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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과 나의 십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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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5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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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나의 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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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의 몇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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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 오월로써 십 년의 탄일(誕日)을 맞는다고 한다. 십 년! 하고 한 마디로 불러 버리기에는, 이 시대를 청년기로써 보낸 사람에겐, 너무도 파란과 곡절이 중첩된 의의 있고 감회 깊은 세월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대하게 될 장래라고, 지난 십 년만 못할 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러나 지난 십년은 인간생활의 제2계단(弟二階段)으로 올라서는 청년이나 장년급에 있어서는, 일찍이 맛볼 수 없었던 중요하고 또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일종의 질풍노도의 시대였음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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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건망증에 사로잡혀 눈앞에 닥쳐오는 모든 사무에 망살(忙殺)되는 머리가 십 년! 하고 한번 지난날을 돌이켜 보게 될 때에, 실로 가슴을 뭉클하게 물러않게 하는 커다란 충격이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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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잘 살아왔다. ── 만일 지난 십 년을 어떠한 물결에 뜨고 어떠한 조수(潮水)에 밀려서 지내 왔던, 그 곳에 인간적인 성실을 일관적으로 상실치 않았다고 자신하는 청년이 간혹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이 눈뜰새 없이 돌아가는 세사(歲事)의 차륜(車輪) 속에서 지나간 십 년이 얼마나 자신을 정신적으로 시련(試鍊)하고 얼마나 풍부한 양식을 던져 주었는가를 고요히 생각할 여지(餘地)를 같고 있지는 아니 할른가? 나는 아직도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퇴폐적인 기운에 침윤되지 않았다고 자신하는 건강한 청년이나 장년들이 과거를 이렇게 값있게 평가하리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혹은 라부류이엘이나 뭇세 모양으로 우리의 뒤늦은 탄생을 한탄(恨嘆)하지는 않고, 오히려 값있는 전환기에 초롱 같은 명징(明澄)한 두 눈알을 주고, 동시에 이 거친 세대를 용감히 헤어나갈 만한 사고력과 육체를 부여한 신에게 대하여 감사를 올리지나 않을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다. 단 십 년의 정신적 시련으로써 가히 백년에 해당하는 풍부한 경험을 제 것으로 할 수 있는 청년이 있었다면, 그는 서슴지 않고 이러한 시대에 생겨난 자신을 축복할 것이오, 이러한 시대에 몸을 잠그고 용감히 헤어나게 하는 역사의 이념과 신의 배려에 대하여 감사의 념(念)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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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년에게 있어 만약 지난 십 년을 이상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 청년과 한가지 생애를 살아오고 가지가지의 시련을 치러온 하나의 잡지 『비판』역시 그의 지나온 십 년을 이러한 뜻 깊은 족적(足蹟)으로써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부침(浮沈)도 있었고 성쇠(盛衰)도 있었고, 메타모르포제도 있었고,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우울(憂鬱)과 찬란한 환희까지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복잡하고 뒤설킨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십 년의 역사와 기복(起伏)을 같이하야 금일에 이르렀다면 그가 지금 어떠한 상처를 제 몸뚱이 속에서 완치(完治)치 못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살아와서 살아 있다는 것 ─ 그것만으로 넉넉히 축복하고 만세를 고창(高唱)할 일이 아닐런가.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십 년을 살아 왔다는 것은 결코 대수롭게 여길 그러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과거를 토대로 하여 꿋꿋이 살아 있다면 그것 역시 아무렇지 않을 일이라고 집어칠 수 없을 일이 아닌가? 여러가지 곤란 가운데서 경영을 지속(持續)하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앞으로도 넉넉히 그의 보무(步武)를 멈춤 없이 행진하리라는 것도 또한 장한 일이 아니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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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우선 생각하면서 점차 가라앉은 상념의 줄을 타고 과거를 회상하여 보면 내가 기억에 떠오르는 일만이라도 마치 여름날의 구름 같으다. 그 중에서 『비판』과 나와의 관계를 더듬어 지금 회고의 몇 토막을 공개하려는 것인데, 실사인즉 『비판』과 나는 퍽 밀접한 관련이 있을 듯 하면서도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에 비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근경에 가까웁다. 좌익잡지(左翼雜誌)를 표방하고 세상에 나왔던 『비판』이오, 또한 그 당시 경향문학의 신입생으로 붓을 들었던 나인 만큼, 응당, 그 간(間)에는 어떠한 특수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리(理)의 당연이겠는데, 실상은 그러치 못하여, 내가『비판』에 문장을 게재해본 것이 겨우 작년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그것 하나로서 능히 만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거지반 비등한 시일에 문필계에 탄생하고 그 바탕이 한고장이면서 남달리 최근에서, 그것도『비판』이 세상에 나와 구 년망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다는 것은 퍽이나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나 자신도 이에 대하야 실로 적지 않은 감회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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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경서 학업을 중지하고 서울로 나온 것은 소화 6년 봄, 바로 『비판』이 창간되던 무렵이다. 당시 나는 사회운동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없었으므로, 카프카 어떠한 파벌에 속하는 것인지로 똑똑히 몰랐으나, 당시에 내가 카프 동경지부원들은 고경흠(高景欽), 서인식(徐寅植) 등의 제시(諸氏)의 정치이론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파벌청산을 구호로 내세우기는 하면서도 의연(依然)히 엠엘계에 심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가담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카프에서는 그 때『집단(集團)』이란 대중계몽잡지를 내려고 준비중이었는데 『비판』이 나왔다. 『비판』은 우익이니까 집필하면 안 된다는 결의가 카프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송봉우(宋奉瑀)씨가 북풍(北風)이었은니까 그랬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나 편집내용은 『조선지광(朝鮮之光)이나 카프 계통의 것과 달라서 퍽 개방적이었다. 우리는 이 개방적인 것을 좋게 보지 않고 잡도사니요 추잡하다고 보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카프의 이러한 태도는 비단『비판』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으니 주요한(朱耀瀚)씨 주간의 『동광(東光)』에 이기영(李箕永)씨가 원고를 팔았다가 다시 찾아온 일도 있고, 심지어는 최승희씨와 안막씨(당시의 카프 중앙위원이었다)의 결혼까지 반대결정한 일까지 있었으니 가히 당시의 예술단체의 면목(面目)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판』은 우익잡지요 나쁜 기관이란 생각을 품은 채, 그해 8월부터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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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보석으로 출감하였을 때 사정은 퍽 달라졌었다. 우선 카프에서도 창작방법을 고쳤고 또 정치주의을 다소간 청산해나가던 무렵이다. 그 때가 바로 소화 8년인데 백철(白鐵)군도 그때에 처음으로 인사를 하였고 이갑기(李甲基)군도 상경하여 있었다. 잡지로는, 동일한 경향을 표방하는 자로 『비판』외에, 조선지광사에서 나오는 『신계단(新階段)』이 있었고, 이종율(李鍾律)씨 등이 주(主)해서 하든 『이러타』, 김약수(金若水)씨와 이갑기(李甲基)군이 함께 하던 『대중(大衆)』, 성대(城大) 졸업생들의 『신흥(新興)』, 그리고는 카프 계통의 각 부문 출판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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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들으니 내가 없는 동안 『비판』에는 이무영(李無影), 서광제(徐光齊), 이갑기(李甲基)군 등이 모두 관계했었다고 하나 『비판』에 대한 나의 태도는 별반 변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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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카프 중심으로 출판물을 통일하고 그 출판물을 중심으로 문화 각 부문을 통제하자는 이론이 있었는데, 나는 『신계단』에 두 번에 걸쳐서 「잡지문제에 관한 각서」란 논문을 발표하야 물의를 일으켰다. 그것 때문에 김약수씨와는 처음 인사하고 사귀게 되었는데, 해논문중(該論文中)에서,『비판』에 대하야 ─ “『비판』은 비판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폭로의 대상이라”─ 라고 쓴 것이 있어서, 송(宋)씨나 그 밖에 이갑기군한테도 좋지 않은 감정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해 여름에 내가 평양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비판』사람과는 인사할 기회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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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에는 전기(前記)의 대부분의 잡지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는데, 『비판』은 계속되었는지 어쩐지 명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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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고는 뚝 떨어져서 소화 10년, 그러니까 소화 구 년에 전주사건 등을 치렀고 그것이 송국(送局)이 된 해인데, 카프해산 즉후(卽後) 나는 상경하야 중앙일보에 들어가 있었다. 그해 가을 서광제(徐光霽)군이 중앙일보로 나를 찾아와서 『바판』을 다시 하게 되었니 원고를 써달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동안 잠시『비판』도 중지되었었는지 모르겠다. 바쁘기도 하지만 『비판』에 대한 낡은 감정이 가시질 않아 종시 아무 것도 쓰지 못했고, 그 뒤 이병각(李秉珏), 한효(韓曉)군 등이 기자로 있을 때도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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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韓[한]군인가 누군가한테 들으니, 송봉우(宋奉瑀)씨도 나에게 대하여 감정이 있다고 하였으나, 실상인즉 아무 토대나 근거도 없어진 뒤에 사소한 감정, 더구나 터무니없는 파적심리(波的心理)에 기인(基認)했던 감정 같은 것을 지속해 갖고 있다는 것이 무의미 하고 싱겁기 없는 노릇으로 생각되기는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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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작년(尹圭涉)군이 김명식(金明植)씨와 함께 관계하던 무렵에 비로소 나도 『비판』에 원고를 썼고, 송씨와도 그 때에 인사하였다. 소설도 썼고 비평도 썼고, 잡문도 써서 고료도 좀 받아썼고, 또 작년 연말에 소고기를 보내주어서 그 놈으로 술도 맛이게 먹었다. 그리고는 지금 이러한 두서없는 회고담을 짓갈겨쓰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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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체 평상적인 우의관계(友誼關係)가 아니었든 만큼 『비판』하고는 이즈음 유별나게 가까워지는 것 같은 심리의 일단(一端)도 경험하고 있다. 남만희(南萬熙)군이나 안동수(安東洙)군 등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비판』이 지금껏 성성해 있을 것을 축복하여마지 않으며, 더구나 십 년 전의 잡지나 벌써 잠적(潛跡)해 버린 지 오래되어, 모두 임금(林擒)봉지나 고기싸개로 되어버렸는지 모르는 지금 『비판』만이 건재하여 탄생축하연(誕生祝賀宴)을 벌이고 있는 것이 희한도 하고 반갑기도 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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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담 몇 줄을 적어 그의 만수(萬壽)를 축원하는 소이(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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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二十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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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1939년 5월)
【원문】『비판』과 나의 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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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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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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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