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렸을 때 형님을 따라 원두막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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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첨지는 박생원 그리고 원두막에는 근처에서 김을 매다가 쉬러 온 농군 두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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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원두서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서리라는 것은 훔친단 말이다. 닭서리 감자서리 콩서리 모두 장난꾼들이 밤중에 훔쳐다가 장난삼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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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의식이 그리운 사람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한 것이면 도적질이라고 하겠지만, 다 내노라는 글방서방님 도령님들이 장난삼아 하는 것이라 따로이 그러한 말이 생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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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개명을 해서 그런지 원두서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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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군이 이렇게 하는 말을 받아가지고 또 한 농군이 대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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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밝어져서…… 허기야 지금은 남의 원두밭에 가서 봉퉁이 하나만 따먹어도 주재소에 잽혀가서 경을 치는 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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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서리야 우리가 한바탕 재미있게 해먹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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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첨지 박생원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옛 기억을 좇아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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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군 하나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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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야 지금 와서 내가 원두첨지 노릇을 해먹고 살 줄은 몰랐지……허허……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든가 얻다 저 백××씨가 이 골 군수로 와 계실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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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때 나는 통인(通人)을 다녔느니…… 그때 통인들이야 밤마다 하는 일이 서리밖에 더 있나…… 그런데 어데서 굴러들어왔는지 웬 영감 하나가 재 넘에다 원두를 놓았는데 퍽 잘 되었단말이어…… 그래 하루 저녁에 우리 멫 사람이 서리를 하러 가잖았겠나……그런데 원두밭 근처에를 가니까 어쩐지 무서워서 원두밭에 발을 들여놀 수가 없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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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가 가장사괴(옛 공동묘지)였든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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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렇잖어…… 그런데 모다들 머리끝이 쭈삣쭈삣하고 등어리에서 식은땀이 나고 해서 필경 서리를 못하고 오잖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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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들어보게…… 그래 이 이튿날 밤에 또 간 게 역시 그렇게 무섭단 말이야……한 댓새나 그렇게 다녔지만 뭣 참외 봉퉁이 하나 못 먹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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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원두첨지가 무슨 요술을 부려놓았든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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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러니 이거 원 분해서 견델 수가 있나…… 그러느라니 그 이야기가 동헌(군청) 안에 좍 퍼졌을밖에……그런데 하로는 백××씨가, 원님 말이야! 우리들을 보고 싱그레니 웃으면서 에끼 못생긴 놈들. 그래 원두서리를 갔다가 무서워서 못하고 온단 말이냐? 하겠지. 그래 우리가 사실 이야기를 다 하니까 허허 웃으면서 종이쪽에다 무슨 부작을 적어주더라니…… 어떻게 꼬불꼬불 쓴 글씬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그래 이것을 가지고 가서 원두밭에다 돌멩이에 싸서 집어던지고 들어가라고 한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허실삼아 그놈을 가지고 가잖았겠나……가서 시킨 대로 하니까 아니나다를까 그새까지 그렇게 무섭든 것이 뭐 씻은 듯이 없어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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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문(八門)검사진을 쳐놓았든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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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원…… 그래 이놈의 원두밭을 와 몰려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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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 그렇게 조화를 부려놓았으니까 지키지도 않는단 말이야…… 그래 그저 모조리 다 따서 짊어지고 왔지…… 봉퉁이 하나 아니 남기고 그저 다 따서 못 가지고 오게 생긴 건 근처 논에다 집어 내던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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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한바탕 웃었다. 그것은 그 심술궂은 통인들을 생각하고 웃은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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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아무 말도 없었어요” 하고 농군이 묻는 말을 받아 박생원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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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동헌 마당에 삿갓 쓰고 구럭을 걸멘 영감 하나가 ─ 그 원두첨지야 ─ 척 들어서더니 백××씨를 보고 “에끼 실없는 사람, 늙은 사람이 소일삼아 해논 것을 자네는 어린아이들 데리고 거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엥.” 하고 나무라더라나. 그러니 명색없는 원두첨지가 무어길래 동헌에 들어서서 일읍의 군수를 나무라느냔 말이야…… 옆에 있던 이속들이, 이놈 어데서 목숨 둘 가지고 다니는 놈이 났나 보다고 가슴이 서늘해서 있는데 또 놀란 것은 백××씨의 하는 말이야. 허허…… 영감님도 점잔찮으시지…… 멀 그런 장난을 해놓고 젊은애들을 시달리면서 허허허허…… 이리 올라와서 약주나 한잔 자시고 가시요.” 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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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들으니까 둘 다 정술(正術)이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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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한날 한시에 어데로 가버렸는데 신선이 되였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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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마치고 박생원은 구럭을 걸머지고 원두밭으로 내려가 참외를 딴다. 나는 이 박생원이 그 술하는 노인인 것만 같아 언제 신선이 되어가나 하고 그 뒤에도 늘 유심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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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나 지금이나 20년이 다 못된 동안이니 네것 내것 하고 소유를 따지기야 일반이지만 그래도 그때는 서리를 한 재미있는 장난으로 묵인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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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오륙 세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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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를 마치고 일이 년 집에서 한문공부를 합노라고 놀던 때니 한참 장난에 맛을 들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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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새그물 들고 촌으로 나가서 닭서리 해먹기, 가을이면 무서리 콩서리 그리고 여름이면 참외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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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참외 시절에는 하루 틈도 그냥은 자지 못하고 기어이 남의 원두밭을 한바탕 짓밟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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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때문에 원두첨지의 명각한 사람을 만나 똥벼락도 맞았고 십여리길을 쫓기어도 보았으나 괴로운 것은 당할 때뿐이요 그 당장만 지내면 다시 서리…… 서리……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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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도 하는 법이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좋기는 소낙비가 내리고 뇌성벽력이 있던 밤이, 장(市日[시일]) 안날 밤이면 더우기 좋다. 이튿날 장에 팔려고 원두밭고랑에는 익은 참외를 수북이 따놓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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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 나뭇가지에서 참개구리가 요란하게 연애곡을 아뢰자 비가 솨 하고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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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지금으로 하면 자정이 지난다. 오륙 명 둘러앉은 글방도령들은 모두 졸리는 소리로 흥얼흥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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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그만들 자거라 하는 소리에 모두들 잠이 번쩍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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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 말고 글을 읽으라는 때는 졸리고, 자라고 하면 되레 잠이 깨니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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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출출한 눈치다. 그리고 모두들 그렇게 하자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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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한테 노골적으로 알리지 아니하도록 글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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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끔 도롱이와 삿갓을 준비하여 가지고 들 가운데로 묵묵히 행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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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릉 딱 하고 뇌성이 요란하다. 비는 눈코를 뜰 수 없이 내려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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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스는 좋다. 더구나 내일이 장날이니 물건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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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서 오리 상거(相距)나 되는 원두밭에 당도하였을 때는 아무리 성벽이 많은 군들이라도 모두들 찬비에 젖어 달달 떤다. 그러나 목적을 변경하지는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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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의하여 그중 한 사람이 처량한 목소리로 귀곡성(鬼哭聲)을 내어 한바탕 섧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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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곡성은 참 우리 서리꾼에게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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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연히 옆에서 같은 동무가 하는 것이지만 소름끼치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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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뇌성벽력을 하고 비 내리는 밤중에 들 가운데 원두밭을 지키는 사람이 들을 때에는 참외를 훔쳐가기는 고사하고 원두밭을 통으로 떠간단대도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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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 켜지 못한 원두밭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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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한 대로 원두밭 고랑에 쌓여 있는 참외를 두어 구럭 넣어 각기 양편에서 걸머지고 무언의 개선가를 부르며 우중(雨中)의 회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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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두막에서 놀던 이야기 (묵은 일기의 일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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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양에 온종일 정구를 했더니 몹시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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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나니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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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과 S군이 참외를 먹으러 가자고 찾아왔다. 마침으로 맥주병에 소주를 넣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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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밀짚벙거지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풀대님으로 단장을 끌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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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모는 벌써 뿌리가 잡혀 제법 검은 기운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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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산을 돌아넘는 뻐꾹새 소리는 언제 들어도 그윽하고 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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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낚시질꾼을 만나 깔다구(농어새끼) 두 마리를 토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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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군이 고추장과 초를 가지러 뛰어가는 것을 아주 생선까지 주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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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첨지 조서방은 막 위에서 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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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밭에서는 물큰 익은 참외 냄새가 구미당기게 코로 솔솔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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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까를 한 스무 개 따다가 놓고 위선 먹었다. 한 볼퉁이도 아니 되게 조그마한 게 노란 껍질을 벗겨내면 뱃속같이 하얗고 연하고 단맛이란 그저 한자리에 앉아 한 접은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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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먹고 담배를 피우고 하느라니까 S군이 안주를 장만해 가지고 헐떡거리며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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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60도나 되고 독한 놈이 가슴을 훑이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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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회는 혀가 짜르르하게 매우면서도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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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돌이가 나뭇짐을 지고 앞산 기슭을 돌아오며 초금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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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승맞고 요염하기란 부는 놈의 주둥이를 싹싹 비벼주고 싶게 가슴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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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가 멀고 또 젊은 과부가 없기에 말이지 큰일 낼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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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김에 드러누운 것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달이 벌써 한 길이나 올라오고 제법 산득거린다. P군과 S군은 세상을 모르고 잠을 잔다. 조서방은 벌써 저녁을 먹고 와서 모깃불을 피운다. 태고로 역려(逆旅)해 온 느낌이 있다. (이상 衆望[중망]에 不依[불의]코 再上映[재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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