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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태와 풍속 - 장편소설 개조론에 기(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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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0.14~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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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와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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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개조론에 기(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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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이나 문화사상인 전체에 관한 비교적 일반성을 띤 논의가 문학의 과제를 거쳐서 창조상 실제에 영향을 주려면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통하여 구체화되는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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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지성, 전통, 주체론 등의 토론이 창조되는 문학 작품 위에 어떠한 혹종의 영향을 확보하려며는,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문학적 현상의 면밀한 분석 평가와 일정한 각도나 교섭면을 발견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왕왕 자기의 사상의 항구를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 문학이 생장(生長)하고 성장하는 구체적인 상모를 면밀히 관찰 평가하지 아니하고 기제(旣製)의 관념이나 척도를 갖고 제 이론에 들어맞게 구체적 사실을 왜곡하는 비평가의 초조성이다. 젊은 작가들과의 대화 중에서 막심 고리끼가 말한 바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의미 있는 점을 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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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사고(思考)하고 토론하고 하는 것은 생활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사상의 완전한 형태를 재빠르게 발견하여 이러저러한 아무 논쟁의 여지조차 없어진 진리를 설정하려고 애쓰는 때문이다. 진리 창조의 이같은 초조는 특히 비평가의 특산물이다. 이것은 작가들에게 대단히 해롭게 영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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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창작방법 논의나 혹은 장편소설 논의 같은 것이 과학, 사상, 기타 일반성을 띤 추상적 논의와 작가와를 어떠한 방면으로 직접 관련시키고, 작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교섭면을 포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하여 만약에 이 토론에 참여하는 분들이 조선문학의 생장의 경로라든가 또는 현재 그가 갖고 있는 다채(多彩)한 분포 상황에 대하여 면밀한 분석이나 평가를 갖고자 하지 않았다고 보면 그곳에 벌어지는 논의나 제시는 이(利)보다도 해를 더 많이 끼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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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평론가의 이 같은 가내수공업적 진리 제조에 희생이 되는 작가도 억울하려니와 우리 문학 전체가 입은 손해도 이루 헤아릴 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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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의 현재와 장래를 싸고도는 논의가 문화, 사상상의 일반적 논책(論策)과 교섭면을 발견케 되는 것이 장편소설이란 장르가 시민사회의 전형적 문학형식이어서 그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장편소설의 위기와 근원이 시민사회의 20세기적 정신적 위기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으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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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대하여는 작년 이맘 때에 본보 지상에 발표된 졸고 「조선적 장편소설의 일고찰」중에서 이야기한 바도 있고 다른 분들도 많이 이야기해 온 바이므로 중복을 피하려 하거니와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장편소설을 위기에서 구출해 보자는 노력이 문학이나 문단의 침체를 타개하는 길을 거쳐서 전문화적(全文化的) 정신적 위기의 타개에 일맥(一脈)의 길을 잇게 되는 것이다. 장편소설의 개조론이 우리 문단의 최후의 희망인 것처럼 주목을 받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듯하며, 작가들이 이 논의에 광범히 참가해야 할 까닭도 이곳에 있을 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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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문은 「현대 조선소설의 이념」이라는 졸고에서 미진한 부분을 다시 잡아서 현재 장편소설 개조 논의가 도달한 지점과 논자간의 차이와 문제의 소재점을 명백히 하여 금후의 논쟁의 초점을 설정해 보려는 것으로 주요한 의도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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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과 목적임에 내가 다시 읽어보고 중요시하려는 논문을 발표순으로 적어보면 대충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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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조선적 장편소설의 일고찰」(정축 7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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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세태소설론」(무인 4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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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장편소설의 방향과 작가」(무인 4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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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문예비평 『탁류』평」(무인 5월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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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최근 조선소설계 전망」(무인 5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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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 「종합문학의 건설과 장편소설의 현재와 장래」(무인 8월 『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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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사실의 재인식」(무인 8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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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현대 조선소설의 이념」(무인 9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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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이원조 씨의 「신문소설 분화론(分化論)」(『조광』과 『여성』지 7월호), 이태준 씨의 『소설독본』과 임화 씨의 「문단시감」(『조선일보』 7월 중순)도 참고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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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38.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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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을 싸고도는 제씨의 논의를 한 개의 길 위에 모아 놓고 금후의 논쟁의 중심이 되어야 할 초점을 명백히 설정하기 위하여는 번거로운 대로 이상 제씨의 논의가 갖고 있는 내용과 결론을 대충이라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상세한 바는 물론 상기의 논문 중에 맡길 수밖에 없겠는데, 우선 이곳에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여야 할 점은, 그 이유나 이론적 근거와는 어찌되었건 제씨(諸氏)의 논지가 결국으로 이(理)나가는 곳은 일치하여 현재의 우리 장편소설은 내용으로나 형태로나 개조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일점(一點)이다. 물론 제씨가 그러한 결론을 얻기까지의 이론적인 과정이나 경로를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가 없지 않고 개조의 단초론(端初論)이나 예상론도 피차간 구구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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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부터 로만에’라는 부제가 붙은 한설야 씨의 전기(前記)논문이 내용하는 바는 현재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장편소설은 ‘로만’리 아니고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급속히 ‘이야기’의 경지에서 헤매이기를 중지하고 ‘로만’으로 가야 한다는 이론인데 이헐게만 말하면 그 논지가 간명하고 씨의 말하려는 바도 일목요연한 것 같으나 그 논문을 통독하고 난 뒤 인상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상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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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로만’과의 구별도 다소 혼란한 듯피고, 또 씨가 ‘이야기’라고 단정하는 ‘현재’의 우리 장편이란, 이 ‘현재’가 어느 때까지를 말함인지도 똑똑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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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로만’의 구별로서 씨가 누차 열거한 것이 서로 뒤틀리는 개소(個所)도 없지 아니하고 또 그러한 구별만 갖고는 신문학 이전의 소설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신문학 이후의 장편소설의 걸어온 바를 어떻게 구별하려는지도 불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이조 봉건이 낳은 『홍길동전』 『구운몽』『사씨남정기』『흥부전』『춘향전』같은 것은 어김없는 씨의 이른바 ‘이야기’인데 신문학이 있은 이춘원(李春園), 염상섭(廉想涉), 김동인(金東仁)을 거쳐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등에 이르는 장편소설도 또한 이 같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적지 않게 우스운 독단이 아닌가. 이밖에 ‘이야기’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20세기적 소설 형태의 붕괴나 설화체의 결함까지를 휩쓸어서 간주한 곳이 많은데 이렇게 되면 춘향전 『』과 조이스류(流)의 장편 형식까지를 합쳐서 ‘이야기’라고 단정하는 것으로 되어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이론으로 되고 만다. 신문학(新文學) 이전과 신문학 이후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현대 소설의 풍모를 갖추어 보려고 애쓰면서 경향문학(傾向文學)에까지 이르렀다가 그것이 위에 열거한 경로를 문학사적 사실에 즉(卽)하여 분석함이 없이 이처럼 두개의 유형을 설정하여 장편소설 개조를 제시하는 것은 지나친 경솔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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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깐으로 한씨의 논문은 좋게 해석한다면 ‘이야기’와 현대소설과의 구별을 명백히 한 명치(明治)시대의 평내소요(坪內逍遙) 박사의 『소설신수』정도의 이론에 현대적 풍모만을 입혀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얻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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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신수』가 말하는 바는 기이담(奇異談), 권선징악담, 황당무계담 등의 담류(談流)를 ‘이야기’로 보고 그것과 구별하여 현대소설의 사실성을 제시한데 있었다. 한설야씨의 논문에서 이 이상의 것을 기대한 것은 과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본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소설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야기’가 발생한 시대의 그 뒤, 그것이 여하한 경로를 밟아 신문학 운동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시 경향문학에 이르렀는가를 조사하기 위하여 손쉽게 참고로 될 만한 것으로 김태준(金台俊) 씨의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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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여하튼 우리는 현재 우리가 도달한 지점과 경로를 지나치게 무시하여 그것을 일색(一色)으로 도말(塗抹)해 버리려 들면 아무런 집착(執着)한 제안도 실행되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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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선 백철 씨의 개조론도 다소의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씨의 현상방임주의와 저돌적인 개조론이 어떤 국면에서 교섭되고 합치되는지 우리는 족히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씨는 현재 우리 작가들이 빠지고 있는 조류와 경향과 그 결함까지를 시인하면서도 그것을 방임해 두자고 희망하였는데 장(章)을 달리하면 이 방임과 낙관이 어디다 발을 붙였는지 창졸간에 실행불능은 말도 말고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개조론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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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백철 씨가 현대 우리문학의 조류에서 외향(세태, 사태묘사)과 내향(내성심리)의 두 경향을 임화 씨와 함께 인정한 바에는 임씨처럼 그 양(兩) 개의 경향을 배격하면커니와 그것을 그대로 방임해 두자고 하는 이상에는 이 두개의 경향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로만’ 개조의 어떠한 단초를 붙잡아야 할 터인데 지극히 필요한 이러한 노력을 중단하고 그대로 순수소설과 통속소설의 구별론이라는 비교적 현상론적인 것의 의미로 장을 바꾼 것도 괴이한 일이거니와 씨가 해론(該論) 모두(冒頭)에서 제기한 바 신 장편소설 형식이라는 종합문학과 이것이 어떠한 국면과 부면(部面)을 거쳐서 교섭 내지는 관련하게 되는지 도무지 상상할 길을 열어주지 않은 것도 괴상타고 아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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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있노라면 백씨는 신문학과 대중소설이란 항목에서 횡광이일(橫光利一) 등의 순수문학론에도 적지 않은 기호를 표시하고 있다. 씨는 별반 씨 자신의 직관이나 비판을 넣지 않고 횡광(橫光) 등의 소설론을 대충 소개한 뒤에 “하여튼 나는 현대 장편소설 문제에 있어서 그와 같은 이론에 적지 않게 흥미를 가지는 자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씨의 기호와 씨의 개조론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아무 곳에서도 논급되지 않았다. 어떠한 경향도 이론도 모두 좋다. 이러한 이론적 니힐리즘에서 어떻게 또 그다지도 당돌하고 저돌적인 신 장편소설론이 튀어나오게 되었는지 나에게는 상상력의 밖으로 벗어나는 적지 아니 장황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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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아오면 역시 가장 흥미 있고 또 음미의 가치가 있는 개조론은 임화 씨의 이삼논책(二三論策)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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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38.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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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臨畵) 씨는 「세태소설론」에서 최근의 소설계를 돌아보고 우선 사상성의 현저한 감퇴를 지적한 뒤에 이것 대신에 압도적인 조류를 형성한 두개의 경향의 특징적인 것으로 세태묘사(世態描寫)의 방향과 심리내성(心理內省)의 길을 들고 있다. 이 두개의 대비되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하여 임씨는 전자를 대표하는 자로 박태원(朴泰遠), 채만식(蔡萬植)의 양씨를 들었고 후자의 대표로는 고(故) 이상(李箱)과 김남천(金南天)을 들었는데 이러한 씨의 개괄에는 다분히 씨의 초조와 독단이 들어 있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씨가 창작심리의 분열이라든가 작품상의 예술적 조화의 상실이라든가 또는 현대인의 자기분열의 반영이라든가 하는 것을 이러한 두 계열의 작가군의 개괄에서 찾지 말고 오히려 어느 한 사람의 작가의 내적 분열을 추구하려는 가운데서 찾아보려 했던 편이 훨씬 구체적 사실을 존중하는 결과로 나타났을 것처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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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씨의 「탁류」「제향날」「치숙」등을 평하면서도 나는 이 작가 가운데 드러나 있는 예술적 부조화를 지적한 일이 있었고, 이것을 나의 작품에 대하여 스스로 고백할 때에도 누누이 이야기해 온 바이다. 그러므로 채만식과 김남천의 대조보다도 오히려 채만식의 가운데 나타난 두 개의 부조화, 김남천의 가운데 폭로된 두 개의 분열, 이렇게 분석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것이다. 하고(何故)냐 하면 박태원, 이상의 대조를 박씨의 「구보씨의 일일」과 이상의 「날개」에의 대비해서 증명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두 작품의 정신적 내지는 형식상 유사점을 발견하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웁고, 채만식의 「제향날」이나 「치숙」에 나타난 작자의 주관적 색조와 「천하태평춘」이나 「탁류」에 나타난 세태의 세부적 묘사와의 간에서 분열을 간취하는 편이 채만식 씨의 「소망」과 김남천의 「가애자(可愛子)」와의 대척(對蹠)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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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화 씨가 이 논책 가운데서 두 개의 분열을 포착하여 그 사회적 근거를 명백히 하려 한 노력은 역시 충분히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구나 세부 묘사가 왕왕히 플롯의 결여를 낳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조선 소설사가 아직 묘사의 기술을 완성시킨 계단을 갖지 못한 사유(事由)를 들어서 세태묘사에 하나의 지위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태소설론이 가진 결론은 지극히 소극적이면서 또한 지나치게 소심하고 인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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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세태묘사(현실묘사)와 심리묘사가 각각 우리 문학 위에 불소(不少)한 비익(裨益)을 남길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이의 전적(全的) 배격으로 결론을 가져갔고 단편소설에의 길을 지시하여 세태묘사의 갈 길을 바늘구멍만큼 조건부로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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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 역시 장편에 대비하여 단편을 지나치게 경시하려고는 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로만’에 희망을 건다고 하여서 그것이 곧 단편의 존재 이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되지 않을 것쯤은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들과 같은 연소한 작가에 있어서는 단편소설의 제작에서 많은 수련을 쌓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언어의 절약, 재료의 논리적 배열, 스토리의 정확성과 테마의 명료성, 그리고 잡다한 현실 가운데서 전형적인 것을 찾아내는 사실 요리의 수련 등, 그러므로 만약에 어느 누구가 단편보다도 장편의 제작이 무난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고리끼의 말마따나 권총보다도 대포의 제작이 수월하다는 괴상한 이론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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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태소설론의 문장이 가진 결론은 결국 비관주의적 태도 이외의 것은 아니었다 임화 . 씨는 사상성의 감퇴 대신에 전기(前記)의 두 조류를 들고 “이 조류는 발전시킬 것인가”하는 자문(自問)에 결국 전적 배격을 갖고 대답하였는데, 이곳에서 문학을 구출할 구체적인 방향도 아무것도 지시함이 없이 “세태적인 문학의 성행은 무력의 시대의 한 특색이라 할 수 있다”로 끝을 맺은 것은 임씨의 이른바 비평정신의 결벽(潔癖)을 만족시켰는지는 몰라도 그 자신 니힐한 페시미즘의 조류는 감출 길이 없었다. 씨는 현재의 우리 문학의 분석에서 발전에의 하등의 계기도 포착하지 못하였고 동시에 아무러한 적극적인 방향의 지시도 갖지 못한 것이다. 나는 임씨에게 도리어 이러한 태도 가운데서 비평정신의 질식을 맛본다고 말하고 싶은데 임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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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38.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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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김에 부첨(附添)하거니와 임화 씨의 최근 논책이나 창작평에는 이러한 태도가 일관하였는데 씨의 비평정신을 만족시킬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작가란 자로서 재삼 미안하기 짝이 없지마는 임씨와 같은 태도를 그대로 연장하면 결국 비관주의에 떨어지는 외에 별도(別途)가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본보(本報)에 게재된 씨의 10월 창작평에서도 이기영, 엄흥섭 양씨의 대하여 극언에 가까운 평단(評斷)을 내렸는데 생각컨대, 작년 말까지만 하여도 묘사된 현실의 가치 운운으로 김모와 더불어 리얼리즘의 본도(本道)인 것처럼 평가해 오던 씨 등의 작품 가운데서 금일의 고질에 지(至)할 하등의 징조도 발견하지 못하는 척해 오다가 이제 급작스레 거의 곤봉에 가까운 평가를 내리는 것은 어이된 일일까. 나는 이러한 비평을 읽어가면서 아지테이션보다도 좀더 신시어리티를 희망하고 싶었던 것이 거짓 없는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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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찌 되었건 임씨의 세태소설론에서 이러한 결론을 얻어 갖고, 월여(月餘)을 지나서 발표된 씨의 최근 조선소설계 전망이란 다음 문장을 읽어보면 흥미가 자못 새로워진다. 이 논문에서 임씨는 세태소설론에서 취급한 문제를 주로 소설의 형태상의 관점에서 재검토하였는데, 조선소설이 신문학 이후 이랬거나 저랬거나 본격소설의 길을 걸어서 소설완성의 지향을 갖고 나오다가 경향문학 퇴조 이후 문학정신의 변천은 드디어 소설형태 위에 세태묘사, 심리묘사의 두 분열과 형태상의 붕괴 내지는 변형을 초래하였다는 것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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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 가운데서 특히 다음과 같은 제 분석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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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주장의 특질 차이나 문학적 입장의 날카로운 안티고니즘에도 불구하고 이광수, 염상섭, 김동인, 이태준에 이르는 하나의 계보와 최서해, 이기영, 한설야가 형성한 또 하나의 계열이 한가지로 본격적 소설완성의 길을 더듬어서 형태상의 공통성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근대적 전통이 서 있지 아니한 조선에서 제 문학을 수립하려는 공통된 지향에서 유래되었었다는 것, 그러나 양자의 어느 노력에 의하여도 조선소설의 근대적 전통은 수립되지 못한 채 드디어 금일의 분열과 소설완성의 지향의 포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임씨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씨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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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개인으로서의 성격과 환경과 그 운명을 그리는 예술이라, 서구적의 완미(完美)한 개성으로서의 인간, 또는 그 기초가 되는 사회생활이 확립되지 않는 한, 소설양식의 완성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갱성이기에 다분히 봉건적인 신문학, 또한 개성적이기보다는 지나치게 집단적인 경향문학은 결국 조선에 소설양식을 완성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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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과 같은 임씨의 문장은 우리 문학이 본격적 소설을 완성시키지 못한 사회적 근거의 해명으로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우리 작가들의 본격소설에 대한 금후의 지향(志向)을 희망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고(何故)냐 하면 서구적 의미의 완미한 개성으로서의 인간이나 또는 그 기초가 되는 사회생활은 아직도 이곳에 확립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임씨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본격소설의 완성을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 되는 때문이다. 결국 이상의 인용구에서 우리가 간취할 수 있는 바는 비관적인 절망이 아니라면, 다른 또 하나 다시 말하면, 우리의 문학정신을 인간 개성의 확립이나 사회생활의 건립 가운데서 찾아보는 방향에서 동시에 본격소설에의 지향까지를 부활시켜야 되겠다는 이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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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러한 분석에서 임씨가 당연히 가진 바 결론은 우리가 소여의 문학적 시대적 환경 속에서 소설 완성의 지향까지를 끌고 갈만한 문학적 정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지시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문학정신이 장편소설의 방향에서 당연히 구현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로만’ 개조론을 제시하든가 하는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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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분석에서 임씨가 도달한 결론이 무엇이었고 그것이 여하한 이론적 경로를 거친 것인가를 아는 것은 임씨의 의향(意向)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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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소설(현재의 소설)들에게서 부분의 완성, 세공의 정밀 등을 기대할 수는 있어 애써 그것을 부정해 버리려고는 않는다. 세태의 묘사라든가 심리의 묘사등은 소설의 중요한 양대요소이고, 또한 과거의 조선소설 규범이 될만한 아무것도 만들어 놓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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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다소 긍정적인 색조가 종래의 임씨의 논리에서 약간 일탈하는 가운데서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줄 안다. 이 결론은 씨의 이른바 두 개의 조류를 씨의 분석의 방법이든 사회적 시대적 해명에서 일단 유리시켜 놓은 뒤에 이것을 다시 ‘수법을 방법에까지’ 그릇되게 높인 결과라고 단정하는 데 의하여 얻게 된 것이다. 하기는 이렇게 우리들 작가들이 하나의 수법을 방법에까지 고양시킨 이유는 현대 작가의 사유의 지엽과 부분적 세계에다 칩거를 지적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씨의 소극적인 페시미즘에 떨어져버릴 것이 아니라 이 두 개를 ‘요소’로서 파악하여 고매한 문학정신으로 하여금 이것을 통합시키는 결론에 이르러야 할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곳에는 극히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긍정적 색조가 보였을 뿐 역시 우리가 기대한 어떤 추진력이 될 에스프리라든가 그런 것은 암시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본격소설의 지향이 의연한 숙제라고만 말하였을 뿐, 본격소설을 (그것이 서구에 있어서는 이미 붕괴되고 있는 지금, 그리고 이 붕괴의 정신이 우리 문학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지금)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는 그것이 완성될 씨의 이른바 사회적인 조건도 구비되어 있지 아니한 지금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객척하려는 지는 역시 제시되지 않았고 “이것의 완성 없이는 아무리 화려한 세태묘사나 정밀한 심리묘사의 기량이 진보한다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소설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는 비판적인 결언으로서 전망을 끝맺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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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러한 결론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해 온지 이미 여러번째이었다. 객년(客年) 10월 본보 지상에서 「장편소설에 대한 일 고찰」을 시(試)한 뒤에,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로만’의 이론을 정당하게 파악하여 그의 개조를 기회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는 시민작가의 손에 의하여 ‘로만’이 붕괴되는 시대인 것을 알고 위대한 리얼리스트는 이것을 넘어서 ‘로만’이란 ‘장르’를 그 자체의 변질과 개조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말하였고, 다시 지난 6월에 본보(本報)로부터 조선문학의 성격의 설문을 접하였을 때에도 아세아적 정체성의 극복이라는 막연한 표현으로 우리 문학이 가져야 할 구체적인 임무를 이야기한 뒤에 ‘로만’ 개조에 대한 의견을 말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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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38.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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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는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문학현상의 분석으로써 만족할는지는 모르나 우리들 작가들은 자기의 문학적 실천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치 않고 혹종의 분석에 종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임 씨의 이상과 같은 비관적인 결론에 대한 불만은, 혹은 분석으로써 만족해버리는 비평가에 대한 작가의 불만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임씨의 ‘로만’ 개조에 대한 의미의 타진을 이곳에서 정지할 수는 없다. 다음 우리는 씨의 「작가에의 진언장」을 음미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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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씨의 「작가에의 진언장」은 현대문화에서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있는 ‘지성’과 ‘사실’의 상극(相剋)을 극복하기 위하여 에토스로 화한 이십 세기 발레리 류(流)의 지성의 입장을 버리고 보다 높은 딴 계급의 지성의 입장에의 여행을 권하여 ‘사실의 재인식’을 작가들에게 진언한 것인데 최재서 씨의 「이십세기에 붙이는 말」과 서인식 씨의 「지성의 시대적 성격」과를 아울러 읽어보면 흥미 있는 호문장(好文章)이기는 하나 ‘로만’ 개조에 대하여 별반 구체적인 방책이 제시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곳에서 운위되는 바 ‘사실’이란 말은 서씨나 혹은 발레리 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문학적 형상이 직접 대상으로 하는 그러한 일상 생활적인 것을 말하느니보다는 좀더 고차적이고 일반적인 추상으로 쓰인 것으로 생각되느니 만큼 리얼리즘과의 관련에서 그다지 명료성을 띤 용어는 못되는 듯하였다. 가령 서씨의 말대로 현대문화의 전국면을 사실의 입장에서 돌아보아 세 계열의(세계성, 민족성, 계층성) 사실군을 운위한다고 하는 경우에 이렇게 사용되는 ‘사실’을 일상적 쇄말사와 혼돈할 수는 없지 아니한가. 임씨의 문장에는 이러한 두 개의 ‘사실’이 혼란한 채로 섞여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교묘하게 엉켜서 섞어진 것 같았다. 그러므로 씨가 일찍이 수법으로까지 낮추어서 생각했던 우리 소설의 두개의 조류(潮流)를 이번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의 가운데 해소해버린 때문에 “사실을 자유롭게 이해하고 요리된 사실을 제 의도에 따라 재편성하는 데서만 문화는 비로소 찬연한 창조적 성격을 취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여도 결국 일반성을 모피(謀避)할 수는 없을 것처럼 생각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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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는 『사해공론』10월 호, 문단 3행 어중(語中)에 ‘녹림객’의 서명으로 쓴 임씨의 단장(斷章) 속에서, 씨의 의견을 더 똑똑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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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단순한 일편의 사실로서 취급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산 나무가 아니라 죽은 목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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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씨는 말하였는데 이곳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취급하려는 태도를 ‘세태’묘사와 함께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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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부터 겨우 ‘로만’ 개조론은 그 단초의 방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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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면 관계도 있고 하니 이야기를 일단 잘라서 리얼리즘이란 것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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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이라고 특별한 이야기를 되씹자는 것이 아니라 노상 우리가 인용하는 다음의 구절을 또 한번 이곳에 적어보기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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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이란 나의 견해에 의하면 디테일의 진실성 외에 전형적이 정세(情勢) 속에서의 정형적인 성격의 표현의 정확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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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명제 중, 전형적인 성격에 관하여는 전번의 졸고에서 말한 바도 있으므로, 이번에는 ‘정세’라는 것과, 항용 우리들의 간과해버리기 쉽던 ‘디테일의 진실성’이라는 두 점을 주의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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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 정세’의 묘출과 ‘디테일의 진실성’의 묘사라는 점을 제작상 실제에서 생각해 보면, 적지 않은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분히 ‘세태묘사’ ‘사실(현실)묘사’ ‘일상생활의 묘사’ 등의 대상하는 바와 공통성이 있는 듯이 보인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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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이 양자 간의 차이는 결코 물과 기름과의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전형적 정세의 묘출은 생활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생긱는 것이며 ‘디테일의 진실성’이란 것도 사실을 극명하게 그리되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파악하는 데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이곳에 사실상으로 파악한다는 것도 생활현상이나 일상 사실을 버리는 것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그것의 개괄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오관을 통하여 접할 수 있는 현사에서 떠나는 데 의하여 문학적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디얼리스트의 상투(常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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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우리 문학은 묘사의 확립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경향문학을 치른 작가들 간에는 아직도 생활현상의 면밀한 관찰 대신에 기성의 개념을 갖고 현실을 재단하려는 폐풍(弊風)이 남아 있다. (이기영 씨의 「대장간」은 노동 신성의 기성 개념에 의한 산물이고 엄흥섭 씨의 「유한청년」은 유한적인 청년들의 생활현상의 관찰이나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기제(旣製)의 상식적 개념의 그대로 관찰을 재단하여 생겨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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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임화 씨와 나와의 분기점이 있다. 임씨의 세태묘사의 전체적 부정에 대(代)하여, 나는 세태를 풍속에까지 높이자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세태를 세태 이상으로, 현상을 현상 이상으로 파악함으로써 풍속은 비로소 문학적 관념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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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풍속은 정황 정세 묘출의 대상이고 풍속에 대한 고현학 이상의 연구 관찰은 능히 ‘디테일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면이 없으므로 미진한 점은 다시 딴 기회를 기다릴 밖에 없으나 임씨와 나와의 이해의 차이는 결국 이 점에 있지 아니한가 한다. 그러나 임씨가 본격소설에의 지향의 부활을 생각하고 있다면, 디테일의 진실, 전형적 정세와 그 속에서의 성격의 묘출, 이것을 생각치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현재 우리 문학 현상에서 이것을 구현하는 단초로서 풍속과, 가족사와, 연대기를 생각하여 ‘로만’의 개조를 찾아보는 외에 어떠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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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까스로 설정해 놓은 초점을 고려하여 논쟁을 진전시켜 보고 싶은 일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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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38. 10. 25]
【원문】세태와 풍속 - 장편소설 개조론에 기(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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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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