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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8
김남천
『조광』, 1939년 8월, ‘사건 있는 해변풍경’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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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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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짤막한 이야기의 남녀 주인공의 이름은 ‘광식’이와 ‘안나’다. 물론 ‘광식’이가 사나이고 ‘안나’가 여자다. 광식이는 청년 소설가이요, 안나는 종로 어떤 바의 마음 착하고 이쁘장스런 여급이다. ─ 이렇게 말해도 독자는 이 두 젊은 남녀가 알지 못할 것인가? 『조광』만 사보고 『여성』이라는 부인잡지를 사서 읽지 않은 이는 아마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실인즉이 두 사람은 『여성』에 지금 연재되는 「애인」이라는소설의 작중인물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이름을 지어준 이는 「애인」의 작자 안회남 군이다. 나는 이 두 분을 잠시 빌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남녀의 창조자인 작자 안회남 군은 아와 친분 있는 분이니까, 언제 엽서로 두어 마디 “귀형의 창조물 두어 분을 빌려 데리고 산보래도 하려 하오니 그리 아시옵기 바라나이다”하고 써보내면 될 것이요, 광식이와 안나는 벌써 두어차례 『여성』지에서 대면한 적이 있으니까, 좋은 말로 꾀이면 어렵잖게 나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두 아리따운 젊은 애인들을 데리고 하루 인천 월미도에라도 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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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여성』을 읽지 않은 분을 위하여 인물을 소개해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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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식이라는 청년 소설가는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다. 또 먹을 만한 양식도 있는 모양 같다. 이 광식이가 안나라는 여급이 있는 주장(酒場)으로 술을 마시러 갔다가 이러저러한 끝에 연애가 된 것이다. ‘이러저러하던’ 그 연애 형성과정을 설명하라고? 그런 거야 구태야 객쩍게 이러니 저러니 쑥스럽게 늘어놓을 것도 없이 잠깐만 상상하면 곧 알 만한 일이 아닐까. 사람이란 술잔이나 하면 때때로 싱거워지는 것이니, 광식이라는 친구도 술잔이나 얼근해서 아마 제법 글줄이나 쓰는 체, 또 점잖은 체, 그리고 돈냥간이나 있는체, 그리고는 또 여자의 심리 같은 것도 꼬치 꼬치 아는 체 했을 것이고, 여기에 또 안나라는 여급은 은근히 반했을 것이 버언한 이치다. 안나라는 여자도 여급은 다니지만 마음씨가 곱고 또 얌전하고 물론 소설에 나올 만한 여자니까 얼굴도 이쁘장스럽고, 악녀가 아닌지라 점잖은 청년을 좋아하고, 범속한 여자인지란 소설깨나 쓰는 친구를 우러러 보았고…… 이래서 서로서로 친밀을 느끼다가, 도가 잦아지니 작자인 안군도 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 동안에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그런데 꼭 질색할 일이 하나 생겼다. 물론 광식이게 처자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사랑에 파란(波瀾)이 있을 것임은 추상하기 힘들지 않은데, 창경원에서 산보를 하며 고백하는 데 의하면, 안나에게도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처자 있는 사내에, 남편 있는 여자 ─ 이 두 사람은 사랑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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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광식이는 ‘바’에 들러 맥주를 몇 잔 마시면서, 안나와 함께 날도 덥고 하니 인천이나 가자고 약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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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금강산이니 석왕사니 원산이니 하지만 안나 씨, 우린 멀지 않은 인천이라도 가 봅시다. 가서 한번 바람이라도 쏘이고, 이 협착하고 눈알이 많은 서울을 잠시라도 피하여 봅시다. 단 둘의 세계, 아무도 보지 않고 엿듣지 않는, 우리 단 둘의 세계를 단 하루라도 만들어 봅시다. 그러구는 아주 칼루다 쌍둥 잘라 버리듯이 우리의 관계를 딱 끊어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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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운도 있고, 또 내 소설가인지라 저윽이 연극조로 소곤소곤, 그러나 힘을 주어 광식이는 말하였던 것이나, 안나는 냉정한 듯이 머리를 살랑살랑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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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됩니다. 이제 이 자리에서 우리의 관계는 딱 끊어 버려야 합니다. 선생님도 다신 이 짐에 오시지 마시고, 또 저는 저대로 곧 행장을 수습해 갖고 시골로 내려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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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번 인천으로 가서 바다에다 모든 감정과 우울한 심사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돌아오자는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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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식이는 채차 요구한다. 안나는 머리를 수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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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에도 몇 번을 더 만났었던가. 인제 인천이 마지막, 바다가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그 날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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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안나는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만 생각은 광식이도 가지고 있다. 만나서는 안 된다고, 다시는 안 만나리라고, 맹서하고 갈라져서도 만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사이다. 안나가 다소곳하니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틈에 광식은 연달아 제의 말을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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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역으로 나오세요. 이등 대합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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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이 말에 놀래듯이 머리를 들고 광식이와의 약속을 뿌리치려고 하였으나, 광식이는 훌쩍 일어나선 그대로 바텐으로 가서 스스로 셈을 치르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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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계산서 가져올게, 앉아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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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 때엔 벌써 약속은 이미 결정이 되어버린 것처럼, 안나는 광식이를 의자에 앉히기에만 힘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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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오늘, 여름도 복중으로 접어든 맑은 공일날 아침, 인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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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속에서 보낸 한 시간 동안에 그들은, 마음을 짓누르는 착잡한 감정을 말끔하게 가시어버릴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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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또 새벽에 어디루 가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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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는 아내를 떨어버리고 집을 나선 광식이었다. 안나 역시 광식을 만나, 사람의 눈을 피하여 인천으로 간다는 것이 어딘가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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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마지막이니,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루의 청유를 갖는다 한들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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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시간 넘게 차창을 내려다보며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즐기는 새에 그러한 생각조차 어디로 날라가 버리듯이 마음은 한낫 기쁘고 즐겁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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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에서 내려서, 그들은 다른 손님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월미도 가는 버스를 탔다. 만원된 버스는 느리게 축저를 향하여 내려간다. 그래도 바닷물을 양쪽에 끼고 판판한 시멘트의 길을 달릴 때엔, 속력이 빨라서 유쾌하였다. 차는 월미도에 왔다. 자갈을 깔은 나무 속의 굽은 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차는 조탕(潮湯) 있는 정류장에 와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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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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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광식은 ‘풀’을 바라본다. ‘풀’에는 많은 사람이 뛰어들고 헤엄치고 물을 끼얹고 하며 한참 복작인다. 이 편 사장이 있는 해변에는, 간조가 되어서 붉은 흙탕이 그물을 친 데까지 연달아 있고 청년 한 사람과 처녀 한 사람이 화가를 버텨놓고 사생을 하고 있는 외에 아무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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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에서 먹은 게 있어 아직 괜찮은데 저리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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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안나는 모래가 깔린 바닷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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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게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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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는 가지런히 서서 소나무 속으로 사장 있는 편을 향하여 걷는다. 사장 웃목에 그들인 진 곳엔 벤취가 있었다.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둘이는 그 낡은 의장에 가지런히 걸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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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찌감치 흰 모자를 쓴 여학생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내려다 보인다. 그들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흰 구름이 바다 저 편에 가볍게 떠 있다. 그 앞에 범선 세 척이 지나가고 있다. 물새가 한 떼 닷비눌처럼 날개를 번뜩이며 물 위를 날다가 범선 뒤로 숨어버린다. 바다는 고요하여 물소리도 은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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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든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바람을 쏘이고, 또 어두워서 달을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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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안나는 한숨 걷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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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시라면 그렇게 하시죠. 못할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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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식이도 안나의 수색 띤 얼굴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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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할 수 없는 신세들이니까 걱정이지요. 할 수는 있지만 하고난 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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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안나는 말을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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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두고 우리 자연 속에 좀더 우리들은 혼을 묻어봅시다. 모든 걸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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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식은 안나의 손을 꼭 쥐었다. 안나는 손을 쥐어 보이며, 그러나 얼굴이 발개져서 낯을 수그린다. 광식은 그의 팔을 안나의 허리에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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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하고 말하려는 안나의 표정이, 오히려 애무를 기다리는 표정 같아서 광식은 안나의 얼굴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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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축항 있는 곳까지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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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의자에서 몸을 털고 해변가에 내려와서 길을 찾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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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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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루 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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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안나는 웃으면서 사내의 얼굴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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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런 협착한 조선에 있지 말고, 이 길로 대련이나 상해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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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발을 멈추고 우뚱 섰다. 바위가 있는 곳에서 바닷물이 깨어진다. 와아 하고 물결이 몰려왔다가 물러간 뒤에 기적이 부웅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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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9년 8월, ‘사건 있는 해변풍경’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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