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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는 이의 군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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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4
최서해
1
흐르는 이의 군소리
 
 
2
하룻밤에 천 리
 
 
3
나는 한양을 떠났읍니다.
 
4
떠나고 싶어 떠난 것도 아니요, 다른 갈 곳이 있어서 떠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처없이 흐르고 싶어서 떠난 것도 아닙니다. 지긋지긋 견디다 못하여 쫓기다시피 떠났읍니다. 이렇게 되니 나는 서울서 떠나는 날까지 어디로? 하고 생각하였읍니다. 북으로 갈까? 남으로 갈까? 동으로 갈까? 서로 갈까?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를 하였으나 쫓겨가는 사람에게 목적지가 있을 리 없었읍니다. 그렇다고 목적을 세우지 않는 것도 더 어리석은 일 같았읍니다. 이렇게 며칠 밤을 꿍꿍 앓은 동티가 났읍니다. 그리고 묘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된다고 하면 내 팔자로 보아서 그런 행운이 없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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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사가 너무도 뜻대로 되지 않기에 이번 안출한 계책에도 반신반의를 품었읍니다. 그러면서도 끌리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먼저 호남 들러서 마산까지 가기로 작정하고 어젯밤에 경성역에서 차를 탔읍니다. 여러 벗들이 역까지 나와 주어서 떠나는 사람의 정회가 별로 쓸쓸한 줄 몰랐읍니다. 마침 설쇠려 귀성하는 金永鎭[김영진]군과 대전까지 같이 가게 되어서 같은 차실에 탔읍니다. 그러나 두 청춘의 낯에는 활기가 보이지 않았읍니다. 넓은 천지에 용납할 곳 없이 흐르는 내 마음이야 어찌 좋으리까마는 귀성하는 김(金)군의 낯에도 어두운 빛이 흘렀읍니다. 그의 형편을 짐작하는 나는 가슴이 뻐끗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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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김]군은 서울서 나와 조석 상대하는 벗이외다. 만나는 때마다 주고받는 이야기에 해지고 달뜨는 줄 몰랐더니 어쩐지 이날 밤에는 서로 묵묵히 앉아 있었읍니다. 서로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다가는 눈을 떠 서로 보고 쓸쓸한 웃음을 짓는 사이에 차는 전속력을 내어서 달아났읍니다. 나는 간신히 알지 못하는 나라로 끝없이 실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서리친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았읍니다. 어둠에 싸인 들에 남은 눈이 언뜻언뜻 보이고 하늘에는 찬별이 가물가물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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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은 오지 않고 머릿속에는 푸른 생각이 돌아서 앉았다 누웠다, 누웠다 앉았다, 하는 새에 대전역에 닿았읍니다. 여기서 호남선과 경부선이 갈리는지라 김군과 손을 나누게 되었읍니다. 때는 오전 두시 팔분, 동천에 방긋이 돌던 새벽달은 동서로 갈리는 두 청춘의 가슴속을 엿보는 듯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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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고 차창에 비켜앉아 밝는 날이면 대할 어머니와 아내의 낯을 꿈꾸고 있을 金[김]군을 상상하면서 푸른 달 흐르는 별을 내다보니 더욱 쓸쓸하여 졌읍니다. 신문을 펴들었으나 공연히 들먹들먹해서 읽지 못했읍니다. 하룻밤이 어찌 그리도 지루하였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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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잠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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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동천이 벌겋게 타올랐읍니다. 나는 차창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읍니다. 아침 바람이 좋았읍니다. 한강은 그저 스케이트를 타는데 여기는 논물도 얼지 않았읍니다. 아침볕에 타오르는 채운이 잠긴 논물은 한 폭 수채화를 보는 듯하였읍니다. 뼈만 남은 숲 속에 어른거리는 먼 촌에서는 푸른 연기가 오릅니다. 만일 이 넓은 벌에 황금물결이 향기를 날릴 제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으리까? 이런 상상을 하는데 남부여대로 오두두 떨면서 길가는 동포가 보입니다. 나는 가슴이 찌르르하였읍니다.
 
11
아침볕이 죽 퍼져서 송정리역에 내렸읍니다. 하룻밤에 천 리 온 것을 생각하면 문명의 헤택이 큰 것도 같으나 그 물결이 커갈수록 시드는 생령이 늘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미웁기도 그지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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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자동차로 영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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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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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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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서 세 시간 견디기에는 너무도 지리하였읍니다. 그것도 이른 가을 서늘한 바람이 치는 때나 늦은 봄 진달래 붉은 때 같으면 세 시간이 아니라 서른 시간인들 지리하리까마는 아직도 쌀쌀한 바람이 뺨을 치고 험한 길에 궁둥이가 부서질 듯하니 일각이 새로왔읍니다. 그러나 차가 소리를 치면서 소산을 넘어선 때에는 기꺼움에 가슴이 두근두근하였습니다. 때는 오후 두시, 곧 구름군을 찾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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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보던 물무산 관람정과 그리던 벗들을 대하니 즐거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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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지금 보리가 푸릅니다. 하늘을 버티고 선 삼각산 봉우리에 눈이 그저 쌓인 것을 보고, 한강에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보고 와서 청산과 보리밭을 보니 바로 강남에나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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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까지 부실부실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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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여창 등잔 아래서 빗소리 듣기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남국에 내리는 봄비이고 듣는 사람은 북극의 얼었던 몸이니 감회가 더욱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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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넝쿨 아래서 속삭이는 첫사랑에 취한 색시의 소리 같기도 하고, 누에가 뽕 먹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또는 나를 못 잊는 임께서 조용한 밤을 타서 오시는 자취 같기도 하고, 둘 데 없는 이 마음을 멀리멀리 구름 밖으로 살살 끌고 가는 듯도 해서 견딜 수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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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창을 활짝 열었읍니다. 창을 스쳐 나가는 등불빛은 캄캄한 뜰에 넓게 흘렀읍니다. 그 속에 실같이 내리는 빗발은 그윽하고도 아름답습니다. 바람은 한점 없는데 그윽한 향기를 실은 축은한 기운은 부드럽게 코를 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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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에 팔을 괴고 앉아서 이 비 뒤에는 마른풀이 속잎나고 강남 갔던 제비들이 옛집 찾아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즐겁습니다. 그러나 만물이 즐겁게 피어날 봄을 당하여도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고 이리 쪼들리고 저리 쪼들려서 갈 바 올 바를 모르고 필동말동한 신세를 생각하니 하늘을 우러러 웃음 밖에 나오는 것이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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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웁니다. 그만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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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속에 울려오는 새벽 닭소리는 퍽 신비롭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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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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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병인 정월 초하룻날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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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설은 참 고요합니다. 더구나 내가 있는 구름벗의 집은 거리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더욱 조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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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얼마나 분주잡답할까 하고 천 리에 마음을 달리니 다니던 길, 대하던 벗들이 눈이 밟힙니다. 그러나 떡을 치고 술을 빚어 서로 주고 마시며, 몰려다니면서 꽹매기 치는 것은 시골 설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줄 믿습니다. 일 년내 땀 짜 가던 농사꾼들에게는 이것이 큰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우리 조상이 남겨 둔 놀인가 생각하니 감개가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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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설은 한양 한 귀퉁이에서 쓸쓸히 지내었더니 올 설은 뜨뜻한 방에서 배불리 쇠옵니다. 객지에 흐르는 몸이 이만하면 상팔자겠읍니다. 그러나 가슴이 아픕니다. 이른 새벽부터 몰려오고 몰려가는 세배꾼들을 보니 더욱 가슴이 쓰립니다. 나는 세수한 뒤 옷깃을 바르게 하고 구름벗 어머니께 세배를 드리다가 코가 찡해서 남모르게 눈물을 머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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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지 몇 해냐? 그새에 봄바람 가을달이 한두 번만 아니었읍니다. 이 몸이 죽어져서 진토가 된들 어머니 생각이 한시나 변하리까마는 지금껏 슬하에 뫼시지 못하였읍니다. 내 주먹이 이 사회를 존속시키는 날까지 이한이 늘 서리서리 엉길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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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친구들이 그 무릎 아래 가서 엎드릴 제 어머니 눈물은 얼마나 흐르시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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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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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같은 자취가 法聖浦[법성포]로 왔읍니다. 映湖[영호]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곳으로 오성(영광)시 서쪽으로 30리. 바다와 산이 좋은 곳입니다. 또 이름 높은 영광 굴비의 소산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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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편에 金[금],曹[조],魏[위], 구름벗과 함께 이르니 앞내에 드는 물과 뒷 산의 푸른 솔은 의구한 정취를 머금었건마는 작년에 함께 즐기던 벗들 가운데는 혹은 동으로 혹은 서쪽으로 불린 이가 많습니다. 거기다 내 꼴까지 옛 꼴이 못 되니 한량없는 정회를 이루 어찌 다 쓰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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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달을 밟으면서 갯가에 배회도 하고 초를 밝히고 모여 앉아서 흉금도 펼치고 하여 그럭저럭 밤을 새고 오늘은 드는 물에 배를 저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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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 뒤라 따스한 볕에 만물이 살아 뛰는 것 같습니다. 산그림자 잠긴 넘실히 빛나는 물에도 푸른 빛이 흘러서 봄뜻이 자못 깊습니다. 어기어차 노소리를 따라 철부덕철석 뱃몸이 움직이는 때면 솔푸른 산들도 오르락내리락 흔들리는 듯합니다. 이러구러 대덕산 아래 강통 바다에 돌아오니 햇볕은 더욱 다정하고 물결은 한껏 고요한데 물 위를 고이고이 스쳐오는 실바람에 은은히 들리는 젓대 소리는 젊은 손의 가슴을 몹시 찌릅니다. 이것이 應岩漁笛[응암어적]이라 하여 法聖十二景[법성십이경]에 드는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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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은 웃고 노래부르고, 뱃전을 치고 하여 고요한 밤하늘에 소란을 일으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읍니다. 고요히 앉아서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안개같은 구름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으리까마는 모두 호화로운 벗님들이라 잠잠히 있기는 싫어합니다. 갯가에는 한 손에 호미들고 또 한 손에 망태를 들고 개똥 줍는 사람이 있읍니다. 세상에는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이 봄빛까지 빼앗기고 그을음과 먼저 구덩이에서 말라가는 이가 많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내 가슴에는 그윽한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아아 세상은 이리도 고르지 못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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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물에 올리저었던 배를 썰물에 내려놓으니 맛이 그럴 듯합니다. 부드러운 바람까지 고물〔船尾[선미]〕을 슬금슬금 알심 있게 밀어 줍니다. 바로 순풍에 돛을 달고 무릉도원이나 찾아가는것 같습니다. 나는 이물〔船頭[선두]❳에 가만히 앉아서 앞으로 푸른 물을 굽어보고 멀리 영호정(映湖亭)과 솥드랑섬〔鼎島[정도]❳을 바라보고 있으니 바람은 나를 스치고 머릿속에는 지난 가을 일이 떠올랐읍니다. 지난 가을 이 바다에 달은 어찌 그리도 밝았던지요? 하늘이 바다런가, 바다가 하늘이런가. 바다에도 달이 있고, 하늘에도 달이 있어, 하늘빛 바다빛이 서로 어우러진 새에 찬 것은 속삭이는 물소리였읍니다. 거기에 한조각 배를 띄우니 때조차 음력 7월 보름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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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송나라 문장 소동파가 적벽강 놀이하던 때였읍니다. 그때 金玉[김옥]이라는 방년 29세의 고은 이가 있어 노래 한 장을 장고에 맞춰 부르니 마디마디 괴로운 세상을 저주하는 듯하고 소리소리 속절없는 일생을 하소연하는 듯해서 윤락한 손의 애를 몹시도 끊더이다. 옛적 백낙천이도 심양강 가을달에 이리하여 눈물을 뿌렸나보외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생각하니 한바탕 지난해 꿈입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무찌르고 갑니다. 인생이 과연 그런 것이라 하면 너무도 무상하게 생각됩니다. 참말 인생은 이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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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金[금],曹[조],魏[위]군은 오성으로 돌아가고 구름벗과 나만 남아서 南宮[남궁]군의 사랑방을 차지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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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달이 퍽 좋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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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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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력 정월 열나흗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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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이날 밤에 밭머리와 산에 불지르는 풍습이 있읍니다. 벌레구이라 하여 밭머리에 불을 지르면 농사에 해되는 버러지가 타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지른 자리에서 삐비라고 연하고 맛있는 풀이 돋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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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이제나 철없이 즐겨하는 어린것들은 벌써 낮부터 밭머리에 불을 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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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터자바, 신구녀, 지게 자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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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치면서 뚝뚝 뜁니다. 그 무슨 소린가는 모릅니다. 그것들 놀이도 귀엽거니와 푸른 연기 오르는 속에 까만 자취를 남겨두고 훨훨 붙어가는 불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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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은선암 가는 길에 솔가지를 꺾어들고 밭머리에 불을 질렀읍니다. 그놈의 불이 훨훨 붙어오르는 것을 보는 내 머리에는 십여 년 전 내 그림자가 떠올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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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 세 살 때라고 기억합니다.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놓고 죽게 얻어맞았읍니다. 나는 그때 솔가지에 맞던 일을 생각하고 빙긋 웃으면서 사면을 돌아보았읍니다. 비단같이 엷푸른 달빛 속에 잠긴 들과 산봉우리에 붉은 불빛이 번득거립니다. 산봉우리에 붙는 불은 햇살을 생각케 합니다. 그 모든 불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영호 잠자는 물에 비취인 꼴은 참말 그저 두기 아깝게 황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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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아래서 막걸리에 목을 축기고 부시로 밭머리에 불을 지르면서 순박한 웃음을 웃던 우리 조상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런 시절이 언제나 돌아오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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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폭죽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그것은 대를 베어서 불을 지르면 그것이 튀는 소리에 산천이 울린다 합니다. 그렇게 소리를 내이면 그 해 일년 동안에 사귀가 들지 못한다는 미신이 있읍니다. 나는 불행히 폭죽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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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선암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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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仙庵[은선암] 달밤은 붓이나 입으로는 표현치 못하게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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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선암은 법성포 동남에 놓인 대덕산 제일 높은 石峰[석봉] 아래 있는 외로운 암자외다.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에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로 새긴 기와와 단청은 오랜 비바람에 씻겨서 이제는 보잘것없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종소리만은 예나 다름없이 울려서 仙庵暮鍾[선암모종]은 지금껏 법성 십이경을 꾸미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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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宮[남궁]군의 집에서 저녁을 마치고 高[고], 金[김], 申[신], 南宮[남궁]군과 함께 달을 밟으면서 솔숲을 지나고 재를 넘어서 은선암을 찾았읍니다. 솔숲에 들면 가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달빛에 화문석을 밟는 듯하고, 재에 오르면 양양한 바다가 눈 아래 빛나서 누리를 벗어난 듯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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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앞에 이르니 달은 암자 위 석봉을 겨우 넘어섰고 암자는 깊숙한 봉그늘 속에서 잠자는데 창에는 불빛이 붉었읍니다. 맞아 주는 대사의 인도로 조실방에 자리를 정하고, 나는 홀로 道場[도장]에서 배회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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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갈수록 달빛은 더욱 쌀쌀합니다. 빈 가지를 하늘로 뻗치고 도량에 선 은행나무는 찬 그림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골에 드문드문한 소나무 푸른 잎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니 진주같이 맺힌 풀끝 이슬을 돗치면서 이 절을 찾아들던, 상년 가을 일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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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돌리니 울퉁불퉁 천 척이나 되어 뵈는 암자 뒤 석봉에는 흘러내리는 샘이 쌀쌀한 밤기운에 얼어서 그야말로 달빛에 수정렴을 곡절 있게 걸어놓은 듯합니다. 앞으로 솥드랑섬〔鼎島[정도]❳과 구수산이 바다 건너 보입니다. 구수산 아래 아련한 안개 속에 불빛이 판득판득하는 것은 시랑촌이라 합니다. 고려에 韓侍郞[한시랑]이라는 이가 저기에 귀양을 와서 있은 까닭에 시랑촌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나는 역사를 모르니 알 수 없거니와 그것이 사실이면 그때 한시랑도 이 밤 이 달에 나와 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뿌렸는지요?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달은 그저 밝았으나 이제에 아무 말 없으니 면면한 이 정회를 풀 길이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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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풍에 옷소매를 날리면서 박은 듯이 서 있었읍니다. 아아, 이 바람이 달이 나로 하여금 잠 못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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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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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달 봐! 응…… 저 새벽달 봐!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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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쫓긴 듯이 급한 소리를 치면서 누가 가슴을 흔듭니다. 새벽 예불 소리에 곤한 잠을 얼프름히 깬 나는 눈을 떴읍니다.
 
63
나를 흔들던 南宮[남궁]군은 비스듬히 일어나 앉아서 창문을 열고 서쪽 하늘을 봅니다. 나도 그쪽을 보았읍니다.
 
64
달은 九岫山[구수산] 머리에 걸렸읍니다. 그 아래 거뭇한 구름이 흐릅니다. 어젯밤에는 밝고 밝아 정채가 자르르 흐르던 달 ─ 나를 잠 못 이루게 하던 그 달이 저렇게 되리라고는 참 상상 밖입니다. 마치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고 악을 부리고 부려서 온몸에 피가 다 끓어오른 눈깔같이 벌겋게 핏발은 섰으나 아무 힘 없이 보입니다. 이제는 하는 수 없다 하고 밝아가는 동천을 슬프게 보는 것 같습니다.
 
65
사람도 저럴 것입니다.
 
66
피가 뛰고 기운이 복받쳐서 풀풀 뛰다가 늙어서 무덤이 가까우면 꿈 같은 청춘 시절을 저 달같이 구슬피 볼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드러누워서 눈을 감았읍니다. 목탁 소리 염불소리는 그저 그치지 않았읍니다. 새벽 달 잠긴 샘에 세수하고 향 피우는 중의 신세가 부럽기도 하나 어찌 생각하면 우상에 절하고 명복을 비는 그 일생이 저 새벽달같이 가긍스럽기도 합니다.
 
 
67
더위팔이
 
 
68
한보름날 아침.
 
69
우리는 중들이 우리를 위하여 차려놓은 밥을 산나물 반찬에 맛있게 먹었읍니다.
 
70
“×대사!”
 
71
웃으면 일본 사람이 위하는 福神[복신]처럼 두 눈이 가늘게 휘어드는 南宮[남궁]군은 밥먹다가 큰방에 앉은 ×대사를 부릅니다.
 
72
“네!”
 
73
같이 밥먹던 ×대사는 머리를 돌렸읍니다.
 
74
“내 더우! 하하하…….”
 
75
南宮[남궁]군은 크게 웃으면서 무릎을 칩니다. 그 두 눈은 오글오글 조여 들었읍니다.
 
76
“하하 이방 더위는 내 혼자 사네!”
 
77
×대사는 낭패가 난 듯이 흥 없는 웃음을 짓습니다. 그 바람에 밥먹던 일동은 모두 웃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았읍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못 웃었읍니다.
 
78
“崔[최]군은 모를 테지?”
 
79
申[신]군은 어리둥절하게 앉은 나를 보면서 빙긋 웃읍니다. 그리고 申[신]군은 그것을 제게 설명하였습니다. ─ 여기는 한보름날이 되면 더위 파는 장난이 있읍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하는 장난인데, 이날 친한 사람을 만나면 먼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 그 사람이 대답하게 되면 처음 부르던 사람이,
 
80
“내 더위 사 가오!”
 
81
해야 그해 여름 자기가 받을 더위를 그 사람에게 팔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날이 되면 대답 않으려는 조심이 사람마다 큽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게 되면 그만 제 더위만 해도 귀찮은데 남의 더위까지 짊어지게 됩니다.
 
82
여기는 이것도 불지르기와 줄다리기와 같이 큰 장난입니다.
 
83
우리는 이 설명이 끝난 뒤에 서로 대답 얻을 만한 기회를 보느라고 빙긋 웃곤 하였읍니다. 이때 이야기 잘하는 高[고]군이 南宮[남궁]군 밥상에서 멱자반을 뺏아 왔읍니다. 南宮[남궁]군은 “저런 저런!”하다가 高[고]군의 커단 입에 멱자반이 넘실넘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웃습니다. 그 웃음은 진정 뱃속에서 나오는, 자기를 잊어버린 순간에 나오는 웃음이었읍니다. 더위팔이를 첨 배워 가지고 묘하게 써 보려고 하던 나는 기회를 얻었읍니다. 나는 일 초도 지체없이,
 
84
“南宮[남궁]군!”
 
85
하고 다정스럽게 불렀읍니다.
 
86
“응!”
 
87
南宮[남궁]은 그저 빙글빙글 웃는 눈으로 나를 보았읍니다. 나는 옳다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88
“내 더위! 하하…….”
 
89
웃었읍니다.
 
90
“응, 저런……. 흐흐…….”
 
91
南宮[남궁]군은 큰 실수를 했다는 듯이 혀를 툭 채면서 재미있게 웃읍니다.
 
92
우리는 아침 후 암자에서 마을로 내려오면서도 서로 이름을 불러 더위를 팔고사면서 웃었읍니다. 퍽 유쾌하였읍니다. 도회 생활에서 볼 수 없는 순수한 즐거움입니다.
 
 
93
줄다리기
 
 
94
징은, 데엥 데 ── ㅇ……
 
95
장고는, 떵더리꿍……
 
96
꽹매기, 꽹맥꽹……
 
97
── 캥 ── 캥, 캥 ── 캥, 캥지갱캥캥, 쿵 ── 매, 쿵 ── 매, 깬지갱캥캥…….
 
98
軍物[군물]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거리에서 줄다릴 군사를 모으는 군악입니다. 미묘한 맛은 없으나 황혼 공기를 뚫고 오는 그 소리의 굵고 씩씩한 것은 순박한 민중에 적합합니다.
 
99
오늘은 열 엿새. 어제가 한보름, 줄다릴 날은 어젠데 줄이 미처 되지 않아서 오늘 다리게 되었읍니다. 나도 군사의 한 사람이 되려고 南宮[남궁]군과 같이 거리로 나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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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부터 흐린 날은 그저 개지 않아서 달돋은 지는 이슥하나 천지는 여전히 흐릿하여 우는 듯합니다. 멀리 바다에는 두어 개 漁火[어화]가 반짝거립니다. 저 사람 전생에 무슨 업원으로 남 다 즐기는 오늘도 고기를 잡고 있읍니까?
 
101
우리는 거리에 나섰읍니다.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들은 중구난방입니다. 그새에 ── 거리 복판에 ── 다섯 뼘 가까이 굵은 줄이 백여 척이나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은 동물원에서 구경하던 인도구렁이가 늘어진 것 같습니다.
 
102
징은, 데엥 데 ── ㅇ……
 
103
장고는, 떵더리꿍……
 
104
꽹매기는, 꽹맥꽹……
 
105
……캥 ── 캥, 캥 ── 캥, 캥지갱캥캥, 쿵 ── 매, 쿵 ── 매, 깬지갱캥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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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總[군총]들은 쉬지 않고 많은 사람 사이를 헤치고 다니면서 軍物[군물]을 칩니다. 사람은 점점 더 모여듭니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도 오고, 걸음말 겨우 타는 어린것도 모였읍니다. 그 중에서도 여자가 전 인원의 삼분의 이나 모였읍니다. 농촌으로 보아서는 놀라운 일입니다.
 
107
이 줄다리는 풍습이 언제부터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모아서 다리면 ‘터를 누린다’ 하여 그 해 일 년 그 마을의 땅귀신(地神[지신])을 안정시켜서 재화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크게 다리는 데서는 내기가 있는데, 지는 편에서 그 해에 그 마을 부역을 맡아 한답니다. 그러므로 서로 눈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다렸답니다. 그런 것이 지금은 그리 굉장치는 못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깊이 가둬두고 봄바람 가을 달을 자유롭게 주지 않던 우리 조상네들도 이날은 여자를 해방하여 자유를 주었읍니다. 흐린 하늘에 별빛 같은 이 기회를 얻은 여자들은 이 밤이 짧다 할 만치 유쾌하게 뛰어놉니다.
 
108
다른 데서는 흔히 아래 웃마을이 두 편으로 된다는데 여기는 어른이 한편 되고 어린이와 여자가 한편이 되어서 승부를 다투게 되었읍니다. 어른편에 서는 어른 장수가 투구 갑옷에 말타고 창들고 영기들리고 지휘를 합니다. 어린이편에서도 아이 장수라 하여 역시 투구 갑옷에 말타고 창들고 있읍니다.
 
109
시각이 당하니 두 편 장수는 줄 중심에 마주 서서 선전 포고를 한 다음에 이런 조약을 체결하였읍니다.
 
110
1. 중심점에서 징소리가 세 번 나면 서로 다릴 일.
 
111
2. 진 편 장수는 이긴 편 장수에게 머리를 베어 바칠 일.
 
112
그 조약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조약 체결하는 두 장수의 위풍은 등등합니다. 더욱 하늘은 흐리고 바다로 오르는 바람까지 음습하여 戰地[전지]의 기분을 돋우는 것 같습니다.
 
113
중심점에 징소리가 한 번 났읍니다. 여자와 어린이는 웃거리로, 어른들은 아랫거리로, 서로 달려가고 달려와서 줄을 잡았읍니다. 종소리가 세 번 나기 전에 벌써 줄을 다립니다.
 
114
“위어차!”
 
115
“이 ── 차!”
 
116
“끌어온다!”
 
117
“다려라, 끌린다!”
 
118
……꽹맥꽹, 꽹맥꽹……
 
119
“이 미친 놈들아 다려라!”
 
120
머리가 허연 늙은이는 빈둥빈둥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욕합니다. 참말 빈둥거리는 것은 밉습니다. 이렇게 웃음 절반, 악 절반으로 아래 위가 버티고 다리더니 우리 어른편이 끌립니다.
 
121
“응……여편네들이 모여든 게다.”
 
122
어른편에서 누가 소리를 칩니다. 참말 여자는 무서운 것입니다. 어른은 장난으로 다리는데 여자와 어린이는 죽기 내기로 단합하여 다립니다. 오오, 굳세인 용사들이여! 그대들 머리 위에 행복이 내리라!
 
123
버티고 섰던 다리가 한 걸음, 두 걸음 끌리더니 나중엔 줄줄 끌렸읍니다. 어른들은 상투가 뿌이해서 졌읍니다.
 
124
데엥 데 ── ㅇ……
 
125
떵더리꿍……
 
126
꽹맥꽹……
 
127
……캥 ── 캥, 캥 ── 캥, 캔지갱캥캥, 쿵 ── 매, 쿵 ── 매, 깬지갱캥캥…….
 
128
만세!
 
129
지화자 좋을시구!
 
130
어럴러지 상사뒤야!
 
131
어린이편에서 울리는 개선가 승전고 소리에 산천이 떠나갈 듯합니다. 어린이편 장수의 호령은 더 가관입니다. 호령 한 번을 벽력같이 지르고 달려오더니 어른 장수의 투구를 창끝에 꿰여들었읍니다. 그것이 목베는 것이랍니다. 장수가 목떼인 뒤에 적군에게 항복하는 어른의 꼴은 더 가관입니다. 아마 전조선을 통하여 민중적 놀이로는 이만한 것이 드물 것입니다.
 
132
이렇게 즐기다가 닭우리 되어서 흩어졌읍니다. 남은 것은 우수달과 음습한 바람이요, 임 다 빠져서 늘어진 줄뿐입니다. 인적이 다 사라진 뒤에 줄에 걸터 가만히 앉았으니 마음은 때〔時[시]❳라는 층계를 밟아서 옛날로 옛날로 올라가는 것 같았읍니다.
【원문】흐르는 이의 군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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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