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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대중과 문예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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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7.5~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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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農大衆[노농대중]과 文藝運動[문예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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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아직까지 일반에게 많이 읽히는 문학 작품은 현대 작가의 작품보다도 고대 작품이다. 출판업자의 말을 들으면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인기가 가장 좋은 것이라도 일년에 천 부가 팔리나 마나 한데 『春香傳[춘향전]』이니 『洪吉童傳[홍길동전]』이니 하는 소위 고대 소설은 적어도 일년에 현대 작품의 십 배 즉 만 부는 팔린다고 한다. 그 말은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서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니와 이제 그 독자 계급을 살펴보면 그 가운데는 부르조아 계급이나 지식 계급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실은 쌀에 뉘와 같이 극소수이고 대개는 국문을 간신히 뜯어보게 되는 노동 계급과 농민 계급이 더욱 많다. 이것은 우리의 손으로 일일이 정확한 숫자를 따져 본 것은 아니나 일반적 현상으로 보아 틀리지 않은 관찰이라고 믿는다. 실로 그네들이 읽는 조선의 고대 소설에는 우리 눈으로 보면 한심한 것이 많다. 어떤 것은 열 모로 뜯어보아도 볼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건만 그네들은 그것을 애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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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농촌으로 돌아다니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겨울같이 일이 좀 덜 바쁜 시절에 농군들이 많이 모이는 어떤 집 사랑채 같은 데 가보면 텁텁한 꿈속 같은 등잔불 밑에서 4호 활자로 구절도 뜯지 않고 내리박은 『趙雄傳[조웅전]』이나 『春香傳[춘향전]』 『洪吉童傳[홍길동전]』류의 고대 소설을 "却說[각설] 이때에……" 하고 솜씨는 서투르나마 고성으로 대독한다. 이렇게 읽으면 읽는 사람의 흥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곁에서 새끼를 꼬고 신을 삼고 장기를 두던 사람들도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하던 일까지 잊어버리게 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老農[노농]들은 젊은이들의 눈총을 맞으면서도 책 읽는 소리를 들으려고 일부러 찾아온다. 이렇게 그네들은 긴장한 흥에 취하여서 기나긴 겨울밤이 새는 것까지 모르고 지낸다. 그뿐만 아니라 농촌의 장날 같은 때에 보면 등짐 장사들이 벌여 놓고 파는 책은 四書三經[사서삼경], 옥편 류 외에는 모두 표지를 울긋불긋 장식한 이삼십 전 짜리의 고대 소설뿐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소설을 사가는 사람은 민상투 바람에 나뭇단이나 쌀말을 지고 왔던 농민들인데 그네들이 책을 가리는 방법은 대개 두가지라는 것을 그 변에 경험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다. 첫째는 이입 저입으로 전하여서 재미있다고 소문난 책, 그렇지 않으면 표지의 그림에 끌리는 것이 둘째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하다. 그런데 첫째 방법은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니나 둘째 방법 즉 표지의 그림에 끌려서 사는 데는 미상불 보는 사람의 호기심을 끈다. 그것도 그림이 어느 정도까지나마 그림이 되었으면 용혹무괴이나 사람의 코 하나도 변변히 그려놓지 못한 데다가 푸르고 붉은 값싼 물감을 칠한 것으로 전문가까지는 차마 거들기가 무엇하고 다소 상식이 있는 이면 구역이 나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건만 그네들은 서로 무릎을 치고 서로 바라보면서 자기들의 상상을 이리저리 그려 보고 감탄을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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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소설에 대한 如上[여상]의 사실은 농촌에서뿐만 아니라 도시의 노동 군중 속에서도 흔히 발견하게 된다. 조그마한 인력거 병문이나 쓰러져가는 어떤 집 행랑방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보게 되는 적이 간혹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네 노농 대중은 신문예품을 버리고 고대 문예품에 접촉이 많은가? 이것이 무산 문예가들의 가장 착안할 점이다. 노농 대중을 위하여 애써 지어 놓은 작품이 결국은 봉건 시대의 산물에 밀리게 되니 작자의 노력은 수포가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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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이대로 나간다면 10년, 20년에 汗牛充棟[한우충동]의 작품을 산출하였더라도 공탑이 可惜[가석]으로 아무 소용도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노농 대중들의 생활을 다 관찰하고 고대 소설의 읽히는 이유를 생각하여서 그네를 위한 문예 창작의 참고를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아래 거기 대한 나의 생각한 바를 써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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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현대 작가의 작품,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그네를 위하여 써 놓은 무산 문예 작품을 더욱 돌보지 않고 지나간 봉건 시대의 끼친 물건인 고대 소설만 읽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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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을 써 놓은 문장이 이해하기에 용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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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농 대중은 무산 계급인 동시에 무식 계급이다. 그네들이 오늘날까지도 봉건 사상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큰 이유도 여기 있거니와 이렇게 됨으로(그러나 그것은 그네들의 죄는 아니다.) 새로운 문화가 산출한 새 용어에 대한 이해가 전연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몇 백 년 몇 십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보편되고 속화되어서 그네들의 생활과 어울리는 용어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만 미루어 생각하더라도 새 용어를 많이 사용한 새 작품보다 속화된 용어를 사용한 고대 소설이 그네의 환영을 사게 될 것은 明若觀火[명약관화]의 사실이다. 또 말에 다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은 그 말이 가진 기분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니 재래의 인습, 재래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네들의 기분은 재래의 작품이 취급한 말과 어울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無學[무학]한 그네들은 고대 소설에 대하여서는 곁에서 읽는 소리만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 기분에까지 취하여서 "좋다, 좋다, 재미있다" 하게 된다. 울긋불긋한 단순한 색채와 단순한 선으로써 표지에 그려 놓은 피상적 그림을 보고 좋아하는 것도 如上[여상]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다소의 지식을 요하는 색채와 선으로써 그려 놓은 그림은 그네와는 몰교섭이다. 그것을 이해치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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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골자가 단순 정연하여서 한 번 듣고 기억하기 쉽고도 파란곡절이 있어서 흥미를 끌어야 할 것이다. (문예상의 이 조건은 無學[무학]한 노농 대중만의 요구가 아니라 상당한 지식 계급에서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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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들은 섬세한 묘사의 妙[묘]라거나 델리키트한 人情美[인정미]나 심리 작용보다도 댓줄같이 굵은 묘사로써 단순한 감정을 움직이는 골자가 뚜렷한 흥미 있는 사건을 좋아하는 것이다. 소리로 치면 단소나 양금의 미묘한 곡조보다도 꽹과리나 새납의 소리와 같이 단순하고 소박하고도 강렬한 소리라야 그네들의 귀를 울리게 되고 그네들의 이야기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네들은 눈으로 보고 감정으로 읽는 작품보다도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작품을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사건은 둘째로 하고 인정의 기미와 심리의 작용 등으로 일관한 현대 작품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사건)를 단순한 필치로써 적어 놓은 고대 소설이 그네의 환영을 받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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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소설은 인쇄 활자가 굵고 또 그 분량이 적고 책가가 싼 까닭에 많이 읽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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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 활자 같은 획이 굵은 木鑄字版[목주자판]이나 그렇지 않으면 붓으로 등사한 책에서 익은 그네들의 시각은 깨알 같은 5호 활자의 인쇄보다 4호 활자의 인쇄를 즐기고 또 활자가 커야 어둑한 등불 밑에서도 잘 볼 수 있는 것이며 서투른 솜씨일수록 글자가 뚜렷뚜렷하여야 읽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분량은 적어야 할 것이니 분량이 너무 많은 것은 그네들 생활의 시간 관계도 되려니와 사건의 결말이 어찌 된 것을 어서 알려는 초조한 심사에 두고두고 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책가가 많아도 이삼십 전이 넘으면 그네의 경제는 그것을 구독할 여유를 못 가지었다. 사실 그네들 생활에서 소설 대가로 이삼십 전을 지불하게 된다는 것만도 과중한 일이다. 요사이 신문에 매일 보도되는 의성군을 필두로 各災害地[각재해지]의 罹災民[이재민]들은 하루 3,4전의 지출이 불능하여서 餓死[아사]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이런 것은 극도의 예라고 하겠지만 하여튼 현하 조선의 무산 대중은 문예를 위하여 지불할 경제는커녕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의식을 위하여 지불할 경제에 곤궁한 판인데 그러한 생활에서 문예를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면 단 십전이라도 과중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에 있어서 그네들이 5호 활자로 깨알같이 인쇄한 2,3백 페이지의 작품을 일 원 내외의 거액을 던지고 사볼 리가 만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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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감정이 일치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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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소설의 내용과 노농 대중의 정신 생활과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 점이 그네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조건보다도 이 조건이 양자를 결합시키는 큰 조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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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농 대중은 자본주의의 물결에 시달리면서도 봉건 사상의 잔재를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네들의 외적 생활과 내적 생활의 사이에는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고 알력이 생긴다. 여기에 그네들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네들은 어찌하여 그네들이 생각하는 바와 그네들을 볶는 현실과 다른지를 모른다. 인과 관계에 대하여 과학적 하등의 비판이 없는 그네들은 다만 모든 것을 그네들이 가진 바 봉건적 사회관, 봉건적 인생관, 봉건적 윤리관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는 조금도 맞지 않고 도리어 그네들의 철학이 흔들리게 된다. 그렇다고 그네들은 그네의 철학을 버리지 않는다. 역시 그 사회관, 인생관, 윤리관 속에서 安身立命[안신입명]의 길을 찾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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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들은 이 현실을 통하려고 한다. 그네들이 꿈꾸는 그런 로맨틱하고 신비적 세계를 찾아서 이 현실에서 받은 고통의 傷度[상도]를 고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네의 힘으로써는 불가능이라는 것을 믿는 그네들은 그런 세계를 찾아 줄 신비적, 초인간적 힘을 자연 바라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그런 신비적, 초인간적 힘을 가진 위인의 출현을 위하여 ─ 그네를 그네가 생각하는 로맨틱한 나라, 아무런 고통도 없이 부모, 처자, 형제가 집을 지니고 밭을 갈아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끌어다 줄 위인의 출현을 위하여 여하한 고통이든지 참고 어떠한 어려운 일이든지 감히 행한다. 고생의 뒤에는 반드시 樂[낙]이 있다는 인과설과 선악의 인과설에 젖은 그네는 항상 바른 마음으로 착한 마음으로 ○○○ ○○○○ ○○○○○○○반항이 없이 충실과 성근을 다하는 데서 그런 위대한 힘의 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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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 감정 ─ 현실 도피, 신비적, 초인간적 힘을 소유한 위인의 출현, 한때 고생은 반드시 한때의 복을 불러온다는 것 같은 이러한 봉건 사상은 봉건 시대의 유물인 고대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홍길동전』 『춘향전』 『소대성전』 『조웅전』류가 모두 그러하다. 그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차마 사람으로서는 겪지 못할 고생을 하다가 끝에 가서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주인공들은 물론 보통의 인간은 아니다. 초인간적 신비로운 힘을 소유한 위인들로 그들이 그렇게 끝에 가서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은, 1. 天時[천시]를 잘 타고나서 神[신]이 도와준 것, 2. 전생과 차생에서 적선을 많이 한 것, 3. 초년에 고생을 많이 한 것, 4.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도 감행할 수 있는 도술을 배운 것 등의 사상으로써 일관하여 있다. 이 사상이 그네들 노농 대중과 일치된다. 그네들은 홍길동ㆍ 조웅을 참말로 믿는다. 또 그런 위인이 때가 오면 출현할 줄 믿고 출현하면 그네는 安心立命[안심입명]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고대 소설은 그네들의 정신 생활에 만족을 주고 그것을 읽음으로써 사나운 현실고를 잊어 버리고 로맨틱한 꿈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그네들의 의식을 더욱 흐리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네들의 생명을 지니게 되는 조건이 된다. 새 세계를 바라는 마음 ─ 그 세계가 가능한 세계든지 불가능한 세계든지는 논할 것 없이 ─ 그것이 다 그네의 희망이요 그네의 이상이다. 이것이 미래를 기다리는 그네들 생명의 약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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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상은 그네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상을 담은 소설만을 애독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의 세상에 실현케 하도록 어떠한 행동까지 취하게 한다. 그네가 名山大川[명산대천]을 찾아 좋은 운명을 빌고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술사를 찾아서 安身立命[안신입명]의 방법을 얻으려는 것도 그러한 따위의 행동일 것이다. 그네의 이러한 행동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니 ‘松風蘿月[송풍나월]’을 중심으로 무학한 농민들이 모여드는 것도 그러한 일례일 것이다. ‘松風蘿月[송풍나월]’이란 것은 白頭山[백두산] 뒤 西間島[서간도] 一隅[일우]에 있으니 松林[송림]이 칠십여 리가 연한 곳으로 인적이 퍽 드물은 곳이다. 여기에 1924년경에 세인의 소위 道人[도인]이라는 劉伯溫[유백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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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上通天文[상통천문] 下達地理[하달지리]한 사람으로 모르는 것이 없다 한다(실상은 무식한 사람). 그는 낮에도 별〔星[성]〕을 보는데 별의 동작만 보면 어느 때 어디서 전쟁이 나고 어느 때 어디서 사람이 얼마나 죽었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고 그의 호령 한마디면 모든 싸움도 진정되고 죽었던 사람도 살아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도사를 따르고 도사의 말대로 행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미구에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으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천벌을 면치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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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혹하여 땅을 팔고 집을 팔고 소를 팔아 가지고 松風蘿月[송풍나월]로 모여 든 농민들은 불과 6,7개월간에 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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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간도 일대의 농민들은 물론이요, 멀리 갑산ㆍ무산ㆍ회령에서며,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에서까지 男負女戴[남부여대]로 모여든 농민들이었다. 그 시절이 뒤숭숭한 시절인 만큼 일반 민심까지 극도로 흉흉하던 때이라 어디 가서 어떻게 지접할 줄을 모르고 알 수 없는 공포 중에서 조석을 보내던 농민들은 그러한 신비적, 초인간적 힘을 가진 도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뒤숭숭한 현실을 피하고 로맨틱한 새 세계를 찾으려고 그렇게 그리고 모여든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네는 피와 땀으로 바꾼 전 재산과 가장 귀중히 여기던 딸까지 그 劉伯溫[유백온]이라는 도사에게 一夫人[일부인] 二夫人[이부인] 심지어 열몇째 夫人[부인]이라는 명목으로 바쳐 가면서 銃[총]끝에서 물이 나게 하고 水火[수화]의 가운데서라도 몸을 피할 수 있는 神出鬼沒[신출귀몰]한 도술을 배워 잘 살아 보려고 매일 '진지'를 지어 가지고 도사를 따라서 백두산에 기도를 올리고 비복에게 대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유도사의 명령을 순종한다. 그 수도의 苦[고]는 그네들이 故土[고토]에서 가난으로 받던 苦[고]보다 尤甚[우심]하되 그것을 오히려 만족히 여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네가 바라는 신세계가 온다는 것을 믿는 까닭이다. 그들이 소위 車某[차모]의 어림없는 登極說[등극설]을 신앙하고 계룡산을 安住之地[안주지지]라 하여 찾아드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의 심리일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망의 구렁으로 들어가는 것이건만 그네의 의식은 그래야만 살 길이 나선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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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기서 주목할 것은 '새 세계'를 바라는 그 사상이 다 괴로운 세상을 하루 바삐 벗어나서 배를 주리지 않고 등이 시렵지 않게 형제 처자를 지니고 화락히 살 수 있는 새 세상을 바라는 그 사상이다. 이것은 그네가 무의식중에 의식하는 의식으로 이 의식이 그네의 모든 동작의 저류가 되어 있다. 환경과 처지의 관계로 과학적 사상을 못 가진 까닭에 현실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 없고 그 현실을 벗어나서 새 현실을 찾는 과학적 행동을 못 취하고 그렇게 비과학적으로 달아나지만 그네의 가슴속에서 불붙고 있는 生[생]에 대한 욕구는 누구나 무시할 수 없는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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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을 잘 이해하여 잘 이용하는 데서 비로소 그들 대중을 끌 수 있고 따라서 그네들을 그네들이 밟아야 할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소위 車某[차모]나 劉伯溫[유백온]의 무리들은 현하 봉건 사상의 잔재를 못 벗은 조선 노농 대중의 심리를 잘 포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나는 여기서 그들이 하는 바 그 미신의 행사를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네들의 행사를 배격하고 그 미몽에서 깨도록 노력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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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뒤를 이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이다. 우리 무산 문예작가들은 그 작품을 어떻게 써야 노농 대중을 고대 소설로부터 빼앗을 수 있고 또 그들의 의식을 고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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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조선의 무산 문예는 이러한 소임을 다하여야 그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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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무산 문예는 그들의 1. 生[생]에 대한 욕망, 2. 신세계의 동경, 3. 반항 등의 심리를 잘 붙잡아서 그들에게 빛나는 생과 새로운 세계와 줄기찬 힘을 보여 주되 그것은 재래의 고대 소설과 같이 비과학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과학적이라야 할 것이다. 우리 무산 계급이 욕구하는 생은 어떠한 의의를 가져야만 된다는 것과 그 의의를 분명히하려면 장래 할 새 사회(동경하는 신세계)는 어떻게 되지 않으면 안 될 것과 그러한 생, 그러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서도 무엇에 대하여 어떠한 반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과학적, 현실적으로 보여서 위에 말한 그네들의 심리에 만족과 법열을 주되 먼저 그들의 환경, 그들의 처지를 그들의 앞에 표현하여 보여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의 생활은 나날이 파멸이 되는 것과 그 큰 원인은 어디 있는 것을 인과 관계가 분명하게 그들의 앞에 제시하고 그러한 생활을 고치려면 그것은 숙명론적의 '때'나 신비적의 초인간적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이 아니면 될 수 없다는 것을 또 그들의 힘은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생경한 이론은 일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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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한 이론은 그들이 즐기지도 않거니와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무슨 뜻인지 모른다. 어쩌다 그네들이 이해하는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이론보다도 작품으로써 모든 것을 그들이 실지 체험하고 실지 느끼어서 사실같이 믿도록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서 그들의 의식을 고쳐야 한다. 그들은 중산 계급이나 지식 계급과 같이 알고도 주저거리거나 어디가 어떻게 되나 하여서 이쪽 저쪽에 秋波[추파]를 보내는 얄미운 짓은 하지 않는다. 한번 믿으면 무조건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네들이 그네들의 安住之地[안주지지]를 찾음에 있어서 현재 그네들의 행동이 글렀다는 것을 아는 날이면 그들은 그것을 버릴 뿐 아니라, 그네들로 하여금 그러한 생활을 하게 하던 그 무엇까지라도 부숴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세상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 새로운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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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문예는 그들의 의식을 그렇게 돌리도록 내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위 노농 대중을 위한다는 흥미에만 치중하고 하등 윤리적 의식이 움직이지 않는 그 따위 대중 문예는 하루 바삐 없어지기를 바란다. 독한 약이 병에는 좋으나 맛이 씀으로 어린것들이 잘 먹지 않으니까 砂糖[사탕]을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노농 대중에게 의식을 불어넣기 위하여서 흥미를 권도로써 쓴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흥미를 위한 흥미의 대중 작품은 고대 소설 이상으로 그네들의 의식을 혼란시키고 그네들의 생활에 파멸을 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아편보다도 알콜보다도 더 심하게 그들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대중문예는 현대노농 계급이 마땅히 가져야 할 계급 의식을 담은 무산 대중의 문예라야만 될 것이다. 그것은 즉 무산 문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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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산 문예는 그러한 내용을 곡절이 있고도 정연하게 그네들이 가장 읽기 쉬운 말로써 표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은 될 수 있는 대로 너무 길지 말고 책은 팜플렛 식으로 하여서 2,3십 전을 받도록 하여 가지고 일반 노농 대중에게 많이 읽히도록 하여야 하리라고 믿는다.
【원문】농촌대중과 문예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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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해(崔曙海)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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