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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음성(呻吟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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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7.10~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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呻 吟 聲[신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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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病床日記[병상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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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나 나을까 내일이나 나을까 하여 大旱[대한]에 雲霓[운예]보다 더 초조하게 바라건마는 병고는 조금도 덜리지 않는다. 고적한 내 생활은 병마에게 붙들린 뒤로부터 더욱 고적하게 되었다. 고국에 있을 때에는 찾아갈 만한 곳도 있었고 찾아 줄 만한 벗들도 있어서 마주 앉아 肝膽[간담]을 토로하면 달지고 해 뜨는 줄을 몰랐으나 한번 天涯[천애]에 방랑하여 胡地 孤客[호지 고객]이 된 뒤로는 늘 숙연한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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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전혀 여기서 농사짓는 사람들이다. 그네들은 오는 때마다 나에게 고국 이야기를 청한다. 내가 고국 이야기를 하면 그네들은 재미있게 듣는다. 자기네 생활 이야기도 한다. 그네들 가운데는 조선이 어디가 붙었는지 어느 때에 이 땅으로 들어왔는지 모르는 이가 많다. 그러나 그네들은 자기의 나라는 조선이요 자기는 조선사람이며 백두산은 자기 나라의 가장 높은 산인 것을 기억한다. 그네 들 가운데는 별별 인물이 다 있다. 살인·강도·협잡으로 도주하여 온 사람도 있고 망명객도 있다. 마치 水滸傳[수호전] 중의 梁山泊[양산박]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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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활 곤란을 못 이기어 男負女戴[남부여대]로 들어온 사람이 그 대부분이다. 그렇게 와서 갖은 풍상을 다 겪어 가면서 나무를 베고 밭을 내어서 자자손손이 대를 물려서 아주 중국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고도 늘 백두산을 바라보고 고국을 생각한다. 피[血[혈]]란 무서운 것이다. 이 지구가 부서져서 인류가 전멸되기 전에는 우리 사람의 피가 흐를 것이다. 나는 그네들을 대할 때마다 늘 이러한 생각을 하고 눈물을 뿌린다. 그러나 그네들은 내 눈물을 모른다. 어떤 때는 병고가 심하여 우는 줄로 믿는다. 오오 고적한 이 생활! 누구를 보고 웃으며 누구를 보고 울어 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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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약이 없다. 병이 들리면 침(鍼)과 뜸을 놓고 그렇지 않으면 아편을 먹는다. 여기는 그 때문에 아편 먹는 사람이 많다. 또 아편을 많이 심는다. 6, 7월 이르면 廲明[여명]한 熱日[열일]의 下[하]에 빛나는 양귀비꽃은 참말로 양귀비를 생각케 한다. 나는 병고를 견디다견디다 못하여 아편을 피웠다. 처음에는 砒酸[비산]물 먹은 것처럼 어지럽고 逆氣[역기]가 나더니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가니 그것이 멎는다. 그것이 멎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인심을 미혹하게 하는 맛이 생긴다. 煙燈[연등]에 아편을 구어서 ‘얜자시’ 에 한 대 피우는 풍미는 그럴 듯하다. 그래 피우고 나면 고통이 스러지고 전신이 一世之淸風[일세지청풍]에 둥덩실 뜬 듯 참말 극락 세계에 노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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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편은 이리하여 사람을 유혹하는구나! 고국 산천에서 손꼽아 기다리는 부모 형제 처자를 잊어버리고 남북 만주와 서백리아 황야에서 阿片鬼[아편귀]가 되는 동포들을 생각하는 때 뜻있는 이로 누가 개탄이 없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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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편을 버리고 鍼[침]과 뜸[灸[구]]으로 치병하기를 결심하였다. 아편은 治病之藥[치병지약]이 못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인심을 마취케 한다. 그런 까닭에 병고를 잊는 것은 취한 그때뿐이지 깨는 때에는 여전히 아프다. 그뿐만 아니라 아편 인까지 박여서 고통이 더 심하게 된다. 여기 사람들은 남녀를 물론하고 거개 아편에 중독되었다. 그 독은 그네들 자신에만 갚는 것이 아니다. 유전이 된다. 건너 마을 許官廳[허관청]의 며느리가 애를 낳았는데 어린것은 뱃속에서 나오면서 즉시 거품을 물고 죽는 것을 그 할아버지가 아편연기를 쏘여 주니 뽀지지 살아나서 첫울음을 내었다 한다. 한심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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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이면 침을 맞고 오후에는 뜸을 뜨게 된 지 벌써 닷새가 된다. 침은 하루 육칠십 군데 뜸은 천여 장씩이다. 아편은 이제 끊어 버렸다. 기나긴 銅鍼[동침]이 사정없이 등이며 배며 팔 다리를 찌를 때나, 내 손으로 비벼 놓고 내 손으로 불질러 놓은 뜸봉이 타들어서 고기와 빠직빠직 끓어 타는 것을 보면 미미한 내 목숨의 줄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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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살아서는 무엇 하나? 괴로운 세상에 그다지 애착이 갈 것도 없건마는 그래도 살고 싶다. 어떤 때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두려워서 鍼灸[침구]의 苦[고]를 감수하거니 생각하면서도 더 살아야 ! 하는 생각, 속일 수 없이 내 마음의 속에 굳세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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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침구가 2, 3일이면 効[효]가 나리라는 의사의 말도 믿을 수 없다. 원래 그는 내가 그리 신임치 않는 의사다. 내가 병을 그 의사에게 처음 보일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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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병인데 新醫[신의]에게 보이니(조선 있을 때) 위확장이라는데 그것은 위가 늘어졌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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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였다. 그것을 들은 그 의사는 식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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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집〔胃[위]〕이라는 것이야 많이 먹으면 늘어나고 적게 먹으면 주는 것인데 미친 것들 그 무슨 병이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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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바람에 나는 그에게 대한 신념이 떨어졌다. 그러나 하는 수 없으니 나는 나의 귀중한 목숨을 그의 침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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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고 오늘까지 닷새째 되건마는 기운은 점점 피폐해지고 고기는 말라서 뼈만 남는다. 나는 그래 죽는가? 이 天涯 異域[천애 이역]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가 ? 내게는 아직도 前程[전정]이 구만리나 있다. 내게는 그저 할 일이 많다. 내게는 부모가 있다. 친구가 있다. 고국이 있다. 나는 죽더라도 이 일을 다 해놓고 부모님 슬하, 친구 곁에서 죽어서 고국 땅에 묻히리라. 내가 왜 죽어 ? 나는 그만 신이 났다. 나는 배에 얹은 뜸봉을 털어 버리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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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청한 초가을 일기는 좀 산뜻하나 서천에 기운 볕은 따스하였다. 조와 콩은 누릿하였고 우거졌던 녹엽은 어느새 끝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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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리를 뻗고 조밭 가 쓰러진 나뭇 등걸에 앉아서 멀리 남쪽 하늘가에 우뚝 솟은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雲捲天睛[운권천청] 맑은 하늘 아래 엷푸른 초가을 안개와 서리 물드는 녹엽이 서로 어우러져서 濃淡[농담]이 자재한 天際[천제]에 白頭[백두]가 屹然聳立[흘연용립] 한 것은 巨靈[거령]이 白雲間[백운간]에 뜬 듯 천고의 신비와 전세계의 운명을 장악한 듯이 숭엄하게 뵈인다. 더욱 闥門潭[달문담]으로 넘쳐 흐르는 물길이 한창 빛나는 석양에 번쩍번쩍하는 것은 우리 동방의 빛을 길이길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을 볼 때 내 머리는 저절로 白頭[백두]를 향하여 숙여졌다.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눈물에 兩眼[양안]이 흐려지고 알 수 없는 힘에 주먹이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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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저 위대한 백두산하에서 우리 2천 만의 시조 단군께서 나셨나 ? 그것이 한 신화에 지나지 못하고 그것이 한 미신이라 하더라도 조선이 있고 조선의 아들과 딸이 있을 동안은 千秋[천추]에 전하여 스러지지 않을 것이며 믿을 것이다. 그것이 벌써 4천여 년 전 옛이야기지만 이제에 이르러서도 백두산을 보는 때에 단군을 그리지 않는 이 누구며 단군을 그리는 때에 백두산을 생각지 않는 이 누군가?
【원문】신음성(呻吟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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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해(崔曙海)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1926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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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8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