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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농업학교 앞을 지나 산허리길을 더듬더듬 올라갔다. 신작로를 보던 눈에는 초라한 촌길이나 그래도 옛날에는 호남 대로이었었다. 교통 기관이 없었던 그때이오 봉건 제도의 주종 관계가 심하였던 그때이라 이리로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은 四人轎[사인교]로 저 들길을 지나고 이 산길을 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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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알지 못할 옛날의 꿈을 마음 속에 꾸면서 바른편 골을 내려다보고 더듬더듬 걸어 올라 산허리 길가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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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國[북국]에는 그저 눈이 펄펄 날릴 터인데 여기는 어느새 보리가 두세 치나 자라서 녹색이 돋은 논판으로 스쳐오는 실바람에 두어 살 된 어린애 머리카락같이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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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으로 玉女峰[옥녀봉] 아랫골에 벌어진 논뺨들은 지형을 따라 수평을위하여 뺨뺨이 엇이은 것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신비로운 궁전의 층계돌 같다. 뺨마다 녹색이 푸르고 간밤 스친 비에 유들유들하니 그것은 유창한 비취축대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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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푸른 앞언덕을 스치어서 멀리 내다보이는 높고 낮은 산물결들은 아른한 엷푸른 안개에 윤곽만이 희미히 떠올랐다. 바로 서남편으로 일 마장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城內[성내]의 공기도 아른한 하늘 아래 따분한 저녁빛 속에서 조는 것 같다.
9
청춘을 위하여 쉬어 주지 않는 볕은 점점 서산에 가까왔다. 그가 하루의 소임을 다하고 마지막 운명의 길을 들게 되니 그는 온몸의 힘과 열과 光[광]을 다하여 온누리를 더욱 눈부시게 더욱 붉게 물들였다. 이 웅장한 태양의 최후 일막의 餘影[여영]에 들은 산이며 들이며 그새에서 움직거리는 생물들까지도 최후 일막을 연출하는 꿈속의 꿈같이 내 눈에 비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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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에 저렇게 붉어져서 몇 억 몇 천의 세기를 스쳐왔는지 가물다물 하는 밤하늘 뉘 별들이나 알까 ? 나로서는 추측도 못 할 玉女峰[옥녀봉] 푸른 높고 높은 봉우리도 아침 햇발에 보여 주던 偉觀[위관]은 스러지고 그윽히 머리를 숙여서 마지막 넘어가는 저 햇발의 만가를 꿈꾸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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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夕煙[석연]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붉은 석양 속에 푸른 장막을 펼치었다. 먼산은 더욱 흐리고 가까운 언덕과 들에 보이는 농군들의 동작은 그 빛 그 기운에 더욱 아른히 싸여서 천지는 더욱 꿈속이다. 길가 속잎 나는 잔디판에 앉아서 그 모든 것을 보던 나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곁에 앉은 동무들도 꿈을 꾸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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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봄은 꿈이다. 그는 꿈같이 와서 꿈같이 허리를 싸고 돈다. 그러나그 꿈은 옛날의 죽은 벗들을 생각하는 늙은이의 꿈은 아니다. 미래를 향하여 뛰고 발육을 위하여 動[동]하는 젊은이의 꿈이다. 교태를 머금은 처녀의 눈동자같이 속에는 끝없는 생명과 불타는 열정을 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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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보고 앉았으니 시들어 가는 이 청춘의 가슴에도 한줄기의 실 비가 스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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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옆으로 받고 황홀히 앉았던 우리들은 김군의 손가락 끝을 스쳐 玉女峰[옥녀봉] 나지막한 산에 시선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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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한 경계로 위는 송림이오 아래는 보리가 실바람에 하늘거리는 그 산 비탈길에 언제 올라왔는지 바랑을 지고 송락을 쓴 탁발승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붉은 볕을 모로 받고 올라가다가 錫杖[석장]을 돌려 석양을 등지고 보리밭가 속잎 나는 잔디판으로 송림을 향하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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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봄꿈에 취하였던가 ? 아니면 속잎 나는 잔디를 밟기가 발바닥이 간지러웠는가 ! 70된 老[노]박이 아니면 2, 3세된 어린애와 같이 錫杖[석장]에 의지하여 발랑발랑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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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승의 그림자가 먼 하늘의 저녁빛같이 송림에 스러지자 마자 처음 그 僧[승]이 올라가던 그 비탈길로 말쑥한 춘복[春服]에 말을 몰아 마을로 내려오는 行客[행객]이 있다. 석양이 비낀 길에 말을 채치는 그 그림자를 보니 옛날의 唐詩[당시]를 읽는 듯도 하고 水墨[수묵]으로 그어놓은 그윽한 고전서를 보는 듯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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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娑婆[사파]가 귀치않아 산으로 가는데 하나는 산을 버리고 사바로 향한다. 이것이 사람의 생활인가 ? 나는 그윽히 가슴을 만지면서 여럿을 따라서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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