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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합숙하는 C사(舍)에 K양이 들어온 뒤로 사내(舍內)에 일종의 암 류( 暗流) 가 흘렀었다. 일개 이성의 내습(來襲)이 사생들에게 얼마만큼 긴장한 기분을 주는 동시에, 일면으로는 호상간에 의문의 눈으로 대하게 하는 불순 한 감정을 가지게 하였다. 외면으로는 더욱 활기 있고 평화로운 듯하여 보였지마는, 기실은 그 이면에 질시와 시의(猜疑)가 가득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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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舍生) 그들 중에는 다수는 성에 체험이 있었으나, 그들의 속에 잠재한 애(愛)의 본질인 동경은 이성을 대할 때마다 함부로 대상을 구하려든 것 이었었다. 그들은 지금껏 본능의 만족은 얻어본 경험은 있었으나, 세상 사람의 항용 떠드는 연애에 실감이 없고, 자못 적지 않은 동경만을 가졌었다. 그래서 그 성적 만족과 애의 정신적 위안과는 아주 별세계의 물건인 것처럼 상상하고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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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은 뒤에나 산보를 마친 뒤에 모여 앉을 것 같으면, 화제의 중심이 흔히 연애에로 돌아갔었다. 그리하여 누구는 누구와 사랑한다는 등, 여 학생모는 연인을 둘씩 두었다는 둥, 여러 가지의 남녀 간의 이야기가 항상 말 하는 흥미의 중심이 되었었다. 그 결론은 소위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연애 전문을 한다고 비훼(誹毁)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중에도 영어 준비 하러 다니는 B가 더욱 분개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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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사생 중에서 큰기침하기로 유명하였었다. 기침을 크게 한 뒤에 담을 뱉고는, 트림을 길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기침하고, 담 뱉고, 트림하느라고 십여 분 시간을 허비하였었다. 동경에서 이 세 가지가 사교에 대기(大忌)인 것을 아는 C사생들은 가끔가끔 B에게 큰 기침, 트림, 담에 대하여 조롱하는 것처럼 주의를 주면, B는 불같이 성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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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을 다 간섭하는구려. 기침도 마음대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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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흉내 잘 내는 K와 C는 일부로 큰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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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 담, 트림의 흉내를 내었었다. 그러면 B는 모른 체하고 배를 어루만지며, 자기 책상 앞에 가서 곰방대에 담배를 넣어서 두어 모금 피고는, 자기( 磁器) 재떨이에 재를 떨었었다. 그 재 터는 소리가 트림하는 소리에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들렸었다. C와 K는 중학생인 어린 사람인 까닭에, 그러 한 흉내 내는 데에는 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 좀 많은 B도 둘이서 한편이 되어서 덤빌 때에, 흔히 못 이기는 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침, 담 뱉는 것, 트림은 근기(根氣) 있게 고치지 않았다. 어떠한 때에는 C사의 모든 회계와 사무를 담당하여 보던 Y가 하도 그 B의 방종한 것에 참을 수 없었던지 조용하게 말하던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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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B 군! 이것이 자네 집인 줄 아나, 이것은 동경에 여러 사람 이함께 공동생활하는 C사일세! 어린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 큰 기침 소리, 담 뱉는 소리, 트림 소리에 동리 사람이 잠을 못 잘 것일세. 좀 조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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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여전히 트림을 한 번 끅 하며,이마를 짚고 입술을 조금 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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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을 다 간섭하네……. 그럴 것 같으면 내가 C사에서 나가면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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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한 사람이 나간다고 C사가 없어질 바 만무하니, 그것은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러나 그렇게 큰기침 소리, 담 뱉는 소리, 트림하는 소리를 어느 하숙에 가더라도 고치지 않으면 쫓겨날 것일세. 자네 한 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이 불쾌한 생각을 하여 쓰겠나! 쫓겨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날마다 이웃방의 항의에 꽤 창피할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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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과격한 언쟁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B는 언설(言說)할 그때 뿐이었다. 조금 지나면 그러한 시비와 언쟁이 언제 있었던가 잊어버린 것처럼 태연히 웃고 이야기하고 놀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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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문제가 나오면 턱을 디밀고 덤비어 듣다가,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휘욕하는 것이 B의 버릇이었었다. B의 그 휘욕은 일종의 질투에서 나온 것을 짐작하는 나는 어떠한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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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B 군! B 군을 지금 어떠한 여성이 사랑하겠다고 덤비면 어쩔 터이요……. 그리고 당신이 아니면 죽는다고 달라붙으면 어찌할 터이오? 말 좀 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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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충동시키는 듯이 말하면, B는 참으로 그러한 일을 상상만 해도 기쁜 듯한 빛이 나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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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럴 여자가 있겠소? 가령 있다고 하면 말라고 권고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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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든 K 양이 들어온 뒤에 B부터 그 태도에 뜬 기운이 있었다. 그래서 큰 기침, 담, 트림, 세 가지 외에 창가 한 가지가 붙어서 네 가지 것이 되었었 다. 그래서 밥만 먹으면 마루로 뒤 골머리에 손을 집어넣고 두루두루 다니며 창가를 시작하였다. 그 비음악적인 창가 소리에 사생들은 적지 않은 불쾌를 느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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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 사생들은 "어! 좋다!"하며 그 창가를 권하였었다. 그러면 B 는 모른 체하고 창가를 중지하였었다. 그중에도 성에 체험이 없는 C는 B 를더 잘 조롱하였다. C는 B의 행동에 특별한 주의를 주었던 것은 C 자신이 K 양에 대하여 어떠한 동경을 가졌던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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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그렇게 미인이 아니었다. 몸이 좀 똥똥하고, 얼굴빛이 가 무스 름 하였다. 미(美)로서는 사람을 끌 수 없었으나, 그 육체에는 폭신폭신한 따뜻한 기운이 돋는 듯한 일종의 매력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 소탈스럽고도 무사 기한 듯한 행동에는 사람을 끄는 적지 않은 힘이 있었다. 더욱 빙그레 웃고, 앞니를 반짝 내놓으며 무슨 엷은 사(紗)로나 가리운 듯한 검은 눈을 깜짝일 때에는, 이성은 알 수 없는 위압을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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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이 C사에 올 때까지, 또는 들어온 그 뒤에도 오히려 그를 무사기한 소녀라고 만 나는 생각하였다. 어떠한 이성으로 대하는 관념이 적은 까닭에, 나의 태도는 언어에 나타나는 것으로만 보아도 존경이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반말과 비스름한 말을 들은 그때에 만일 K 양이 성에 눈떠서 자기는 벌써 소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을 것 같으면, 그는 반드시 내가 자기를 없이 여긴다고 불소(不少)한 불평을 나에게 대하여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남에게 대하여 원한이나 불평을 품고, 또는 반항하는 것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최후까지 온순한 태도로 나에게 소녀의 대우를 달게 받았었다. 나도 어떠한 때에는 나의 양심을 속여가면서도 어디까지든지 그를 소녀로 대접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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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이 건너 사첩반 방에 온 지 2일 후 어느 날 밤에 나는 동경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늦게야 사에 돌아왔었다. 때가 벌써 유월 중순이었으므로, 조금 바쁜 걸음으로만 걸어도 등에 땀이 축축이 젖었었다. 그리고 매우( 梅雨) 시절이라, 매일 비 아니 오는 날이 없어서 교외의 신개(新開)한 통로는 진흙으로 덮이었었다. 정거장에서 사까지 칠팔 정(町) 걸어오는 동안에 다리에 힘이 풀어져서 전일보다도 더욱 피로를 느끼었었다. 습기가 가득한 공기는 땀 묻은 의복을 축축하게 적시어서 자못 불유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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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방에 들어가서 의복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가려 할 때에, 사생들 은 석반(夕飯)을 안친 뒤에 문외(門外)에 산보하고 마침 현관으로 들어오던 터 이었다. 트림 잘하는 B 군이 나를 빙글빙글하는 얼굴로 바라보며 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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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이 당신을 몹시 기다리는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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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 군의 그 '몹시’ 라는 말에 어떠한 조롱이 없는가 생각함에 자못 불쾌하였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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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면서도'몹시’ 라는 것과 또는 '무슨 까닭으로 나를 기다리나.’ 하는 생각이 부절(不絶)히 일어났었다. 이러한 생각 가운데에 저녁밥을 마치고 나의 방으로 돌아왔었다. 사생들은 툇마루에 둘러앉아서 B 의창 가를 중심으로 논전하는 중이었었다. B 군은 창가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나의 자유라 하였었다. 다른 K, C, P들은 공동생활에는 그러한 자유를 인정 할 수 없다고 공격하는 중이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 총중(叢中)에서 가장 진실한 P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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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씨! 가보시지요. 아까부터 K 양이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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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의 말이 끝나자 사첩반 방 앞으로 향하였다. K 양이 발자취 소리에 방문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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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뒤에 나를 비웃는 듯한 시선이 쏘아 옴을 알았다. 이러한 때에는 바라보는 그 시선을 나의 시선 밖으로 느끼지 않더라도, 알 수 없는 무엇이 그것을 직각(直覺)하게 하는 까닭이다. 히히 웃는 소리도 들리었다. K 양이 온 뒤로 그 방에 들어간 일이 그때가 처음인 까닭에, 참으로 소녀 로만 생각 하면서도 그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주저하는 데에는 자기 모순을 아니느 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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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K 양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무슨 심려되는 일이 있 음을 C사로 옮겨오던 그때보다 얼굴이 좀 파리해진 것을 보고 직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잠을 깰 때마다 K 양의 방에서 무엇이라 중얼대며 입안소리로 창가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반드시 무슨 원인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였다. C사로 온 지 이틀 밤을 다 그렇게 지낸 K 양은 매우 피곤하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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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책상 곁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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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는데요. 곧 나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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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그 말대답에는 매우 주저하다가 나를 부른 요건이 곧 그 말에 있으므로, 그는 얼마만큼 실망의 애수를 띄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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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남자만 있는 데가 아니에요? 제가 남자만 있는 C사로 들어왔다고 했 더니요. 그런 데 있을 것 없이 곧 집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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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이 남의 도움으로 공부하는 줄은 나도 알았었다. 학비 보내던 사람이 그것을 중도에 거절한 까닭에, K 양은 여러 달 동안을 고생으로 지냈다는것도 들어 알았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에 밥을 먹지 못하고, 군 고구마( やき苧[ 저]) 만 먹고 지냈다는 말도 들었었다. 그러다가 동향인이 많은 C사 사생의 호의로 당분간 기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K 양의 집에서는 그렇게 무리가 나리라고 생각하였지마는, 그러한 부모네의 말을 순종하려는 K 양에게 공부 하려는 성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보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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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 있는 데 있으면 무엇이 어쩐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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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알 수 없어요……. 모처럼 멀리 공부하러 왔다가 그렇게 근심 하시니, 가서 자세히 말씀해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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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가는 것도 좋지마는 우리 기숙사에 들어온 지 이틀이 못 되어서 그대로 귀국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이상스럽게나 생각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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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이 그렇게 소문에 관계없을 것을 알면서도 K 양의 돌연히 귀국 하겠다는 원인이 이 사생 중에서 나오지 않았는가를 알고 싶어서 시험 겸 그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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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야 상관없을 듯합니다. 저의 사정으로 귀국하게 된 것이지, C 사 여러분에게 무슨 불평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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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드래도 다른 사람이야 어데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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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덮어놓고 귀국을 주장하는 것은, 다만 자기 집에서 오라는 것보다 도, 자기의 현재의 무슨 형편이 그것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인 것을 나는 확실히 짐작하였다. 그래서 나는 눈치를 차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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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의 최후 대답의 어미가 매우 애매하므로, 나는 그 대답을 그대로 두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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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짐작하세요? 참으로 알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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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걱정하는데요. 만일 그러한 소문을 들어보세요. 어떻게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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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가 늘 창가를 하고 뜬 기운으로 지내는 까닭에, B 군이 혹은 무엇이라고 K 양을 건들지나 아니했나 하는 의심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한 의심은 적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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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요? 자세히 말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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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남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에 없는 말 보태어서 소문을 낼것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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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의 그 주위를 살피는 것과 소문 두려워하는 데에 소녀 같은 어린 것도 있고, 성에 눈뜬 처녀 같은 부끄러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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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것을 그렇게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오? 이 C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친형제 같으니까 사내에서 무근(無根)한 말을 지어낸다든지, 또는 사내 말을 바깥에 전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을 듯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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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조금 붉히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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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씨가 제게 이 집에 온 뒤에 편지를 여러 번 하였어요. 이 방에다 가끔 편지를 던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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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군은 성에 아무 경험이 없는 동정을 가진 중학생이었었다. 나는 제일 혐의( 嫌疑) 한 B 군이 아니요, 무사기한 C 군이었으므로 하도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B 군에게 대하여는 어떻게 미안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그때에 B 군이 나의 앞에 있었다면, 나는 머리를 수그리고 그에게 사과 하였을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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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군은 K 양보다도 연하였었다. 그 말을 마친 K 양은 바느질 광주리 속에서 편지 뭉치를 집어내어 나의 앞에 놓으며, 바깥을 주의하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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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편지를 일일이 내려 보았다. 그것을 읽으면서도 나는 어린 C에게는 미안을 느끼었었다. 만일 K 양이 자기의 연서를 일일이 나에게 보였다는것을 C가 알고 보면, 철모르는 C는 아무 이해하는 것도 없이 전일의 존경과 신용은 다 어디로 내어버리고 그때에 반목과 질시로 향하리라 생각함에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의 단꿈을 여지없이 흔들어 깨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한편으로 그러한 사람의 비밀을 하필 나에게 하소하는가 생각 함에 K 양의 치기를 귀엽게 생각하는 동시에, 신뢰한다는 그 의미에는 어떠한 책임관(責任觀)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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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의 내용은 여러 장이 다 한뜻이었었다. 나를 사랑하여달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에 항용 쓰는 엷다란 감상적 문구가 나열하였었다. 편지를 K 양에게 도로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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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신은 C 군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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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하도 답장을 하라기에, 답장하면 다시는 편지가 아니 올까 하여서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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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랑할 마음도 없이 편지 오는 것이 두려워서 답장을 하였다는말이 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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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러한 문답을 하여갈 때에 우스운 생각이 절로 났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사랑 유희 가운데에서, 좌니 우니 하는 것 같은 웃음거리처럼 생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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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어린 사람들이 사랑이니 연애니 우스운 말이요마는, C와 참으로 사랑할 생각만 있으면 말하구려! 나도 C 군의 형과 상의하여 약혼이라도 되도록 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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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고, 나는 가벼운 헛웃음을 쳤었다. K 양은 까만 눈을 빠끔히 뜨고, 말끄러미 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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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세요. C 씨는 저보다도 나이 어리지 않아요? 저는 동생처럼 생각 할 따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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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녀로만 여긴 K 양이 연령 계산을 하며 동생처럼 생각하는 밖에도, 또 어떠한 것이 있다는 의미의 말에 나의 소녀의 꿈은 확실히 깨뜨려졌었 다. 역시 K 양은 성에 눈떴다 하였다. 그 위에 연애 선택력까지 가졌다는데에는 아니 놀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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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그렇게 잘 생각한다면 걱정할 것이 무엇이오. 편지 사건으로 그렇게 귀국까지 하겠다는 것은 나는 알 수 없는 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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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가요? 편지가 왔다 갔다 하면 필경은 소문이 나서 말거리가 되지 않아요? 집에서 알게 되면 걱정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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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문답 하는 동안에 K 양은 극히 소심한 소녀라는 것보다도, 선택에 최선을 다하여 연(戀)의 대상을 구하려는 처녀란 의식이 나에게 더욱 농후하여 왔었다. 그리고 편지 투입 문제만 없으면, 그대로 C사에 눌러 있을 뜻도 보였었다. 나는 여러 말 하지 않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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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것 같으면 편지 답장을 그렇게 애매하게 할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말하구려! 나는 C 씨를 동생으로밖에 생각지 않는다고……. 그리 고우리들은 아직 중학 시대의 어린 사람이니,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보다 공부나 더 착실히 하자고 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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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C 씨가 저를 원망치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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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한집에 있으면서 서로 불평한 얼굴로 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에게 불안인 것 같았다.나는 그의 뜻을 알므로 그 문제에 대하여는 아주 안심 하도록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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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염려 마오. C도 나이는 어리지마는 모든 소견이 상당한 사람이니까, 그런 것으로 사람을 원망하는 일 같은 것은 아마 없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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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말은 어느 의미로 보던지 C 군을 격찬한 것이다. 서로 동경 하는 마음으로 연의 대상을 고르는 K 양 앞에서 예사로 C를 칭찬하면서도, 그러면 거절하는 편지를 쓰구려 말하는 것이 확실한 모순이었다. 그리고 K 양의 어린 가슴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듯한 생각을 할 때에, 나는 스스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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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본의는 당분간 C사에서 기식하고 걱정 마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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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방으로 돌아왔었다. B 군은 나의 얼굴빛을 유심하게 살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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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웃는다. 나도 "아니, 별일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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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기장 속에로 들어갔었다. 그래서 혼자 웃었다. '아주 소녀로만 알았더니 맹랑한걸! 참으로 성에 눈뜬 여성인걸!’이라 생각함에, 말 할 수 없는 호기심이 나왔었다. 그리고 하필 나를 불러서 그러한 말을 고백할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나를 가장 신뢰한다는 말인가? 여성이 남성을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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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피가 아직도 가슴에 물결치는 청년 남녀가 서로 신뢰? 또는 나를 방편으로, 수단으로 사용함이 아닌가? 여러 가지 공상에 잠기었었다. 혹은 나의 공 상하는 것이 더욱 우스운 것이라 생각할 때에 목을 옵치어 이불 속에 파묻고 싶었다. 녹색 문장(蚊帳) 사이에로 보이는 전등은 희미끄럼하게 조는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광선은 저녁 습기에 젖어서 더욱 창백하였었다. 나는 무한한 자격(刺激)을 그 광선에 느끼다가 잠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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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과 같은 시각에 기상하였다. 나는 매일 조조(早朝)에 일어나서 비가아니 오는 날이면 반드시 C사 부근을 산보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었다. 시간은 대략 삼십 분이 걸리었었다. 삼십 분 시간을 돌아다니다가 C사에 돌아오면, 그때까지도 코 고는 소리가 방에서 들리었었다. 그때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의 절약하는 것이 그 사료(舍僚)들보다 어떠한 우월감을 자신에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책상에 앉아서 독서할 때에야 비로소 사료들이 기침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에도 뜰로 향한 빈지(雨戶) 문을 열고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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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넓지 못한 뜰이지마는, 두견화, 회목(檜木) 등을 심었었다. 왜 철쭉은 늦게 핀 붉은 꽃송이가 푸른 잎사귀에서 보였었다. 매우 시절에는 그렇게 자주 볼 수 없는 호천기(好天氣)이었었다. 파란 하늘에는 물같이 맑은 별 두셋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방 안에서 B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단장을 끌고 문밖으로 향하려 하였다. 뜰에서 바로 문밖으로 나아가려면 K 양의 사첩반 방을 지나야 하므로, 나는 K 양 방 앞 좁은 길로 들어갔다. 그때에 K 양은 벌써 일어나서 앞살창 미닫이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살에 면경을 비스듬히 놓고, 머리를 고쳐 쪽지는 중이었었다. 내가 창 앞에 당도 할 때에 K 양은 정면으로 나를 대하게 되었었다. 창살에 거울을 비켜놓고 보던 중이었으므로, K 양은 앞으로 흩트려 내렸던 머리를 뒤에 제 치며 빙긋빙긋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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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K 양을 볼 때에 그의 안색이 얼마만큼 초췌한 것을 알았다. 다른 것은 다 그렇게 현저(顯著)치 않다 하더라도, 눈이 까풀진 것이 괴로운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나는 그 살창문 앞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구와 책상도 다 정돈되어 있었다. 나보다도 일찍 일어난 것을 알았다. 나는 나의 몸을 뒤에 짚은 단장에 조금 의지한 채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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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보다도 일찍 일어났구려! 벌써 방 안 정돈까지 되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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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의복 입은 것을 고쳤다. 그는 가는(細[세]) 붉은 띠(オヒ)를 매었었다. 일어난 뒤태도를 창살에 비겨놓은 거울에 비추며, 맨 띠를 고쳤다. 그래서 그의 뒤태도가 나의 정면에 나타났었다. 그는 얼굴만을 돌리어 거울에 비춘 자기의 뒤태를 살피던 눈으로 가끔가끔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빙긋 웃었다. 나는 그 북슬북슬한 고운 선이 내린 K 양의 뒤태를 잠깐 여념 없이 바라보았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놀란 듯이 그 자리를 옮기려 할 때에 K 양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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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그 엷은 여름 옷 위로 가늘고 곱게 흘러내리는 곡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무슨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이 깜작 놀랄 만한 충동을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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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산보하시지요. 어제도 아침에 나가시는 것을 제가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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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산보하시는 것도 습관이 되니까, 안 하고는 못 견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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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매일 산보할랍니다. 좀 같이 가도 관계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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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대답하였으나, 나는 마음에 또 이상하다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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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르게 편지를 받는 데에도 다른 사람의 구설을 저어하는 K 양이 이 성과 매일 아침 산보를 청하는 것은 어제저녁의 그 K 양인 것처럼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에는 그가 매일 함께 산보하겠다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또 C사에 문젯거리가 생기나 보다 생각함에, 홀로 문밖으로 달 음질하며 나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함께 어깨를 견주어 사람 적은 둘의 아침 길을 걷는다고 생각함에, 그 발을 다시 멈추고, 다시 K 양이 "저는 그만두겠어요. 혼자 가시지요."란 말이 나올까를 저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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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띠를 바삐 매고 옷을 가다듬으며 현관으로 향하였다. 현관 앞에서 다시 K 양과 만나서 어깨를 가지런히 맞추어 행길로 나왔었다. 아직 이른 아침인 고로 길에도 그렇게 사람이 있지 않았다. 상점도 아직 가게 문을 열 지 않았었다. 공장에 가는 듯한 소년 둘이 도시락 그릇을 들고, 잠에 잠기어 보이는 눈을 부비며 우리 앞으로 지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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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의 즐비한 큰길을 바로 건너서 넓은 들로 가는 좁은 길로 들어갔었다. 길 좌우 언덕에는 밤이슬에 젖은 어린 잔디풀이 덮이었었다. 그 좁은 고요한 길을 걸으며 K 양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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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상쾌한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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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말고요! 아침잠을 포근하게 자는 것도 좋지마는, 아침에 일찍 얼어나서 산보하는 것도 참으로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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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씨가 C사에서는 제일 일찍 일어나시지요, 아마!" 하며,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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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될 수 있으면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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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웬일인지 C사에 온 뒤에는 저녁에 늦도록 잠도 못 자고, 그래도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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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하나 생겼으니까, 나는 제2 근면가가 되었소 그려. 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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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늦잠 자는 것이 일평생에 큰 손(損)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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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질문하는 어조로 물었다. 정녕 나의 말을 들어보려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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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아침에 단잠을 마음대로 자는 것이 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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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연설 구조(口調)로 설명하였었다.
141
"그것도 그럴듯하지오마는, 사람들이 항용 장수하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지 않는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의 잠자는 시간은 아무리 심장이 벌떡벌떡 뛰놀았다 할지라도, 의식이 없는 동안이 아닌가요? 그 무의식한 동안을 우리가 참으로 생명 있는 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요? 사람은 보통 여덟 시간만 수면하면 충분하다고 생리학자가 말하지 않는가요? 그러면 의식 없는 시간이 일일 이십사 시간의 삼분의 일이 아니요? 만일 우리가 여덟 시간 중에 한 시간을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난다 하면, 그만한 동안은 의식 있는 생을 얻지 않소? 일 년이면 삼백육십 시간, 인생 오십이라 하면 일만 팔천 시간이나 다른 사람보다 의식 있는 동안을 얻는 것이 아닌가요? 간단히 말하면 그만큼 생명을 연장함이 아닌가요……."
143
"만일 사람이 여덟 시간 휴식하여야 할 것을 일곱 시간이나 여섯 시간에 단 축하여 건강치 못하므로, 육십 살을 것을 오십에 죽는다 하면 도리어 손이 아닌가요……."
144
"그도 그렇지오마는, 사람이 반드시 여덟 시간 수면이라야만 장수 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지금 사람들 여덟 시간 수면하는가요? 다 이상의 수면을 탐합니다."
145
그와 같은 분명치 못한 논리로 K 양을 설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K 양 도나의 말을 그렇게 추궁치 않았었다.
146
우리는 이 말을 하는 동안에 그 좁은 길을 지나 들 가운데의 길에 나왔었다. 들 건너에는 무장평야(武臟平野)의 잡목림이 아침 안개를 통하여 거 무스 름하게 보였었다. 물이 가득가득하게 괴인 논은 혹은 둥글게, 혹은 길게, 혹은 모지게 여기저기에 거울처럼 번듯이 누워 보였다. 그리고 그 논과 논 사이 언덕은 늙은 사람의 괴로운 손등 심줄처럼 얽히어 보였었다.
147
K 양과 나는 길 곁 전신주 아래에서 아침 안개에 싸인 야경(野景)을 바라보고 섰었다. 우리가 서 있는 전신주 바로 앞에는 똘물이 맑게 흘렀었다.
148
맑게 흐르는 똘물은 서늘해 보였다. 그 물 가운데에는 고기 새끼가 헤엄 치며 다니었었다.
149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섰던 K 양은 바로 발밑에서 헤엄치는 고 기 떼를 보고, "웃 ─ 웃."손바닥을 치며 몰았다. "저것 한 마리 잡았으면……."하더니, 흙덩이를 주워 던지었다. 나는 다시 귀여운 소녀처럼 생각 하였다. 역시 무사기한 소녀라 하였다. 그렇게 떠드는 소리에 고 기 떼들은 어느 틈에 덤불 밑에 그 몸을 숨겨버렸다.
150
K 양은 다시 무엇을 찾는 듯이 이리저리 똘물을 따라 다니다가 "다 숨었다……."고 하며, 다시 나의 곁으로 왔었다. "엇 ─ 어 ─ 엇."소리에 나왔던 고기는 다시 덤불 속에로 도망갔었다.
151
"고기를 보려거든 가만히 두고 보구려!"
152
"고기도 참 영리해요. 못난 사람보다도 눈치가 빨라!"
153
"생각해보오. 보고 알진대, 그것은 눈치가 아니라 본능적이요! 살려는 본능이 라우!"
154
이라 말하면서도, K 양의 그 고기를 영리하다 칭찬하는 의미가 극히 엷은 여자의 공통한 센티멘털한 기분이라 함에, 나의 기분이 도리어 무의미한 것을 알았다.
155
아침 안개는 점점 거두어져갔다. 들 건너 잡목림도 그 정체가 분명히 보였다. 동편 한울의 붉은빛이 차차 엷어갈수록 연하(煙霞)의 장막 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나타났었다. 인가의 지붕의 이슬은 아침볕을 받아서 반짝거리어 보였다. 노방의 풀잎에서는 물방울이 구슬처럼 떨어지며 구르는 것이 보였다. 무장평야의 서편에 푸른 연산의 고저부제(高低不齊)한 선이 하늘에 닿 았었다. 그리고 그 머리에 백설의 관을 쓴 듯한 후지산도 우두커니 서서 그 웅장한 것을 보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157
K 양은 나의 손가락질하는 곳을 따라서 한참 보다가,
158
"네! 저것이에요? 아이고, 높기도 하지요! 아이고, 눈이 하얀걸요. 저 푸른 산들은 다 후지산 앞에 있는 산들이지요!"
159
"그 연산 뒤에서 후지산이 넘어다보는 것 같구려!"
160
K 양은 곧 후지산 노래를 흥겹게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침 고요한 들에 간수( 澗水) 처럼 맑고 가는 소리가 흐를 때에, 나는 잠깐 실신할 만큼 그것에 주의 하였었다. 나는 그의 발그스름한 뺨에 키스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무사 기한 천진이란 것이 항상 나의 경건한 마음을 일으키는 동시에, 그의 따뜻한 심장의 고동을 항상 나의 귀 곁에 두고 싶었다. 어젯밤의 연서 문 제 로나에게 적지 않은 쇼크를 준 K 양이 오늘 아침에 모든 아양으로 거기다 더불을 붙인다 생각함에, 나는 어떠한 알 수 없는 운명의 손에 붙들리어 다시 나올 수 없는 구렁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래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161
'나의 현실을 어떻게 하라고? 이성에 하소하여보라.’는 말이 문득 귀에 울리어 왔었다. 똘물의 고기를 쫓고, 후지산을 보고, 후지산 노래를 부른 그 천진인 K 양에게 내가 어떠한 집착을 느끼는 것이, 또는 동경을 가지는것이 도리어 불순한 나의 감정이라 하면서도, 그 불순한 감정을 나의 자신이 부인할 수 없었다.
162
아침볕은 동편 수풀 속에서 명랑한 빛을 한없이 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천천히 움직이었다. K 양도 나의 뒤를 따라오면서 좌우를 면잠( 眄暫) 하였었다. 좌우의 모든 것에 끌리어"아!", "아!"의 감탄사를 연발 하였었다. 나는 어느 때에는 K 양과 어깨를 가지런히도 하고, 또는 앞에도 뒤에도 서서 다시 좁은 길로 들어서 C사로 돌아왔었다.
163
C사 여러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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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서도 K 양과 산보한 것을 다른 사람이 색안경으로 바라볼까 하는 것을 저어했었다. 전일의 산보는 무미건조한 산보 이었었다. K 양과 함께한 산책이 나에게는 무슨 긴장한 의미의 시간이었다. 홀로의 산보에는 고독을 무한히 느끼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 고독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구하려 하였었다. 후지산, 무장평야, 잡목 림이다 고독의 대상이었지마는, K 양과 걸은 그 순간에는 환희의 대상처럼 생각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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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양은 자기 방에 들어가며 콧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가끔 가끔 그 찬송가에 귀를 기울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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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눈을 부비며 일어나며 큰기침을 하며 마루에 나아가서 담을 뱉었다.C 사 안이 다시 시끄러워졌었다. 그러나 나와 K가 아침 일찍 산보한 줄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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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며칠 동안은 다행히 천기가 좋아서 K 양과 늘 함께 산보함을 얻었었다. 그러나 처음에 산보하는 그날과 같은 위안은 없었다. C사 내에 일어난 일을 서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극히 단순한 가운데에서도 알 수 없는 긴장한 기분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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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에 우리들은 산보하는 방향을 바꾸어 신사(神社) 내에 갔었다. 신사 내는 극히 한적했었다. 신궁 앞에 늘어선 석등롱(石燈籠) 사 잇길로 그 신궁 뒤에 갔었다. 그곳은 음침하기가 백주에도 야차가 뛰어나올 듯 하였다. 큰 삼목(杉木) 밑에는 아이들 완구 같은 신전이 있었고, 그 앞에는 분향한 재(灰)가 소복하게 되었다. K 양은 나의 뒤를 따라오다가 "아이고, 무서워요!"라고 부르짖었다.
170
나는 그 어두컴컴한 삼림 속에서 조금 광명한 곳을 향하여 나왔었다. 조 금광명한 신사 곁에는 인조산(人造山)이 있었다. 그것은 후지산의 모형 이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길을 고불퉁고불퉁하게 만들어놓고, 그 구부러진 모퉁이마다 조그마한 석비(石碑)를 세워 이합목(二合木)이니 삽 합목( 三合木) 이니, 내지 팔합목(八合木)까지 표시하여 놓았었다. 석괴(石塊)로 쌓아 올린 간극( 間隙)에는 두견화, 회목(檜木), 황양목(黃楊木) 등을 심었었다. 나는 K 양과 인조 후지산의 등산을 시(試)하였었다. K 양은 그 고불퉁한 길로 올라오는 동안 숨이 찼던지,
173
"아침 산보에 후지산 등산! 아! 우리가 어느 소인국에 온 것 같소그려!"
174
참으로 후지산일 것 같으면, 그 분화구 근처에 넓은 들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돌에 걸터앉아서 십주(十州)를 부감(俯瞰)하려는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목의 그늘은 우리의 머리를 덮었었다. 신사의 지붕도 쳐다보았다. 후지산정에서 환멸의 비애를 잠깐 느끼었다.
175
K 양도 아무 말 없이 바위에 걸터앉았다. 나도 그리하였었다. K 양은 한참 우두커니 무엇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말을 내었다.
176
"S 씨! 세상이 왜 이렇게 야속하고 불공평한가요?"
177
나는 '이 소녀의 감상주의가 또 나왔군!’ 이라 생각하였다.
179
"그렇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물질의 만족을 얻어서 의기가 양 양 한 데요. 저 같은 사람은 남의 밥 먹고 지내니……."
180
나는 생각하였다. 단테의 말과 같이, 남의 빵을 먹고 남의 섬돌을 밟는 것처럼 고통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완미할 때애, K 양의 고민도 상당하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고통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아니 될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을 느낀 것은 벌써 나의 사오 년 전이라 생각 함에, 사람으로서 양심이 그래도 한편에 있던 그때가 반갑게 생각났었다. 그리고 K 양의 금일 고통은 아직 고통의 서론(緖論)이라 하였다.
181
"여보! 당신이나 나의 지금 형편은 그래도 행복스럽다고 생각하오. 우리들은 그래도 남의 것이 되었든지 제 것이 되었든지, 먹고 입을 것이 있고, 그 위에 장래를 위하여 동경까지 유학한다 하지 않소? 아침도 못먹고 배를 지금 집어 뜯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가를 생각해보구려!"
182
나는 이와 같은 말을 하는 동안 나의 어조는 벌써 연설체가 되었고, 소리도 비교적 높았었다. 나는 나의 소리에 놀라 좌우를 돌아보다가 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하였다.
183
"당신이나 나나 그 사람들에게 비하면 행복이라 해서, 그것에 만족한다는말은 물론 아니지요. 우리들은 물질 외의 정신의 고통이 더욱 많을 줄 믿습니다. K 씨가 지금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하셨지요? 우리는 왜란 것을 확실히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될까요? 당신도 지금 당신 댁에서 학비를 내기가 넉넉하다 할 것 같으면, 혹은 이 세상에 아무 불공평한 것이 없는것처럼 생각할는지 알 수 없소마는, 그러한 처지에 있을 수 없는 우리들은 역시 불평이 없을 수가 없지요……."
184
K 양은 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의심의 눈을 깜박 거리고 있었다.
185
"왜 우리는 부모의 것을 제 것처럼 생각합니까? 가령 자기 집에서 부모나 형제가 학비를 보낸다 하면, 그것은 의례히 받을 것처럼 생각합니까? 그리고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가요? 부모도 생리상으로 볼 것 같으면 남이지요. 아비의 목을 베었다고 자식이 죽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한 부모가 죽을힘을 다하여 모은 재산이라도 자기 것처럼 생각한 것은 웬 까닭 일까 요? 그것은 다만 우리 사회생활의 인습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 것이지 요. 우리가 남인 부모의 것을 자기 것처럼 의례히 부조를 받을 것처럼 생각 하는 것같이 더 한 껍질을 벗어버리고, 세계가 다 부모 형제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우리가 지금 남의 밥을 먹는다는 것이 그렇게 치욕 될 것이 무언가요? 그리고 세계 물건이 저의 것이란 것이 어디 있겠소? 세상 사람들이 저의 소유가 영원한 저의 것처럼 생각하지마는, 우리는 공수로 와서 공 수로 가지 않습니까? 누가 자기의 재산을 극락이나 지옥으로 가지고 갔다는 사람이 있소?"
187
"그러면 왜 가난한 사람이니 부자이니 합니까? 그래도 제 것, 남의 것이 있으니까 그러할 것 아니에요?"
188
"옳소. 그러나 제 것, 남의 것이란 구별이 본래부터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사람이 제 것을 내고, 남의 것을 만든 데에서 그러한 빈부가 생겼지요."
189
나의 말의 요령을 K 양이 오해한 것을 알았다. K 양은 나의 의견이 "세상의 자기 것이란 것도 없으니,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면 부한 대로 그저 원망할 것 없이 불공평을 부르짖을 것 없이 지내가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 하였었던 것이다. 나의 의견이 본지와 K 양의 어린 의사로 해석한 것에는 꽤 경정(俓程)과 착오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해석하였다. 듣기 쉬운 말로,
190
"지금 말한 것은 우리가 이 사회에 대하여서 불평이 없다는 말이 아니지요. 물론 불평은 크게 있지요. 다 같은 사람으로 어떠한 사람은 자자손손 이 부귀와 영화로 사는데, 어떠한 사람은 대대로 가난에 빠져서 천역(賤役) 을 하게 되는가요. 이것이 사람이 힘으로 이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까닭이라는 말이오. 그러니까 제 것이니 남의 것이니 말하는 것도 사람 제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것이란 말이오.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사람이 다 같이 먹고살게 되었다 할 것 같으면, 배불러 괴로워하는 사람과 주리어 죽는 사람의 구별이 있을 리가 있소……."
191
문제가 하도 복잡에 들어가려 할 때에 나는 화제를 돌리려 하였었다. 왜? 그것은 K 양처럼 일시의 감정이나 자극으로 추상적 불평을 규호( 叫呼) 하는 어린 머리에는 사회주의의 이론이나 그 실제의 행동이 이해될 수 없으므로, 그저 간단하게 빈부가 생긴 것을 말하였다.
192
"그리고 왜? 가난과 부가 있는가 하였지요? 세상모르는 도덕군자들은 저만 부지런하면 부자가 된다 하였지마는, 그것은 태고 세상에나 적용할 말이지요. 쉽게 말하면 삼인에게 쌀 서 말이 있어야 한 달을 지내여 간다고 합 세다. 그리고 서 말밖에 또다시 없다 합세다. 이러할 때에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쌀을 두 말 닷 되나 차지하였다 합시다. 그러면 나머지 닷 되로 두 사람이 한 달을 지내자면 좀 곤란하겠소? 쉽게 말하자면 두 말 닷 되 차지한 사람은 부자요, 닷 되를 차지한 두 사람은 가난뱅이였지요. 세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지내려면 두 말 닷 되 차지한 사람이 과분의 점령한 것을 온순하게 내어놓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만 닷 되 차지한 두 사람이 죽어가 면서라도 배고픈 것을 참어야 할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곤란을 참다 못 하여 닷 되 차지한 두 사람이 단결하여 가지고, 두 말 닷 되 차지한 사람에게 덤비겠지요. 그때에 일어나는 것은 좀 쉽게 말하면 경제 혁명이라 하겠지요. 물론 경제 혁명이니 사회 혁명을 이와 같이 단순한 예로 말할 수 없 소마는, 대강은 그러한 것이란 말이요……." 라고 간단히 말을 마치며, 나는 다시
197
이와 같이 말하는 동안 해가 벌써 동편에 높게 떠올라 왔었다.
198
K 양과 나는 바쁜 걸음으로 사로 돌아갔었다. 이야기하는 동안에 시간이 좀 늦어서 사생들도 벌써 다 일어났었다. 우물가에서 세수하는 사람, 자리를 치우는 사람, 마루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다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K 양과 산보한 것을 사생을 다 알았다.
201
하는 어조는 그 가운데에 구슬리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202
연서를 투입한 C는 그날 아침부터 나에게 질투의 눈을 던졌었다. 그리고 나를 한 연적처럼 생각하는 것인지 나에 대한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었다. 나는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인제는 C사에 참으로 문젯거리가 되는가 생각 하였었다.
204
C사에 내에서는 나와 K 양의 문제가 중심이 되기 전에, C사에 침입자가 있었다. C사는 학생의 합숙소이므로 남녀 학생의 내객이 많았다. 일요일이나 기타 휴일이 되면, 점심밥을 두어 번 짓는 때가 있었다.
205
어떠한 일요일에 오랫동안 K 양을 감독하다시피 한 S 양이 왔었다. K 양은 S 양을 "언니"라고 불렀고, S 양은 K 양을 자기의 동생처럼 사랑 하였었다. 그래서 언어에도'─ 해라’를 깍듯이 꿰어 붙이었다. K 양의 소개로 S 양과 나도 알게 되었었다. S 양은 그날 저녁밥을 우리와 함께 마치고 갔었다. 어째든 S 양의 그 남성스러운 듯한 행동이 나에게 비교적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었다. 그래서 S 양이 돌아간 뒤에도 가끔 K 양에게 S 양의 동정을 물었었다. 어떠한 때에는 K 양이 내가 말하기도 전에, S 양의 말을 가끔 내었었다. 그러할 때에는 나는 '이 소녀가 나의 생각을 오해하는군! 맹랑 한 걸!’이런 속에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체하며 K 양의 말을 들었었다.
206
이 S 양이 오던 그날에 K 양과 동향인 R이 왔었다. R은 아주 수재였었다. 나이 이십도 못 되었으나, 모든 것이 삼십이나 된 것처럼 조달(早達) 되었었다. 그리고 음악의 천재가 있어서 그렇게 공부한 적 없이도 항용 음악의 소양이 있는 음악 청년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었다. 그래서 모이는 동반( 同伴) 들에게 독창으로 귀여움을 받았었다. 그리고 문예에도 많은 취미를 가져서 시를 논하기도 하고, 소설을 평하기도 하였다.
207
그 일요일에도 여럿이 모여서 R 군에게 독창을 청하였다. R 군은 그 청아한 소리로 유행하는 창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B 군의 트림 소리와 비 음악적인 창가 소리에 귀를 가리던 사생들도 R 군의 소리에는 턱을 디밀고 귀를 기울였다. 그 창가를 듣는 중에 가장 동경을 가진 이는 K 양이었었다. K 양은 자주자주 독창을 청하였었다. 그리고 지필을 가지고 와서 그 악보와 가사의 기록을 R에게 청하기도 하였다. R은 K 양 한 사람을 대수(對手)를 삼은 것처럼 열심으로 부르기도 하고, 악보와 가사를 종이에 기록 하여 주기도 하였었다.
208
이러하는 동안에 흥미를 잃은 사생들은 각기 방으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R 과 K 양이 마루에 남아 앉아서 재미스럽게 속살거리고 있었다. B와 C는 눈을 흘 기어 보면서
209
"아주 창가소리에 흥 나 있는걸! 아주 정신이 빠졌는걸!"
211
나 역시 조금 불유쾌한 생각이 났었다. 그러나 나는 것을 극력으로 취소하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그 반면의 질시를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 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R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여자에게는 너무 달게 한다는 것이 R에게 대한 마음으로 비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의 그 이성에 대하여 얼굴이나 좀 반도구하하고 특수한 기교나 있으면 곧 홀리는 것을 속에서는 적지 않게 경멸하였었다. 그리고 K 양도 그러한 유형의 여성이라 생각하였다. 범사가 소극적인 나는 그때를 기회로 C사 화제의 중심에서 모든 질의의 초점에서 벗어나고도 싶었다.
212
그래서 나는 마음에는 그 여자가 나에게서 멀어질까를 두려워하며, 또는 모처럼 오늘까지의 호감을 서로 저버리는 것을 아까워하면서도, 하루라도 속히 문제의 중심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기뻐하였다. 사실 그만큼 비겁하였었다. 그것은 나의 현실이 그것을 이성적으로 판단케 한 까닭이었다.
213
그 뒤에 R은 자기의 있는 숙소가 불합(不合)하다고 C사에 잠깐 유숙 하기를 청 하였었다. 그것을 거절할 수 없어 서로 불평을 머금으면서도 같이 있게 되었다. C군의 반감의 중심은 그날부터 나에게서 옮기었었다. C는 나를 전일보다도 더 존경하였었다. 나는 혼자 웃었다.
214
R은 며칠 뒤에 바이올린을 사 가지고 왔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뜯고 있었다. K 양은 흔히 바이올린 앞에서 합창을 하며 지껄이고 날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었다.
215
K 양과 R 사이는 누가 보든지 이상하다 할 만큼 친압(親押)하였었다. 이러한 때에 제삼자로 축복하여야 할 것이지만은, 그러한 이해를 갖지못한 C 사 사람들은 K 양과 R 양인을 아주 권외에다 내놓았었다. C는 바이올린 소리 만나면 일기가 그렇게 더운 데에도 오호(襖戶)를 소리가 나도록 닫고 들어갔었다.
216
"아이, 또 바이올린 소리! 공부를 좀 해야지!"
219
하는 소리가 사생들의 공론(公論)이었었다.
220
어째든 R이 들어온 뒤에 사내의 공기가 험악하여졌었다. R은 눈치를 차리면서도 더욱 사생들에게 질투의 불꽃을 일으키었었다. 그는 더욱 K 양을 가까이 했었다. 그러나 어린 K 양은 그러한 눈치를 차리지 못한 것 같았었다. 만일 차렸다 할 것 같으면 사람의 구설을 저어하는 K 양은 반드시 조심하는 거동이 보였을 것이다.
221
결국 R과 K 양의 말이 B의 입으로 발표되었다.
222
B는 분개한 태도로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비 오는 날 아침이었다.
223
"S 씨! 이 사내의 풍기가 문란해서 안 되겠소."
224
나는 B의 흥분한 태도를 아니 웃을 수 없었다.
226
B는 큰 죄악이나 발견한 듯이 두서없는 말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
227
B가 그날 아침에 변소에 갔다 와서 아직 잠이 들지 않았었다. 그때에 K 양 이 나와서 모기장 밖에서 R 군을 깨웠다.
228
R 군은 K 양의 깨움에 눈을 떠보고, 모기장 밖에 손을 뻗쳐서 K 양의 손을 쥐었다. K 양은 손을 쥐인 채로 R 군의 일어남을 권하였다. R 군이 일어나서 K 양과 문밖으로 나갔다 하는 의미였었다.
229
나는 그 안날 저녁에 R 군이 K 양에게 내일 조조에 일이 있으니 좀 일찍 깨워 달라고 청하는 것을 들었으므로, K 양이 와서 깨어준 것이 그렇게 괴이한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는 까닭에 예상(例常) 으로 대답하였다.
230
"좀 일찍 깨어주었다고 그것이 풍기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요?"
231
그러나 깨는 K 양의 손을 쥐었다는 것과 손을 쥐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는데에는 조금 불쾌하였으나, 내가 벌써 C사의 화제 중심에서 벗어난 이상에는 그것을 질투한다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었다.
232
"S 씨도 문학가라 다르시구려! 공동생활 하는 데에 와서 그렇게 방 약 무인( 傍若無人) 한 행동을 하는 데에도 연애는 자유라고 용서하십니까?"
233
이 문학가란 명칭은 C가 나를 구슬릴 때에나, 혹은 나를 자기의 친구에게 소개 할 때에 쓰던 말이었었다. 나는 그 말을 그렇게 대응하려고 아니하였으나, B의 그 내면의 야심을 짐작하는 까닭에 '여보! 남 좋아하는데 그렇게 시기할 것 무엇 있소? 손을 잡거니 입을 맞추거니, 저들이 좋아서 하는 것을!’ 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 C사의 평화가 일개 이성으로 말미암아 허물 어진 것을 아니 아까워할 수 없으므로,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있었다. B 는 입을 달달 떨면서,
234
"R 군으로 말하면 연애 전문 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자기 처소도 아닌데 억지로 들어와서 흑작질을 하니……. 미안하지오만, 제일 친분이 있는 S 씨가 다른 데로 옮기라고 말씀하여주시오."
237
"당신 말도 옳소. 며칠 아니 되면 하기 휴업도 될 터이니,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오? 그러나 R 군에게 대하여 사생 제군의 의견이라고 말은 하여 보지요."
238
나는 그때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239
이 말이 사내에 터지자, 가장 호인인 P까지 그른 사람을 경멸하는 눈으로 대하였었다. 나는 K 양에 대한 감정에 이것을 기회로 삼아 불순한 것을 벗어 버리려고 애를 썼었다. 어떻게 고뇌하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질투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바로 그것에 가까운 감정의 눈으로 항상 R 군을 대하게 되었었다. 우정을 믿고 K 양과 나의 사이가 어떠한 것을 모르는 R 군은 사내의 배척이 자기에게 핍박할수록, 그는 나를 의뢰하려고 하였었다. 참으로 나에게 우정의 순결이 없었다면, R 군을 적으로 삼고 나는 C사 여러 어린이와 그 규(揆)를 한결같이 하였을 것이다.
240
이러하는 동안에는 물론 K 양과 산보하는 것도 중단되었었다. 그리고 어린 K 양이 남자 있는 데에 들어와서 여러 사람의 설두(舌頭)에 얹혀 지내는 것이 다만 그 물질의 관계라고 생각할 때에 더욱 미안하였었다. 그리고 C 와 의연서 사건이 있을 때에 귀국하려는 것을 만류한 것이 나의 책임처럼 생각 함에, 그때에 K 양의 말한 대로 그이의 자유에 맡기지 않은 것을 후회 하였었다. 그러나 할 수 없다 하였다. 더욱 미안한 것은 K 양은 사생들이 자기에게 직접으로 매도하는 언사를 던지지 않는다고 그러한 눈치도 차리지 못하고, R의 창가나 바이올린에 덤비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K 양에게 좀 주의하여주려고 틈을 기다렸었다.
242
아무 눈치를 차리지 못하는 K 양에게 그러한 충고를 드릴 틈은 역시 아침 산보를 부활시키는 수밖에 다른 방편이 없었다.
243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K 양의 방 창살 앞으로 단장을 끌고 갔었다.
245
"K 시! 산보 안 가려우?"불렀었다.
246
K 양은 일어난 지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지 못했던지, 그는 침구도 아직 아니 치우고 우두커니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던 것이었다. 나의 말에 깜짝 놀라
247
"벌써 일어나셨어요? 이 동안에는 왜 산보도 데리고 가시지 않으셨어요?"
248
하고, 방긋 웃으며 흩어진 머리털을 뒤로 짜지었다.
250
"글쎄요. 자연 그렇게 되었소. 오늘부터 갑시다."
251
나는 마음에 부끄러워하였다. 그동안에 계속하던 산보를 그에게 권치 않은것은 C사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을 저어한 것도 사실이었지마는, R 군에 대한 감정적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252
그래서 K 양은 전일과 같이 나의 뒤를 따라 나왔었다. 그날에는 전일에 다니던 바와는 반대 방향으로 갔었다. 보리가 아직도 누런 밭을 건너서 기차 선로를 따라 한참 걸어갔었다.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갈 때에 저편에서 기적 소리가 들리며 레일이 들들 울리며 기차가 왔었다. K 양과 나는 선로에서도 두어 칸이나 떨어져 있는 언덕 밑에서 달려가는 기차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차륜(車輪)의 구르는 소리와 연기 토하는 소리에 고요한 시각을 여지 없이 흩트려버렸다. 기차가 다 지나간 뒤에 K 양과 나는 다시 선로로 올라갔었다. 기차가 지나간 뒤에는 검은 연기가 길게 떠 있었다.
254
"S 씨! 아까 가는 기차 밑으로 들어가면 죽겠지요?"
256
"나는 어떠한 때에는 그런 것을 생각하여요. 둘둘 굴러가는 기차 밑으로 들어가 죽었으면 하는……."
257
나는 이 K 양이 또 소녀답다는 말을 한다 하면서도, 나의 어떠한 때의 공상한 것을 생각하였었다.
258
'내가 저 굴러가는 기차 밑으로 들어가 무거운 차체를 실은 수레바퀴 가나의 팔다리, 또는 배, 가슴 위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하자. 수레바퀴가 처음에로 나의 몸에 닿아서 신경을 자격하는 순간에는 나는 그래도 아픈 것을 감각하 렷 다. 그것이 번개처럼 지나간 뒤에는 나의 전신에 물결치던 피는 침목, 사자(砂磁) 레일 등을 발갛게 물들이렷다. 그리고 팔과 다리, 머리와 가슴, 배와 등이 여기저기 흩어지렷다. 그날 신문에는 철도 자살……. 모든 사람들이 나의 유서를 찾느라고 황망할 것이다. 그리고 내의 친구들은 나의 자살에 대하여 포폄(褒貶)이 불일(不一)할 것이었다. 가장 나의 신뢰 하는 벗 Y 와 P 들은 나의 유고 수집에 땀을 흘리렷다…….’ 라고 상상한 일이 가끔 있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할 때에 소녀인 K 양이라고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은 없는 것처럼 생각한 것은 자가당착이라 하였다. 그래서 웃으면서 말하였다.
259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소그려."
260
"있고말고요. 하도 갑갑하면 그런 생각까지 하여요……."
261
"당신도 그렇게 갑갑할 때가 있소그려?"
262
"있고말고요. 갑갑한 말을 다 어찌하여요?"
264
"제가 어데 죽어보았는가요? 그렇지만 언젠지 죽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265
"그것은 그러할 것이 아니요. 생물은 생활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266
이러한 말을 하는 동안에 우리 C사의 지붕이 보리밭 위로 뾰족이 내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언덕에는 잔디가 앉기 좋게 덮인 곳이 보였다. 나는 그 리로 걸어갔었다. K 양도 잔디 있는 데로 왔다.
267
나는 무엇이라 말을 낼까 한참 생각 하다가,
268
"여보! 당신이 무슨 일이든지 서로 통정할 만하다고 나를 생각한 까닭에, C 의 연서 사건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나를 신용한 까닭에……."
269
말하였더니, K 양은 나의 정색에 이상한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가,
271
"이 말을 하면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알 수 없지마는, R 군에 대하여 당신의 태도가 어떠한 것을 자기들의 일이지마는 모르겠지요."
272
K 양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273
"별로 다른 것이 없지요. 다른 남자에 대하는 것과……."
274
"그렇지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는지요. R 군과 당신 문제로 사생들이 떠드는 것을 알지요?"
275
"사생들이 무엇이라 하여요? 아이고! 참, 어찌 그렇게 말이 많은가요? 그렇게 볼 것이 무엇이에요?"
276
"보고 아니 보는 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이니까 관계없지요마는, 나는 R 군의 과거를 생각하고 K 양도 다만 한 유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염려 하는 까닭에 말이요!"
277
말을 하고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였다 후회하였다. R의 벗인 내가 그의 과거를 여성에게 고하여 그의 장래를 경고하였다는 것은 아무리 무사 려( 無思慮) 하고 말았다 할지라도, 여성에게 나의 비열(卑劣)을 보였다는 것이라 생각 할 때에 될 수 있으면 나는 그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취소할 수 없다 생각 함에 나는 그 자리에서 달음질하여 R에게 미안한 것을 사과하고 싶었다. 나는 한참 우두커니 앉았다가,
281
부르는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282
K 양의 그렇게 그 추레한 태도는 전일에는 보지 못하였다. 나는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무슨 말로 위로하여서라도 그 쾌활하고 무사기한 태도를 다시 보고 싶었다.
283
K 양은 머리를 수그린 채로 말하였다.
284
"S 씨도 제가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십니까?"
285
"내가 당신을 어떤 여자라구요? 가령 당신이 남성과 그러한 연애를 한다고 내가 그것을 어떻다 하겠소? 나는 다만 당신의 장래를 생각하고, 또는 C 사의 여러 문제를 생각하는 까닭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286
"만일 S 씨도 저와 R 씨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저는 참으로 슬퍼요."
287
"글세, 내 말을 모르는구려! B 군이 말합디다그려. 어제 아침에는 당신이 와서 모기장에 손을 넣어서 R과 악수하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고 사생들이 떠들기에 하는 말이지요……."
288
K 양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리고 천천히 걸어왔었다.
289
"나는 다만 R 군이 C사에 온 뒤로 사생들이 떠들기로, 하도 미안하여 잠깐 하는 말이오. 만일 나도 다른 사생처럼 당신을 생각한다면, 안 듣는데서 욕설이나 비방하였으면 그만이지요. 이와 같은 주의를 할 것이 무엇 있겠소?"
290
"저는 참으로 S 씨를 믿어요. 누가 저의 사정 알아줄 이가 있어야지요.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잘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용서해주세요."
291
나는 이때에 양심에 여러 번 물어보고, 또는 장래에 대한 여러 가지의 보장을 헤아려본 뒤에 용기를 내어
292
"나는 당신을 누이동생이나 다름없이 여기니 말이지, 남자란 것은 여성에 대하여 모두 악마라고만 생각하면 큰 실패는 없을 것이오. S! 나도 악마인지 알 수 없소. 당신과 같은 아무 경험 없는 처녀들은 극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294
나는 나의 주장인 연애는 운명이란 생각과는 저어되는 말이라 깨달을 때에, 나는 나의 무책임한 설교하는 것 같은 태도를 스스로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나의 욕망의 한구석에 숨겨 있던 K 양의 마음을 어디까지든지 나의 마음에 품어두고자 하는 마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예사로 설명 하게 한 것이었다.
295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사에 돌아왔었다.
296
그날부터 K 양은 R 군이 독창이나 바이올린을 하여도 나오지 않고, 자기 방에서 옹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나는 소녀의 아름다운 동경의 꿈을 깨우친 것을 후회하였었다. R 군도 며칠 뒤에 다른 하숙으로 옮겨 갔었다.
298
더위는 날마다 더하여 왔었다. 매우도 개어서 불볕이 호득호득 나는 날도 많았다. 사생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휴학되는 날을 기다렸었다. P는 가끔 정 강이를 눌러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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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보세요. 각기(脚氣)가 들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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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었다. 과연 손가락조차 한참 동안 움푹 들어간 채 그대로 있었다.
301
그러면 B도 힘껏 그의 다리를 누르며,
304
자세히 보면 그것은 손가락으로 너무 눌러서 혈관이 압축되어 피부가 하얀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한편 무릎 위에 한 다리를 걸쳐놓고, 손바닥을 넓게 펴 가지고 도로 그들의 무릎을 살짝 쳐서 근육의 반사를 시험 하여주었었다. 사생 그들은 가끔가끔 진찰을 청하였다. 이것은 선 병자( 先病者) 인 내가 먼저 각기를 앓은 까닭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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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갈수록 그들은 귀국의 날을 기다렸었다. 그들 중에는 벌써 귀국 할 여비를 자기 집에 청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여름 한철에 귀국 하는 것이 일 년 중에 큰 행사이었었다. 귀국할 즈음이 되면 모자를 사느니, 구두를 맞추느니, 하복을 맞추느니, 가방을 사느니 하여 부지런히 시가 출입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C사에서도 벌써 귀국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K 는 벌써 하복을 맞추었고, B도 흰 구두를 맞추었었다. 그때에 나는 본국에 강연 여행을 계획한 까닭에 원고 작성에 골몰하였었다.
306
칠월이 가까운 날이었다. 나는 상의를 벗고, 잠방이(사루마다)만 입은 채로 강연 원고를 쓸 때에 K 양이 빙긋 웃고 들어왔었다. 나는 바삐 유카타( 浴衣) 를 어깨에 걸치며 일어났었다.
307
K 양은 양봉투(洋封套)를 한 장 내주며,
310
나는 그것이 양봉투인 줄만 알고, 받아 들고 표면과 이면을 살펴보았으나, 흰 봉투 그대로요, 아무것도 기록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꽉 투(套)한 것과 봉투 배가 조금 불쑥한 것으로 보면, 그 가운데에 무엇이 들은 것은 짐작 할수 있었다.
313
나는 다시 안팎을 두루 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하였다.
314
"이것이 웬 것이오? 알 수 없는걸……."
315
B와 P가 나와 K 양의 문답에 호기(好奇)의 눈을 뜨고,
318
나는 한참 자세히 보았다. 눈을 가까이 대어야 보일 만하게 H라 써 있었다. 내가 그 H 두자(頭字)를 자세히 굽어볼 때에 K 양이 빙긋빙긋 하면서,
321
"왜 모르세요? H 성에 S 씨 아는 분이 몇 분이나 되세요?"
322
나는 H 두자의 성을 가진 사람으로 아는 이는 가장 적었었다. 일전에 C 사에 왔던 S 양도 두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일 첫번에 생각나는 대로
326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백지인 양봉투가S에게서 온 것인 줄을 알았다.
327
나는 어쩐지 가슴에 조금 이상한 뜀을 느끼었다. 괴상하다 하였다. S 양 이나에게 편지? 처음 본 나에게……. 참으로 괴상하다 하였다.
331
B 군은 무슨 사건이나 생긴 듯이 "아! 한턱하시구려. 여학생에게 레터가 왔으니……."
332
나는 그 봉투 뜯기를 매우 주저하였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서어서 하는 듯도 하였다. 나는 큰 비밀을 사람의 앞에서 공개하는 듯한 생각을 가지고, 그 피봉(皮封)을 뜯었었다. 뜯는 나의 손은 조금 떨리었었다. 무슨 큰 비밀을 기다리는 것같이 B와 P는 곁에서 나의 손을 지키고 섰었다.
333
그 봉투 속에서는 붉은 종잇조각 하나와 흰 종잇조각 하나가 나왔었다. 붉은 종이는 어느 부인 문제 강연회의 프로그램이오, 흰 종이는 활동사진 광고의 인쇄물이었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었다. B라든지 P도 허허 웃었다.
337
붉은 종이와 흰 종이를 B는 곧 해석하려고 자기 일처럼 애를 썼었다. 이 것이 잠깐 동안 C사에 한 숙제가 되었었다. 그래서 제각각 의견껏 해석 하였다.
338
"부인 강연회에서 만나자는 말이오, 붉은 종이는."
339
"그리고 활동사진 광고는 함께 활동사진 구경 가자는 말이오."
340
하는 온갖 우스운 해석을 하여 가지고, 나를 놀려보는 터이었다.
341
나도 그 문제 해석에는 남모르게 머리를 썼었다. 결국은 '이것은 희롱에 지나지 못한다, 장난이다.’ 해석하고는, 나는 바로 화봉투(和封套)에 S 양의 성명과 나의 성명, 즉 수신인과 발신인을 분명히 기록하고,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인쇄도 않고, 쓰지도 아니 한 적지(赤紙)와 백지(白紙)를 넣어 K 양에게 주었었다.
342
이것이 또 C사의 문제가 되었었다. B는 가끔
343
"S 씨! S 양이 당신과 연애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한턱하시오."
345
이러한 구슬리는 말을 K 양이 들을 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고적한 표정이 나타났었다.
347
"S 양이 비관한다 하더라고 전해달라 하여요."
349
나는 S 양의 모든 것이 장난이 아니면, K 양의 날조라고 믿는 까닭에 고 소로만 그 말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350
K 양의 나에게 대한 태도는 날마다 신뢰를 더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나에게 상의하였었다. 그러나 가끔가끔 S 양이 이리이리 하더라고 말을 전하고는,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분명히 나의 눈에 보였었다.
351
C사는 다시 온미(溫味)가 났었다. 그러한 지 사오 일 뒤에 나는 C사생 여럿의 송별을 받아서 동경 역을 떠났었다. 나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나에게로 습래(襲來)하는 운명을 밀어 물리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K 양을 그 인심이 불온한 C사에 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었었다. 그리고 어떠한 재미스러운 꿈에서 깬 듯한 섭섭함을 느끼었었다. 귀국하는 차에서아! 나는 「연(戀)의 서곡(序曲)」을 들었다 부르짖었었다. 기차는 점점 서( 西) 로 달려갔었다. 다시 만날 때를 두려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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