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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리(原理)와 시무(時務)의 말 - 평론계 상반기 소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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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8
김남천
『조광』, 1940년 8월 ‘상반기결산보고서’평론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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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原理)와 시무(時務)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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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계 상반기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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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학예면이나 잡지 같은 데 실리는 논문들은 될 수 있으면 빼놓지 말고 읽어두는 습관인데, 지금 상반기 평론계의 결산을 하라는 주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어쩐 까닭인지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는 논제가 없다. 무슨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운데로 하고 평론가들이 토론을 하였는지, 그런 것이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감명 있게 읽었다는 인상을 남겨주는 어떤 한사람의 논문의 제목조차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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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대라는 것을 느꼈다. 평론하고 비평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가를 느끼고 새삼스러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지금 소묘의 대상으로 하려는 시기는 지나(支那) 사변이 3년을 넘어 중요한 계단에 올라섰을 뿐 아니라 구라파의 전란도 방감(方酣)하여 북구와 백(白), 란蘭)을 거쳐 이미 불란서의 항복이 전하여지는 시기에 긍(亘)하여 있다 지구위의 낡은 질서가 물러가고 새로운 질서가 찾아오려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철학자와 평론가는 이 세계사의 커다란 전환에 문화 이념을 부여하고 지도 원리를 세워주려고 용약(勇躍)하여 필봉筆鋒)과 학문적 온축(蘊蓄)을 가다듬고 기울이는 시기가 아니면 아니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사의 전환기에 처하여 하나의 시무의 말도 원리도 그리고 포즈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럽고 또 슬픈 일이냐. 역사에 대해서 발언하지 못하는 평론의 존재란 우리의 두뇌가 상상할 수 없던 상태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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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正)히 그러한 기막힌 상태가 지금 우리 평론계를 찾아 오고있는 것이나 아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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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의 상실이라든가 비평정신의 상실이라든가, 또는 지금은 비평이 성립될 시대가 아니라든가 하는 소리를 가끔 들어왔다. 한두 번 들었을 때엔 그럴 듯도 할 법하게 들었었다. 그러나 세 번 네 번 거듭되고 또 누구의 입에서나 무사려(無思慮)하게 뱉어지고 이제 그것이 상투어나처럼 되어버리면 유쾌(愉快)하지 못한 인상을 독자로 하여금 품게 한다. 탐구와 분석의 노력 대신에 이러한 문구가 안전판(安全辦)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무위도일(無爲徒日)의 구실이거나 현실도피의 변명으로 들려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 등의 분석과 처지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평론이란 어려운 시기일수록 활기를 띠어야 할 것이 아닌가. 진창물이 튕길까 저어하여 높은 언덕에 서서 공수방관(拱手傍觀)자가 무엇으로 평론가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인가. 주어진 원리에 안재(安在)해서 큰 고함이나 올리는 것을 능사로 하고 원리를 스스로 탐구하고 건립하려고 애쓰는 능동적인 창조적인 노력에 인색(吝嗇)한 사람을 우리는 무엇으로 평론가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하는 불만을 품어보게 되는 것이다. 붓을 던지고 권외(圈外)에서 관망하거나 원리의 상실만 되풀이하고 있으면 자기의 신상보전이나 명예는 유지될는지 모르나 평론은 후세에 블랭크만은 남겨줄 것이다. 그것은 평론을 살리고 문화를 구하려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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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각도로 보아나가면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이 방면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분은 대단히 희귀한 것 같다. 물론 모두 마음속으로 세계정세의 추이를 바라보며 자기의 심장을 그것에 의탁하여 함께 문화를 살릴 만한 이념의 체계를 준비하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나, 아직 일정한 신념을 가지고 세계와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의 문학 문화의 위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서인식(徐寅植), 박치우(朴致禑), 신남철(申南徹), 김오성(金午星), 박종홍(朴鍾鴻) 등제씨의글을좇아가면서 읽어도 또는 문예비평의 엑스퍼트들의 글을 따라가면서 보아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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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수중에 상세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 최재서 씨가 이 시기에 정려의 전부를 기울인 것은 『인물평론』에연재한현대소설연구뿐이었고 임화 씨의 활동은 작년부터 계속되는 조선일보 연재의 신문학사의 한 부분으로밖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타의 잡고(雜稿) 「소설20년」, 두개의 소설론, 그리고 「동경문단과 조선문학」등은 소잡(素雜)한 소개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파괴적인 잡설뿐이었다. 소설 연구가 나쁨이 아니요 문학사 또한 귀중한 글이 아님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도피나 혹은 은둔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며 작가나 시인에게 추진력이나 목표를 주지 못하는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씨 등은 이런 것조차 평론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비평정신의 상실과 논리의 획득」으로 작년이래 많은 공명자와 에피고넨을 만들은 이원조 씨는 「30년대검토」에 종사해서 동일한 논리로 낡은 시대의 처리에 참여하였으나 마치 씨 자신도 함께 처분해 버리기나 한 듯이 그 뒤 새 정신을 건립하려는 탐구의 노력에는 정채(精彩)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유진오론」과 월평이 자료표에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윤규섭 씨와 안함광 씨가 비교적 많이 활동한 분들이었으나 자기 자신의 공부한 성과를 기계적으로 시무의 말에다 맞붙여 놓은 폐단이 많아서 시평의 성질의(‘을’의오식인듯- 편자) 띠고 나오는 글이면서도 언제나 시대의 맥박을 가지고 있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문학적 현실 속에서 이야기할 논제를 찾는다든가,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공부 코스에서 화제를 골라내어서 그것에다가 우리 문학적 현실의 국부 현상을 초조하게 주워 붙이니까 너무 성급한 느낌을 주면서 또한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과학적 비평의 수립이나 문예학적인 사고방식의 고취를 되풀이한 두 분의 공적은 뚜렷하지만 앞으로 공부가 원리와 시무의 말을 분별해서 처리하는 수완을 기를 필요가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씨들이 애용하는 논리가 지나간 시대의 연장인 만큼 시대와 겨누어 새로운 감각을 준비하지 않으면, 혹(或)여 이야기하는 글이 평론에서 점점 멀어가게 될는지도 알 수 없다. 구멍이 한 개밖에 없는 악기는 현대음에는 없는 것 같다. 이야기하는 방도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서 있는 발판이 모호해질 리는 없지 아니한가. 우견(愚見)에 의하면 평론가란 어떤시대에 놓여 있어도 신선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 다시 말하면 어떠한 국면에 처하여서도 자기의 생각을 살리려는 사람의 명칭이 아닌가 싶다. 진부하게 보여지는 것은 시대적 매력의 상실을 말함이며 동시에 평론의 하나의 측면을 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함인 줄 안다. 물론 이것은 윤, 안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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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세대 평론가로 처음 평단에 데뷔한 정의호(鄭義浩) 씨의 새로운 가치를 알고 있지 못하다. 정시가 즐겨서 부는 피리는 구멍이 꼭 한 개다. 그리고 이 악기야말로 30년대 평론가를 투지를 뒤적이면 누구나 하나씩 모두 가지고 있는 것에 속한다. 인간성의 신뢰 같은 것으로 새 세대의 이념이 될 수 있다면 신세대론 같은 것은 아예 씌어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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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비평가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작가나 시인 가운데서 자기이(‘의’의오식- 편자) 신념과 체험을 들고 시대와 문학에 대해서 발언을 기도한 분이 없을까. 자기들의 제작을 끊지 않고 계속시키고 있는 이상 어떠한 것이든 간 이러한 시대에 처한 문학자로서의 심리나 심경이나 주장이야 있을 것이 아닌가. 시인 중에서 김광섭 씨가 「시인과시대성」이라는 글을 초하여서 시인에 대하여 시대와의 관계에 반성을 구하였으나 주관적으로 보면은 이러한 각성을 약간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고 또 객관적으로 보면은 시단의 현상으로 보아 퍽 필요한 경종(警鐘)이었으나 문제제기의 소박성으로 하여 그다지 효과를 주지는 못하지나 않았는가. 한편 김기림 씨는 「과학으로서의시학」과「시와 과학과 회화(會話)」에서 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론의 기도가 나변(那邊…)에 있는가를 보여주었으나 물론 우리들이 그 곳에서 시대의 호흡을 곧바로 느껴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오장환, 김광균, 윤곤강 씨 등 새로운 부대의 시적 주장도 시대적 감명을 주는 점은 역시 희박하였다. 소설가에서는 자기의 창작 심리를 들고 나와서 새 정신 탐구에 자(資)하려는마음을 가진 이도 없었던 것 같다 필자의 「관찰문학론」같은 것도 나 자신의 문제에 속한 것일뿐 처음부터 현상타개에 자(資)하려는 자신은 가지고 있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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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작년부터 시국과 문학을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선구자로서 박영희 씨 등의 금년 상반기의 활동은 일부에 기대를 주었던 모양이나, 통계에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박씨가 『문장』에연재중인「문학의 이론과 실제」라는 논문은 물론 씨의 연래(年來)의 주장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지리멸렬한 노트이다. 문학이 국책에 참여하는 길을 박씨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런 결과밖에 나올 길이 없다. 작년도 1년간 총평에서 최재서 씨가 “연설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거니와, 이 방면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좀더 문학의 본질에 즉(卽)하여 연구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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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이상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금년도 상반기라고 하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비친 우리 논단의 형편을 소묘해 본 것이다. 이 시대의 거울에 나타난 우리들의 얼굴은 필자의 보는 바 대충 이상과 같은 표정으로서 개괄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관찰은 문제의 일 측면을 그렸음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저널리즘의 동향과 노력을 통하여 다시금 평단의 거취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문예잡지의 일 익명자(一匿名者)가“비평에 있어 화제의 빈곤은 그 책임을 편집자들이 독담(獨擔)을 해야 한다”로 말하면서 신세대론 일거(一去)후 요요(寥寥)한 평단의 책임의 태반을 신문 잡지 편집자에게 돌리려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다소 지나친 느낌이 있지만 일리는 충분히 있는 말이다. 우리 형편에 있어서는 신문 학예면이나 잡지 책임자의 위치는 확실히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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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통계를 보면 조선일보에서는 대담이 한 번, 박치우, 서인식, 김오성 정담이 한 번, 이것으로 평단의 현상타개의 길을 잡어보려고 하였다. 그후로는 ‘30년대 검토’‘학생에게 기함’‘소설의 현상타개’‘현대가 요망하는 신윤리’‘명일에 기대한 인간타입’등이 특집 제목으로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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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는 동보 창간 20주년을 계기로 ‘문화20년’타령이끊임없이 계속 연재되었으나 생일놀이의 여흥으로는 과분한 작란(作亂)이요물론 얻어들을 말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연초의 ‘동양문화검토’가 오히려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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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평론』이 평론잡지인 만큼 여러 번 특집도 내었고 필두 문화논문도 씌었으나 권두논문이 중단되는 것을 보면 역시 이 방면의 사고력이 우리 평단에 고갈해 있다는 것을 추상(推想)할 수가 있다 ‘신세대론’‘현대 와 인간 문제’‘소설론’‘문학과 직업문제’‘동양문학의 재반성’등이 특집 제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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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제목만 가지고 운위(云謂)할 것은 아닐지 모르나 이러한 데 저널리즘의 동향이 단적으로 표현될 것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 새로운 토픽이라든가 혹은 문화, 문학을 지도할 표치(標幟)같은 것은 나붙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대체로 저널리즘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는 곧 알아볼 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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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범박(泛博)한대로 갈라보면, 이미 지나간 시대의 처리와 새로와야 할 것을 맞기 위한 대망, 준비 같은 것이 눈에 뜨인다. 작년으로부터 넘어온 것이지만 신세대론에다 어떤 결실을 지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조선일보는 현상을 걸어 신세대의 정신을 불러보았고 『인문평론』에는 세 부류의 인선(人選)으로 이것의 피리어드를 찍으려 하였다. 동아일보에도「신세대론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강병탁(姜秉鐸)이라는 분의 글이 실렸고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문자인 대로 김동리 씨의「신세대의정신」도『문장』에 실렸었다. 조선일보의 ‘30년대 검토’도 일종 낡은 시대의 청산을 목표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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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 함께 새로운 것을 향한 모색 같은 것이 눈에 뜨이는 것이 사실이다. 전환기의 인간문제라든가 신윤리, 신인간형의 탐구, 동양적인 것의 반성을 거쳐서 신질서에 참여하는 길을 더듬으려 하고, 동양적인 것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것으로 비약시키기 위한 계기의 준비 같은 것, 그리고 보다 문학적 문제에 있어서도 소설을 타개해보려는 기도, 역시 저널리즘은 추진해 보려고 애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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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과 집필자, 평론가(광의의 저널리스트)들의 타이엌(의미 불명 - 편자)이나 호흡이 맞지 않아서 성과는 시원치 않으나, 이러한 길을 붙들고 박차를 가하는 외에 딴 방도는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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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문제 같은 것이 전년처럼 문학상의 모랄로서 제기되지 않고 좀더 철학적인 부면에서 재기(再起)시킬 수 있고 또 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 재미나지 않는가. 동양문학의 반성 같은 것도 앞으로 세계문화에의 참여를 목표로 새우고 추궁(追窮)하면좀더높은득得)이있을는지도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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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어떤 것이라도 끈기있게 붙들고 저널리즘의 기운을 작성해 보는 밖에 원리나 비평정신 탐구의 방도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불과 6개월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1, 2년이 무효(無效)히 지나간단들 그것이 무엇이랴. 문학을 살리고 문화를 이끌고 나갈 신통한 이념이나 원리만 찾아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견인(堅忍)하여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을 하루라도 빠르게 오게 하기 위하여 앞으로의 반년이나 일년이 유용히 쓰여지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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