사])에서 결과(結果)하셨다 하니 쌍계사(雙溪寺) 칠불암이 7왕자의 결과한 곳이라 한다. 친척들이 보러오면 다 큰 절 즉, 해인사 앞에 영지(影池)가 있으니 7왕자가 이 영지에 비치어 보였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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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칠불암에 높이 올라 앉은 자,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옛날 그들의 기거하던 자리를 찾아보기도 하고 혹 우물을 찾아 물을 받아먹는 자, 기부를 거두어 절을 짓자는 둥 의논이 자자하다. 다리를 질질 끌고 오는 자, 나는 선생에게 지팡이 한 끝을 쥐이고 끌려오니 우스운 소리 잘하는 Y가 “거기다 눈만 감았으면 되었소” 하여 일동은 웃었다. 여관에 돌아오니 해는 저물었고 왕복 40리 걸은 다리는 촌보를 옮길 수 없다. 저녁도 먹을락 말락 두고 몸살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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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佛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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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일을 불사(佛事)라 하나니 탄생 불사(4월 8일), 백종(百種 : 百中) 불사(7월 15일, 목련존자가 그 어머니를 지옥에서 극락세계로 천도한 날), 성도(成道 : 원문은 成過[성과]) 불사(12월 8일), 열반 불사(2월 12일)이니 그 중 4월 8일 불사를 성대히 거행한다. 해인사에서는 3월 그믐께쯤 되면 해인사에서 약 3마장 되는 데 땅을 몇 평씩 사서 전방을 차리나니 이 노점(露店)은 한 20여 호 되어 각처에서 갖은 각색 물건을 가져올 뿐 아니라 노점마다 새악씨의 노래 소리가 울려나오고 장구 소리가 울려 나온다. 큰 절 작은 절 중들, 여관객들, 저녁 후의 산책으로 적이 위안이 된다. 초하룻날부터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4월 7, 8일 간은 여관은 물론 만원이요 집집마다 방마루가 터져나간다. 4월 8일날은 수십만 명의 참배자가 오고가고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번 볼 만한 경절(慶節)이다. 지금은 장경각 불사가 있으니 조선총독이 만원을 내서 팔만대장경을 복사하여 만주국 황제에게 헌상하는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라고 쓴 정문에 ‘금단방(禁斷傍)’이라고 크게 써붙이고 장경각 안에는 23조로 나누어 복사, 검열이 있고 총독부에서 내려온 기수(技手)들과 도감(都監)은 이것을 감독하고 있다. 2개월 넘어 동안 한다. 이 불사는 그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일화(日貨) 1원, 3원씩 받는 중, 속인들은 큰 벌이가 될 뿐, 한가하던 중들도 매일 8시간씩의 노동으로 바쁘지 않을 수 없고 생산능력이 없던 중들은 주머니 속에 돈소리가 나게 되어 어느 방면으로 생각하든지 대사(大事)라고 아니 볼 수 없다. 나도 몇 부인들과 동행하여 구경을 간 일이 있는데 한번 볼 만하였다. 이 불사가 끝나면 성대한 공양이 있고 염불이 있으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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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土窟)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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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경내에는 인가가 60여 호 있는데 이것을 토굴이라고 하여 중들은 크게 구별한다. 대개는 중들의 처가속들의 집이오, 그 외에는 속인의 집이다. 논마지기나 있든지 종무소(宗務所)에 사무원으로 월급이나 타든지 하면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나 그렇지 않으면 중들의 삯바느질로 삯빨래로, 그 생활상태가 말이 아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이 토굴을 정리시키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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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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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종소리, 새벽 종소리, 우거진 숲 사이로 은은히 멀리 들려올 때 자연 머리가 숙여지고 새벽 잠이 깨인다. 무심하다. 저 종소리 어찌 그리 처량한지 내 수심을 돕는도다. 부지불각중에 밀레의 「만종(晩鐘)」 생각이 아니날 수 없다. 임시로 불공 있을 때는 예외거니와 정기로는 매일 3차 예불이 있으니 이때마다 사방 큰 절, 작은 절에서는 땡땡 종을 울린다. 즉 오전 4시 아침 예불, 오전 11시 오정 예불, 오후 6시 저녁 예불이 있어 부처님 앞에는 가사장삼을 입은 부전 스님, 감원 스님이 목탁을 치며 능엄주천수(楞嚴呪千手) 다라니로 염불을 하고 이어 공양을 한다. 그 반찬이란 마늘도 안 넣은 김치의 푸른 채소뿐이다 . 그러므로 그들의 얼굴은 맑은 빛이 도나 영양부족으로 힘을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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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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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인사 지정 여관 홍도(紅濤 : 원문은 紀濤) 여관에 일객이 되었다. 이 여관은 해인사 내에 없지 못할 편리를 주는 유일무이한 여관으로 도회지에서 보기 쉽지 못하게 설비가 구비하여 있다. 나는 일찍이 구미만유시 요세미티 산중 여관에서 1주일 간 지내 본 일이 있는지라 자연 연상치 않을 수 없다. 그 요세미티 여관은 전부 인도식 건물과 장치이었다. 집과 장식품만 보아도 산중 생활에 싫증이 아니 날 만치 된데다 갖은 오락기관이며 댄스회, 경마회가 있어 한 시라도 심심한 때가 없나니 경마회란 것은 말을 조그만 나무로 만든 것을 각색으로 모자를 쓴 객중(客中) 미인들이 한 중년 부인이 번호를 부르면 말을 옮겨 놓는 것이다. 그러면 박수로 야단이요, 이기는 말편 사람들은 돈을 타느라고 야단들이다. 이뿐 아니라 어여쁘고 젊은 미인들은 여기저기서 불러내어 볼 만하다. 이러한 구경을 옛날에 한 나는 산중에 들어오니 더욱 회상이 되고 옛날이 그리워진다. 이런 여관은 언제나 그런 여관과 같이 되나 싶다. 매일 3, 40명씩은 떠날 새 없고 산중이라 물론 봄과 겨울은 세월 없을 것이요 여름 피서로, 가을 단풍 구경으로 몇만 명씩 출입이 있다. 더욱이 10여 명의 월박(月泊) 손님이 있을 때는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치 마루 끝에는 화로에 약탕관이 열을 지어 죽 늘어 놓였고 객중에는 아직 펄펄 뛸만한 청년의 얼굴이 노랑꽃이 피고 기운이 척 늘어져 느른한 자로 자리를 펴고 늘 드러누운 자, 그 중에는 혈기 왕성하여 단조로운 생활에 조바심을 치는 자, 어떻게 놀면 잘 놀까 하여 산중 암자마다 계곡 골짜기마다 매일 다니는 자, 3일에 한 번씩은 2층 오락실에서 이 장난꾼들이 모여 정종을 마시고 비어(맥주)를 마신 끝에 밥주발 뚜껑을 놋젓가락으로 두드리며 장구를 치고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 춤을 추다가 맨발로 마당까지 내려가 겅둥겅둥 뛴다. 나 외 몇 여자는 구경꾼이다. 이러므로 여관은 분잡함과 식가(食價)가 비싼 관계상 조용히 수양하러 오는 사람들은 암자로 가고 더욱 묘령 여자들은 일부러 피하여 승방으로 간다. 실로 누구든지 여행을 오면 기뻐서 잠이 아니 오는 듯하여 밤중까지 새벽부터 떠들어 옆 방 사람까지 잠을 못 자게 한다. 하여간 홍도여관은 해인사로는 없지 못할 곳이요, 여객의 피로한 다리를 쉬게 하고 곤한 몸을 잠들게 하는 천당이요 극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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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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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재적 승려가 남 398인이요. 여 100인이다. 승려 생활이란 것은 진세를 벗어난 소위 물외(物外) 생활이나 단합과 규율로써 그 주(主)를 삼는 것이요, 승려는 즉 승가(僧珈이며 승가는 곧 화합의 의(意)다. 생 부동(生不同), 성 부동(姓不同)의 각인 각씨(各氏)로서 세속 진애(塵埃)를 벗어나서 할애 사친(割愛捨親)하고, 출가 위승(出家爲僧)하여 입산 수도하는 이들의 일상 생활이 즉 승려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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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此等) 각인 각씨가 입산 수도하여 혁범 성성(革凡成聖)을 목표로 도량(道場, 寺院[사원])에 투신하는 날이면 진세 애욕을 멀리 하고 불법 도량에서 길리우는 청풍납자(淸風納子)의 몸이 되나니 불타의 무상도법(無上道法)을 위하여 그들의 생활이 계속됨에 이화위주(以和爲主)하여 불분시비(不分是非)하여 이법위회(以法爲會)하여 호상부조(互相扶助)하니 이것이 곧 청렴탁생(淸兼度生)의 물외적(物外的) 화합법인 동시에 승려 생활의 근본적 주간(主幹)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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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생활의 대강은 이러하거니와 그 생활질서를 유지하는 세칙의 청규법(淸規法) 내용에 있어서는 일반 사회, 대중 단체 생활에 비추어 훨씬 초월할 뿐, 그 발달된 규정은 전반적으로 사회 단체의 규범이 되는 점이 불소(不少)함이니 승려의 그날그날의 생활 일과를 소개하려면 승려라면 총칭이 되려니와 승려 중에도 개인 개인의 위인(爲人)의 자격에 따라 각 계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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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체에 있어서는 선종(禪宗), 교종(敎宗)으로 분(分)하여 있으니 선종이란 것은 소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하여 불타의 교리를 문자상을 통해서 그 일람해석(一覽解釋)한 후에 다시금 실제에 들어가 진리를 체득하는 즉, 이문자(離文字) 외에 실제 진여지리(眞如之理)를 체험하여 대오(大悟) 철저(徹底)를 목표하는 참선인을 말함이요, 교종이란 것은 불타의 일대(一代) 시교(時敎, 經典[경전]) 중 어느 것이든지 다 경전이면 교종에 속하나니 강사 혹은 승려로서 어느 경전이든지 전문으로 지송(持誦)하는 이는 통칭 교종(敎宗)이라 한다. 사원에서는 선종인과 교종인을 이판인(理判人), 사판인(事判人)이라 하니 즉 선종은 이판이요, 교종은 사판이라 구별한다. 그리하여 이 선교 양종을 통하여 각자 위인의 자격 여하에 따라서 대선사(大禪師), 대교사(大敎師), 선사, 대덕(大德), 중덕(中德), 대선(大禪), 사미(沙彌) 등의 계단이 있으며 이러한 자격을 양성함에는 각기 세칙의 청규법에 의하여 교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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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선종의 일상생활을 들어 간략히 말하면 그들의 생활은 모든 것이 규율적이다 . 1년 12개월을 통하여 각찰(各刹) 선원에서는 결제(結制), 해제법(解制法)이 있어 하안거(夏安居) 동안거법(冬安居法)이 있다. 구(舊) 4월 15일부터 결제하여 7월 15일에 해제하니 그간 3개월 간은 전심 참선하니 이를 하안거라 하고, 10월 15일부터 결제하여 1월 15일에 해제하니 그간 3개월을 동안거라 한다. 안거 중 일상생활이란 매일 오전 3시면 필히 기침(起寢)하여 일제히 노소 없이 법당에 모여 불전에 향화를 사르고 예식을 마친 후 6시까지 면벽 관심(面壁觀心)하여 참선을 하고, 아침 공양을 하고(조반), 8시부터 10시까지, 오후도 역시 1시부터 3시까지, 6시부터 9시까지 참선을 하여, 이와 같이 대중 수십 명이 동일 규율 하에서 이와 같이 구순 안거(九旬安居)를 종료하는 날이 해제일이고 그 해제 후 다음 결제일까지 3개월 동안은 고행을 닦기 위하여 동거하던 선객(禪客)들이 각자 걸망(鉢囊 : 원문대로, 바랑)을 짊어지고 타처로 옮겨 도처선(到處線)을 따라 고행을 닦되 혹은 성읍(城邑) 부락에도 지나며 혹은 명산 대찰과 이름난 성지를 찾아서 신심을 맑히기도 하여 고행 중에서도 항상 도 닦는 것을 잊지 아니하고 화두를 참구(參究)하다가 결제일이 도래하면 여전히 각처의 선원으로 입방(入榜, 즉 名目[명목]을 드리는 것)하여 다시금 참선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교종인의 생활은 보통 기침은 5시이고 기침 후 법당에 모여서 예식을 마친 다음에 각자 지송하는 경전을 외우고 6시 30분 경이면 조반을 먹는다. 조반 후는 각자 임무를 좇아서 종일 일과를 하게 되는데 그중 불법 중 대승경전을 연구하는 학인들은 조반 후 약간 휴게한 후에 타종(打鐘) 집합하여 논강을 시작하니 논강이라는 것은 일종의 경전을 연구하는 것인데 학인이 3인이면 3인, 4인이면 4인이 1일간 연구하기 위하여 과정을 정하되 불경 책장 수를 동일히 정하여 그날 일과로서 종일 각자 견해를 좇아서 연구한 것을 그 익일 조반 후에 논강하게 되나니 각기 견해가 동일할 때에는 아무 이동(異同)이 없지마는 만일 각기 연구한 견해가 다를 경우에는 조실(朝室, 선생) 화상에로 가서 판결을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일대 시교를 연구하는 가운데서 대제사(大諸師), 대법사(大法師), 포교사(布敎師)가 생겨나는 것이다. 삼계 대성(三界大聖)인 석가모니의 법도량에서 청정(淸靜)한 몸으로 길들이는 승려 생활이란 참으로 신성한 가운데서 인천(人天)의 대법기(大法器)를 이루는 곳으로서 가히 부러워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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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千里[삼천리]』(1938. 8)
【원문】해인사(海印寺)의 풍광(風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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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해인사의 풍광 [제목]
 
  나혜석(羅蕙錫) [저자]
 
  삼천리(三千里) [출처]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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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2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