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름같이 자연과 친하기 쉬운 시절은 없으리라. 풀도 한껏 푸르고 나무도 한껏 우거진데 풀다님 맨발로써 시름없이 소요(逍遙)하는 맛이란 속된 말로는 형용하기도 어려웁다.
3
우연히 써 놓은 풀다님 맨발이란 말에 귀여운 어릴 때의 기억이 문득 난다. 그 때 내가 열 두 살이든가 열 세 살이든가. 우리 고장에서 한 십리 되는 '앞산'이란 데 놀러를 갔었다. 해는 거웃거웃 서산으로 넘어가 장엄하고도 힘없는 광선이 불그스름하게 나뭇가지에 걸렸을 제 귀여운 처녀 둘이든가 셋이든가 고목 나무 등걸에 앉은 내 앞 멀지 않게 나물을 캐고 있었다. 새 새끼가 날기를 배우는 것처럼 잠깐 걸었다 주저앉고 주저앉고 한다. 그때 이상하게도 그 처녀들의 맨발이 나의 눈을 끌었다. 유순하고도 폭신폭신한 파란 풀 속으로 그 발들은 잠으렀다 떠올랐다. 아마도 바루 그 산 발치를 씻어 나려가는 시내에 씻고 또 씻었던지 그 발의 희기란 거의 눈과 같지 않은가. 미끄러지는 듯 잠으락질하는 듯 풀 위로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그 예쁜 발들은 마치 물속에 넘노는 은어(銀魚)와도 같았다. 어쩐지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 발에만 눈을 주고 있었다. 10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나의 기억이란 풀밭에 그 발들은 이따금 솟았다 잠으러졌다 한다. 그 때도 물론 여름이었다. 지금 그 처녀들은 어데 가 있는가.
4
말이 빗나가 얼토당토않은 옛 이야기에 벌써 정한 페이지는 채워지고 말았다. 문득 그 기억이 나고 보니 어느 사이에 나를 버리고 뒷걸음을 쳐 버린 과거가 돌아다 보이고 또 돌아다 보여 딴 것을 쓸려도 쓸 수 없다. 여름이 되면 나는 맨발을 연상(聯想)한다. 그러고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처녀들의 현재와 장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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