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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흔(血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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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1
최서해
1
血 痕 [혈흔]
2
(創作集序 [창작집서])
 
 
3
나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이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어떠한 뜻을 가지고 그렇게 걷는 것이 아니라 어찌구러 그렇게 걸어진 것이다. 그런 것이 한 성벽이 되고 주의가 되어서 상년 봄부터는 뜻을 가지고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것이 나에게 행복이 될는지 또는 불행이 될는지 그것은 내가 괘념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걷고자 하는 그 길을 못 걸을까 보아서 걱정할 뿐이다.
 
4
이 세상 사람이야 비웃거나 깔보거나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다만 ‘참인간’ 의 ‘참생활’ 이란 목표 아래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면 고기가 찢기고 뼈가 부스러져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해 보려고 한다.
 
 
5
나는 늘 괴롭다.
 
6
“인생이 괴로우냐? 세상이 괴로우냐?”
 
7
나는 송주처럼 이것을 외운다. 나는 거기서 어떠한 철리를 찾으려고 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괴로운 끝에 나도 알 수 없이 흘러나오는 소리다.
 
8
그렇지만 내 고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나도 백이 넘는 벗을 가졌지만 나를 가리켜 고통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이해한다는 사람이 한 분 있지만 그도 나의 속깊은 고통은 모른다.
 
 
9
나는 항상 웃는다. 떠든다. 나를 아는 친구는 누구나 내가 하하 너테웃음 잘 웃고 왁자지껄 잘 떠드는 줄 안다.
 
 
10
어떤 이는 나를 ‘선동 인물’ 이라고 이른다.
 
11
어떤 이는 나를 ‘바람’ 이라고 이른다.
 
12
어떤 이는 나를 “생각이 없다” 고 이른다.
 
13
어떤 이는 나를 “푯대가 없다” 고 이른다.
 
14
어떤 이는 나를 ‘낙천가’ 라고 이른다.
 
15
무에무에라고 하든지 그것은 평하는 각자의 의견을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이때까지 ‘나’ 를 내 뜻에 적합하도록 비판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나는 그것이 슬플 것도 없거니와 좋을 것도 없다.
 
 
16
혹 어떤 때 내가 내 불평을 뿜으면 모두 흥하고 코웃음칠 뿐이다.
 
17
사람이란 자기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범위 안의 고통을 제일 큰 고통으로 아는 까닭이다.
 
 
18
나는 어제 전차 속에서 눈을 감고 공상을 달리다가 미래의 애인의 고통없이 달게 자는 나를 눈 앞에 그려 보고 싱긋 웃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었다.
 
19
“네가 내 고통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평화로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내가 네 평화를 가졌으면 이렇게 잠 못 들 리가 만무할 것이다.”
 
 
20
반대되는 성격이 반대되는 성격과 타협하려는 것은 참 미련한 일이다. 이 말 하는 나부터도 미련할는지 모르지?
 
 
21
나는 공상의 나라에 늘 마음을 달린다. 워낙 난치의 병으로 광대뼈가 툭 뼈진 나는 간단없는 공상으로 말미암아 나날이 파리하여 간다. 나는 그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22
스러져 가는 꿈을 좇듯이 열정에 괴인 눈을 멀거니 뜨고 오색이 영롱한 공상의 천지에 이 마음을 끝없이 끝없이 달리는 때면 나는 한없는 법열과 충동을 받는다.
 
 
23
시퍼런 칼을 이 심장에 콱 박고 시뻘건 피를 확확 뿜으면서 진고개나 종로 네거리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온 거리를 이 피로 물들였다면 나는 퍽 통쾌하겠다. 나는 미칠 듯이 통쾌하겠다.
 
24
그러나 아직도 내 한편에서 인습의 탈을 못 벗은 무엇이 나를 잡아당겨서 나는 그것을 못 한다.
 
25
나는 그것을 슬퍼한다.
 
 
26
나는 온갖 고통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벗으려고 하면 벗으려고 할수록 번민이 더 커지는 까닭이다.
 
27
나는 어떠한 고통이든지 사양 없이 받으려고 한다. 받아서 꿍꿍 밟고 나아가려고 한다. 즉 고통에 이기려고 한다.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이 있다하면 그것은 승리의 기쁨이다.
 
 
28
참인간의 참생활이라는 윤리관(倫理觀)으로 비참하다 뵈이는 사실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 전에는 나는 평온한 생활을 요구치 않는다.
 
 
29
양심이 마비된 사람과 우상을 사람 이상으로 숭배하는 사람과는 사리를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다.
 
 
30
나는 기이(奇異)를 보고 신비(神秘)를 느끼고 싶다.
 
31
사람을 보나 짐승을 보나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사시의 운회와 봄비 겨울눈 가물다물한 별 초하루 그믐으로 이지러지고 보름이면 둥그는 달을 볼 때 놀라운 눈으로 신비를 느끼고 싶다. 그러나 과학의 물에 철저치도 못하게 중독된 나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32
나는 그것을 슬퍼한다.
 
 
33
사람이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불순한 과거와 거칠은 현재는 나로 하여금 거칠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물질은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내 맘은 늘 끓는다.
 
 
34
나는 이 세상 사람과 같이 그렇게 미적지근한 자극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쓰라리면 오장이 찢기도록, 기꺼우면 삼백 육십 사 절골이 막 녹듯이 강렬한 자극 속에서 살고 싶다.
 
35
내 앞에는 두 길밖에 없다. 혁명(革命)이냐? 연애(戀愛)냐? 이것뿐이다. 극도의 반역이 아니면 극도의 열애 속에 묻히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연애가 없다. 아니 있기는 하나 그것은 사야만 된다. 나는 연애를 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게는 반역뿐이다.
 
 
36
나는 평평범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 등이 휘이도록 무거운 짐을 지거나 발바닥이 닳도록 먼 길을 걷거나 심장이 약동하도록 높은 산에 뛰어오르거나 가슴이 터지도록 넓은 뜰에서 소리를 치거나 독한 술에 취하거나 뜨거운 사랑의 품에 안기거나─이렇게 지내고 싶다.
 
37
삶을 평평범범하게 요구치 않는 나는 죽음도 평평범범하게 요구치 않는다.
 
38
칼이나 창에 심장을 찔리거나 이 머리를 담벼락에 탕탕 부딪치거나 높다란 벼랑 끝에서 떨어져 피투성이 되거나 뜨거운 사랑에 녹아 버리거나─이렇게 죽고 싶다.
 
39
총이나 아편에는 죽고 싶지 않다. 병이거든 호열자 그렇지 않거든 급성 폐렴에 죽고 싶다.
 
40
나는 죽음을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오래 살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내가 왜 났느냐 하는 것도 알고 싶지 않다.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도 알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 났으니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날까지 힘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41
나는 늘 내 생활을 창조하고 싶다. 파란곡절이 많도록 창조하고 싶다. 산속에 흐르는 맑은 샘같이 어떤 때는 여울이 지고 어떤 때는 폭포가 되고 어떤 때는 목메인 소리를 내고 싶다.
 
 
42
나는 예술(藝術)을 동경한다. 나는 내게 예술적 천재가 없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문예를 사랑하며 문예를 짓는다.
 
43
내 글은 세련이 없고 미숙하며 내 글은 현란이 없고 난삽하며 내 글은 푸른 하늘 밝은 달 같은 맛이 없고 흐린 못 진흙같이 틉틉한 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나는 문예를 지으려고 애쓴다. 나는 다만 내 가슴에 서리서리 엉킨 정열을 쏟으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세상이야 욕하거나 웃거나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한다. 그것은 내 아들이 잘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아들은 세상에 보이기 무섭게 못났다. 그러나 내 고통을 말하여 주는 것은 오직 내 아들[創作]뿐인 까닭이다.
 
 
44
남이 웃는 때에 내 혼자 운다. 남이 뛰는 때에 내 혼자 앉아서 가슴을 친다. 남은 순종하는데 내 혼자 반역을 한다.
 
45
나는 차라리 울지언정 아첨의 웃음은 웃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가슴을 치고 엎드려 궁굴지언정 남의 기분에 뛰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반역에 죽을지언정 불합리한 제도에 순종하고자 하지 않는다.
 
 
46
천만 사람이 서쪽 달을 좇는 때에 홀로 동쪽 매화를 찾는 사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지도하는 이가 없고 붙들어 주는 이가 없다. 다만 그 가슴에 끓어 넘치는 정열과 금석이라도 뚫을 만한 굳센 의지와 신념이 있을 뿐이다.
 
47
태양은 어느 때나 동에서 솟는 것이다.
【원문】혈흔(血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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