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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은 권운층 위 산정에 고인 맑은 못이다. 이 이름으로 제한 시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1941년 9월 그때는 문화 부면에 종사하는 무리들까지 억압하는 세력에 아첨하여 한참 더러운 꼴을 백주에 내놓고 부끄럼을 모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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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 은 용이하게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장수산) 곳에서 그때를 초연할 수 있었다. 남들은 작가 생활을 계속하려고 추악한 현실에서 발버둥치기도 하고 혹은 비굴한 억합(抑合)으로 얽매일 때 이 세 계를 벗어나 오로지 자기 순화를 꾀하고 깨끗함을 지키기에는 그가 취한 언어만의 연금술 더 찍어 말하자면 감각만의 연금술이 유리한 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라고 아무나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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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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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 속에도 세속의 일이 낑긴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는 엄연한 현실이며 애절한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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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탁마하여 자구자구가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위치를 차지하여 우리나라 풍경물시에 무류(無類)의 보옥(寶玉)을 가져온 지용사 그러나 이 희유의 연금술사도 한번 냉혹한 현실면에 부닥치면 선상(船上)에 끌려온 신천옹(信天翁) 모양 그 화려하던 날개깃도 보기 싫게 퍼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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끗치 아니나 늘면 무엇하리 조로 맺어진 소곡과 맨 앞에 인용한 「백록담」의 일련은 다부찬 현실을 속세라고 피하여 따로 나간 사람이 그 속세에 발목을 잡힌 좋은 예이다. ⌜백록담⌟의 일절에서 그 완전한 지향은 없었다 하나 민족적인 애상과 비감을 포착한 것은 공통적인 우리의 표현이라 하면 「소곡」의 센티와 자폭(自暴)은 ‘지용’ 개인 본심의 꽁지를 남의 눈에 띄우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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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백록담』은 전편을 통하여 이것을 시학생의 에튀드로 돌린다면 찬란하였을 것을……. 그러나 그처럼 숨기려 하는 자아 감정이 이 희유한 연 금술사로도 가릴 수 없어 군데군데에 그가 입각한 토대-그리 높지 않은 차라리 안 보는 편이 나았을 태(台)는 드러나고야 만다. 일찍이 넘쳐나는 춘 정(春情)의 회의와 움트는 자의식을 풀 잔이 없어 가톨릭에 귀의한 ‘지 용’ 사 그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보는 한 이 치열한 정신을 육체로서 받아 들인 것이 아니라 커다란 외형적인 힘에 안도하여 완전한 형식주의자에 빠져던 것이다. 1935년에 『정지용시집』을 세상에 물은 후 그냥 묵묵불언하던 그가 여러 해 만에 다시 발언한 것은 이가 시릴 만큼 맑게 닦여진 형식의 세계임은 필연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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