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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복(素服) 입은 영혼(靈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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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8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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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服[소복]입은 靈魂[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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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픈 傳說[전설]의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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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아직 어려서, 아마 여남은 살이나 되었었을까? 『통감(通鑑)』을 옆에 끼고 글방에 다닐 때 글방의 선생인‘덕언이 선생님’ 한테 들은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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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언이 선생님’ 은 시방 말로 하면 아주 괴짜였읍니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읍모가 졌는데 그 바탕이 솜솜 얽었으니 위선 그것부터가 인상적(!)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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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아마도 다섯 자 미만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덕언이 선생님’ 이 순사 시험을 본 일이 있었어요. 글방의 한문 선생님이 순사 지망을 하고 시험을 보다니 그것은 진실로 천하의 대사건이요 ‘덕언이 선생님’ 자신에게는 더구나 생활의 일대 비약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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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때에 ‘덕언이 선생님’ 이 다 무사히 파스를 해서 여섯 달 동안 교습을 마치고 정복 정모에 환도를 차고 거리로 나섰더라면 조선의 경찰사상에 숨은 에피소우드의 한 페이지를 써넣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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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덕언이 선생님’ 은 순사시험에 다른 학과는 어렵잖게 패스했으되 첫째 왈 나이 너무 많다는 것, 그때에 ‘덕언이 선생님’ 은 사십이 넘었었읍니다―둘째는 키가 너무 작다는 것으로 그만 낙방이 되고 말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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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 글방 아이들은 선생님이 무슨 일인지 본댁에 가신 채 여러 날 오지 아니하는 것을 궁금히 여기면서도 그 싫은 글을 아니 읽는 것이 좋아서 제발 아주 아니 왔으면 하는 희망도 은근히 품고 한 댓새 지나는데 하루는 ‘덕언이 선생님’ 이 (아 그때에 그런 변괴라니!)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할 상투를 어디다 두고 오지 아니했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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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박박 깎은 머리와 이마에는 옛날을 기념하듯이 하얀 망건 자국만이 유달리 남아 있을 뿐이요, 언제나 덕언이 선생님의 두상에 올라앉아 그의 고개와 행동을 같이하던 조그마한 그 상투는 씻은 듯이 종적을 감추어버렸으니, 처음 그것을 볼 때에 왜 아니 우리가 놀랐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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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 꽂은 사람은 시험을 뵈지 아니한다고 해서 미리 깎고 갔던 것은 그 뒤에 안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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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풍모가 변해가지고 돌아와서는 자기도 좀 계면쩍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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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끼 놈들 읍끼 놈들 무얼 그렇게 뻔하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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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 잦은 말로 되레 우리를 나무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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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덕언이 선생님’ 은 글방 주인영감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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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끼! 나깨나 먹어가지고 무얼 철딱서니 없이…… 사서삼경 어데가 머리 깎고 순검 댕기라고 씨었든가? 내 원 머리 깎고 중노릇 가는 선비는 더러 있다데만 선비가 머리 깎고 순검─포리(捕吏) 다닐 과거 본다는 말은 내 육십평생에 첨 들었읍. 애들 보기도 부끄럽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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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톡톡이 핀잔을 먹었읍니다. 그 뒤 사십이 넘은 ‘덕언이 선생님’ 은 머리를 도로 길러서 솔잎상투라도 짜려고 애를 썼지만 노쇠한 머리가 그렇게 자라주지를 아니해서 영영 ‘중’ 으로 여생을 마쳤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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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잘하는데 머리까지 깎고…… 허기는 잘되었읍…… 부산가서 통사(通士 : 通譯)나 댕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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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영감님은 이렇게도 조롱을 했읍니다. 그 말이 났으니 말이지 ‘덕언이 선생님’ 은 일본말을 아주 잘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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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데서도 선생 문하에서는 배우지 아니했지만 그때에 개명사상(!)이 울적하게 일어나자 비록 상투는 그대로 짰을망정 ‘덕언이 선생님’ 도 새로운 사조를 이해해서 『무선생일어자통』을 놓고 독실히 공부를 했읍니다. 원래 재주가 비상한 터에 부지런까지 겸해서 일취월장했읍니다. 참 열심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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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중쯤 되는 담뱃대를 물고 반 이상이나 노출된 배를 슬슬 문지르면서 대문 밖 길 옆에 나서서 ‘일본 내지인’ 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대개 한둘은 그 그물에 걸리는데 걸리기만 하면 염치도 싫어하는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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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곰방와 아 와다꾸시와 리도꾸온데수 아나다와 도나다상 데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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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수작을 붙이었읍니다. 말은 일본말인데 악센트는 그냥 조선말이어서 정말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기괴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요술만큼이나 신기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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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쓸데없이 ‘덕언이 선생님’ 의 인물 소개가 너무 길어졌읍니다. 이제 그러면 잔말은 그만두고 원줄기 이야기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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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덕언이 선생님’ 은 이야기를 참 잘했읍니다. 시방 같으면 서울 와서 방송국의 초빙을 받아 야담 방송 한자리쯤 잘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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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잘하는 이야기 가운데는 이야기의 천재인 ‘덕언이 선생님’ 의 창작도 있었고 또 변조도 있었지만 여기서 내가 전하는 ‘서글픈 전설’ 은 외수없는 정말 전설입니다. ─혹시 그 남자 주인공이 ‘덕언이 선생님’ 의 아버지였었었다는 것쯤은 ‘덕언이 선생님’ 이 꾸민 여흥(餘興)일는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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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 여인읍가 산이나 들에서 나물을 뜯을 때였으니까 아마 음력으로 사월 초생이었던 듯합니다. 그날 들로 거닐다가 돌아온 ‘덕언이 선생님’ 은 산에서 나물 뜯는 여인읍를 보고 문득 그 생각이 났던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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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는 매일 밤 하듯이 졸리는 봄밤의 무거운 눈두덩을 꼬집으면서 이슥하도록 글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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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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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덕언이 선생님’ 의 명에 모두 살아날 듯이 졸음이 달아나고 눈이 맑아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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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것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렇게도 몹시 졸리던 졸음이 언제 어디로 달아나는지 책만 덮으면 그저 씻은 듯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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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날 밤에도 우리는 철이른 모기와 날파리가 날아드는 석유램프등 밑 사간 대청에 죽 늘어앉아 각기 집에 돌아가려고는 아니하고 ‘덕언이 선생님’ 의 입만 바라보았읍니다. 저녁마다 한가지씩 듣는 이야기를 또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글방에 가서 이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없었다면 그때 우리 소년 몇 사람은 퍽 비참한 ‘학문의 고역’ 에 시달려서 우울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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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 또 이야기 듣고 싶어서 오도카니 앉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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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놈들’ 이라고 반드시 직함(?)을 붙여서 우리를 부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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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언이 선생님’은 결코 잊지 아니하는 이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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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 대답도 아니했읍니다. 아무 대답도 아니하는 것은 그저 생각이 꿀안 같아도 처분만 기다립니다…… 하는 무언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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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끼! 방정맞은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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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언이 선생님’은 이렇게 자기야말로 방정맞게 그러나 결코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웃으면서─한번 비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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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끼! 방정맞은 놈들! 글 읽을 때는 눈두덩이 들어붙어서 꼭 맹꽁이 울듯이 졸음 반 이 앓는 소리 반을 섞어 밍맹 밍맹하더니 책을 덮어노면서는 눈구멍이 모다들 샛별같이 초랑초랑해 가지고 요뇨하니 앉어서 이야기를 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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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언이 선생님’ 이 사는 동리 ×××에 문장이 좋고 풍채가 신선 같은 선비 한 분이 있었읍니다. 이 선비가 즉 ‘덕언이 선생님’ 의 오대 할아버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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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어찌도 문장이 좋든지 소동파나 이태백이가 왔다가도 뺨을 맞을 지경이었다니까 퍽 능란했던 게지요. 그리고 인물이 어쩌면 그렇게도 잘나서 삼국시대 강동대도독 주유보다도 더 잘났더랍니다. 이것은 덕언이 선생님이 그 오대 조부를 며칠 전에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말로써 그려낸 표현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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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울을 와서 기생집에를 가 노는데 기생이 그이 즉 ‘이서방’ 이 인물이 잘난 데 흠빡 반해가지고 은근히 속은 있으되 이서방은 변변히 자기를 바라보아 주지 아니하더라나요. 그래 그 기생은 일부러 뜯던 거문고를 잘못 뜯어서 ‘이서방’ 의 주의가 자기에게로 오게 했다……고 ‘덕언이 선생님’ 은 그의 일화까지 미리 말했읍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내가 자란 뒤에 『삼국지』에서 주유의 에피소우드인 것을 발견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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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그러한 이서방은 열일곱 살부터 해마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 다녔읍니다. 해마다 보러 가서는 장원급제는 했으되 나라에서 주시는 벼슬은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왔다가는 그 이듬해 또 가서 과거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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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장원급제를 하고는 다시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돌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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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기를 무릇 여덟 번…… 그래서 여덟 번 과거에 여덟 번 장원급제를 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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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벼슬은 아니하고 그렇게 과거만 보러 다녔느냐?” 고 우리가 ‘덕언이 선생님’ 더러 이야기의 허리를 잘라서 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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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 장원급제를 하면 백의(白衣)로 정승을 하는 법이어든…… 백의 몰라? 벼슬 아니한 선비를 백의라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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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답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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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말에 과거제도가 없어지지 아니했더라면 우리도 그렇게 아홉 번 과거를 보아 아홉 번 장원급제를 해가지고 ‘백의정승’ 을 한번 해볼 걸 하고 안타까이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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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덟 번 과거에 여덟 번 장원급제를 한 이서방은 아홉 번째 장원급제를 해가지고 ‘백의정승’ 이 되려고 아홉 번째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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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까지 무사히 장원급제를 하면 여덟 번 장원급제한 보람이 한데 나서 경사롭게 ‘백의재상’ 을 할 터이요 만일 운수 불길해서 이번에 떨어지면 그야말로 십년 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 될 터이니 시방 말로 하면 이서방의 이번 길이 중대한 운명을 결정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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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했겠지만 그러나 여덟 번이나 장원급제를 했는데 그것 한번 더 하기야…… 이렇게 든든히 여기기도 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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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길을 떠난 지 며칠 만에 과천을 당도하였읍니다. 날이 저문지라 이서방은 여기서 하룻밤을 쉬고 내일 일찍 떠나 일찌기 장안에 당도할 작정으로 그새 팔 년이나 해마다 오는 길 가는 길 두 번씩 정해놓고 찾아가던 아는 사관을 찾아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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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이서방을 보더니 반겨하면서 일 년 동안 적조한 인사를 지나는 말이겠지만 흠선히 늘어놓고는 손님을 객실로 인도하려고 하지 아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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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길은 우리 집에서 유하시잖아도 좋은 데가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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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이서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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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 십 년을 서로 주객삼어 지나던 터에 그게 무슨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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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읍니다. 속으로 좀 섭섭했겠지만 군자는 불현어색이라니 그런 내색이야 보일 수 있겠읍니까. 그러니까 주인은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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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하니라 우리 집에서 유하시게 하면 내야 인사가 되고 좋겠지만 어느 귀한 댁의 부탁을 받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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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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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댁의 부탁이요? 아니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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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기가 십상이지요. 그럼 이야기할 테니 들어보시요. 저기 전에 못 보던 큰 기와집이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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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주인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데 아닌게아니라 읍귀에 풍경을 달고 으리으리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새로 들어서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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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있기는 하오만…… 그래 지나는 행객이 그런 양반의 집에 무슨 인연이 있겠소? 과객이면 모른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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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댁은 작년에 이곳으로 낙향해 오신 서울 김판서댁입니다. 그런데 낙향을 해오시면서 우리 사관해 먹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 과천으로 지나는 남방의 선비 가운데 점잖은 이가 있거던 우리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셨읍니다. 그래서 내가 이서방더러도 가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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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사관 주인이 가라는 뜻은 알겠으나 정작 한편 낙향해 와서 남방의 선비를 맞아들인다는 김판서 집의 그 하는 일이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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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방이 그저 보통 행각이라면 다만 하룻밤의 노자도 아끼고 또 겸해서 좋은 대접을 받을 겸 두말 아니하고 그곳으로 씽씽 갔겠지만 본이 선비요 또 가는 길이 무거운 소임을 가진지라 그런 속 모를 집에는 섬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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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가 잘 내키지 아니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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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탁이 있다면 그렇기도 하겠소마는 나 같은 사람이야 무엇이 그리 무엇하다고 점잖안 선비를 청한다는 집에 찾어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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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방은 이렇게 거절을 했읍니다. 그러니까 사관 주인은 황황하게 납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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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천만에도! 글쎄 이서방 같은 이를 천거 아니한대서야 양반댁에서 일껏 부탁받은 것을 시중해 드리는 보람이 생기나요? 그리지 말고 어서 가보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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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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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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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머 혐이쩍거나 수상한 일은 않읍니다. 그렇다면 낸들 왜 권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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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무엇하려 선비를 만난답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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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도 모르지요. 모르지만 갔다가 온 사람의 말을 들으면 주인 김판서는 나오지도 아니하고 그저 조요한 방에다가 하룻밤 편안히 쉬여 가게만 한답니다. 조석 대접을 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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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일인데? …… 선비를 청했으면 주인이 나와서 학문을 토론한다든지 그런 것이라도 있어야 할 것인데…… 그것도 없고 그저 밥만 먹이고 잠만 재워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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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그래도 그새 준일년이 되었지만 한번도 혐의쩍은 일은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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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어쩐지 내키잖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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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관계없어요. 어서 가보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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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이렇게 굳이 권하는 바람에 이서방은 할 수 없이 그 김판서 집이라는 집을 찾어갔읍니다. 종자를 뒤세우고 솟을대문 앞에 이르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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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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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니까 그 집 하인이 선뜻 나와서 잠시 이서방을 눈치바르게 훑어 보더니 공순히 허리를 굽히며 깊숙한 뒤채 방으로 영접을 대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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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인의 태도는 마치 줄맞은 병정 같아서 초면부지의 이서방이건만 친히 아는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서슴지 아니하고 영접을 하는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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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서방은 종자는 바깥에 하인들과 같이 유하도록 이르고 자기는 모셔들이는 대로 들어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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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은 아닌 듯싶은데 방은 퍽 깊숙했읍니다. 방안은 그렇게 큰 부자일 터이요 또 양반의 집이면서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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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방은 인도하는 대로 방에를 들어가니까 아주 정사하게 소제를 하여놓고 벽에 붙은 주련이며 깔아놓은 보료며가 모두 생스럽지 아니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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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마침 주비한 촛대의 초에 불을 켜놓고 물러갔던 하인이 조금 있다가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나왔읍니다. 이서방은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그러고 앉으니 미상불 장사삼아 하는 사관보다는 기분이 훨씬 좋은 것 같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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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오래잖아서 저녁상이 나오는데 비록 번화스럽게 차리지는 아니했으나 조촐한 데도 모두 입에 맞는 음식이 가히 양반의 집 풍도를 엿볼 수가 있었읍니다.
 
89
시장도 한 판이라 밥을 배불리 먹고 상을 물리니까 하인이 또 나와서 상을 내갑니다. 그래 그때에 비로소 이서방은 하인더러 물어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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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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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92
“상은 잠시 내려놓고 내 말 좀 듣게.”
 
93
“읍.”
 
94
하고 하인은 시키는 대로 들었던 밥상을 도로 내려놓고 손님의 말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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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댁이 김판서댁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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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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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찌 어떻게 낙향을 하섰으며 또 지나는 과객을 청해서 이렇게 후히 대접을 하신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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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은 그런 영이 계시니 시중할 따름이지 알 수는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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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께서는 늘 댁에 계신가?”
 
100
“녜 그렇습지요만 늘 병환으로 누어 계십니다.”
 
101
“응…… 자제는?”
 
102
“한분 계신데 서울 그대로 계십니다.”
 
103
“그러면 혼자 내려와 계신가?”
 
104
“녜…… 그저”
 
105
이러다가 하인은 그 다음 말은 더 하지 아니했읍니다.
 
106
이서방에게는 더욱 모를 일이었읍니다. 그래 더 묻고도 싶었으나 남의 집 하인을 붙들고 이러니저러니 내정 이야기를 캐어묻는 것이 한갓 선비의 할 일이 아니므로 그만하고 하인을 내보냈읍니다. 날이 밝으면 떠나면 그만이지…… 이렇게 무관심하려 했습니다.
 
 
107
밥상을 들고 나간 하인이 조금 후에는 다시 깨끗한 금침을 가지고 나와 한옆으로 펴놓고는 안녕히 주무시라고 공순히 인사를 한 뒤에 물러 갔읍니다. 그러고는 한동안 아무 인기척도 없이 지냈읍니다.
 
108
그래 아직 자기는 좀 이르다고 생각하고 웃옷과 갓을 벗어 벽에 건 후에 조용히 앉아 이제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 마지막인 아홉 번째의 과거를 보아서 마지막의 장원급제를 한 후 경사로운 백의정승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을 자못 만족해하며 있노라니까 어디선지 신발 소리가 자박자박 들리더니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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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귀를 기울이니까 여인의 소리로
 
110
“서생님 주무십니까?”
 
111
하는 것입니다. 분명 종년(婢女)이었읍니다. 그래 이서방은 바로 앉으며
 
112
“거 누구냐?”
 
113
하고 대답했읍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이 바스스 열리면서 아닌게아니라 종년이 술상 하나를 공순히 받쳐들고 들어옵니다.
 
114
이서방은 궁금도 하고 또 미안도 했읍니다. 아까 사관 주인의 말에는 그저 하룻밤 편히 재어 보낸다고 했지 술상이니 종년이니 하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건 웬 것일까? 그 사람이 혹시 술상 이야기는 잊고 아니했나?
 
115
그러는 사이에 종년은 술상을 가져다가 살포시 손님 앞에 놓고는 일어섭니다. 그것이 또한 이상한 것이 가령 이편에서 사양할값이라도 술상을 들고 나온 종년이 술 한잔 먹으라고 딸아서 권하는 말도 없이 그대로 일어서는 것은 무엇일까?
 
116
“거 웬 술상이냐?”
 
117
이서방은 이렇게 물었읍니다.
 
118
“녜.”
 
119
하고 종년은 고개를 숙인 채 이렇다 저렇다는 말이 없읍니다. 그러니 이서방은 더욱 궁금합니다. 도무지 꿈을 꾸는 것도 같고 나쁘게 말하자면 도깨비한테 홀린 것도 같고.─
 
120
그러나 종년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나가고 맙니다.
 
121
그러니 이서방은 차차 불안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갈스럽게 차린 술상을 우두커니 치어다만 보고 있읍니다.
 
122
이렇게 잠시 앉았으면 이 담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기려노? 하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문이 방싯이 열리었읍니다.
 
123
학문과 덕을 쌓아 여덟 번의 과거에 여러 번 장원급제를 하여 태도가 침착한 이서방도 그 자리에서는 아니 놀랄 수가 없었읍니다.
 
124
방싯이 열리는 문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도 선녀에 가깝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었읍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그러나 위아래를 하얗게 소의소복으로 차리고서 아닌밤중에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양자는 그러나 선녀와 같은 아름다움에 취하기보다 귀신인가 의심하게 요염하였읍니다.
 
125
그 고운 얼굴에 까만 속눈썹이 선연히 보이도록 눈을 아래로 깔고 조신하게 들어서는 그 여인은 수족이 약간 떨리고 분 바르지 아니한 얼굴은 불그레하니 상기가 되었읍니다.
 
126
이서방은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요염한 여인을 바라보았읍니다. 그의 가슴은 사뭇 두근거렸읍니다.
 
127
그러는 사이에 그 여인은 방문을 뒤로 닫고 바로 문턱 안에 몸을 약간 모로 앉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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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을 지은 것으로 처녀가 아니라 부인인 것을 알 수가 있읍니다.
 
129
처음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서방은 다시 침착해져서 얼핏 일어나 웃옷을 입고 갓을 쓰고 그리고 싹 돌아앉았읍니다.
 
130
비록 저편이 내통도 없이 들어왔기 대문에 이렇게 한 방에 앉게는 되었으나 남녀가 유별하니 그에 대한 체면을 차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돌아앉아서 비로소 이서방은 말을 했읍니다.
 
131
“어떠한 여인이기에 이 아닌밤중에 낯 모르는 사람이 홀로 있는 방에를 들어오섰는지는 모르겠으되 속히 돌아가서서 객 된 사람의 불안함이 없도록 하소서.”
 
132
그러나 등 뒤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고 또한 물러가려는 기색도 보이지 아니했읍니다.
 
133
“허 이게 그러면 필시 귀신이로구나. 귀신이 작희를 하려는 것이니……”
 
134
이서방은 혼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냅다 주문을 좍좍 외었읍니다. 주문을 외우면 귀신이 물러간다니까요.
 
135
그래 이서방은 청을 돋우어서 주문 한 대문을 좍 내려 외우는데 등 뒤에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이서방은 좁 흘개가 풀리는 것 같았읍니다. 그러면 귀신은 아닌 것이다. 주문을 외어도 물러가지 아니하니 분명 귀신은 아닌 게다. 귀신이 아니면 필경 사람인데……
 
136
이렇게 생각한 이서방은 다시 목소리를 고쳐서 말을 하였습니다.
 
 
137
“주문을 외어도 물러가지 아니하니 사람일시 분명은 한데 사람이라면……”
 
138
말이 마치기 전에 등 뒤에서는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139
“분명 귀신은 아니요 사람이올시다.”
 
140
하는 것입니다.
 
141
“그러면은.”
 
142
하고 이서방이 하는 말입니다.
 
143
“무슨 곡절이 있는 누구이길래 여자로서 이런 당돌한 처사를 하시오?”
 
144
“저는 이 집 김판서의 딸이올시다.”
 
145
여전히 모기만한 소리였으나 이서방에게는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알몸에다 끼얹는 듯이 놀라운 말이었읍니다.
 
146
“김판서의 영애?”
 
147
“네.”
 
148
“하물며 김판서의 영애로서!”
 
149
이서방에게는 명문 김판서의 딸이 아닌밤중에 행객의 방에를 들어왔다는 것이 실로 해괴망측한 패륜인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그의 어성에는 노염이 띠어졌읍니다.
 
150
“네 부끄럽사오나 서러운 곡절이 있읍니다.”
 
151
여자의 변명하는 듯이 여하라는 대답이었읍니다.
 
152
“곡절? 곡절이 있으량이면 어른 되시는 김참판이 계시는 터이니 밝는 날을 기다려 어훈으로 하여곰 말씀이 계시게 할 일이지 부인의 오늘밤의 이 거조는 매우 해괴하오…… 하니 잠시도 유예없이 돌아가시오.”
 
153
이서방은 이렇게 준절히 일렀읍니다. 그러나 여자의 대답은 또다시 의외였읍니다.
 
154
“아버님께서도 아시는 일입니다.”
 
155
“응! …… 그렇다면 더욱이 딱하지 아니하오.”
 
156
“또한 곡절이 있는 소치입니다.”
 
157
“곡적이 무슨 곡절일고?”
 
 
158
김판서는 당대의 명문거족이요 집안이 부유했읍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있었읍니다.
 
159
슬하에 아들이 없고 만득으로 오직 하나 둔 딸 소저는 낙지 이후부터 불행한 인생의 길을 밟기 시작했읍니다.
 
160
첫번 불행은 산후 삼일에 그 모친이 별세했다는 것입니다.
 
161
그러나 호화로운 집안에 귀하게 태어난 소저인지라 이 불행은 의식하지도 아니하고 유모와 또 지극한 정에 넘치는 아버지 김판서의 손에 무사히 장성을 하였읍니다. 김판서는 딸 소저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혹시 남의 집안과 같은 그런 갈등이 생겨 딸로 하여금 조금치라도 불행한 일을 당하게 할까봐서 당시 사십의 장년으로도 재취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162
소저는 그리하여 잘 자라났읍니다. 자라는 사이에 먼저 나타나는 것이 출중한 재질이었읍니다.
 
163
열 살 안에 사서와 삼경을 다 읽고 또한 문리를 얻어 그 의견이 능히 장성한 남자를 능가할 만하였읍니다.
 
164
다시 나이 열다섯 살이 되매 실로 하늘의 선녀가 인간에 하강한 듯이 얼굴과 태도가 아름다왔읍니다. 그러고 보니 상하와 인근의 칭찬이며 흠모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김판서의 애지중지하는 사랑은 천하의 보물을 귀하고 중히 여기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었읍니다.
 
165
열여섯을 맞이하는 해 봄 김판서는 사위를 맞이하게 되었읍니다. 결혼…… 이것은 인간의 대사요 경사이었으나 그러나 소저와 및 그 아버지 김판서에게는 소저가 인생의 불행의 두번째의 길을 내어디디는 첫걸음이었읍니다.
 
166
그것은 혼인을 치른 첫날밤 그 정정하던 신랑이 신방에 첫발을 들여 놓으면서 도무지 병명도 모를 급병으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167
그리하여 소저는 소위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손목 한번 잡혀보지도 못한 처녀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68
과부, 이것은 이마에 불행의 낙인(恪印)을 찍은 여성입니다. 보통 서민에게도 그러했겠지만 양반의 집안에서는 더욱 그러했읍니다.
 
169
이렇게 되고 보니 일을 당한 소저도 소저려니와 심통이 지극한 것은 아버지 김판서였읍니다. 그렇게도 귀애하며 그렇게도 세상에 드문 재질을 겸비한 딸 소저가 인제 한평생 눈물과 한숨으로 우울한 가운데서 인생의 낙을 청춘의 향기를 즐기지 못하고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김판서는 눈이 아득하고 그만 발광한 것 같았읍니다.
 
170
그는 ‘법’과 예절을 저주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러한 끝에 그는 단연 결심한 바가 있었읍니다. 소저가 실로 엉터리도 없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고 울적히 지내는 그 아버지 김판서를 위로를 할 겸 또 그 지극한 정의 위로도 받을 겸 근친을 왔을 때에 김판서는 육십 전에 벌써 백발이 성성하여 가지고 눈물 어린 눈으로 소복한 딸을 바라보았읍니다.
 
171
삼년의 상을 마치고도 그대로 소복을 한 딸의 심경 그것을 김판서는 넉넉히 알 수가 있었읍니다 ─ 다홍적삼도 없고 남치마도 없고 다만 구슬프게 희기만 할 너의 젊은 일평생. ─
 
172
이렇게 생각한 김판서는 분연히 삼년 전의 결심한 바를 시행하려 했읍니다.
 
173
“사람은 법보다도 예절보다도 위선 사람이니라. 너를 저렇게 해서 젊은 대로 평생 자리 없는 상청(無形의 喪廳)에 가두어둔다는 것은 큰 죄요 하늘에 사무칠 원한이다.”
 
174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소저는 고개를 소곳하고 말이 없었읍니다. 김판서는 다시 말을 계속합니다.
 
175
“나는 벼슬도 명망도 인제는 다 일이 없다. 하늘을 두쪽에 내어서라도 인제 너 하나를 다시 즐겁게 살어가게 할 수가 있다면 나는 그만이다. 다행히 내게는 재산이 있다. 그러니 너는 오늘 나하고 같이 과천으로 내려가자…… 내가 사람을 시켜서 집도 지어놓고 했으니……”
 
176
소저는 과천으로 가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아버지의 얼굴을 치어다보았읍니다. 김판서는 잠시 말을 끊고 딸의 동정을 살피던 끝에 다시 말을 합니다.
 
177
“과천이라는 곳은 서울 왕래를 하는 남방 선비들이 많이 지내는 곳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거기서 하룻밤씩을 유숙하느니라. 그러니 거기를 가서 네 눈으로 보아라. 일 년이고 이태고 두고 보아서 만일 네 눈에 드는 사람이 있거든 따라가거라. 선비이니 과히 숭없지 아니할 것이지만 그런 것보다도 사람은 우선 사람인 것이다. 남녀가 서로 합심이 되어서 살게 된다면 그것이 근원이지 벼슬이니 법이니 예절이니 재물이니 하는 것은 다 거기 따르는 가욋 것이다.”
 
178
소저는 고개를 소곳하고 앉아 아버지의 말을 듣는 동안에 아버지의 지금 하려는 거조가 가타부타하기보다 먼저 그 아버지의 지극한 정이 실로 뼈에 스미게 감격했읍니다. 그래 저절로 눈에 어리어 소리 없이 흘러내렸읍니다.
 
179
“그러니 네 생각은 어떠냐?”
 
180
하고 김판서는 물었읍니다.
 
181
소저는 잠시 생각한 끝에
 
182
“아버지 시키시는 일이면……”
 
183
하고 응낙을 했읍니다. 그리하여 김판서 부녀가 과천으로 내려왔읍니다
 
184
김판서는 사관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남방의 점잖은 선비가 당도하거든 자기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읍니다.
 
185
그래서 그새 일 년 동안 지나가는 선비가 찾아와서 묵을 때마다 소저는 그 이웃 방으로 들어가 엿을 보아왔읍니다.
 
186
그렇게 하기를 일 년…… 그러다가 이날 밤 소저는 비로소 ‘눈에 드는 선비’ 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187
이러한 내력과 곡절을 다 듣고 나서 그러나 이서방은 발연 변색하여 가지고 먼저보다 더욱 준절히 그 부인 즉 소저를 꾸짖었읍니다.
 
188
“허, 그렇다면 더구나 해괴하고 망측한 일이지!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라니…… 어데 비록 손목 한번 서로 만지지 못했다손치더래도 남편은 남편이니 감히 다른 남자에게로 개가할 생심을 하며, 명문 김판서가 그것을 그 딸에게 시키다니! 하물며 양반의 집 규중부인으로 외간 남자의 혼자 있는 방에를 아닌밤중에 찾어 들어와서…… 엥…… 망칙하다! 썩 물러나지 못할까?”
 
189
그의 호령은 실로 추상 같았읍니다. 이 추상 같은 호령의 서리를 맞고 애련한 한 떨기 꽃은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몸을 떨다가 필경 소리없이 눈물을 떨어뜨렸읍니다.
 
190
한동안 소리 없는 눈물을 떨어뜨리는 소저는 조용히 일어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읍니다.
 
191
이서방은 자기의 훈계가 효과가 생겼음을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읍니다.
 
192
그래 그는 다시 의관을 풀고 잘 채비를 차리느라니까 아주 간 줄 알았던 그 부인이 밖에서 망설였든지 다시 들어왔읍니다.
 
193
일종의 승리감(勝利感)에 취하여 스스로 만족하던 이서방은 다시 화를 내었읍니다.
 
194
여자는 소곳하고 앉아 있다가
 
195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여 보십소사.”
 
196
하고 애원하였읍니다. 그 소리는 비록 가늘었으되 그 애달픈 심정을 헤아려서 듣는다면 구천에라도 사모칠 애소였겠지요.
 
197
그러나 이서방에게는 그것은 한 파륜의 한소리에 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198
그는 완고하게 거절을 해서 소저를 또다시 쫓아버렸읍니다.
 
199
두번째 여자를 물리친 이서방은 자리에 누웠읍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궁글 저리 궁글 하며 그야말로 전전반측하는데 밤이 이슥한 후에 소저는 또 나왔읍니다.
 
200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도 아니하고 똑바로 쳐들고 이서방을 바라보았읍니다. 그의 눈은 오래 울었던지 퉁퉁 부었읍니다. 그러한 가운데도 우렷이 솟아오르는 달같이 훤하게 아름다운 그 자태가 실로 한폭의 명화와도 같았읍니다.
 
201
“마즈막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하여 줍소사.”
 
202
이렇게 애원은 하나 그러나 의연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서방은 그러나 고개를 흔들었읍니다.
 
203
“안될 일이오.”
 
204
“그러면 저는 자결을 하겠읍니다. 규중의 여인의 몸으로는 이에서 더한 부끄러움은 없읍니다. 자결하는 수밖에 없읍니다.”
 
205
“죽어야지. 열녀는 이사수절이라니 차라리 죽어서 절개를 더럽힘이 없어야지.”
 
206
이서방의 대답은 이랬읍니다.
 
207
소저는 호 한숨을 내어쉬고 잠시 이서방을 원한 깊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돌아서서 나갔읍니다. 그 눈을 이서방은 영원(?)히 잊지 못했읍니다.
 
208
이서방은 또다시 누웠으나 더욱 잠은 이루지 못했읍니다―어쩐지
 
209
불안스러워서.
 
210
그래 이리 뒤척 저리 궁글 하기를 한식경이나 하던 끝인데 갑자기 안에서 곡성이 와 일어나더니 이어 아까 술상을 가지고 나왔던 종년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목메인 소리로
 
211
“아씨가 돌아가섰어요. 목을 매고 돌아가섰어요.”
 
212
하고 우는 것입니다.
 
213
이서방은 비로소 무릎을 탁 치며
 
214
“어풀싸!”
 
215
하고 부르짖었읍니다.
 
216
이때에 종년이 방문을 열고 섰는 등 뒤에 허연 노인 하나가 나타났읍니다.
 
217
“이 딱한 젊은 사람!”
 
218
그 노인은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한마디 하고 이서방을 구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노인의 얼굴에는 많이 잡힌 잔주름 속에 비애가 고비샅샅이 박혀 있는 듯이 처량하였읍니다.
 
219
노인은 조금 후에 다시 말을 하는 것입니다.
 
220
“내 딸을 죽게 했다고만 내가 하는 말이 아닐세…… 그대는 들으니 ‘백의정승’ 의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 그러면 군명을 대신하여 천하의 백성을 다사릴 큰 그릇이어늘 그다지도 변통성이 없고 인정(人情)에 어두어서야 어찌 그러한 대임을 다하겠는가?”
 
221
이렇게 말을 하고 노인은 다시 사라졌읍니다. 이서방은 한동안 넋이 나간듯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의관을 가다듬어 입고 일어섰읍니다.
 
222
이 집에 더 있을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종자를 재촉하여 가지고 그 밤으로 과천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223
넋을 잃은 사람같이 되어가지고 이서방은 과거에도 낙제가 된 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224
과천의 꿈 같은 비극의 하룻밤이 있은 후 그의 눈앞에는 그날 밤 마지막 돌아서던 소저의 그 원망하는 듯 애원하는 듯하던 그 눈이 밤이나새나 앞에 얼찐거렸읍니다.
 
225
과거를 보는 데도 무슨 소리를 썼는지 또 글씨는 어쩌면 그다지도 못나게 썼는지!
 
226
그래서 필경 낙제를 하고 따라서 아홉 번째 장원급제를 해서
 
227
‘백의정승’을 하자는 희망도 사라지고 말았읍니다.
 
228
그뿐 아니라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병들어 누워 가지고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이 못 가서 그만 황천객이 되고 말았읍니다.
 
229
“참 아까웠지! 그때 그 나이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으니!”
 
230
‘덕언이 선생님’은 이렇게 탄식했읍니다. 우리도 그때는 ‘덕언이 선생님’ 을 따라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 철이 나서는 잘했다고 되려 고소했읍니다.
 
231
“그런데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라는 말이 있느니라.”
 
232
‘덕언이 선생님’ 은 그중에도 대가리 큰 아이들을 치어다보면서 말했읍니다.
 
233
왜 그런고 하니, 이서방이 그렇게 죽은 뒤에 그 동리는 매년 모진 병이 돌고 또 흉년이 들어서 동리가 거진 망할 지경에 이르렀었읍니다.
 
234
그것은 그러면 분명 그 여인의 원한이 서리어서 이서방도 죽었고 또 동리도 이렇게 망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읍니다.
 
235
그래서 동리에서 공론을 해가지고 돈을 걷어서 그 동리 뒷산에다가 그 여인의 사당 하나를 지었읍니다.
 
236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그해부터 병이 나지 아니하고 또 흉년도 들지 아니했읍니다.
 
237
그리고 봄 날이나 따뜻하고 하면 그 사당 근처로 하얗게 소의소복한 그 여인─소저가 나물 바구니를 들고 배회하는 것을 동리 사람들이 가끔 본다고 합니다.
 
238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덕언이 선생님’ 은 담배 대꼭지를 가지고 바로 그 옆에서 조는 아이를 톡 때리면서
 
239
“이놈들아 인제는 그만 가서 자고 일쯕들 일어나.”
 
240
하였읍니다.
 
241
우리는 마당 앞 고목나무에서 두견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처량한 소리가 마치 그 여인─소저의 아직도 원한에 어리어 우는 소리인 것같이 들으면서 각기 집으로 돌아갔읍니다.
【원문】소복(素服) 입은 영혼(靈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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