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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항상 사모하는 표박(漂泊)의 길위에 계신 우연(牛涎) 愛兄[애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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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 열 한시. 아, 우주는 죽은듯이 고요합니다. 죽음의 시체가 누운 무덤과 같습니다. 다만 창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칼날같이 불어오고, 그 너머로 창백한 달빛이 눈 쌓인 뜰위에 소리없이 흐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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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나는 지금 손에 펴든 바이런의 시집을 책상 위에 던지고 하염없이 앉아, 저 편 바람(벽)만 바라보고 있읍니다. 그 벽에는 형님이 주신 밀레의 ‘달아래 뜰’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읍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그 그림을 바라보았읍니다. 하얀 달빛은 자취도 없이 좍좍 대지위에 떨어지고, 대문에는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두 다리를 뻗고,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한데 모은 후, 조용히 앉아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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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희미한 안개가 뭉게뭉게 서린 저편은 깊은 잠속에 빠진듯이 잠잠하고, 그윽한 한채의 기와집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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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그 여자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애인의 옛 자취를 생각할까요? 친구의 옛 정을 생각할까요? 좌우간 침묵에 잠긴 밤빛을 등에 지고, 나무사이로 아스라이 비치는 달빛을 몸에 물드리면서 그 무엇을 절실히 생각함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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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나는 이 그림을 볼때마다 형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그림의 여자와 같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후 형님을 생각합니다. 진주같은 이슬이 풀위에 방울방울 맺히어 돌아오는 아침 햇살에, 애인의 눈과 같이 반짝반짝 광채나는 풀밭을 밟을때도 형님을 생각하고, 젊은 여신의 유방과 같은 하얀 달이 푸른 하늘에 뚜렷이 솟아 옥빛같은 포옹의 향기가 대지위에 넘쳐 흐를때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등에 지면서도 형님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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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형님! 벌써 재작년 가을이지요? 뜰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기 시작하고, 산에는 아직도 울긋불긋한 단풍이 지지 않았을때 내가 형님의 집을 방문했지요. 그때 형님은 여러가지로 고심하는 나를 위로하여 주시면서 인생문제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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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간의 삶에 대해서 이전에 많이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한한 우주 중의 한 아톰인 나로서는 도저히 그 원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려 함이 오히려 고심을 사게 됨으로 모든것을 자연에 맡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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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의 모든 도덕이나 법률은 모두 자본가를 위하여 만들어 놓았다. 돈없는 자에게는 그 법률과 도덕이 모두 원수요, 장애물이다. 십년 후나, 백년 후나. 언제나 이 도덕과 법률을 깨칠 ××이 있고야 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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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읍니까? 이때 나는 형님의 말씀을 매우 재미있게 들었지요. 그리고 한참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형님은 ‘달아래 뜰’이라는 그림을 나에게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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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부자유하고, 불공평하고, 재미없는 사회에서 살 수가 없다. 기회를 보아 나는 가련다. 시베리아 벌판으로, 남북 만주로, 그리고 우랄 산맥을 넘어 ×××으로, 또는 돈 많고 자유스러운 북미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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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흥분을 가누지 못해 주먹으로 땅바닥을 두어번 내리친 후에, 다시 말을 이어 다정한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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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우야? 너는 항상 나를 잊지 마라. 그림속에 있는 여자와 같이 나를 생각하여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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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씀하시고는 봄 풀위에 내리는 햇빛같은 미소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의 손목을 잡아주시지 않았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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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형님은 그후 20일을 넘기지 못하고 행장을 단속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번양성을 지나 시베리아로 향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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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이 떠나시던 11월 25일. 그리고 밤 열 한시. 그때를 나는 잊지 않고 있읍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읍니다. 하늘은 무한수(無限愁)에 길이 잠겨 암담하기 짝이 없고, 그 위에 실비(絲雨[사우])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 밤. 그리고 시들은 나무잎을 가만히 흔들고, 애처롭게 불어오던 바람이 정거장의 하얀 전등불을 잽싸게 휩싸던 그날 밤. 아! 사정 모르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뚜우! 하고 한양성 중에 한 줄기 파동을 일으키자 형님을 실은 봉천행 기차는 떠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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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그때 힘이 있었던들, 달아나는 기차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형님의 다정한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힘이 없는 나는 기차도 붙잡지 못하고, 가슴에 무엇이 매달린듯 갑갑하고도 기가막혀, 발만 구르다가 기차가 봉래교를 지날때까지 손수건만 흔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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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청춘에 있는 때리오가 그의 애인을 남겨두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때 그의 애인 마리오가 기차가 떠나는 선로 옆에서 차창으로 내민 때리오의 모습을 향하여 품(泡[포])에 안았듯이, 장미꽃을 한 송이 두 송이 한 없이 던질때에 그도 애인 마리오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열광적으로 손수건을 흔들었듯이, 나 또한 열광적으로 어찌할 줄 모르며 멀어져 가는 형님의 얼굴을 향하여 몇번이나 손수건을 흔들었는지 모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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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그후 나는 며칠 동안 짝잃은 원앙새와 같이 정붙일 곳이 없어서 낮에는 겨우 회사에 출근하였으나, 밤에는 공연히 가슴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며, 너무도 갑갑하고, 너무도 쓸쓸하여, 공원으로, 극장으로, 강연회로,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다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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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형님이 표박의 길을 떠나신지 나흘만에 장춘에서 하신 편지에서 ‘아! 어린 아우 춘성아? 나는 너를 떠나 이곳까지 무사히 왔다. 가까운 날에 북행(北行)할 모양이다. 해삼위(海蔘威)로 니코리스크로, 치타로, 어디던지 발가는 대로 가겠다. 아! 앞길을 생각하면 마치 새장안의 작은 새가 푸른 하늘을 그리다가 그리운 옛날 보금자리에 돌아온 듯 하다. 이곳만하여도 대륙적인 시원한 기분과 자유스러운 공기가 나의 가슴을 상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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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어디던지 가고 싶은 곳까지 나는 가겠다. 그리고 지금 금전과 자유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제부터 금전을 잊고 자유를 얻어 금전은 불쌍한 사람에게 주고, 자유는 ×××, 약소한 사람에게 주고자한다. 그 승전여부는 내가 알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자연과 운명에 맡기고 그저 죽는날까지 싸우고져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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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눈물어린 글귀를 읽고 대단히 기뻤하였읍니다. 그와 동시에 한층 형님의 생각이 간절하여 울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후에는 날이 가고, 밤이 오는것 조차, 하루, 열흘, 한달, 두달, 몇달을 기다려도 형님의 소식은 간절했읍니다. 아! 그때 나의 마음이 얼마나 갑갑하고 쓸쓸하였을까요? 긴 얘기 하지 않아도 형님이 잘 이해하여 주실 줄 압니다. 나는 그때 형님은 틀림없이 ‘죽음의 피안’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리하여 조급하고 급장하던 나의 마음도 한결 풀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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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것은 세월이요, 빠른 것은 광음이라. 그해 겨울에 남산 북산에 집채같이 쌓였던 흰 눈도, 해가 바뀌고 봄철이 가까와옴을……, 차차 쓰러지고, 어언 북악산 허리에 보이는 듯 마는 듯한 연자색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층을 이루고, 고요하게 속삭이는 이른 봄바람에 아른아른 흔들리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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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였어요. 나는 그 어느날, 즉시 회사에 출근하여 펜을 들고있는 사이에 뜻하지 않던 형님의 편지를 받았읍니다. 나는 편지를 받고 울고도 싶고, 웃고도 싶었읍니다. 그야말로 희비교집(喜悲交集)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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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춘성아 모든 것을 용서하여라! 끝없는 방랑에 너까지 저버렸구나. 그러나 사실은 저버린 것이 아니다, 다만 무슨 사정때문에 편지를 중지하였을 뿐이다. 아직까지 일정한 주소가 없이 물위에 흐르는 부평(浮萍)과 같이 물결과 바람조차 이리저리로 표박(標泊)하고 있다. 아! 이 표박의 생애! 나는 이 속에서 무한미(無限美)와 무한고(無限苦)와 무한애(無限愛)를 맛보고 있다. 마음대로, 그리고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청춘의 쾌락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국을 생각하니 눈물 맺히는 향수의 열화가 가슴 위에 타오른다. 언제나 귀국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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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어린 아우야, 그 동안 건강하여서 사무에 열심 하였느냐? 문학은 너의 천직인 즉, 공연한 딴 생각말고 많이 쓰고 많이 읽고, 많이 배워 그로서 입신하도록 하여라! 내내 너의 건강을 빌고 그만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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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2월 2일 ……「니코리스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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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편지를 읽고읽고 또 읽었읍니다. 그러나 회답할 수 없음을 무엇보다도 유감으로 생각하였읍니다. 어찌하면 회답할 수 있을까? 언제나 일정한 주소를 정하시고 편지를 하시려나! 하고 몹시도 애쓰고 갑갑하게 지냈읍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무소식이었읍니다. 그해 봄에 피었던 꽃이 떨어지고 다시 녹음이 지고 단풍이 피고 다시 흰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북악산을 넘어 한양성중에 梨花[이화]의 세계를 만들때까지 일자(一字)의 음신(音信)이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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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말 아니하여도 나의 마음을 넉넉히 추측하여 주시겠지요? 내가 얼마나 우울과 적막을 느꼈다는 것은 구태여 변명하고저 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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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로 사랑하던 형님을 잃어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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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생각한 즉, 나의 마음 속에는 알지 못할 슬픔과 외로움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옷깃 위에 떨어집니다. 나는 날마다 회사에서 퇴근한 후에는 취운정 술맛과 동작동 등지로 외로이 방황하기를 싫다하지 않았읍니다. 그리하여 솔잎을 울리는 산바람을 가슴에 쏘이며 검푸른 나무 그늘이 어른어른 흔들리는 유수하고 삼엄한 솔밭 속에서 외로운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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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가슴을 부둥켜 안고 처량한 노래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르며……. 자진 저녁 안개가 꿈같이 무르익고, 그 위에 고요한 황감(黃柑)의 저녁 노을이 밝끗밝끗 펴도는 한강하류를 바라보며 한강신사(漢江神社)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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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애닯게 노래한 것도 몇 번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읍니다. 그리고 테니슨의 작품에 있는 ‘유미스’라는 처녀가 그의 애인 ‘스미스 하아디’를 잃어버리고 너무도 기가 막혀 ‘오룬스’라는 흰 눈이 쌓인, 넓고도 커다란 벌판을 사흘동안이나 쏘다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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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노래한 것과 같이, 나도 언제인가 한번 은가루 같은 흰눈이 보기좋게 쌓인 서빙고 벌판에 갔었읍니다. 발로 쌓인 눈을 밟고 머리로는 내리는 눈을 받으면서, 햇빛은 지는지 모르게 서산에 잠기고 ‘잠세상’같은 어둑한 밤빛이 천지를 휩쌀때까지 이리로, 저리로, 쏘아다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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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목을 놓아 처량하게 소리 질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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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이렇듯이 형님을 간절히 사모하던 나는 1921년이 지나가고 1922년이 돌아와 새해 첫날 아침에 떡국을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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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이때 나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그저 “반갑고도 설어웠다”는 말 밖에는 나는 별로 형용사는 발견하지 못하겠읍니다. 한껏 마음이 푸르러지고 한껏 낙망이 되어 마치 형님을 표원의 객으로만 생각하던 나는, 이 연하장 하나로 다시 새 용기를 얻고 다시 새 기대를 얻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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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린 아이가 되어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지요. 곧 나의 가슴에는 푸른 향기와 따스한 기운이 가득하여지며, 어느 알지 못할 감미로운 세계에 몸을 옮긴 듯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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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그동안 표랑의 생활이 얼마나 피곤하시며, 또는 몸이나 건강히 계셨읍니까? 정말 형님이 오늘까지 지내온 생활의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싶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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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를 지나고, 우랄산을 너머, 수만리를 활보하신 그 어려운 싸움의 역사를 알고 싶었읍니다. 시베리아 일대에 쌓인 눈과 모스크바 일대에 부는 바람을 목격하시고 느끼신 눈물의 생애를 듣고 싶습니다. 그 동안 싸우고 헤메신 총결산의 보고를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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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한양을 생각하실 때, 이 아우를 잊지 아니하셨겠지요? 그와 동시에 나의 고심생애를 생각하여 주시겠읍니까? 나의 내적 전투는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았읍니다. 나는 아직 최후의 비판만 기다리고 있읍니다. 눈물은 마르고, 웃음은 쓸어져 기름이 없고, 생기가 없고 윤택한 것이 없는 ‘生[생]’을 지속하고 있읍니다. 풀 속에 숨긴 한 송이의 백합같은 나의 아름다운 이상도 벌써 깨어진 지가 오래되었고 달 아래 호적(胡笛) 소리같은 감미로운 사랑의 세계도 쓸어진지가 벌써 먼 과거입니다. 사랑도 잃고, 이상도 잃고 ──‘환음(幻陰)’에 방황하는 어둠의 미아가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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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감미’를 두 발로 짓밟고 그 위에 모래를 쌓는 쫓긴 자의 무리가 되었읍니다. 세상의 모든 불공평을 원망하여 그 위에 회색무덤을 만드는 암흑의 두목이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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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나는 살기가 싫어졌읍니다. 영원의 나라가 그립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살기까지는 싸움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살아가는 그 무엇인가 봅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보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맛없고, 심심하고, 쓰린 삶이여! 하느님은 왜 이러한 우리 인간을 만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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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다음에 드릴 말씀은, 한양에 있는 우리 친구들의 소식입니다. 재작년 5월이지요. 형님과 함께 보트를 타고 한강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흥에 겨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다가 술에 취하여 푸른 강물위에 떨어졌던, 분홍이 쓸어지는 줄도 모르고 마포까지 떠내려가던 우리 일행의 소식입니다. 그중의 하나인 설파 형은 요사이 새로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랑의 향기에 취하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장군은 어디로 갔는지 소식을 알 수가 없으며, 오천석군은 미국을 갔고, 차군은 지금 서울에 있으며, 한장설군은 진남포에 내려가서 인력거를 끌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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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2년의 세월이 그다지 장구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우리 친구들의 변천은 정말 격렬하였읍니다. 결혼을 하고 유학을 가고, 설파와 천석 두 형에게는 정말 축복의 잔을 드릴뿐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펜을 던지고 인력거를 끌던 한장설군에게는 느낌이 많습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불평을 조소하는 반항의 부르짖음을 나는 그에게서 분명히 들었읍니다. 아! 반항의 소리여! 삶의 모순이여! 광명의 해여! 이 천지 위에 속히 자유와 평등의 샘물이 흘러라! 하고 나는 기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내내 건강하셔서 많은 복 받으시길…… 이것으로 붓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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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한양에 있는 아우 춘성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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