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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영(朴世永)군이 보내준 시집 「山[산]제비」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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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영의 시(詩)를 처음 읽은 것이 아니지마는 그의 노작(勞作)을 집성해 놓은 이 시집을 읽고 나서 그가 열정적, 정열적 시인인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느껴 알았다. 누구든지 세영을 대할 때 그가 순진하고 과장없는 열정, 정열이 찬 시인이란 인상을 얻겠지마는 그의 인격에 대한 같은 인상을 그의 시(詩)에서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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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의 勇士[용사] 나어린 少年兵[소년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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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詩)를 재삼 반복해 읽은 나는 상상해 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영이가 정의감의 피가 끓는 주먹을 쥐고 열정의 불이 반짝이는 새까만 눈을 깜박여 가면서 이 시(詩)를 쓴 광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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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중의 「산제비」 1편은 열정의 시로써 발표 당시에 책책(嘖嘖)한 호평으로 이미 상당히 대중화 되었으니 예를들 필요도 없거니와 그는 또 정열에 넘처서 너무도 애상에 흐른 시(詩)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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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는 이 없건만 아니 나오면 왜 못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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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戀人[연인] 과 訣別[결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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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故鄕[고향] 떠난지도 이미 十年[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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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러나 열정, 정열이 찬 시인(詩人)인 한편 또 순진하고 가식없는 자성적 양심(自省的 良心)을 갖고 있는 시인(詩人)인 것을 다음의 예를 읽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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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사회]를 위하여 이 몸을 바치자던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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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妖術帥[요술수]와 같이 한가닥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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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시집(詩集)에서 백퍼센트 만족을 느낀 것은 아니다. 좀더 억세고 굵은 좀더 날카로운 곡조로 노래했으면 이 시기에 가능한 정도까지 훨신 더 현실을 똑똑하게 노래했으면 하는 감(感)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세영의 시(詩)에만 대한 문제가 아니고 또 시(詩)부문에만 대한 그것이 아니고 현재 조선 문단의 모든 부문에 대한 공통적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군의 자서(自序)중에 미리 변해(辯解)한 바와 같이 이 시집(詩集)은 사정에 의하여 대부분이 구작(舊作), 그중에는 15년 전후의 것도 다수로 편집되어 있다 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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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우리들 시(詩)의 가장 큰 금물인 한문 숙어의 나열도 없이 용어가 극히 평이하게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의 표시가 어떤 것은 너무도 상징적이고 고답적(高踏的)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군의 본 의도(意圖)가 아니고 이 시기에 부득이한 표현 방법으로 쓴 것임은 묻지 않어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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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이 시집(詩集)에서 감득(感得)된 것은 무엇보다도 용어의 풍부하고 세련된 점이다. 이점이 군의 시를 완성에 가까운 형태로 만든 것은 아닌가 한다. 이때까지 우리 시인(詩人)들의 대개가 시의 용어에 대하여 비교적 주의가 부족하게 지불되어 온 것은 누구나 시인하는 사실이다. 문학이 언어로 되는 줄, 언어가 문학의 한 큰 요소인 줄은 인정하면서 언어와 문학의 관계를 심절(深切)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언어의 수식과 탁마(琢磨)는 기교파 ─ 예수지상파만의 사업인 줄로 인식하였다. 우리는 언어가 문학, 더구나 시의 기초도 되는 동시에 장식도 되며, 언어의 풍부와 빈약, 정연(精練)과 조악(粗惡)이 얼마나 그 예술품의 생명과 가치에 관계되는 것을 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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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우리는 또 기교파, 예술지상파가 되자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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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시집(詩集)「山[산]제비」는 세영의 시 생활의 발전 과정에서 남겨 놓은 한 커다란 족적(足跡)인 동시에 우리 신시(新詩) 운동의 발전 과정도 역시 한 족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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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세영의 시생활 20년만에 처음 남겨 놓은 이 족적은 우리에게 한 귀중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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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동아일보]」 1938.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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