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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군(憑虛君)의 〈빈처(貧妻)〉와 목성군(牧星君)의 〈그날 밤〉을 읽은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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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開闢)》신년호(新年號)에 난 것인데 그 내용으로 말하면 어떠한 무명 작가의 빈궁한 생활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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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K가 예술적 충동에 타오르는 열정과 예술의 동산에 동경(憧憬)을 두고 세간을 부지(不知)하고 시일을 보내었다. 물질의 곤란을 받아서 가정에 소풍파(小風波)가 일어나는 것과 그 신경질인 성격의 소유자 K의 심적 변화가 일어나서 나중에는 의복 집물(什物)까지 전당포에 집어넣고 입을 것이 없게 된 자기의 처를 괴롭게 하였고 깨쳐서는 천사와 같이 여기고 찬미하게 된 것이 차작(此作)의 경개(梗槪)이다. K가 자기의 처에 대한 동정이든지 측은히 여기는 맘이 그와 같은 빈궁한 생활의 과중(過中)에서 번롱(翻弄)을 당하는 동안에는 자연히 있을 것이 인정의 떠떳함이라 할 것이다. 표현한 바 사실이라든지 심리의 묘사에는 심각한 맛이 확실히 있다. 결코 유탕적(遊蕩的)인 것이 없다. 우리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생활의 고민과 모든 갈등이 이러한 작품에서 얻은 바 인상에 자연히 울리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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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작품은 결점(缺點)과 미점(美點)이 상반하다 할 수 있다. 내용을 자세히 살피건대 작품에 표현된 인물의 성격과 행위가 호상(互相) 모순되는 것이라든지 또한 ‘폼’도 일사불란한 통일을 결(缺)한 듯하다. 이것으로 보면 작자에게 표현에 숙련한 수완이 아직 없는 듯하다. 나는 이 작가가 아직 노련한 맛이 없고 생생한 기운이 보이는 것이 즉 장래에 큰 촉망을 두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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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성격으로 말하면 자만도 강하고 또한 덕의심(德義心)도 상당하게 있는 듯하다. 근자(近者) 예술가로서의 돌비(突飛) 하고 편기(偏奇)한 개성은 그렇게 보이지 않고 그 이면에는 이 세간과 융합하려는 미증(微增)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모르는 세간을 비웃으며 서로 세간에 반항하지 못하고 추수(追隨)하는 듯하다. 이로 보면 K는 예술가로서는 너무 본능을 억압하고 그 창조의 특성이 암만해도 부족치 아니한가 한다. 퇴영적(退嬰的)인 인생관 “빌어먹을 것 ─ 되어가는 대로 되어라” 하는 중얼거림이라든지 자기의 사위(四圍) 사람들이 자기를 악평한다고 그것에 불평과 불만을 품는 것이든지 남이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을 심고(心苦)로 여기는 것이든지 세간과 자기의 처지가 배치(背馳)되는 것을 알면서도 여하한 특수(特殊)의 각오가 없는 듯한 것은 모두 K의 성격의 약점인가 한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에 대한 작가의 동정이 너무 농후한 듯하다. 너무 K의 행위를 미화시키려고 그것을 호의로 해석하려고 함이 과도하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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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처가(妻家) 덕으로 생활을 하여왔고 나중에는 염치가 없어서 자가(自家)의 집물의복(什物衣服) 등을 전당포나 고물상에 맡기고 생활하게 된 결과 자기의 처의 아끼던 모본단(毛本緞) 저고리 한 벌까지 잡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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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작자의 소(小) 주관이 너무 나타나지 아님인가 한다. 말하면 우리 조선에는 가족끼리나 친척끼리 상호 부조(扶助)하는 것을 자로고 미풍으로 알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K의 처가에서 K의 생활을 보장하여 온 것이다. K는 자기의 예술에 열중함으로 세간을 모르고 먹으면 밥이요 입으면 옷으로 알 줄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활하기를 수 삼 년 동안이나 되었고 그 작품을 통하여는 자기의 처가와는 이러한 동안에 하등의 갈등이 난 것도 보이지 않고 조석(朝夕)을 걱정하게 되었고 입을 의복이 없어서 출입을 못하도록 된 것은 나의 처의 결백한 성격을 순화(純化)시키려 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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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K 부처(夫妻)를 청한 것이며 K가 아무 아니꼬운 생각이라든지 창피한 빛 없이 자기 처와 동부인(同夫人)해서 자기의 처가에 간 것으로 말하면 K와 그의 처가와는 아무 갈등된 일도 없었고 규각(圭角)난 것이 없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자기 처가의 대문에 들어갈 때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든지 ‘이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이 집 차인인가 보다’하는 것이며 그들이 ‘경모(輕侮)를 아니하는가’하고 의심한 것과 기타 모든 것으로 보면 K의 처가는 얼마큼 요부(饒富)한 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아무 상반되는 일도 없이 갈등 난 일도 없이 자기의 혈육인 딸의 단가(單家) 살림을 불고(不顧)하게 되어 입을 옷이 없게 되고 밥을 굶게 된 것도 몰랐다하면 조선의 현실사회에서 반드시 있을 현상으로 관찰하면 그러할까 하는 생각이 소(少)하다. 작자가 K에게 동정함이 너무 깊은 까닭에 그 고상한 성격을 너무 과장함이 아닌가 한다. 차라리 지금까지 처가의 구호(救護)를 받아왔으나 의식(衣食)의 외에는 다른 것을 청구할 수 없는 고로 세간집물과 의복이 고물상에로나 전당국에로 점점 나아가고 말았다고 하면 작품에 솔직한 맛이 있을 듯하다. 이것은 작자가 더 일층 올라가지 못한 것이라고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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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기의 처가에 가서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난작(亂酌)하고 전후를 불고(不顧)하고 주정한다는 것이며 인력거에 실려 자기의 집으로 온 것이며 장모가 인력거 삯 줄 때에 그 돈을 나를 주었으면 책을 한 권 사 보겠다고 취중이라도 그와 같은 비열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전에 표현 된 바 순결한 K의 성격과 서로 모순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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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인(普通人)의 음주 심리로 말하더라도 못 먹는 술을 넉 잔이나 마셨다 하지마는 겁나(劫懶)한 K의 소위로는 생각나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 작자가 음주에 대한 경험이 없는가 한다. 아무리 부주객(不酒客)이라도 사약(死藥)으로 알고 마시지 않은 이상에는 실신하도록은 너무 과장이요. 추상적인가 한다. 저항하고 감내(堪耐)할 수 없이 퇴도(頹倒)하기까지에는 명료(明瞭)한 의식이 반드시 있다는 것은 처음으로 술 먹는 이들의 고백이다. 그러면 K가 못 먹는 술을 넉 잔이나 먹었다고 손을 내젓는다든지 “안 돼요 안 돼요 집에 가겠소” 하고 자기의 장모 앞에서 참으로 주정군(酒酲軍) 노릇을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부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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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얼마큼 ‘센티멘탈’을 면할 수 없는 혐(嫌)이 있다. 자처(自妻)의 늘 ─ “아! 나에게 위안을 주는 천사여 ─ 원조(援助)를 주는 천사여!”하고 찬미하는 것이든지 “후 ─” 한숨을 늘 쉬는 것이든지 ‘그렁그렁한 눈물이 물 끓듯 넘쳐흐른다’하는 것은 다 그러하다. 자기가 그와 같이 사랑하고 찬미하는 애처(愛妻)에게 맘에 조금만 틀리면 “계집이란 할 수 없다”하는 것이며 “나를 숙맥으로 알우”하는 것이며 “막벌이꾼한테나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무엇이야”하는 것은 어떠한 히스테릭한 여성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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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처로 말하자. 그는 구식 가정에서 자라난 여자인 듯하다. 그가 그와 같은 구차한 살림에도 싫증을 내지 않고 자기 양인(良人)에게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양처(良妻)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처 노릇 하려고 독특한 결심을 하였다 함에는 그 성격 소행에 대하여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구식 여자로서 예술을 요해(了解)한 듯한 것이며 예술가라는 것이 어떠한 것을 양해한다는 것도 부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내 생각에는 K의 처는 차라리 현금(現今) 도덕의 관념으로 자기의 양인(良人)의 그 애쓰고 노력하는 데에 애처로운 생각을 하고 동정하며 초민(焦悶)히 여기고 자신의 고로(苦勞)를 망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희생에 바친다는 것이 더욱 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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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苦勞)하는 남편에게 “당신도 살 도리를 하셔요”하고 구박한다는 것은 그와 같이 요조(窈窕)한 K의 아내의 입으로 나왔다는 것은 의외의 감(感)이 불무(不無)하다. “왜? 맘을 조급히 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 빛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 장본(張本) 이야요” 이러한 기특한 말을 하면서 다른 사나이가 그의 처에게 사다주는 양산 한 개의 자격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그의 남편에게 괴로운 생각을 주는 것은 다만 작자가 묘사하기 위하여 묘사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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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는 누구든지 주인공 K가 문예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중에 예술가니 예술가의 처니 하는 명사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가 무보수(無報酬)한 독서와 창작으로 시일을 보낸다하면 예술가 되려는 것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예술가이고 아닌 것은 독자의 판정에 맡기는 것이 당연함 아닌가 한다. 그러한 말을 남용하여서 작(作)에 대한 진실하고 솔직한 맛을 감(減)하게 하는 것은 한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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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작품의 전체로 말하면 수긍할 만한 점도 많다. 글을 쓰는 그 조자(調子)가 침잠(沈潛)하고 온화한 것과 붓이 부드럽게 나아간 것이며 제재가 금일 우리 문단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생활과 부합되는 것이며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심각한 기분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그대로 두고는 말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이상의 나의 말한 바를 더 구상화(具象化) 하였다면 결점이 소(少)한 예술품됨이 확실하였을 것이다. 모처럼 그 좋은 제재를 가지고 그대로 거기에 그친 것은 참으로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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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감출 수 없는 작자의 우의(寓意)는 근래 조선청년들이 신여자(新女子)와 가정을 짓는 것에 동경하고 자기의 현재 가정생활을 파괴하려는 것이 일대 운동이 되고 유행이 된 것을 풍자하고 이상(理想)의 가정은 반드시 신여자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K가 외국에도 돌아다닐 때에 소위 신풍조(新風潮)에 띠어 까닭 없이 구식여자가 싫었다하는 문구에 ‘소위(所謂)’라든가 ‘띠어’라든가 ‘까닭 없이’라든가를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또한 “그러나 낫살이 들어 갈수록 그러한 생각이 없어지고 집에 돌아와 아내를 겪어보니 의외에 그에게 따뜻한 맛과 순결한 맛을 발견하였다” 함과 “그의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요 헌신적 사랑이라” 함과 같은 것은 자기가 표현시킨 바 작품의 전체를 일언으로 고백한 것에 불외(不外)한다. 모처럼 호(好) 제재를 가지고 노력한 작품에 사족을 가하여 근대적 상징의 맛이 있을 작품을 은유화시킨 혐(嫌)이 불무(不無)하다. 나는 이 작자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금이 작가의 도의적(道義的) 관념과 구식여자에 대한 동정이 하시(何時)까지 계속할는지 이것은 한 의문으로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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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청년 남녀의 연애로 그들의 가정에 풍파(風波)가 일어나고 그들의 어린 가슴에는 육(肉)과 영(靈)의 충돌 그로 말미암아 번뇌·고통·질투·실망·자살 모든 인생의 암흑면의 사실을 그대로 끌어 집어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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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英植)이 정숙(貞淑)과 서로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그들은 자기네의 가슴에서 물결치는 본능를 억압하고 신성한 영적(靈的) 사랑을 꿈 꾸었었다. 그러나 육(肉)적 충돌에는 영(靈)의 순결한 것도 미진(微塵)처럼 파쇄(破碎)되고 말았다. 야합(野合)까지 하게 되었다. 영식은 이것을 후회하고 양심에 부끄러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회한은 일시적이요 어떠한 빙판을 달려가는 사력과 같이 표면을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할수록 그는 본능적인 애(愛)를 요구하여 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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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의 사위(四圍)의 형편이 자신이 요구하는 바와는 배치되는 행동을 그에게 강요하였다. 결과에 실연 자살까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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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영식이가 자기의 생명 같은 연애에 불충실함을 알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연애가 둘 사이에 성립된 동기가 너무 충동이므로 파열(破裂)이 곧 오지 않았는가를 말하려한다. 그들은 왜? 자기의 부모네가 결혼을 강요할 때에 맹렬히 반항하는 태도를 취지 아니하였는가. 금일 상당한 교육과 신풍조(新風潮)에 젖은 청년으로는 너무 인순(因循)하고 굴종적(屈從的)인가 한다. 이것이 주인공의 약미(弱味)를 나타내는 동시에 작품에도 어떠한 하자(瑕疵)를 던지지 않았는가 한다. 아무리 인순(因循)하고 심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과 결합한 이성(異性)에 대한 애(愛)가 진실하다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반항적 태도를 가질 것이다. 그와 같이 소극적 수단을 취하여 소절수첩(小切手帖)을 훔친 것이며 자기의 삼촌의 전당포 철궤(鐵櫃)를 엿보려는 맘이 나오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반항함이 인정에 떳떳한 일인가 한다. 가정이 아무리 엄격하다기로 그만할 말도 못해본다는 것은 그들의 애(愛)가 너무 착실치 못함인가 한다. 자기 가정이 이러한 말하기에는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도 아니한 듯하다. 그는 이와 같은 불성실한 애(愛)에 실패한 뒤에 모든 사물에 대하여 병적 사상을 품게 된 것이 어떠한 회심의 작(作)이라고 할 수 없다. 전차나 거리에서 여학생을 보면 반드시 그들에게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인생이란 것은 모두 추악한 것으로 보았다. 더욱 여자를 죄악의 덩어리로 보았다. 이 인생과 세간을 저주하고 증오한 결과 이 세계보다도 비밀도 없고 여자도 없는 천국을 구하여서 인천 해안에서 몸을 던지게 된 듯하다. 그의 연인이었던 정숙은 자기의 애인을 버리고 미국 유학생이란 미명(美名)에 취하여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는 “나도 안가겠다 싫으니 안가겠다”는 단단한 맹서(盟誓)도 다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귀하를 그리다가 죽겠다든지 암만해도 인간의 일이 조종하는 운명의 실줄이 미리 매어서 있는다든지” 하는 단념하기에 고운 말을 드리고 그대로 다른 사람의 품에로 들어간 것은 어찌했든지 둘 사이에는 성실한 애(愛)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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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여 보면 불충실하고 불순수한 애(愛)에 애착하고 미련을 두어 실망 민번(悶煩)한다는 것이며 그 우유부단하던 영식이가 생명을 희생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부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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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의 성격으로 보면 자살을 결정하기까지에는 다수한 시일을 요하여야 할 것인데 전차에 정숙을 만나며 바로 죽을 장소를 찾아 인천까지 간 것은 너무 ‘로맨틱’하다 할 수가 있다. 인천 해안의 그 악마 같은 파도와 수평선에서 환멸하는 모든 신비적의 암시가 그 약하고 인순(因循)한 성격의 소유자 영식에게 공포를 주지 않고 종용(從容)히 죽음에 나아가게 하였을는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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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作)을 일언으로 말하면 작자가 너무 결말을 급히 하지 않았는가 한다. 어찌했든지 죽음에까지 이르기에는 좀 더 곡절(曲節)이 있고 파란(波瀾)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작자가 심리묘사에는 상당한 수완과 예민한 신경을 가졌으나 좀 더 냉정한 태도를 가지고 주도(周到)히 관찰하였다면 이 작품에 심각한 맛을 얻었을 것인가 한다. 사실의 전개가 마치 활동사진 ‘필름’처럼 연(連)하게 나온 듯한 혐(嫌)이 불무(不無)하다. 또 한 가지 감동될 것은 작자의 어휘(語彙)가 많은 것이다. 우리들의 누구든지 곤란으로 여기는 우리나라 말에 상당한 다수의 말을 적소(適所)에 적용하는 것은 작자의 큰 강미(强味)인가 한다. 따라서 문장도 상당한 세련(洗練)을 받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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