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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민중에는 소박한 문학이 있고 화사한 민중에는 화사한 문학이 있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도 증명하는 바이거니와 현재 각 민중의 문학을 보더라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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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찬 눈과 쓰라린 바람이 뿌리고 스치는 끝없는 황야에서 실낱 같은 생을 위하여 이 무서운 자연의 위력과 싸우고 있는 북구의 민중에는 운명의 신에 대한 공포의 念[념]과 사색적인 우울한 기분과 인간적 현실苦[고]에 염세적 사상을 품으면서도 강직 웅건한 색채가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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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 년 삼백 육십 일 향그러운 백화가 산야에 난만하고 아름다운 새 소리가 냇물 소리와 같이 골을 울리는 남구의 민중은 그렇지 않다. 저들의 사상은 우수달밤 화향에 취한 듯이 공상적이며 저들의 감정은 그 혈관에 뛰노는 붉은 피같이 열렬하며 향락적 예술적 생활을 營[영]한다. 이렇게 남북 민중의 이채가 있는 생활은 드디어 각각 색채를 달리한 문예를 지었다. 북구의 문학은 현실적 생계적인데 暗愁[암수]와 고통과 강건한 기분이 흐르고 남구의 문학은 낭만적이요 열연한 연애의 감미의 꿈을 따르는 듯한 정조가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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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여기에 쓰려는 영국의 문학은 남구의 색채를 띠었는가? 또는 북구의 색채를 띠었는가? 어떠한 특질을 가졌는지 우리는 이것부터 연구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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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가운데 質素[질소]한 빛을 머금고 질소한 가운데 화려한 기분이 싸고 흐르는 것이 영국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영국 문학은 남북구의 중간위를 얻었다. 그리하여 非華非質[비화비질] 즉 중용을 얻은 것이 영국 문학의 특질이다. 現英本國[현영본국]은 조그마한 섬이다. 동서남북에 영토가 없는 곳이 없으며 또한 英人[영인]의 혈관에는 남구인의 뜨거운 피와 북구인의 쌀쌀한 찬 피가 아울러 흐른다. 따라서 그네의 사상은 非熱非寒[비열비한]하다(그 중에도 열렬한 사상자와 냉정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로 好奇尙新[호기상신]하면서도 영인과 같이 보수적 기질에 富[부]한 자는 드물다. 그렇게 보수 氣像[기상]이 굳세이나 세계의 신사조에 큰 동요 없이 응하고 있다. 온고지신의 태도로 은연히 움직이고 있다. 정치상으로 보더라도 의연한 군주 일체건만 노동당 내각이 섰다. 그 민중의 사조가 이러함을 따라 생활도 그렇게 나아가며 그 생활을 따라 문학도 그렇게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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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지적 현실적 인각적인 엄숙한 북방의 문학과 감정적 공상적 예술적인 艶麗[염려]한 남국의 문학과를 조화하여 지어낸 영문학은 영국민적이며 남북의 중간적으로 극단에 닿지 않아 어디까지든지 온건하여 중용을 얻었다. 그러나 이 중용에 伴[반]하는 因循姑息[인순고식]한 것과 決[결]한 듯하고도 미결한 불철저한 결점이 영문학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차츰 구태를 퍽 벗은 감이 없지 않으나 먼 앞길에 큰 빛이 있을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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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학은 영국과 사조가 같다. 그것은 언어도 같고 민족도 대부분 피를 같이한 까닭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차차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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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질의 대략은 상기한 바와 같거니와 이제 일보 더 들어가서 어떠한 변천이 있은 것과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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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주의는 의고주의라고도 이르는 것이니 고전주의의 화신이다. 현금에 恒言[항언]하는 의고주의는 곧 상고주의며 고전주의다. 15세기에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 이후로 비현실적인 기독교 사상을 배척하는 반면에 현실적인 희랍과 拉典文學[납전문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 연구는 창조적이 못 되고 희랍과 拉典[납전] 문학의 형식과 규율을 모방하였다. 희랍, 拉典[납전]의 예술은 통일ㆍ균제ㆍ명석ㆍ규율 등을 중히 하여 정서적 자연적인 데 반하여 知巧[지교]적이며 이상과 자아 즉 내용적인 데 반하여 형식적이며, 공상적 상상적인 데 반하여 현실적이었다. 이리하여 자아의 감정을 죽이고 이지적 형식에 依[의]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것을 총칭하여 의고주의라한다. 이 고전주의가 盛流[성류]한 것은 16세기로부터 18세기초까지여서 이 주의의 本素[본소]는 불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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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의고주의 문예가 성류한 것은 17세기 중엽이었으나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 18세기말까지도 그 정신이 흘렀다. 그러나 더 일대 문호 섹스피어의 감화가 컸었는 고로 그렇게 큰 해는 없었다. 섹스피어의 공은 참으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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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국 근대 문학을 씀에 여러 가지 의논이 있을지나 여기는 섹스피어 시대를 첫머리로 삼으려 한다. 물론 섹스피어 이전에도 스펜서, 쵸오서 등 이름높은 문호들이 있으나 그것을 일일이 기재치 않고 섹스피어로부터 쓰더라도 영국 근대 문학의 大要[대요]는 넉넉히 엿볼 수 있음일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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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가 섹스피어(1564~1616)는 호머, 단테, 괴테와 같이 세계의 四時聖[사시성]의 일컬음을 받는다. 섹스피어는 15세기말 문화가 찬란한 엘리자베드 여왕조에 났다. 때는 의고주의가 한창 팔을 펴는 때였다. 그러나 당당한 그의 필봉은 시대를 초월하였다. 古往今來[고왕금래]에 그와 같이 모든 형식을 벗어나며 시대를 뛰어난 이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한다. 그는 능히 문예 부흥이후의 비인간적 예술에서 탈출하여 일보 더 나아가서 인간적 사실적인 현세 문예의 원천이 되었으며 동시에 18세기말 낭만주의의 선구자로도 보겠다. 그는 이렇게 의고주의의 시대에 났으되 그것에 붙잡히지 않고 과거를 벗어나서 미래의 새 세계를 개척하였다. 엄격한 성격 묘사며 세밀한 심리 묘사는 而今[이금]까지도 많은 敬仰[경앙]을 받는다.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 것을 들면 아래와 같다. 『햄릿』『오델로』『十二夜[십이야]』『리어왕』『맥베드』『中夏夜夢[중하야몽]』『쥴리어스 시저』『베니스의 상인』 등이다. 거개 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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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피어의 희곡과 같이 유명한 것은 밀턴의 시이다. 그는 섹스피어의 곧 뒤를 이어 17세기 초엽으로 18세기초까지 영국 문단에서 큰소리를 친자이다. 북구의 壯美[장미]한 색채와 농후한 그의 붓은 웅대한 그의 사상과 장중한 그의 節奏[절주]를 그리기에 퍽 합당하였다. 그는 실로 주관이 깊은 시인이었다. 그는 고원한 이상과 강건한 의지를 소유한 청교도로 그의 謠[요]에는 종교 색채가 진하게 흐른다. 그의 작으로 유명한 것은『失樂園[실락원]』『復樂園[복락원]』이다.『복락원』은 신의 子[자] 기독이 죄를 贖[속]하여 한 번 잃었던 낙원을 다시 찾은 것을 읊은 노래다. 『복락원』은 『실락원』만큼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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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에 대하여 찬탄하는 이도 적지 않으나 비난하는 이도 많다. 찬탄하는 것은 雄揮無比[웅휘무비]한 대서사시라 하고 비난하는 이는 冗長不具[용장불구]의 주관시라 한다. 대개 북구의 壯美[장미]를 사랑하는 이는 찬미하고 남구의 우미를 찬미하는 이는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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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보다 좀 뒤진 浴人[욕인] 존 반연도 밀턴과 같이 청교도로 역시 종교 시를 쓰며 종교적 우화를 많이 썼다. 그는 밀턴같이 위대한 시인은 아니었으나 비상한 신앙을 가진 그는 감정도 열렬하였다. 『天路歷程[천로역정]』 『聖戰[성전]』등은 그의 작 중 유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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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학은 시가 대부분을 점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경향이 있다. 산문이 차츰 성하여지기는 18세기초부터였다. 스위프트며 데포오 등은 다 이때에 踵出[종출]한 산문가들이었다. 스위프트는 풍자 문학으로써 고금에 그 짝이 없다. 『桶傳[통전]』『걸리버 여행기』등은 그의 걸작으로 신랄한 풍자는 돌침으로 뼈를 지르는 듯이 쩨릿쩨릿하다. 데포오(1661~1731)는 저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를 지은 자이다. 『로빈슨 표류기』를 영국 어느 册肆[책사]에서 처음 인쇄할 제는 한 빈한한 문사의 이름없는 작으로 그리 대단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풍부한 사상과 주도한 정력으로 그려낸 모험적 색채가 넘치는 이 표류기가 서사 머리에 나오기가 무섭게 팔렸다. 이리하여 好奇當新[호기당신]하는 영인의 공상을 운청만리에 달리게 하였다. 그러나 문학적 견지로 비평하면 이 『표류기』는 예술적 가치가 적다. 데포오를 영국 소설의 개조라고 한다. 실로 데포오 이전에는 소설이 없었다. 데포오와 동시에 문인 에디슨도 경쾌무비한 필치가 영인의 성미에 잘 맞았다. 그는 시만 쓴 것이 아니다. 논객으로도 당당한 권위를 가졌었다. 이 외에도 시인 포읍, 뻐들러, 드라이든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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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언제든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것 외에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는 시인들과 같이 소설가들이 배출하였다. 소설가로는 리차드슨, 죤슨, 퓔뒹 등이며 시인으로서는 끄레이, 꼴드, 스밋 등 퍽 많았다. 리차드슨(1689~1761)은 소설계에 신파를 열었다 한다. 그는 인정의 기미를 잘 보아서 그것을 그렸다. 그 대표작 『클라리사 하아로오』는 당시에 있어서 인간 본위의 소설로 이름이 있다. 죤슨(1709~1884)도 영문단 소설계에 공헌이 큰 자이다. 그는 평민적 독립적인 주의를 가지고 붓을 들었다. 그는 교훈적 작품을 많이 지었다. 그의 걸작『라셀라스』도 교훈적 物語[물어]이다. 퓔딩도 존슨과 동시대이다. 의고 정신이 농후한 당시에 있어서 어디까지든지 현실적 사실적으로 쓴 것이 그의 특색이었다. 끄레이는 『墳上[분상]의 감상』의 작자로 유명한 시인이며 또 당시 유명한 시인으로 꼴드 스밋 (1728~1770)이 있다. 그는 시뿐 아니라 희곡ㆍ산문ㆍ소설에도 붓을 들어 상당한 지위를 얻었다. 소설로는 『웨이퓔드 목사』가 제일 고명하며 이외에도 전원시며 역사소설 등의 작이 많았다. 이 외에도 많은 작가가 있으나 일일이 들 여유를 못 가졌기에 더 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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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작가가 배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새에 문단의 조류는 차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 자연주의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18세기말에는 古城[고성]의 신비라거나 요괴라거나 하는 초자연적 괴상한 것이 묘사된 작품이 차츰 문단에 머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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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지 말아라. 세상을 위하여 개성을 버려라 ─ 하는 것이 의고주의의 중심 사상이었다. 어디까지든지 보편적이어서 상식 외의 사물은 모두 비문예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자기를 억압하는 것이 우승하는 작품일수록 首位[수위]를 잡았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진실히 느낀 것이라든지 사색한 것이라도 자유로 발표치 못하였다. 자연계에서 신비를 보았더라도, 비천한 사회에서 幽玄[유현]한 哲理[철리]를 얻었더라도 高遠熱烈[고원열렬]한 상상과 감정을 가졌더라도 발표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오랫동안 피동으로만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개성이 눈뜨기 시작하면 자기라는 것을 찾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개인주의적 사상이 사람의 가슴에 움돋기 비롯하였다. 이리하여 차츰 낭만주의가 나와서 재래 인습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에 개성을 중히 하며 자아의 이상ㆍ상상ㆍ정서를 자유로 발표하며 知巧[지교]적이 아니고 자연적인 것이 숭상되었다. 이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엽에 開端[개단]이 되어 19세기초에 이르러서 불란서를 중심으로 全歐文壇[전구문단]에 큰 동요를 주었다. 그러나 영국에는 낭만주의 운동이 크지 않았다. 의고주의의 영향을 그리 크게 받지 않은 영국 문학은 낭만주의 운동에도 큰 동요가 없었다. 큰 동요는 없었다 하더라도 역시 낭만 사조의 지배를 받았다. 실로 19세기에 들어서는 영국 문학에 낭만주의가 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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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낭만주의의 선구가 된 것은 뻔쓰, 쿠퍼, 블레익 등이다. 모두 18세기말 19세기초에 亘[긍]한 시인들로 그네들 시에는 혁명적 정신이 번뜩이는 신문학의 빛이 있었다. 신비적 낭만 정신이 가장 굳세인 것은 워즈워드, 코울릿지 들이다. 19세기 전 2년에 발표한 호반 시인 코울릿지와 워즈워드의 작집 『抒情詩[서정시]』는 공공연하게 의고주의에 대한 반동의 거포였다. 코울릿지(1772~1834)는 섹스피어 이래의 천재라고까지 이르는 신비적인 공상에 當[당]한 시인이며 비평가로도 상당한 位[위]를 얻었다. 워즈워드(1770~1856)는 분전고투로써 일생을 꾸민 시인이다. 그는 실로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매 그 속에서 대우주의 생명과 접하며 신비를 얻는다는 일종 종교적 신앙까지 가지었다. 그는 어떠한 자연의 속에서든지 남이 찾지 못하는 유현 오묘한 진리를 찾았다. 그의 시는 取材[취재]는 평범하고도 想[상]이 풍부하며 감정이 자연이면서도 열렬하여 무한한 감회를 준다. 그 작에는 『테인타안 精舍[정사]의 數里[수리]의 水上[수상]에서 읊은 노래』『幼時[유시]를 追懷[추회]하여 불멸을 知[지]한 노래』『吾等[오등]은 七人[칠인]』『最后[최후]의 小羊[소양]』등 명편이 있다. 그는 낭만주의의 선구인 동시에 자연주의의 색채도 농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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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요 소설가인 스캇(1771~1882)도 낭만주의 운동에 공헌이 크다. 그의 작은 영국뿐 아니라 불란서, 이태리, 독일, 러시아 등 대륙 문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중 『湖上[호상]의 美人[미인]』은 그의 명성을 높인 서사시다. 소위 이 호반 시인 일파가 쇠미하는 때에 바이런, 키이츠, 쉘리의 3대 시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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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壞的[파괴적] 氣焰[기염]을 강렬히 토하여 낭만적 풍조를 잘 대표한 것은 바이런(1788~1824)이다. 그는 우울한 기분과 애절한 정회에 번뇌하면서도 반항적 정신이 굳세고 분방한 정조를 토하여 꺼리는 바가 없었다. 특히 바이런의 시가 영국보다도 도리어 대륙 문예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 때문이다. 방종한 그는 도덕상 비난으로 드디어 본국에서 쫓기기까지 하였다. 그 작으로 저명한 것을 들면 『돈쥬안』『맨푸렛드』『차일드 헤롤드』『카인』등이다. 그는 만년에 희랍 독립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원의 침묵 속에 들었다. 키이츠(1795~1821)도 반항적 정신이 굳센 시인으로 이상을 추구하며 춘광과 같은 선명한 진미를 찾았다. 그 걸작으로 『하이피리온』『쎈트에끄니쓰의 夜[야]』『희랍 古甁[고병]의 賦[부]』등이 있다. 키이츠와 동시대인으로 그의 사상을 같이한 것은 쉘리이다. 그도 역시 현실 생활의 고통을 벗고 별천지에 신이상을 동경하였다. 『구름』『종달이』『西風[서풍]의 歌[가]』『悲嘆[비탄]의 賦[부]』등 걸작이 있다. 이 외에다 뿌라우닝(夫婦[부부] 로셋티) 등이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入[입]하여 전세계를 흔들기 시작한 과학 사상은 감정에만 편하는 것을 許[허]치 않았다. 이에 지식과 감정과를 조화한 낭만 자연주의적 풍격을 가진 시가 새로 나게 되었다. 뿌라우닝(夫[부]) 作[작] 『指環[지환]과 册[책]』이며 극시 『힛파 파세쓰』며 테니슨의 작 『이녹 아덴』『인메모리엄』등은 그네의 사상을 잘 말한다. 이렇게 지식과 감정을 조화하는 일면에 순감정파로 라파엘 前派[전파]가 있었다. 이것은 이태리의 大畵伯[대화백] 라파엘 前[전]의 화법을 존중하는 일파로 1847~1848년경에 영국에서 창시되어 로셋티를 중심으로 신비적 중세 정신과 자연의 열정의 미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사상은 영국의 陰畵界[음화계]에 먼저 일어나서 시가계에도 위관을 呈[정]하였다. 로셋티(1828~1882)의 작 소곡집 『생명의 家[가]』는 세평이 가장 높은 것이다. 이 밖에도 작가의 작품이 많으나 일일이 들지 못한다. 그런데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영문학의 중심은 시가이다. 낭만 시대를 꾸민 것은 이 詩歌家[시가가]들이었다. 쓰콧같은 소설가들도 있었으나 그 역시 本領[본령]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으로 사실주의의 소설도 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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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시대 및 최근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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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로 解[해]하면 사실주의의 작자나 자연주의의 작자나 동일하다. 다 과학적 사상에서 산출된 주의로 적나라하게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해부하며 쓰려는 주의이다. 이러므로 공상적ㆍ주정적인 낭만주의에 반하여 현실적이며 이지적이다. 그러나 개성을 產[산]하게 여기는 점은 낭만ㆍ사실ㆍ자연주의가 다 공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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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사실주의 ─ 자연주의가 단서를 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말 쓰콧, 워즈워드 등이다. 이래 그 사상의 명맥이 미미히 흐르다가 쌕커리, 디킨즈 등에 미쳐서 사실주의의 경향이 확실히 현시되었다. 쌕커리(1811~1863)는 냉정한 관찰로 객관적 묘사가 빼어났다. 그는 상류 사회 묘사에 성공한 자이다. 그 걸작으로 『虛榮市[허영시]』의 한 편이 있다. 쌕커리와 같이 소설가로 유명한 디킨즈(1812~1870)도 또한 사실 묘사에 妙[묘]를 얻은 자다. 쌕커리가 상류 사회를 잘 그렸음에 반하여 디킨즈는 하류 사회를 즐겨서 그렸다. 그의 작으로 『크리쓰마쓰 캐롤』『픽윅 페이퍼스』등이 유명하다. 그의 작은 쌕커리의 작과 같이 냉랭치 않았다. 따뜻한 기분이 어리었다. 심리적 묘사로 유명한 규수 작가 엘리엇이며 主我[주아]주의적 정신이 횡일하는 『자아주의자』의 작자 메레딧(1828~1909)도 이때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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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 자연주의의 작가로 유명한 이가 많으니 냉정한 태도와 염세적 기분으로 전원 생활을 잘 묘사하는 『떠버빌쓰의 테쓰』의 작자 하아디(1840~ )며 심리 묘사의 대가요 심원한 철학적 색채를 작중에 藏[장]하기로 특색 있는 『한 부인의 초상화』『비둘기 짓』의 작자 제임스며 『근래의 사랑』『배우의 처』의 작자 무어는 다 그네들이다. 이리하여 자연주의 ─ 사실주의의 경향은 영국 소설의 주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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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열거한 작가 외에도 키폴링(1865~ )이며 시인 라벗 뿌지며 시인이며 또 평론가인 아더 씨몬즈며, 탐정 소설가 코오넌 도일 등이 있으며 이외 현하 영국의 중견인 『아르메니아의 愚行[우행]』『靑春[청춘]』의 작자 콘랏드(1857~)며 통속 소설가로 知名[지명]한 홀케엔(1853~ ) 등이 있어서 역시 사실적 자연주의적 경향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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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남, 화려와 質朴[질박] ─ 이 중간을 얻어서 온건 중용한 영문학은 애란문학의 발흥에 인하여 놀랄 만치 急劇[급극]한 변동이 있었다. 애란 문학의 대표적 작가를 들면 오스카 와일드와 버나드 쇼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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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다(1856~1905)는 영문단에서 보기 드믄 극단의 유미파로 예술 지상주의를 표방한 자이다. 그도 역시 라파엘 前派[전파]의 여맥을 이은 자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에도 육감적 특색이 현저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바랄 것은 쾌락이다. 쾌락 중에서도 관능적 육체적 쾌락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관능의 작용을 예민히 하여 육체상의 쾌락을 향락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것은 와일드가 그 작 『또오련 끄레에의 肖像[초상]』중에 쓴 구절이다. 아마 이것이 그의 중심 사상이겠다. 그는 「架空[가공]의 퇴폐」라는 論中[논중]에 극단의 예술 지상주의를 高唱[고창]하여 인생을 위하는 예술이라거나 비향락적 예술을 몹시 배척하였다. 그의 작으로 유명한 것은 『또오련 끄레이의 초상』외 희곡 『쌀로메』등이었다. 그의 예술에는 신경과민으로 出來[출래]하는 떼카단 색채가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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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의 예술 지상주의에 반하여 인생을 위한 예술주의를 唱[창]한 것은 역시 같은 애란 희곡가 쇼오(1856~ )다. 생생한 勇進[용진]적 인격을 가진 그는 예술에도 그 빛이 흘렀다. 그는 확실한 철리의 위에 서서 만인 공존을 위하여 사회 개조의 큰 이상을 가졌었다. 그는 어디까지든지 비합리한 사회를 개조하여 인생의 正道[정도]에 적합케 하려고 하였다. "사람을 위하지 않는 문학은 절대 쓰지 않는다." 한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늘 인생을 향상시키며 결함 많은 사회에 모든 어두운 허깨비를 부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행복을 얻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또 그렇다고 그의 부르짖은 파괴는 무희망한 파괴가 아니었다. "우리는 전력을 들여서 생존할 것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하한 고통이 當前[당전]하든지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 할 것 없이 피할 것 없이 그것을 체험하며 헤치고 나아갈 용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한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에 그의 특색이 있으며 인생적 의의를 가진 그 정신이 영문단을 위시로 각국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 위대하도다. 쇼오의 희곡이여! 그의 작 중 가장 고명한 것은 『월런 부인의 직업』『人[인]과 超人[초인]』『유넵어켄텔』등이다. 그 중 『월런 부인의 직업』은 매춘부의 입을 빌어서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통절히 풍자한 작이다. 그는 실로 용진적 도전적의 애란인의 특질을 잘 발휘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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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현하 애란 문학자에 시인이요 희곡가로 시 『갈대와 싸우는 바람』극으로 『無何有鄕[무하유향]』『텍오도라 아기씨』의 작자 예이츠(1865~ )며 『谷蔭[곡음]』『海[해]의 기수』『성자의 泉[천]』작자 씽그(1875~1909)며『長男權[장남권]』의 작자 마레이(1873~ ) 등은 다 저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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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을 果枝[과지]에 비유하면 비료와 剪刀[전도]는 평론이 되겠다. 좋은 과목을 배양하려면 비료와 전도의 힘을 빌지 아니치 못하겠다. 이와 같이 시가ㆍ소설ㆍ희곡의 성쇠는 평론의 성쇠에 伴[반]하는 일이 많다. 그런 고로 “어떤 의미에서 평론은 창작이다” 하는 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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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국 문단의 평론계를 보면 그 위대한 發遠[발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평론계는 영국 창작계에 비하여 훨씬 나은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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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인으로서 의고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평을 개창한 워즈워드, 코울릿지 2人[인] 이래로 19세기 중엽을 지나서부터 평론계는 끓기 시작하였다. 아아놀드는 19세기 후반의 비평가이다. 그는 '예술을 위하는 예술파'의 견지에서 필봉을 들었다. 그는 비평의 표준을 실인생에서 떠나서 문예 자신에 구하였다. 아아놀드는 佛[불]의 싼 부우브, 獨[독]의 렛싱과 아울러 근대 3人[인] 비평가라고 칭한다. 아아놀드와 동시대에 칼라일(1705~1881)이 있었다. 아아놀드가 예술파 견지에 입각함에 대하여 칼라일은 인생파였다. 그는 실인생에 공헌이 없는 문예는 문예의 가치가 없다고 논하여 진문예는 일국의 문명을 지도치 아니치 못할 것을 말하였다. 그 논저로 『괴테론』『영웅숭배론』등이 저명하다. 이외에 섹스피어 연구의 泰斗[태두] 도오덴이며 쾌락주의 견지에 선 페이터(1839~1894)며 문학사가로 유명한 쎄인츠뻐리며 저 유명한 '표상파의 문학 운동'의 저자 씨몬즈 등은 다 근세 각국 문단에 知名[지명]한 평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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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아직 세계적 文士[문사]가 없으나 전도에 양양한 희망을 품고 있다. 여태까지의 미국 문학은 대체로 영국과 동일시하여도 큰 실수될 것 없다. 미국에 가치 있는 문학이 출래한 것은 『스켓치북』의 작자 어어빙 이후이다. 어어빙(1721~1859)은 희락의 중에 애수를 품은 작가였다. 앨런포오 (1809~1849)도 이때 작가다. 그의 작에는 사진 색채와 자연파 냄새가 교묘하게 조화되었으며 쾌락을 寫[사]하는 것으로써 예술의 최고 천직이라 하였다. 미국 문학자로서 세계 문단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마 이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실로 세계 문단에 중요 위를 有[유]한 대시인이다. 그는 시뿐 아니라 산문도 잘 썼다. 산문으로는 「붉은 影[영]의 가면」「黃金蟲[황금충]」「黑猫[흑묘]」시로는 「鴉[아]」「警鍾[경종]」등 모두 그의 걸작이다. 그의 민감과 비통한 사상에 채색한 신비적 작품은 명확히 근대 떼카단 문학의 선구이다. 포오는 일찍 병과 음주로 생애를 마친 자로 그 경우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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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수필가요 시인인 에머슨(1803~1882)이며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청교도적 정신을 발휘한 시인 롱펠로우(1607~1682), 「森林生活[삼림생활]」의 작자 삼림 시인 쏘로오(1817~1862)며 미국민 정신을 가장 강렬히 읊은 휘트만(1819~1892)이며 『蛙[와]의 踊[용]』『赤毛布[적모포]』 작자 마악텐(1835~ ) 등은 유명하다. 그 중 마악텐은 미국민의 요소라고도 할 滑稽趣味[활계취미]가 풍부한 작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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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의 차이점 및 그 양문학의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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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잘 아는 바로 미국 문학은 근세 영국 移住民[이주민]간에 발생한 것으로 지역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조류는 대체로 영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흔히 영문학의 일지맥으로 본다. 그러나 이제 일보 더 들어가서 그 내면을 세밀히 더듬을 때에 우리는 영미 문학의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상에 누누이 말한 바 영문학은 온건 중용을 얻었다. 이 구속스러운 古道德[고도덕]에 被囚[피수]된 영문학에 반하여 해방적이요 無頓着[무돈착]이요 평민적 색채를 가진 것이 미국 문학의 특색이다. 그것은 여러 민족의 피를 받았고 데모크라씨에 富[부]한 미국민 생활에서 반영된 것이니 으례 그럴 것이다. 그리고 현실 생활에서 만족을 가진 그네에게는 동경이 없으면 꿈이 없다. 그와 같이 그네의 문학에는 예술적인 따뜻한 맛이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든지 해방적이며 평민적인 데 그네의 문학의 특색이 있는 것이라 반드시 앞으로 큰 발전이 있을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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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문학도 현금 세계의 대세에 응하여 인생적 조류의 세련을 받고 있다. 반드시 세계적 큰 소리가 나올 것이다. 현금도 평론계는 각국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영문학의 대부분은 희곡과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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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문학도 현금 세계의 대세에 응하여 인생적 조류의 세련을 받고 있다. 반드시 세계적 큰 소리가 나올 것이다. 현금도 평론계는 각국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영문학의 대부분은 희곡과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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