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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자랐을까 내 고향의 라일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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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5.15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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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자랐을까 내 고향의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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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의 뚜뚜 소리에 육중한 흰 대문이 좌우로 열리고 조약돌을 깨무는 소리를 내면서 차대(車臺)가 스르르 굴러 들어간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신사와 숙녀를 떨어뜨리고 그 앞을 빙 돌아 다시 낮은 고동을 뛰― 한 번 울리고는 까만 차대가 언덕진 정원의 구부러진 길을 커브하면서 대문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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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을 깔아 놓은 흰 길을 가운데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언덕이 져서 그 곳에 작은 못이 있고, 단풍과 소나무와 사쿠라와 잣나무와 진달래와 또 이름 모를 가지각색의 나무가 이발하고 면도한 두발같이 미끈히 하늘을 찌르고, 둥글게 땅에 붙어 혹은 꾸부러져서 잔디밭 위에 그늘을 만들고 혹은 허리를 굽히고 못 속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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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 쪽 흰 벤치를 두 개 놓은 곳에 등(藤)이 구부러져 올라가 지붕을 만들고 못을 향하여 서 있는 등롱(燈籠)은 수위 모양으로 움직이지 않는데 날쌘 세퍼드가 풀포기를 쑤시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간간이 새 소리, 저편 후원에서 핑퐁채를 쥐고 달아오는 영양의 명랑한 웃음, 바람에 불려오는 듯 피아노 소리, 우리는 이런 정원을 더위에 허덕이며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면서 그 앞을 지나다 힐끔힐끔 대문으로 들여다보는 때가 있다. 홍진만장(紅塵萬丈)의 시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오히려 티끌과 먼지와는 인연 먼 이 정원의 명랑한 향훈과 청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특이한 심장과 폐를 상상해 보면서, 우리는 땀과 먼지에 축 처진 양복바지를 끌면서 다시 게딱지같은 자기 집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정원’하고 일컬을 뜰 안을 거닐어 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이 속의 풀과 나무 잎새와 샘물의 서늘한 맛을 누가 능히 상상인들 할 수 있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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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평도 안 되는 세모 혹은 네모난 땅조각에 대문과 마주 서서 변소가 있고 그 옆으로 장독대, 물독, 나무후간, 그리고 두 줄, 세 줄 가로 세로로 매어 놓은 쇠줄에는 명태같이 꿋꿋한 와이셔츠의 팔대기다리를 꺾여서 매어달린 부인네의 속옷 중의 심지어는 방 걸레조로, 구멍 뚫어진 양말, 삼과(三科)의 미술품 같고 초현실파의 회화 같은 지저분한 풍경―골목에서 떠드는 졸망구니 아이들의 재재거리를 소리를 귀를 막을 듯이 피하여 들어오는 내 집 대문에서 문턱을 넘어서자 맥고 모자를 벗기듯이 떨어뜨리는 빨래를 얼굴에 들쓰는 일이 우리들의 정원이 주는 첫 인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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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나무 한 가지가 있고 풀 한 포기가 있을거냐. 어디 폐를 씻는 청신한 향훈이 있고, 땀을 그으는 한 조각의 그늘이 있을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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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도 이 뜰 안에선 공평을 잃고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색의 창공도 이 속에선 광윤(廣潤)을 잃는다. 마비된 신경에서 안정을 잡아찢는 ‘무드렁사리요’의 소리, 숨을 매이게 하는 굴뚝의 연기, 이것이 우리들의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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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정원에도 황혼은 온다. 초하(初夏)의 밤, 산산한 바람이 대청에 기어든다. 이 때, 처마 끝에 달이 매어달린 것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휴― 한숨을 쉬고 내 마음의 한 모퉁이에서 찾아 보고자 하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빈약은 하나 마음대로 하늘은 볼 수 있는 뜰, 내 고향 내 집의 뜰을.
 
9
나는 금년 이른 봄에 시골서 동무와 종달새 둥지를 내리려 산을 넘고 들판을 헤매어 다니다가 헛물을 켜고 돌아오는 길에 라일락을 세 포기 떠가지고 와서 뜰 안 한 구석에 심었다. 우리 시골에는 이 꽃나무가 대단히 흔하여 산마다 ‘개똥아리’ 천지다. 나는 이 강렬한 방향(芳香)을 가진 꽃이 필 때에 강을 건너 산중을 방황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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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튿날부터 물을 주고 그것이 피기를 기다렸다. 오월! 그것은 히슴스러한 자주빛으로 피어나고 그 향기는 내 방에까지 흘러 들어와서 나의 머리를 취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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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향 떠나 40일, 달을 보며 산산한 바람이 볼을 스칠 때 나는 내 가슴속에 이 뜰을 그려 보며 혼자서 생각하여 보는 거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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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에 심고 온 라일락이 지금은 얼마나 컸는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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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5년 5월 15일)
【원문】얼마나 자랐을까 내 고향의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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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5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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