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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촌기 ◈
◇ 궁촌기 1 ◇
카탈로그   목차 (총 : 2권)     처음◀ 1권 다음
1939년11월
이무영
1
궁촌기 1
 
 
2
1. 산장일기
 
3
10월 ×일
 
4
아침 여섯시에 기상. 제법 산산하다. 일어나는 길로 우물로 가다. 우물을 친 지가 여러 날 되어서 파란 이끼가 서리어 있다.
 
5
얀정없이 샛노란 감나무잎이 두 잎새 물 위에 동동. 헤식은 밤나무 단풍한 잎이 저도 단풍이로라 감나무잎 사이로 매식매식 돌아다닌다.
 
6
우물 둥천 이맛돌에 놓인 바가지 조각으로 물을 휘휘 저어 한 모금 마시다. 잔입이라 그런지 물맛이 곧 달다. 되거퍼 한 모금. 웬일인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7
고추밭머리를 돌아서 방울방울 열린 이슬을 차고 골짜기를 건너막은 밤나무 다리를 건너 산기슭에 오르다. 안개낀 때처럼 목안이 칼칼하다
 
8
동산에 오르니 펀한 들. 모닥모닥 한줌씩 집어다 놓은 것 같은 조그만 산들이 잔솔을 덮고 요기도 하나, 조기도 하나. 으레 그 산밑에는 초가가 네다섯 집. 어쩌다 많은 곳이라야 여남은 채. 그러나 한 집, 두 집, 산당처럼 선 곳도 또한 여러 군데다.
 
9
산 아래 뫼. 뫼 앞에 농가. 농가 둘레로는 빠알갛게 불붙는 감나무가 그 이글 이글한 횃불을 아직 이슬에 촉촉히 젖은 대공을 향하여 쏘고 있다. 나직한 산기슭에 불덩이 같은 단풍인가…
 
10
삐 ― ㄱ!
 
11
기다란 흰 연기가 널따란 들판을 가로지른다. 여섯시 봉천행인가. 누이가 나간 지 십오분. 오늘은 지각이 아닐까?
 
12
스스로 창안한 아침 체조를 한 십분. 하얀 사기 대야에 세숫물을 찰찰 넘게 떠놓고, 언제 보아도 고운 감나무잎에 소금을 한줌 갖다놓고, 세숫물 속에 얼른거리는 야윈 얼굴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려니, 우물터 위 동산 망주석에 까치 한 마리가'깍깍깍’손을 부른다. 전하는 말에, 까치는 손이 옴을 알린다고 ― 누가 이 산속을 찾아오려나?… 아무라도 좋으니 오기만 한다면… 소식 채갱이나마 다정히 마주앉아 하루를 즐기련만…
 
13
오후에 고개 너머 서 군이 찾아오다. 이십대 청년에게 장죽이 격에 안 맞는다. 그런 말을 하니 서 군은 오직 웃을 뿐.
 
14
"허허, 모르는 소리니, 짚단을 깔고 앉아서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뻑뻑 빠는 맛이야 말로 신선 부럽지 않으니… " 모를러라.―된 현실 앞에 눈을 감음이 그 신선이 될지… 서, 흡, 나― 이렇게 셋이 수수밭과 콩밭 샛길을 타고 산기슭에 허리를 폈다. 우물 오른편 쪽 동백나무와 대추나무 사이로 쑥 들여다보이는 도독하고도 편편한 지점을 장죽으로 톡톡 두드리며,
 
15
"자네도 여기다 집이나 한 칸 세우게." 하고 서가 권하는 말이다. 조그마한 여유가 있대도 초가삼간라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솟아오른다.
 
 
16
10월 × 일
 
17
새벽 일어나서 밤 아람을 주우러 간다고 밤새도록 벼른 것이 공교롭게 늦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일곱시. 그래도―하고 부리나케 밤나무 밑을 달려가 보았으나 벌써 아이들이 다 주워가고 간 후인 듯 겨우 밤 다섯 톨을 줍다.
 
18
아침을 먹고 나니까 밤 주우려다 못 주웠으니 새끼밤이라도 주우러 가자고 누님이 끈다. 새끼밤이 뭐냐 하니까,
 
19
"이 것!" 하고, 둥구미에서 무엇인지 한움큼 움켜다 보인다. 도토리다.
 
20
"이것을 곱게 빻아서 묵을 하면 야들야들한 것이 참 좋다나!" 하고 누님이 가라앉힌 미각을 따짝거린다. 그야말로 야들야들한 도토리묵을 파간장에 깨소금을 알맞게 쳐서 먹는 재미도 그럴 듯한 성싶어 대 바구니를 끼고 누님을 따라섰다.
 
21
누님은 하얀 타월을 머리에 쓰고, 갇히었던 새처럼 신이 나서 앞서 간다.나도 바지를 깡똥히 걷고 뒤쫓아 나가려니까 점심에 넣을 콩을 까고 계시던 어머니가 따라나오시며 고함을 치신다.
 
22
"얘들아, 나두 가련다!"
 
 
23
10월 ×
 
24
도회의 소음을 떠나 산간에 처박힌 지 오늘이 꼭 한 달 반이다. 이제 겨우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 같다.
 
25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찬물에 세수를 하고 부탁받은 단편을 시작하다. 아침을 알릴때까지 30매. 상을 물리고 나서 일곱 장을 더 써서 이 달분으로 맺기로 하다.
 
26
우선 몰리던 것을 써놓고 나니 맥이 탁 풀린다.
 
27
아침 까치가 또 짖는다. 이제는 속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혹시… 하고 기다려 진다.
 
28
하루에 한 번씩 오는 우편배달이 몹시 기다려진다. 열한시부터 열두시 사이에는 반드시 오던 배달이 오늘은 웬일인지 한시가 되도록 안 온다. 으레히 오겠건만 그리고 온대니 별로 신기한 노릇도 없으면서도 때가 되어도 안오니까 더욱 기다려지고 궁금하다.
 
29
낡은 잡지를 뒤적뒤적하다가도 수수밭 저 너머로 내어다보다. 그래도 오지 않아 역으로 나아가는 조그만 마루턱까지 나가서 기다리다가 들어왔다.
 
30
공연히 속을 것 같아서 다시 방에 가 누워 있으려니까,
 
31
"아저씨, 편지 왔어요!" 하고 옥이가 소리를 지른다.
 
32
엽서 한 장. 벽암한테서 온 것이다. 그나마도,「조선문학」을 할 때 내게 맡겨둔 원고를 찾아 보내라는 독촉이다. 나도 무심하지. 벌써 여러번째이다. 온 집안이 뒤집히도록 찾았으나 안 보인다. 벽암에게 엽서를 써 부치다.
 
33
저녁을 먹고는 서 군을 찾아가 장기를 한 번 놀다. 포를 떼주는 데도 졌다.
 
34
두번째 시작하려다가, 기박(棋博)이란 젊은 놈의 할 노릇이 아니라고 하여 흡(洽)이 둘러엎다.
 
35
「중세 구주 문학사」를 읽다. 한 십여 혈(頁).
 
36
두통이 심하다. 건뇌환 20개. 그래도 머리가 띵하여 머리를 감으러 큰 사랑 앞 연못으로 갔다가 훌훌 벗고 냉수 목욕을 했다.
 
37
버들가지에 눈썹달이 걸렸다.
 
38
몽유병자처럼 들판을 또 헤매게 할려고 저 달이 또 살쪄 가는구나.
 
 
39
10월 ×일
 
40
처녀의 마음속같이 맑디맑은 아침. 아침을 먹고 나니 에쓰란 놈이 마루 밑뜰팡에 주둥이를 넓죽히 깔고 있다. 혼곤히 아침잠에 취하는 듯이도 보인다.
 
41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은 드높기도 하구나.
 
42
참새 몇 마리가 추녀 끝에서 곡예를 한다.
 
43
열시부터 점아를 따라 밭을 거두러 가다. 헌 즈봉에 머리에는 수건을 동이고 지게를 지고 나서니까 온 집안이 웃는다. 고 서방 같다고 누님이 놀린다.
 
44
생후 처음으로 낫을 만져보고 지게도 져보았다. 봄에는 수월할 것 같으면서도 지게가 등에 붙지 않는다. 간신히 일어나기는 했으나 오금 밑이 와들와들 떨린다. 하마터면 족제비를 잡을 뻔했다.
 
45
오후에 가서야 겨우 지게가 등에 붙는다.
 
46
점심밥이 달다. 일을 했으니 장하다고 어머니가 높은 밥을 담아 주신다. 마루 끝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떠들고 웃고 하며 먹었다.
 
 
47
10월 ×일
 
48
오늘은 어제 거둬들인 콩을 털다. 나는 서투른 도리깨로 콩깍지를 두드리는 동안 누님과 어머니는 동산에 홑이불을 펴고 깨를 떨었다.
 
49
들깨가 서 말.
 
50
사랑에서 갑자기 시 읊는 소리가 낭랑하다. 토닥토닥 깨 떠는 소리에 도리깨 떨어지는 기운찬 소리, 거기에 가끔 시 읊는 소리가 흐른다.
 
51
참에 사랑을 들여다보니 이 참판, 서 노인, 아버지 세 분이 벼루를 놓고 둘러앉으셨다.
 
52
제하여「呼吾無[호오무]」
 
53
浪使世人名字呼[낭사세인명자호], 以吾自量未知吾[이오자량미지오]. 産綠己判心神靜[산록기판심신정], 家事不關憂廬無[가사불관우려무]. 蔣氏會開三遙竹[장씨회개삼요죽], 陳公閑閱五湖圖[진공한열오호도]. 而今幸結參同契[이금행결참동계], 誦德爲隣正不孤[송덕위린정불고].
 
54
아버지의 즉흥시다. 읽어도 몰라 풀어주실 때만 기다리다.
 
 
55
10월 ×일
 
56
「신동아」「신가정」「청년조선」「개벽」「중앙」 제지의 창작을 읽다.
 
57
정태양 씨의「조락」을 재미있게 보다. 처음 듣는 이름이나 어느 한 군데 구김이 없다.
 
58
김동인 씨의「최 선생」은 기대하니보다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염상섭 씨의「무현슬」에서는 말 몇 마디만을 배우다.
 
59
엄흥섭, 김기진, 송영, 조벽암 모두 떨치지 않는다.
 
60
갑자기 우울에 사로잡히다. 우울이 걷히며 새로운 용기도 생긴다. 우리는 아직도 이십대의 청년, 삼십 년 한하고 이를 악물고 애쓰리라 한다.
 
61
오늘처럼 시골 온 것을 다행히 생각한 일이 없다. 깊은 이해와 동정 밑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행복을 생활 불안으로 헤매는 여러 지우와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 박태원과 이무영이가 작가로서 서기에는 가장 유리한 환경에 있다고 말했다는 모씨의 말이 생각난다.
 
62
그 주어진바 이로운 환경을 잘 살리리라 다시 굳게 맹세하다. 턱없이 흥분이 된다.
 
63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던 장편의 실마리를 풀어보자. 웬만한 자신도 생기는듯 느끼다가도 얼굴이 홧홧하며 이불을 푹 뒤집어쓰다.
 
64
산장의 밤도 깊었나보다. 램프의 심지 타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65
〈동아일보, 1934년 11월 2~6일〉
 
 

 
66
2. 속(續) 산장 일기
 
67
× 월 × 일
 
68
훨씬 볕이 얇아졌다. 낭인이 된 지도 벌써 2삭여. 이 궁말에 별거하는 지도 이미 순여다. 사리와 이삿짐은 가만 두어도 새끼를 친다더니 결혼 삼 년에 다다르고 보니 짐도 늘었다. 버들상자에 책 몇 권, 이불 한 채, 조그만 책상 한 개. 이것이 삼 년 전의 가산의 전부이던 것이 트럭으로 한 차하고도 몇 개는 손으로 날랐다.
 
69
겨우 이삿짐과 집안을 정돈하고 책상에 앉아보다. 이 개월 동안을 동해로, 서도로, 거리에서 거리로, 이렇게 방랑을 한 탓인가 자리가 잡히지 않는다. 내야 할 편지가 밀려온 지 삼사 일. 그래도 붓이 손에 안 잡히어 누워서 뒹굴다. 직업에 대한 실낱같은 미련도 인제는 없어졌다. 미친 사람이라고 주장질하다시피 하던 몇몇 친구들의 충고가, 조그만한 미련도 없는 저 전설에나 오는 이야기같이 회상이 된다. R 형은 나를 평하여 야심이 없는 자라고 한다. 야심, 그런 것이 필요한가? 이렇게 생각하고 R 형을 경멸하던 것도 전설에 속한다. 나는 분명히 야심을 가질 필요를 느낀다. 나의 이 생활 계획도 야심의 조그만 발현일 것이다.
 
 
70
×월 ×일
 
71
거기가 어떤 곳이냐고 몇 번째 물어온 친구 O 군에게 답장을 쓰다.
 
72
"이름은 궁촌 ― 또한 궁촌. 군포에서 이십분 행로의 산간. 성냥 한 갑을 사재도 이십분은 걸어야 하고, 엽서 한 장 부치는 데도 역에까지 나가야 하는 곳. 아우가 사는 동리는 물경 단 두 집 뜸. 병풍처럼 산이 두르고 겨우 앞만이 트인 감나무 촌 ―"
 
73
밤에는 인명부를 정리하다. 나의 직명이 벌써 신문기자가 아닌 이상, 신문사로 해서 사귀인 지인의 이름과 주소를 기억해둔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커다란 짐이다. '거래’란 매매가 영위되는 때만 유효한 것이다. 폐업을 한 상인이 과거의 거래처를 일일이 기억해둔다는 것은 비극이요 또 희극이다.
 
74
과거 이 개월간의 '체험’을 근거로 주소 씨명을 벅벅 찢다. 얼마를 찢다 보니 남은 것이 겨우 오 명. 어쩐지 너무 허전하다. 친구는 삼 인으로 족하다 한다. 그러나 지인이 다섯 명이라는 것은 미칠듯이 외로워진다. 다시 한 사람, 두 사람, 다섯 사람을 늘이다. 지기 삼 명에 친지 칠 명. 이것으로 족하리라.
 
 
75
×월 × 일
 
76
겨우 마음이 안정된 것 같다. 오전에는「메리메」를 읽다. 오후에 대량의 서신 발송. 봉서 팔 매에 엽서 십육 매. 봉서는 회신을 요하는 것이요, 엽서는 H 군의 충고를 들어 지인들에게 주소를 알린 것이다.
 
77
마코 한 갑 두 개. 자는 길에 달걀 한 개. 냉수 한 잔.
 
 
78
×월 × 일
 
79
오전 여섯시 기상. 산에 오르다. 도토리나무, 밤‧떡갈나무, 참나무, 잡목 숲이다. 애송이 솔이 도회인인 내게는 좀 과한 초향을 풍긴다.
 
80
시월부터 연재키로 한「퀴리 부인」소설화에 착수.
 
81
오후에는 앞집 이 서방의 지게와 갈퀴를 빌려 산에 올라 낙엽을 긁다. 먹고 일하고 먹고 자고, 이런 것에서 생의 희열을 느끼는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해 본다. 내게도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할 것도 같고 불가능할 것도 같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장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 자기 생활 속에도 얼마든지 행복은 있을 것이다. 행복인이란 잡석에 낀 순금을 캐듯 자기 생활 속에 산재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리라.
 
82
나도 행복 탐구자가 되리라.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갈퀴질을 하다. 전후 다섯 시간 긁은 행복은 송엽 사오 관. 이것으로 족하지 않으냐. 지게도 사람을 알아보는가 말을 안 듣는다.
 
83
"그렇게 나물 해가지고야 어디 쥐나 쫓겠소."
 
84
구면이 된 서 서방이 웃는다.
 
85
"내가 나물 많이 해오면 이 근동 서씨네가 모두 쫓겨날 테니 그럴 수야 있소."
 
86
나도 농담을 하다.
 
87
오후에는 뒷산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하다. 그 무슨 고상한 음악을 듣는 때와 같은 평화와 함께 '노동의 피로’가 온다. 봄 아지랑이를 보는 듯 노곤한 피로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은 불쾌한 피로는 아니다. 갑자기 산비둘기의 풍기는 소리에 깜짝 놀라다. 아마 잠시 졸았는가보다.
 
88
K 형 내방. 그는 이 세대와 함께 불우의 화가다. 건강이 몹시 부진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림과 약을 바꾸기 싫어한다. 권하다 못해서 말다. 우리와는 딴 세상 사람이다.
 
 
89
×월 × 일
 
90
가 주인 S씨에게 밭 한 뙈기를 빌리어 무와 배추를 뿌리다. 철은 늦었지만 잎이라도 뜯으라고 이 서방이 권하기 때문이다. 정말 흙을 만져보다. 그러나 흙의 향기를 내 코는 맡을 줄 모른다. 흙의 신비와 흙의 자애를 이해해서가 아니다. 흙을 만진다는 그 인식 ― 그것은 경영일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 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해온 그만한 노력만 바친다면 흙이나 육체노동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이 생겨진다.
 
91
K 형에게 뒤늦어진 결혼신고를 부탁하다. 삼 년간 늑장을 부리다가 부청 오 군이 졸라대어 신고를 한 것이 금년 일월이었다. 그러나 원적지에서 만 사 개월 만인 지난 오월, 서식에 착오가 있으니 고쳐 보내라고 반환이 되어 왔다. 삼 년 끈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나 사 개월 만에 반환하는 면장 친구도 어지간하다고 처와 웃은 대로 또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제발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고 행복을 비는 것과 똑같은 심정으로 빌다. 이런 서식이란 내게는 폭탄보다도 무섭다.
 
 
92
×월 ×일
 
93
친가에 가 있는 처에게서 내전. 금조 다섯시 생남. 무서운 정열로 폭탄을 사랑하는 히틀러를 제압할 남아 출생―이렇게 궁금해하는 P씨에게 엽서를 쓰다. 웃었을 것이다.
 
94
요새 갑자기 행복이란 것을 자꾸 생각게 된다. 행복 행복, 개인의 행복, 민족의 행복, 인류의 행복. 문학도 이 행복을 유일한 목표로 하는데서만 훌륭한 문학이 나오지 않을까. 행복된 인간 내지 민족은 위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위대하지 못하더라도 행복스러우면 그만이 아닌가. 절대의 행복, 절대의 환희, 그리고 절대의 미― 이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을까? 행복은 평범하다고 한다. 정말 행복이란 평범한 것일까? 평범이란 용어도 고쳐 씌어져야 하지 않을까. 비범하고 불행한 것보다는 평범하고 행복됨이 얼마나 더 '행복’될까.
 
95
문득 R 형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신문기자가 새로운 비약을 하기 위 해서만 직업을 내던지는데 군은 흙을 파기 위해서 직업을 버렸다고 나의 소극적인 생활 태도를 비난하던 말. 요새 와서 행복을 이렇게 자꾸 생각게 됨도 이 소극적인 생활태도 때문일까? 아내를 사랑하고 어린것의 장래를 근심하고 일가의 미자(米資)를 근심하고, 건강을 걱정하고 이런 것도 또한 소극적인 때문일까?
 
 
96
×월 ×일
 
97
흡에게 엽서를 쓰다. 비로소 신문이 오다. 꼭 회신을 기다린 봉서 육 통과 재제 한 삼 통, 전후에 엽서 이십여 매에 답신 단 이 통. 인명부의 재정리 통감. 다시 육 명으로 줄 것 같다.
 
98
생각이 나서 한양영화사 박 형에게 편지를 쓰다. 재직시에 졸작 영화화에 관한 약속의 효과 지속 여부를 다진 것이다. 신문사로 해서 내가 유명해졌다는 어떤 가십자의 말이 비로소 수긍된다. 재직시에 언약한 세 가지가 다 실효가 된 것이다. 그렇게해서 더 이상 유명해지지 않았던 것은 내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다행이다.
 
99
출판기념회나 무슨 명령에 연명되는 그런 '유명’은 멀리 전설이 되라. 나는 완전한 무명으로 돌아가리라. 그것이 내게 있어서 행복이라면 ― 또 행복이란 말을 썼고나, 혼자 웃다.
 
100
오후에 나무 한 짐. 하루만 긁으면 내 방에는 사흘을 땐다.
 
 
101
×월 ×일
 
102
간밤에 두 곳서 도적이 일다. 쌀 두 말 된 것을 가지러 왔다 한다.
 
103
"못생긴 놈! 남의 나라를 뺏겠다고 전쟁을 하는데 쌀 두 말을 훔치러 와!"
 
104
가주 S씨가 분개를 한다. 허전해서 개 한 마리를 사다 두다. 할트라는 이름이다. 부잣집 개라 그런지 나보다는 분명히 귀족적이다. 문화한 동물이 또 하나 늘었다. "앉아라." 해서는 못 알아듣고 "스와레!" 하면 앉는다.
 
105
"빠가!"해야 멈칫한다. 아마 그래서 이름도 '할트’인가보다.
 
106
「퀴리 부인」이 회. P씨에게 엽서 일 매. 내신 삼 통. 엽서는 흡과 송형. 봉서는 처에게서 온 것이다. 모자가 건재한 모양. 다행한 일이다.
 
107
감이 날로 붉어간다. 이 음력 보름이 가까워진 탓일까? 무―그대로 고요한밤이다. 미닫이를 열고 달빛에 신문을 보다. 오호 활자도 거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밝다. 늙은 감 떨어지는 소린가, 가끔 동산에서 ' 퍽퍽’ 소리가 난다. 지극히 문명한 할트 군이 짖고 내닫는다.
 
108
모르나로의 단편 두 편, 모파상의「일 시민의 일요일」을 읽다. 박태원 형의 「구보씨의 일일」과 모지에 쓰기로 된 단편과의 형식이 같아질까봐 일부러 구해온 것이다. 역시 이 두 작가의 형식을 피하기가 어려움을 깨닫고 구상을 다소 변경하기로 하다.
 
 
109
×월 ×일
 
110
갑자기 커피의 진한 향기가 유혹을 한다. 인제는 하룻밤을 드새일 방조차 없는 서울. 숙박계를 하는 우울을 생각하고 참다.
 
111
아내한테 결혼 후 처음으로 긴 편지를 쓰다. 제삼자가 읽는다면 웃었을 그런 성질의 편지다. 처도 의아했을 것이다.
 
112
집을 세워볼 계획을 해본다. 하불하 삼백원은 가져야 할 모양.
 
113
오후에는 오봉산에 오르다. 어머니와 누이와 산밤을 따자 함이다. 이 산중에는 누룩, 주머니, 도마 등 다섯 가지의 보물이 있다 한다. 그것을 찾는자는 행복되리라고. 밤이 두어 되는 실하다.
 
114
R형에게서 내신. 경위를 알고 보니 나의 오해이었던 모양이다. 인명 부에 새로 기입이다 "××정 ××번지, ××사, R ―"
 
 
115
×월 ×일
 
116
몹시도 달이 밝다. 보름이다. 동리에는 다홍치마 자락 하나 보이지 않는 추석이다. 달이 혼자서 밝고, 감이 혼자서 붉다. 째지게 달이 밝다고들 하나 그 째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함일까. 달빛어린 대지를 한 장의 종이에 비함 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익어가는 감나무 밑에서 달빛을 즐기다.
 
117
이 서방과 쌀 기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공정가격도 여기선 무효다. 매두 이삼십 전의 고가인데다가 물에다 불린 쌀이다. 그렇기에 법이 문제가 아니다.
 
118
감 세 개. 대추 한줌. 새벽까지에「퀴리 부인」삼 회.
 
 
119
×월 ×일
 
120
고요한 마을에 양반 쌈이 벌어지다. 개도 족보를 따지고 싸우는 것은 아니련만 두 집 개가 마주짖는다. 내가 만일 위정자라면 이 빈궁민들에게 구제 사업을 하기보다도 먼저 초시나 참봉을 봉하리라. 지금의 그들을 금년과 같은 흉년에서 구제하기 위해서는 참봉을 봉해주는 도리밖에 없을 것 같다. 만일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 행복이란다면…
 
121
이런 의미에서 앞집 사람에게 '주사’를 봉해주다. 서 주사는 몹시 기뻐한다. 뇌물을 받지 않은 한 범죄는 구성될 리도 없겠지.
 
122
서인식 씨의「역사의 문화」를 읽다. 미열이 있어 일찍 쉬다.
 
 
123
×월 ×일
 
124
효석의 「화분」이 인문사에서 전작으로 나왔다. 그 출판기념회 안내장이 왔다. 가기로 하고 엽서를 내다.
 
125
나무가 또 떨어졌다. 날이 흐린지라 배추밭을 매만지다. 제법 싹이 좋다. 잎만은 뜯어먹을 것 같다.
 
126
흡, 앓다. 벌써 여러 날째다. 오후에 또 미열. 이삼 일 쉬리라.
 
127
산에 오르다. 산공기에 살이 찌는 성싶다. 여기저기 나무 긁을 만한 자리를 보아가며 약수터로 내려와서 칡잎에 물을 떠먹다. 매일 이 약수를 한 잔씩 먹으면 소화불량증이 낫는다 한다. 약수를 안 마시기로니 매일 이 산중의 깨끗한 공기만 마신대도 소화불량쯤은 나으리라.
 
128
다만 안타까운 것이 산과 바위와 나무 ― 이런 자연들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다.
 
129
이 산과 더불어 역사를 말하고 이 풀과 더불어 자연을 교담하며, 이 물과 더불어 신비를 주고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130
그러나 차차 나도 그들을 이해할 날이 오리라.
 
 
131
〈1940년〉
【원문】궁촌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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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