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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원(心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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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5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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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心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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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이 패한 것은 확실히 마음에 언짢았으나, 원통까지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세가 떨림에 인격조차 떨어지는 것은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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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씨는 감자를 캐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호미를 먼즛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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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 성재야 머 악한 짓을 해 본 때가 있가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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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짓 두 눈깔이 바루 백이구야 허지, 원래 성잰 위인이 어리석은걸, 제레 밥을 안 굶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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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전자보다 후자는 듣기 역한 소리다. 아니 모욕에 가까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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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지금 일반으로부터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는 데 마음이 허한다면 역할 것도 없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아는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데 안타깝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성재임에는 누구보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더 잘 안다. 그 무엇이 세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삐뚜로 엿보게 만들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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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이 밖에 더 나아가 그 귀착점에 생각의 실마리는 풀리지 못하고 얼크러진다. 재산이 있을 때 오던 찬사가 이렇게 바뀐 것이니 파산에 원인이 있으리라는 그저 막연한 추측에 저로라고 나설뿐, 그리고 다음 순간에 더러운 돈이란 귀결로 언제나같이 끝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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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도 더러운 돈이라고 내심으로 저주는 하면서도 그 돈을 다시 잡아 보려 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해 보기에 애를 쓰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 때 가장 바른 마음의 소유자라고 자처하던 자신의 신상에 일어나는 한 커다란 의욕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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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을래서 모았던 돈이 아니었고, 또 알뜰히 돈에 목을 매고 살지도 않았다. 한결같이 사랑문을 열어 놓고 오고가는 손님 접대를 잊지 않았고 공공사업에 기부 같은 것도 기회만 있으면 아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만 원에 가까운 채권을 포기하여 인근 수백여 빈농으로 하여금 북만주 길을 잊게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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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믿음의 칭호를 주었거니와, 이것은 결코 명예를 위하여 불러 왔던 사실도 아니였고, 장차 그 명예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명예가 양심의 반증이라고 아는 것이 기꺼웠고 기꺼우니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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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행복 속에서 삶을 찾는 마음은 돈에 대한 애착을 몰랐다. 세간을 임의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지 불과 십여 년에 천여 석 추수의 토지는 냉정하게도 뭇사람들의 손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궁박궁한 나머지 집 칸을 파는 것으로 밑천을 삼아 마을 끝에 한 채의 주막을 움키고 술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삼지 않아서는 안 되는 구차한 살림으로 전락을 하게 되니 법이 없어도 살겠다던 성재 씨의 신상에는 별의별 소리가 인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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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 생애의 이 한 사람의 몸뚱어리에 오고 가는 변화 - . 내 돈을 내가 없앤 것이요, 또 그리함에 그들을 위함이 있었을지언정 누구의 것 하나 다친 것이 없건만 무리하게도 주었다. 빼앗는 명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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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씨는 새삼스럽게나 생각하는 듯이 다시금 놀라며 한숨과 같이 힘없는 손에 또 호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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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어서 헤치는 흙 속에서 콩알 같은 감자알이 수둑이 묻어 나온다. 한 달만 지나면 마음대로 주먹같이 크게 자랄 감자알들이다. 그리고 그때면 제법 양식이 되어 줄 그 감자이언만 무참히도 호밋날에 목이 잘리는 것이 마음에 아쉽다. 아직 감자 포기를 파 들추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기인 것은 모르는 배 아니었으나 시재의 용도에 말유하다. 기껏 컸대야 몇 포기 새에 달걀만큼씩한 것이 한 알씩 덧묻어 나오는 그 요행이 이렇게 한참 자라는 감자 포기를 파 들추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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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는 맺히는 감자를 다 파 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짐짓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여름철의 술장수는 맞돈에 궁하다, 떨어진 안주감에 저녁 술 손님을 볼 수 없으리란 것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내키지 않는 마음이언만 성재 씨는 포기마다 호밋날을 아니 끌고 다니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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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마련된 감자알이 납작납작하니 엷게 썰려서 접시 위에 뒤개어 얹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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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똥벌레가 불을 켜기 시작해도 손님은 얼씬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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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목을 지나니 손님은 알아보게 발을 끊는다. 여름철과 술장수는 이렇게도 인연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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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밤마다 손님이 서넛은 없어 본 일이 없는데 이제나 오려나, 이러다가는 이달엔 색시의 몸값도 어렵잖을까, 이십 원도 큰돈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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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쓸데없이 윗간에 혼자 넘어져서 노랫가락을 입버릇처럼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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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을 데려다 놓고 사람들을 호려들임으로 삶을 지탱해 가려는 자신이 가엾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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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새파란 젊은 축들이 저것을 보고 밀려나와 뒤덤벅실 때 당연히 일러야 할 도덕상 책임을 지고 있는 윗사람으로서 못 본 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 마음이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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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이 갈 때에 떨어치고 간 돈을 손에 쥘 때는 말 바로 상쾌한 일이다. 분명히 전에 느껴 볼 수 없던 더러운 즐거움이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을 굳이 찾고 또 가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 즐거움의 대상이 되어 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때 성재 씨는 자기의 맘속을 이렇게도 알 수 없이 파먹는 벌레가 야속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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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과 같이 몸을 뒤채 일으켰다. 그리고 샛문을 밀고 손님을 위하여 준비하여 놓았던 술상 위에서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괴로움의 벗이 술인 줄을 안다. 마음의 위안을 찾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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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른 술을 또 축내디. 에이구 뒤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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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의 말은 듣는지 마는지 성재 씨는 잔에 술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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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없다던 걱정두 그저 괴닌 소리야! 그러기 우린 이런 노릇두 못 해먹구 산대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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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는 분명히 남편의 인격을 물어뜯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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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로소 지나 보는 것이 아니다. 대꾸를 하려다가는 한정이 없음을 안다. 잠자코 부어서는 곰배님배 마시는 사이 주전자는 점점 가벼워지며 까꿉서기를 요하더니 주룩 하고 방울만이 뚝뚝 잔 안에 든다. 열 잔도 못 부었다고 아는데 술은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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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씨는 그것을 한 병이라고 넣어서 사람을 속이는 것이 비로소 깨닫기는 듯 나치 간지러웠다. 반 병은 좀 넘을까, 그렇지 않으면? 생각하여 보는 동안, 저적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마당에 들리다 멎는다. 성재 씨는 안주로 가던 손을 내밀다 말고 다시 귀를 가다듬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극히 가늘게 흘러든다. 얼른 주전자를 밀어 놓고 눈짓을 색시에게 주며 골방으로 들어갔다. 자기 때문에 자유로 들어올 수 없는 젊은 술꾼들의 행색임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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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맞아들인 색시는 손님이 다섯이나 되는데 술이 모자라겠다고 마누라와 같이 상을 차리며 수선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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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손님이라는 데 성재 씨는 적지 않이 정신이 새로웠다. 그러나 술이 모자라서 양전에 돈을 남겨 돌려보낼 생각을 하니 그 바른 술을 축낸 것이 금시 후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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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씨는 은근히 계획해 오던 창안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순간 미련도 없이 이제 베풀기를 주저치 않았다. 술에다 물을 타자는 것이다. 이 법칙에 손님들은 으레히 상들을 찡글 것이나, 그런 술을 먹이기 위한 색(色)이 있고, 또 이런 노릇은 색에 끌리는 축들이야만 뜨끔이 떨어뜨리는 것이 있다. 그러한 인물이 수두룩함을 이제 손님들 가운데서 진맥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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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씨는 가만히 일어나 뒷문을 밀고 부엌으로 돌아가 두 병 술에다 한 병쯤 물을 타서 세 병을 만들기를 일렀다. 그리고 취한 기색이 드러났음에도 술을 그냥 찾을 때에는 좀더 물질을 해도 괜찮으리라고 다시 한 번 참고로 이르고 골방 속으로 되돌아와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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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착하고 불 없는 골방 속은 가슴을 누르는 듯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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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은 차츰 시끄러워진다. 손님을 호리는 색시의 노랫가락이 귓가에 역하다. 이런 짓을 아니 하고는 못 살까? 차라리 듣지 않으리라, 성재 씨는 잠을 청하려고 눈에 힘을 주어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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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열 잔 푼수나 들이킨 술은 벌써 어릿더릿 정신을 흐리기 시작한다. 감은 눈앞에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다. 잠이 어릿어릿 몸이 녹아진다고 느끼고 있는 순간, 성재 씨는 바늘에 귀를 찔리는 듯 놀라고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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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에에 이게 무슨 술이야. 이거 물을 탔구나! 이렇게두 원 물을 탄담! 이년아, 대관절 물에다 술을 탔네? 술에다 물을 탔네?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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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도 지껄이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모두 몽롱하게 귓전을 흐르고 말건만 그 한 마디, 그것은 귀를 때리는 것같이 쑥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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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은 참 모를 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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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이야, 제것 없으문 굶어 죽을 줄만 알았던 성재 영감이 술에다 물을 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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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이제야 눈깔이 바루 백이는 모양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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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미처 흘러드는 그들의 대화 - 성재 씨는 몸이 흔들일 만큼 놀랐다. 자기를 비방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것은 결코 악평으로만 볼 수 없는 반은 더 자기의 인격을 돋우보는 말이라고 아니 들을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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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거운 술에 상들을 찡그리면서도 그들의 말은 이런 데 일치된다. 차마 못 할 짓이라 내심 허하지 않는 것을 눈을 딱 감은 데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도리어 종래의 악평에서 버젓이 벗어날 수 있고 따라서 또한 명예를 도웁는 소임도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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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를 베풀수록 반비례로 인격은 올라간다. 명예가 결코 언짢을 이치 없지만 현재의 생활에서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는 성재 씨의 마음은 만족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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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말하면 그 명예는 자기에게는 더할 수 없는 모욕인 것이다. 그러니, 삶을 위하는 수단은 앞으로 자기에게서도 악의와 인연을 멀리할 수 없는 것임을 알 때, 좇아서 점점 올라갈 자기의 인격을 미루어보니 우스운 것이 세상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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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어서 잔을 따려므나, 물 아니라 물 해내빌 탔대문 어때? 누가 머 술 먹으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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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렇지, 그렇구말구, 누가 참 머 술 먹으러 왔나, 요것 보러 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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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참 요년 옥심이 너, 사람을 그렇게도 녹여 내는 법이 어디 있다든?”
 
51
술에다 물을 탔건 말건 그들은 좋아라고 옥작이며 그저 진탕치듯 먹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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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하는 계획은 아니었으나 색으로 위하여서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손님들은 그 술을 이렇게 먹는 것을 볼 때 성재 씨는 그 계획의 성공이 은근히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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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법칙을 계속만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군색은 면해질 것이 아닌가 하니 마음의 고삐도 한결 늦춰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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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씨는 손님을 호리는 옥심의 애교가 귀여운 듯이 코웃음을 하며 녹아져 오는 몸에 사지가 늘어나는 듯하게 기지개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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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지〕《비판》(193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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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단행본〕*『병풍에 그린 닭이』(조선 출판사, 1944)
【원문】심원(心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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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용묵(桂鎔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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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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