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대는 내 마음의 친구외다. 내 속을 통털어 말씀드릴 知己[지기]외다. 나는 이때껏 그대를 찾았었나이다. 산에게 찾고 물에서 찾고 들과 모험 속에서 찾았었나이다. 그러다가 그리운 그대를 마침내 이곳에서 만났나이다. 내 가슴이 희열에 뜀이 또한 무리가 아닐 것이외다.
4
그대는 내 마음의 거울, 내 감정의 공명체입니다. 그대는 나를 이해하실 뿐 아니라, 나를 동정하십니다. 내 설음이 있을 때 나는 그대를 붙들고 울 것이외다. 내 울분이 있을 때, 나는 그대와 함께 뛰고 무료할 때 그와 함께 들가를 배회하리이다.
5
그대를 대할 때에 나는 천진한 어린이로 돌아가나이다. 그대에게 드리는 모든 말씀은 반성을 거부합니다. 그대에게 드리는 글은 적나라한 내 심정의 표현이외다. 대인탁물에 내 느낀 그대로를 아뢰리다. 애호, 감격, 증오, 번민, 분노 모든 것을 느낀 그대로 아뢰리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드리는 이 글에 장식과 수식이 있을 리 없읍니다. 수식이 왜 필요하며 두서가 어이 있으리까. 오직 내 참 마음을 거둬주소서.
7
40여일만에, 처음으로 해가 났다. 그동안 짙었던 더위를 이 화로에 담아 붓는 듯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영천행 ‘버스’는 이번도 초만원이다. 차장은 문설주에 겨우 몸을 기대고 섰다. 밖에 배이는 더운 차내, 게다가 땀내, ‘가솔린’내까지 겸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차가 신축중인 두꺼비등 같은 길을 키질을 하며 달리니, 오장이 금시에 뒤집힐 것 같다.
8
“4, 5분을 타기도 이리 약약하다. 이 노릇을 온 종일 하는 그들은 오죽 고달플까.” 나는 이런 분수에 넘는 걱정을 하던 때다. 이때 차장은 밖을 향하고 머리를 숙인다. 분명 누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돌리자 차장에게 마주 인사를 하는 20내외의 체격이 그럴듯한 청년을 차창 밖에 본 것이다.
9
차장의 얼굴에는 꽃피듯 웃음이 핀다. 반가운 정이 가슴만으로 좁아 입술로 넘치는 것 같다. 이 순간, 그에겐 차내의 악취도 없는 것 같았다. 엔진의 폭음도, 차체의 동요도, 이런 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몸의 피로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 마음 속엔 오직 희열과 행복이 넘치는 것 같았다……….
10
차장과 청년과의 관계를 나는 모른다. 또 알아야 될 필요가 내게 있지 않다. 나는 오직 한 사람의 순간의 만남이 오히려 하루의 고통을 잊고 피곤의 추적 속에 ‘희열의 생명천’을 기를 수 있게 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족하였었다.
11
고통이 백이면 약이 일도 못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일도 못되는 약이 능히 백의 고통을 이기게 하지 않는가. 사막이 천인들 어떠리, 10보 林泉[임천]이 있으면 족하다.
13
어느 해 초겨울, 나는 창경원 근처를 지나다 여승 하나가 거지에게 속저고리를 벗어주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오고 가는 행인은 발을 멈추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승은 상기가 된 낯으로
14
“이런 추운 날 이게 무어란 말이오. 원 세상에도 가엾어라. 세상이 어쩌면 이리 무정탄 말이오.” 하고 굉장히 북새든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냉혹을 혼자서 느끼는 것 같았다. 그의 베푸는 자비의 중대성을 분명히 깨닫는 그가 그의 언동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자비는 남더러 ‘보아라’하는 자비였었다. 나는 여승이 미웠다.
15
오늘 나는 우연히 남문통을 지나다 전차를 못 타고 선로에서 어른대는 여맹인 하나를 부축하여 차에 오르게 해주는 두 여학생을 보았다. 그들은 제 할일이 끝나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달음질을 쳐 제 길을 가버리는 것이다.
16
그들은 남이 ‘볼세라’ 하고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는 내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돌았다.
18
단상에서 천여 청중을 굽어보는 그의 위풍은 과연 당당하다.
19
“학문에 대한 모모의 말은 어디 어디가 그르다. 결국 문학은 여기여기 하여야 한다.” “문학은 이러한 체계를 이루어 이러히 발전되었으니, 현문학은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
20
“현대 작가 중 모모는 노후 하였다. 지금에 그를 논함은 어리석다. 모모는 그 주위가 잘 되고, 모모는 그 태도가 미온적이다.” “모당은 무슨 적이니 그르고, 모배는 무슨 그룹이니 틀렸다.”
21
도도수천언 변사는 땀을 흘린다. 청중은 손뼉을 친다. 나는 그의 풍부정연한 문학 이론에 경탄하였다. 만약 그가 한번 붓을 들면 과연 얼마 만한 대작을 쓸 것인고?
23
그 후 다행히 나는 어느 지면에서 그의 시 몇 수를 읽을 기회를 얻었다. 시제 밑에 그의 이름을 볼 때 내 가슴을 기대에 두근거렸다. 아! 두근댄 내 가슴의 어리석음이여!
24
어쩌면 용이 이런 지렁이 새끼를 나놓았을까? 상의 비근함, 형의 평범함, 용어의 내긋내긋함, 맹물에 끓인 미꾸리국이었다. 그 뒤 나는 ‘개구리헤엄’ 하나 변변하게 못치는 꼴에 한 여름을 수영 선생으로 뽐내던 某[모]와 함께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26
가을이다. 들에는 국화가 향기롭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기를 시작한다. 산에는 밤과 도토리가 익어 그 기름진 알들이 돌과 나무잎 위에 떨어진다. 다람쥐 ── 그 중에서도 부지런한 다람쥐 ── 는 벌써 양지 바른 바위 밑에 굴을 파고 마른 잎을 물어다 깔았다.
27
다람쥐는 겨울준비를 시작하였다. 벌어진 밤알, 도토리알을 물어다가는 바위 밑 마른 잎을 깐 속에 넣고는 한다. 열흘동안 不避風雨[불피풍우]하고 다람쥐는 물어다 쌓았다. 다람쥐는 주관이 없다. 아직 예산을 꾸밀 줄을 모른다. 그러나 다람쥐는 한 겨울동안에 소용될 분량을 안다.
28
다람쥐는 별안간 권태를 느낀다. 물어오기 싫은 충동에 신음하게 된다. 다람쥐는 햇볕에 나가 꼬리를 베고 낮잠을 잔다. 그동안 다른 다람쥐 ── 좀 게으른 다람쥐 ── 들은 부지런한 다람쥐들이 물어가고 남은 밤과 도토리를 물어 들인다. 그들도 필요한 분량만 물어 들이면 곧 권태를 느끼고 물어오기 싫은 충동에 신음하게 된다. 그럴 때엔 그들 역시 햇볕에서 꼬리를 베고 낫잠을 잔다.
29
다람쥐들은 참으로 현명하다. 적어도 현명하게 태어난 것이다. 만약 그들이 현명하게 태어나지를 아니하였던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두 가지 큰 과오를 범하였을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필요한 분량 이상을 물어오느라 햇볕에서 꼬리를 베고 낮잠자는 아취를 맛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둘째, 그들 중 부지런한 놈들이 밤과 도토리를 함부로 물어 들인 결과, 다른 게으른 놈들이 물어 들일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못 물어 들인 놈들은 겨울이 들자 부득이 먹을 것을 찾아나선 것이다. 헤매다가 많이 쌓둔 부지런한 다람쥐 굴을 견할 것이다. 객다람쥐는 달라 할 것이다. 주인 다람쥐는 못 준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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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훔쳐내게 될 것이다. 훔쳐내다 들킬 것이다.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서로 피를 흘릴 것이다. 다람쥐 세상에도 살벌이 생길 것이다. 여러 세기 생각을 하여 다람쥐들도 법률을 만들고 재판소를 설치하고 감옥을 지을 것이다. 필경 사람과 같은 불행한 다람쥐들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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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로 어떻게 새끼를 죽였느냐구요.” “딱도 하오, 어미가 죽인 게 아니오.” “네 살부터 남의 밥을 얻어 먹었오.” “여섯 살부터 물을 길었오, 밥을 지었오, 애를 보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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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마음놓고 잠 한잠 편히 자본 일이 없오. 옷 한벌 변변히 얻어 입어 본 적이 없오, 열 다섯 살 되던 정월 초 하룻날, 불쌍하다고 이웃집 새댁이 준 헌 비단치마를 얻어 입고 널을 뛰본 일은 있오. 그때 어찌나 좋았던지 지금도 그때 일만은 그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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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나를 데려간 이튿날부터 나를 때렸오. 할대로 다해 바쳐도 머리채를 잡고 발길로 찼오, 나는 늘 울었오.” “몸풀 때가 가까와질수록 그 사람은 나를 더 미워하였오.” “저런 년의 새끼, 먹여 살릴 미친 놈 없다더니 그 사람은 종래 정처없이 가버렸오.” “그 사람이 나가버린 뒤에 집 주인은 다섯 달치 방세라고 내 솥 부집갱이를 뺏고 나를 내몰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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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에 천 집은 찾아갔을 게요. 그러나 다들 애 가진 년이라고 가라는 걸 어찌하오.” “처마 밑에 거적 속에서 울다 아이를 낳죠, 딸애 녀석이었죠, 배가 고프고 추워 견딜 수가 없었오. 젖을 달라 우나 주린 배에 무슨 젖이 나오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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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년의 딸이 자란대야 결국 내 신세 같은 평생을 보내야 할 게 아니요, 소위 자식새끼에게 어떻게 알고야 그 고생을 하게 하오.” “한때 숨막히는 고생만 하면 그 오랜 고생을 안 하게 될 것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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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술을 깨물었섰오. 핏방울이 거적에 떨어졌오. 손을 놓으니 잠이 든 것처럼 다시 젖달라 보채지를 아니하였오.” “제 자식이 왜 불쌍치가 않았겠오. 불쌍하였기에 나는 내 자식을 죽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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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제멋에 산다 . 제각기 가장 현명한 줄로 생각한다. 적어도 우둔을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40
“노형은 患痴[환치]이외다.” 해서 노하지 아니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당장에 뺨을 안 치면 제법 점잖은 친구다. 그러나 기실 그 사람은 우둔의 都家[도가]다. ‘배꼽’과 ‘우둔’은 함께 타고난 사람의 운명이다. 말하자면 사람은 제 우둔을 모를 정도로 우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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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돼지니라’를 알아내기에 인류는 여러 만년을 허비하였다. ‘돼지는 非[비]돼지’가 아니라 사람은 또 몇 천 년 후에야 이 진리를 알아내었다. 얼마나 개똥 같은 진리뇨. 그러나 이 진리를 알아 낸 친구들은 哲人[철인]의 감투를 썼고, 이 진리를 배우려면 적어도 전문학교 2학년의 재학증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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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사람이 일어나 “세상은 힘으로 이루웠나니, 힘은 세상의 주재로다. 힘있는 자 ── 힘없는 자를 다스리나니 이는 정의요, 법률이로다.” 부르짖자, 인류는 그를 따라 “힘은 거룩하도다”를 부르짖은 것이다. 다음 날 또 한 사람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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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강함과 약함의 구별이 있지 아니하다. 세상은 평등한 것이다. 적고 큰 것이 같은 선상에 서 있다 하자” 인류는 다시 그를 따라 “세상은 고르다”를 외친 것이다. “세상은 복된 곳, 꽃향기 들에 가득함이여, 강물은 새 노래에 잠들도다” 누군지 부르는 이 노래에 인류는 일어 춤을 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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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人[허인]되고 헛됨이여, 세상은 밑빠진 독이로다. 종일 물을 길어 부음이여, 독의 불음이 남을 뿐이로다. 황혼이 가까워 옴이여, 빈손으로 왔던 나그네, 빈손으로 돌아가도다.” 이 넉두리에 인류는 얼마나 한숨을 짓고, 눈물을 지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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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털을 베어 불효를 범하나요.” “왜 털을 길러 固陋[고루]를 자취하나요.” 둘의 말이 다 옳고, 둘의 말이 다 그르다. 결국 사람은 백치의 전형, 우둔은 그의 운명이다. “사람이 좀더 현명하였으면……” 아주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우둔의 덕이 또한 크지 아니한가? 우둔이 있기에 인류는 이 무대 위에 가장 재미있는 배우들이 된 것이 아닐까. ‘우둔’ 덕의 그들의 연출하는 희극과 비극이 갈채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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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둔’을 저주할 것인가? 도리어 우둔 없는 그날의 적막과 무리를 두려 우둔을 송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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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잎에 깍다귀 하나 , 콩잎에 깍다귀 한 마리가 다리가 걸렸다. 깍다귀는 뺄랴뺄랴 애를 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지지를 않는다. 결국 그러다가 말라죽을 것이다. 깍다귀가 거미줄에 걸리는 일은 있다. 그러나 깍다귀가 콩잎에 걸린 것은 들은 적 없는 처음 보는 일이다. 깍다귀가 콩잎에 걸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행한 우연이다. 호랑이가 달아나다 하필 가닥진 나무 새에 끼여 산채로 묶여간 것도 역시 이런 우연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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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찾으면 이런 사실에도 혹 인과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뇌엔 ‘비지’만 들었는지 생각이 삭막하다. 남산 꼭대기에서 솔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꼭 서울편으로 떨어지려던 것이 마침 내지르는 북풍에 용산편으로 굴러 버렸다. 이게 우연이 아닐까? ‘우연’이 없다면 어떻게 저 똥개천에도 못 버릴 ‘배불뚝이’가 金[금]돌에 발뿌리를 챈 덕에 ‘득의’를 코에 걸고 종로에서 활개를 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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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아니라면 어떻게 왕에게 비길 저 깨끗한 선비가 하필 이 말라빠진 시절에 태어나 뒷골목에서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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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식으로 자동차, 마차, 마차, 자동차가 늘어서 간다. 세계에 화려하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어느 도시 거리다. 자동차, 마차들이 토해 좋은 다채로운 모양의 신사들 ── 南北[남북] 대가리, 배뚱뚱이, 껑추, 메기수염, 코주부, 왕눈깔 ── 은 제각기 제 늠름을 자랑한다. 한 나라를 대표한 갸륵한 손님이 안 빼실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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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참됨과 귀함을 모아 그들의 회장을 꾸몄다. 그들은 찬란한 이 회장에 앉아 장차 천하의 평화를 논할려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탁상을 치며 평화의 의의를 말한다. 평화의 가치를 논한다. 평화의 필요 내지 평화의 제법을 말한다. 그들의 논함은 고맙게도 평화로 시종한다. 암만해도 이 세상에 여직껏 잠자리 눈꼽만한 평화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을 그들이 모여, 빈 주머니에서 달걀을 꺼내는 요술장이처럼 없는 평화를 막 빚어 내는 모양이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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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그들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내 나라 군함을 좀더 많이 만들고?” “어떻게 내 나라 병정 수를 늘리고 폭격기, 고사포, 毒瓦斯[독와사] 제조공장의 수를 늘릴고? 하는 毒霧[독무]로 가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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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 코훌쩍이가 고개에 모여앉었다. 소근소근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매우 다정하다. 동행하는 친구가 “재들이 ×××회의에 모인 친구들 보다 낫지!” 한다. 나는 그의 총명에 놀랐다.
56
두부장사 영감이 발을 밟았다. 무어랄 말이 없어, “모르고 실례했소. 용서하오” 한 것이다. 영감 낄낄웃고, “용서랄 게 있오. 밟기도 예사 아니오.” 한다.
57
친구! ×××회의에 모인 궐자들을 불러놓고 두부장수 영감 시켜 평화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줄 필요가 없을까?
59
‘원수배암’ 두 마리가 묵어 까마귀로 둔갑을 하였다. 둔갑한 ‘배암까마귀’는 각기 까마귀떼를 후려들였다. 동편 ‘배암까마귀’는 제 무리와 서편 까마귀떼의 대가리 물어 죽일 꾀를 내었다. 서편 ‘배암까마귀’가 이 꾀를 알았다. 그리하여 주둥아리로 동편 까마귀떼의 목구멍 뚫으기를 제 무리에게 가르쳤다.
60
급기야 두 무리가 어우러졌다. 동편 까마귀떼는 서편 까마귀떼의 대가리를 물었다. 서편 까마귀떼는 동편 까마귀떼의 목구멍을 물었다. 서편 까마귀떼는 대가리를 물려 죽었다. 동편 까마귀떼는 목구멍이 물려 죽었다. 두 ‘원수배암’이 마지막으로 어울려 서로 꼬리를 물었다. 서로 삼키기를 시작하였다. 서로 삼켜버렸다.
61
두 놈이 각기 다른 한 놈을 먹은 셈이다. 두 놈은 곱으로 늘었을 듯도 하다. 그러나 두 놈 다 먹혀버린 점에 있어 전잉여는 零[영]이다.
63
“불만없는 세상을 주소서!” 나는 이 말에 가슴이 서늘하였다. 이 저능아의 기원이 이루워진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사흘안에 세상이 쑥밭이 될 것이다.
64
“저 기원이 이루워진다면……” 하고 나는 떨며 생각을 하였다. 불만이 없어질 것이다. 만족이 남을 것이다. 포만이 올 것이다. 아무 구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먹고 . 싶은 음식도 없고, 입고 싶은 의복도 없고, 보고 싶은 경치도 없고, 또한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맡고 싶은 향기도 없어지게 될 거다. 무서운 상태다. 지난 여름에 이틀 동안 안 먹고도 배가 불러 ‘피마자 기름’을 연인 못잖게 기다린 일이 있다. 나는 그때 생각을 하고 진저리를 쳤다.
65
여배우 한 사람이 자동차를 몰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더 구할 것이 없었노라’ 이것이 그의 유서였었다. 이렇게 밟을 길이 없었던 그의 운명을 나는 잘 이해한다.
67
미국 어느 부자집 자제들이 전신주 끝에 몸을 얽어매고 오래있기 내기를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웃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의 냉정함을 부러워하였다.
68
그들은 구해 못 얻은 것이 없었다. 더 구할 무엇이 없었다. 그들은 포만을 느꼈다. 그 순간 그들은 살 길이 모두 그칠 줄을 깨달았다. 그들은 살 길을 찾아, 괴로움과 불만을 찾아, 전신주 끝에 올라간 것이다. 그들은 식으려는 심장에 식염주사를 맞는 중병자들이다. 그 위급한 소식을 웃음으로 듣는 간장이 과연 鐵石[철석]이 아니냐?
69
병든 거지가 거리에서 한 푼 돈을 빈다. “저 사람들, 의사는 이치를 몰라” 한다. 제 꼴에 알리 없다. 생은 불만의 총화다. 병든 거지는 병이든 만치 또 거지인 만치 불만이 크고 불만이 많다. 불만이 크고, 불만이 많은 만치, 그의 생의 선은 굵고 굳세다. 돼지 눈으론 진주를 못가리는 법이다.
70
사실 생명력은 불만과 정비례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세상에 만족하다는 자, 행복되다는 자처럼 불행한 자가 또 있을까? 나는 암만해도 불만의 공을 잊을 길이 없다.
72
쏴! 하고, 굴을 지나는 소리에 깨었다. 새로 두 시 반, 차는 三防峽[삼방협]을 지나나 보다. 차창 밖 소란에 비하여 차내는 적막하다리 만큼 조용하다. 걸상 간막이 판장 앞과 뒤에 혹은 눕고, 혹은 꼬부라지고, 또 혹은 기대어, 모두 잠이 들었다. 천장의 전등마져 졸음이 오는지 빛이 희미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그들의 자는 양을 보며 나는 세 시간 전 京城驛[경성역]의 혼잡을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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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찰구와 차 층층대에서 서로 앞 뒤를 다투던 일 서로 자리를 싸우던 일, 손을 잡고 평안을 빌던 사람들의 일, 수건을 흔들어 이별을 아파하던 여인네 일을 생각하였다. 그들에겐 제 설음, 제 괴로움이 있는 것과 같이 제 의무와 제 권리를 찾는 데 있어 똑똑하고 매서웠었다. 내 앞에 자리를 잡은 老翁[노옹] 하나를 잡아가는 친구의 표정은 잡혀가는 늙은이의 둔하고 풀기없는 안색에 비하여, 몹시 암상맞고 영악해 보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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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지금 잠이 들었다. 내 앞에 잡혀가고, 잡아가는 두 친구도 잠이 들었다. 서로 어깨를 마주대고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었다. 그들의 자는 곁에서 나는 아까 보던 그들의 표정을 찾을 길이 없었다. 잡혀가는 친구의 둔한 빛, 풀기 없는 빛도 없고 잡아가는 친구의 암상과 영악도 없다. ‘순진’ 그대로의 두 어린이 표정이다. 이따금 쩝쩝 벌린 입을 다시는 것은, 아마 엄마 젖을 빨던 옛 버릇을 꿈 속에 해보는 것인가 보다. 나는 문득 십년 후의 내 앞 두 친구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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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문득 백년 후의 천년 후의 차내의 내가 보는 사람, 차 외의 내가 못 보는 모든 사람, 그리고 내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모두 야릇하다”하는 생각이 났다. “가소로운 世事[세사], 가련한 인생”하고 혼자 중얼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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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호젓한지 울 것만 같았다. 불현듯, 내 앞에 잠든 두 친구의 흐르는 입 침을 수건을 내어 씻어 주고도 싶다.
77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 1934. 8. 22 ∼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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