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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리야 ◈
◇ 생활의 노래 (생활보(生活譜))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처음◀ 1권 다음
1933.4
이효석
1933년 김기림,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 등과 구인회 결성. 미완성 장편 주리야 연재
1
주 리 야( 朱利耶)
 
2
생활의 노래 (生活譜[생활보])
 
 
3
"짱· 겐· 보 "
 
4
"짱· 겐· 돌 "
 
5
"짱· 겐· 칼 "
 
6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7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는 듯이 이르니,
 
8
"로 ― 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9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10
"로 ― 자라구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11
"싫어요. ── 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12
"그것이 소아병이란 것야."
 
13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 ― 자가 크게 실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14
"그 로 ― 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15
"로 ― 자가 ── 부엌에서 ── 암만해도 어색한걸."
 
16
"로 ― 자가 별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도 짖고 옷도 기 워야 지."
 
17
"행주치마 입은 로 ― 자."
 
18
"참으로 장한 로 ― 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19
"나는 공설시장의 로 ― 자인가요. ── 장에 가는 건 내게 맡기니."
 
20
"암, 공설시장의 로 ― 자요, 방안의 로 ― 자요, 거리의 로 ― 자요."
 
21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 ― 자, 그런 로 ― 자는 오늘부터 폐업이여요."
 
22
"땅속의 로 ― 자가 슬퍼하게, ── 어서 장에나 갔다 와요."
 
23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 ── 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 하니까 요."
 
24
책상 위에 펴놓은 로 ― 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 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25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활의 잔치 마당이 예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 ── 그 속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 ── 그같이 신선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26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27
"그럼은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요. ── 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띠우면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자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찬란하게 비취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28
"나물 바구니 ── 생활 바구니."
 
29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30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 ── 생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 ── 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가지고 올께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벙어리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벙어리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삐죽히 솟는 돈 잎이 한 잎 두 잎 좁은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날마다 푼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 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벙어리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벙어리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그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벙어리 속에 넣고 날마다 한 잎 두 잎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나갈는지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 ── 이것은 생각할 때에 벙어리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31
"그럼 갔다 올께 ── 그 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여 노세요, 네."
 
32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게 덥석 전신을 의지 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 문질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 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는 ──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33
"능금 한입 드릴까."
 
34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35
"아서요. 한입 이상은 안돼요. ── 행길에서 먹을 게 없어지게."
 
36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37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38
나의 능금 누가 사노
39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
40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41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42
'모로코’에서 다이트리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리로 읊으면서 주 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못 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의 한숨. ── 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 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43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졌을 때에 주화에게는 두 번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 이겨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 건너 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44
어느덧 뜰 안에 봄이 가득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 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45
"벌써 ── 봄."
 
46
주리야와의 몆 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 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 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47
"로 ― 자는 못되더라도 ── 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48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 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49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난 속심을 뾰족한 구두 끝으로 툭 차 버릴 주리야 ── 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과 진열장의 미학(美學)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 ── 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에길게 떨어트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섰을 주리야 ── 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에 그려 볼 때 주화에게는 석 달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 나왔다 ──.
 
 
50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51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 부었다.
 
52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 속에서 꿈이 새어들고 꿈속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이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 를 다시 바라보고 두 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 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항구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나 어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걸이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 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은 귀엽다고 생각하였다. 나 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부는 못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 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 로주화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 ── 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리는 동안에 문득 꿈을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 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취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53
이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가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54
"선생님 계셔요."
 
55
주화는 벌떡 일어나 열었다.
 
56
"에!"
 
57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여자 ── S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58
어느것이 꿈이고 어느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 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았다.
 
59
"저를 모르시겠어요, ── 성진 사는 김영애요."
 
60
"대체 웬일이요. ── 들어오시오."
 
61
"편지도 안 드리고 무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62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63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 내렸다.
 
64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웠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 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이 바라보면서,
 
65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 ── 왜 그리 일찍 주무세요."
 
66
듣고 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 ── 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67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 있소. ── 그것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68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69
"흠. ── 대담한 용단이시군."
 
70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 속이 백짓장같이 하아얀 넌센스 보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결혼의 회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노라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예요. ── 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 안 돌아갈 작 정이예요."
 
71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72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 ── 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 왔으니까 요."
 
73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74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 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는 못했을 것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예요."
 
75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 ── 당분간 살만한 것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하고 그는 슈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을 집어내서 주 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그를 똑바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76
"──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 쓰면 한 일년 지탱해 갈는지요."
 
77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다 할는지 ── 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78
어어서 그는 슈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 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놓고는 자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등 얇다란 몇 권의 팜플렛이었다.
 
79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대로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 ── 비인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한 구석에 간수하였다.
 
80
주화는 그 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두 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 도의 정도를 넘은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 사상의 경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 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할 수 없었다. ──
 
81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간 자세를 이지러트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듣 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의 절대 적임을 언명 하였다.
 
82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 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다음 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사글세로 빌려 놓고 약 백 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만하고 따로 백 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 ── 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 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 '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 '리야’를 빌려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 이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의 괴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 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83
──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퍼(이렇게 부르기는 과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84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 주 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 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 신의 피가 수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 가는 동안의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85
그칠 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채의 연속 ── 그의 처음 뜻한 방향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찬란한 색채의 전개 ── 책을 아직 반도 넘기지 않은 이 제주화는 주리야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 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 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 준 것은 무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 속을 아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
 
86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87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에 생긋 웃고 섰 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88
"──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89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90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카페(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로 이렇게 말 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대로 샐러드나 맨들구요."
 
91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92
"그 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고 하 꾸라 이가아니라 요. 클로버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 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 먹어 본 탓인지."
 
93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갑에든 클로버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94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 ──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샐러드, 카페와 숭늉 ── 이 칵테일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95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러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떤 때에는 햄이나 소시지 조각을 사 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하고 탄식하였을 때에 주 화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 어데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지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지"하고 도리어 톡톡히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96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에도 갸야 하지 않겠소."
 
97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98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 ── 석 달 동안이나 데리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에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예요."
 
99
"석 달 동안이나 벼르거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견학할 자격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100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 직공과도 친해 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101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102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103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찍이 가봅시다."
 
104
"네 ── 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105
기뻐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굽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이 뚫어져 뽀족이 내다보이는 하아 얀 한 개의 별 ── 석 달 동안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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