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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적인 것과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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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2.14~18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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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적인 것과 문학
 
2
- 소시민 출신 작가의 최초 모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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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아닌 나를 송두리째 매혹해버린 장면을 신약 성서는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가라앉지 않는 소란한 마음이 때때로 헛되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한 권의 바이블을 들 때 으레히 펼쳐지는 몇 군데의 구절이 그곳에는 있다. 마태 26장, 마가 14장, 누가 22장 혹은 요한 13장으로부터 각각 끝장까지가 그것이다. 기독(基督)이 제사제장(祭司諸長)과 병정에게 체포되어 골고다의 이슬이 되어버리기까지의, 유월절 전후의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는 성서에서보다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12제자를 둘러 앉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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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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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폭탄적 예언을 던지는 기독과, 열두 제자의 표정과 행동에 돌개바람과 같은 동요가 일어난 것을 보면서 누를 수 없는 감동을 품었던 일이 있거니와 성서의 이 장면 묘사는 다빈치의 그림에 못지 않게 나에게 항상 새롭게 흥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얼굴과 교설(敎說)을 덮고 있던 겹겹의 베일이 찢어지고 이곳에 인간 기독의 면목이 약여(躍如)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한 13장의 묘사는 한층 더 육체적인 것을 가지고 나에게 육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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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이 의미심장한 최후의 기회에서 사랑하는 12 제자에게 둘러싸여 음식을 나눌 때에 너희들 중에 나를 잡아 적에게 넘길 자가 있다고 선언하는 그것이, 벌써 적을 사랑한다는 불가능의 시적 환상으로서는 품을 수 없는 불가해의 일이어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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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주를 잡아 줄 놈이 누구오니까? 누구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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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소연(騷然)히 기독에게 반문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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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웅큼의 먹을 것을 적셔서 주는 자가 곧 그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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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자기 손에 들었던 식물(食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몬의 아들 이스카리오테(가롯)의 유다에게 주는 기독의 거동은 수백 수십의 신학도의 종교적 해설에도 불구하고 전연 인간적 감정에 사로잡힌 싱싱한 사람다운 한 면모의 여지없는 표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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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적에 대한 사랑도 타협도 없다. 사탄의 마음속에 든 불쌍한 전포목상인 시몬의 아들 유다는 이곳에 가장 날카롭게, 준엄하게, 무자비하게 고발당하고 있다. 다시 유다가 예수가 주는 먹을 것을 받아들었을 때 예수는 추상같이 추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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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자 하는 행동을 속히 실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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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좌석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것이 무엇을 뜻함인지 몰라 의아 속에 소란스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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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먹을 것을 받아들자 곧 밖으로 나와버렸다. 때는 이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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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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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방을 차고 나갈 때의 심경과 그 뒤에 그가 허둥지둥 제사장을 찾아가던 심리상태에 대하여는 성서는 하등의 묘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문학적 상상 앞에 흥미 있는 길을 열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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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나에게 이상한 문학적 흥분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흥분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또 한 장면을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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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이 끝나려 할 즈음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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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지금 따를 수 없다 함은 무슨 이유이니인까? 나는 주를 위하여는 목숨을 버려도 좋사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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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의 주의 수심을 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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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나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겠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가 나를 세 번 거부하기 전에는 계명성(鷄鳴聲)이 없으리라”
 
 
23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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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이 제사장과 학자와 병정에게 이끌리어 대제사의 뜰에 이르렀을 때 죽음을 맹세했던 베드로는 또 한 제자와 함께 그곳에 따라가 문 밖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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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문을 지키던 비녀의 하나가 베드로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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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저 사람의 제자의 한 사람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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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힐문하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자기의 선생을 부인한다. 지금 그의 주(主)는 뜰 안에서 갖은 모욕과 학대를 무릅쓰고 있을 때에 사(死)를 맹세한 베드로는 전전긍긍하며 합쳐서 세 번이나 그의 주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부인이 채 끝나지도 전에 그의 전 몸과 마음을 잡아 흔드는 계명성(鷄鳴聲)이 들려온다. 이것을 듣고 고민하는 장면의 묘사도 성서에는 상세치 않다. 그러나 네 사람의 복음 기록자가 한가지로 베드로의 통곡을 간결하나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닭의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밖으로 나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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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우리는 인간 베드로가 여하히 고발당하는가를 육체적 절박성을 가지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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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7.12.1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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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생을 은 30냥으로 바꾸어버린 유다의 그 뒤 행적에 대하여는 일정한 종교적 목적에 의하여 기록된 복음서는 지나치게 냉대한 감이 있다. 내가 알기에는 7장에 단 세 절이 그를 위해 할애되었을 뿐이다. 유다는 본시 제자 중에 가장 수양이 옅은 위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만큼 더 인간적이 것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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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자 중에서 유일의 유대 출신이요, 금전 향기를 가장 많이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전날 포목전을 벌렸다가 실패하고 그 탓에 빚도 있었으려니와 술값 진 것도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또 열두 제자 중에서 회계격인 직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돈을 속여서 술을 마신다느니, 옛날의 빚을 갚는다느니 하여 제자들한테 늘 힐난과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런데다가 유다는 또다시 공명심이 상당했다. 제자들은 아름다운 요단강안(江岸)에서 그들의 선생이 없는 것을 틈타 예루살렘 점령을 획책할 때에 유다는 그들의 총대장격이 되고 싶어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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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서는 유다가 그의 주를 은 30냥으로 바꾸어버린 것을 사탄의 침범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그는 모든 조건에서 그렇게 될 수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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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에서 기독의 말과 행동에 뾰로통하니 분개하여 이미 캄캄한 밤이 된 방 밖으로 나가던 유다의 모양이 우리의 눈앞에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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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다는 예수가 십자가에까지 오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였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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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를 판 유다는 그가 사형으로 작정(作定)된 것을 보고 후회하여 제사장 장로들에게 30냥의 은을 돌려주면서 나는 죄없는 사람을 팔아 죄를 범하였도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고 거절할 때 유다는 그 은을 성소에 던지고 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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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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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기록은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상상의 줄을 뻗게 한다.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돈을 던져버리고 산으로 가서 목을 매어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버린 것이다. 이 유다의 죽음은 어떠한 제자의 거룩한 행적보다도 결코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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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나는 빈약한 성서의 지식을 기울여서 지나치게 장황한 독단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본 세 장면, 다시 말하면 기독이 배신자를 적발하는 곳과 베드로가 그의 선생을 부인하고 통곡하는 곳과 끝으로 유다가 선생을 판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이 세 가지 감격적인 장면에서 나는 유례없는 높은 문학정신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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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컨대 이 세 개의 인간적 감정이 한 둘의 계단을 넘어서서 가장 전형적으로 종합된 것은 물론 유다에 있었다. 그러나 은 30냥과 바꾸려는 제자를 무자비하게 적발하는 기독의 비타협성과 자신의 비굴과 회의와 자저(趑趄)와 비겁에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는 베드로를 넘어서 그의 마음을 팔았던 유다가 은전을 뿌려던지고 목을 매어서, 자기 승화를 단행하는 곳에 이르러 우리들이 결정적인 매혹을 느끼는 것은 어떤 까닭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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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장면이 혼연히 합하여 하나의 높은 감동을 주어 이곳에서 현대문학 정신으로 직통하는 어떤 직감적인 것을 갖게 하는 대신, 유다의 속에는 우리들 현대 소시민과 가장 육체적으로 근사한 곳이 있으며 다시 그의 민사(悶死)의 속에서 소시민 출신 작가가 제출하여야 할 최초의 모랄을 발견하게 되는 때문은 아닐까 하고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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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모든 것을 고발하려는 높은 문학 정신의 최초의 과제로서 작가 자신 속에 있는 유다적인 것을 박탈하려고 그곳에 민사(悶死)에 가까운 타협 없는 성전(聖戰)을 전개하는 마당에서 문학적 실천의 최초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작가의 모랄은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상술한 바와 같은 고귀한 감흥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곳에 유다를 성서에서 뺏어다가 우리들의 선조로 끌어세우려는 가공할 만한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실로 현대는 그가 날개를 뻗치고 있는 구석구석까지 유다적인 것을 안고 있다는 것으로 고유의 특징을 삼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 전(全) 포위진을 향하여 리얼리스트 작가가 그의 필검(筆劍)을 휘두르기 전에 우선 무엇보다도 자기심내(自己心內)에서 유다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작가의 최초의 모랄이 되는 것에 대하여는, 그러나 이곳에 약간의 문화적, 사회적 해명이 필요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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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7. 12. 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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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항상 문제를 주체성에 있어서 제출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주목할만한 명제의 하나이다. 그가 어떠한 높고 넓은 인류의 문제를 제출할 때에도 작가는 그것을 주체성에 있어서 파악한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국가·사회·민족·계급·인류에 대한 사상과 신념의 문제가 여하한 것일런가? 하는 국면으로서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높은 문제가 얼마나 작가 자신의 문제로서 호흡되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로 그 자신의 심장을 통과하여 작품으로서 제기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그가 파악하고 있는 세계관이 그대로 개념으로 표명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체를 통과한 것으로써 표시된다. 작가 개인이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그의 마음이 항상 그것을 가운데 두고 호흡하는 문제가 역사나 국가나 계급으로서도 역시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일런가? 자기는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절실하게 자기 개인의 문제로 하고 있는가가 현대 작가에 있어서는 가장 곤란하나 또한 무엇보다도 긴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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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당에서 비로소 주체의 재건이나 혹은 완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화 씨가 주체의 재건이란 결코 문학자가 이러저러한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해득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임화 씨가 그 뒤의 논위 속에서 수행(數行)의 이론적 해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버리려고 할 때에 곧바로 모피(謀避)할 수 없는 공혈(空穴)을 직감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정히 임씨가 작가의 주체 재건을 획책하면서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하여야 할 작가 자신의 문제, 그러므로 정히 주체되는 자신의 문제를 이미 해명되어버린 문제처럼 살강 위에 얹어버린 곳에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임화 씨는 주체의 재건을 기도하는 마당에서 작가의 문제를 작가 일반의 문제로 추상하여 그것을 그대로 들고 문학의 세계로 직행한다. 작가 일반의 추상화된 개념으로 파악되어버릴 때 문제의 해결은 지극히 용이할 지 모르나 주체의 재건과 완성은 해명의 뒤에서 전히 방기되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결코 기정된 리얼리스트 작가 일반의 개념으로써 해결될 만큼 통일되어 있다느니 보다는 실상은 더 혼란하게 자기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참한 일이나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추상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심각하게 토구(討究)되어야 할 이유가 이곳에 있다. 우선 제일로 일어나는 것이 작가 자신의 속에 있는 유다적인 것으로 발현된다는 것은 사색이 조그만 땅 위에 발을 붙이는 것으로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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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정히 작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데까지 절박되어 있다. 작가가 자신의 속에서 유다적인 것을 발견하려고 하고 이것과의 타협 없는 싸움을 통과하는 가운데서 창조적 실천의 최초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 현대작가의 모랄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적인 것과의 항쟁, 그것이 옳건 그르건 하나의 결론을 보려고 할 때까지 작가는 자기 자신을 추급하고 박탈하고 끝까지 실갱이해 보려는 방향을 고집할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이 또한 고발문학이 가지는 넓은 과제 중의 하나로 소시민 출신 작자의 자기고발의 문학적 방향이 설정되는 소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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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들 심내(心內)에 있어서의 유다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을 말함일런가? 그것은 결코 유다가 돈을 받고 그의 선생을 매각해버렸다는 표면적 사실에서 제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소시민 지식인이 신봉하던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서 이탈하거나 배반한다는 등의 저급한 곳에 있어서 제출될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매각이라는 고도의 성찰과 더불어 제출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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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에는 앙드레 지드의 두 개의 여행기는 우리에게 흥미 있는 대상이 된다. 우리가 그의 제일의 여행기에서 느끼는 흥미는 리온 포이히트방거보다도 서투르게 지적한 획일주의의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드 자신이 유다적인 것과 다투는 그의 심내(心內)의 고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행기 수정에 있어서는 고귀한 심내의 투쟁이 저열한 자기 상실과 자기 매각에서 종료하고 있다 . 그는 그의 마음에 있는 유다적인 것에 비참한 패배를 맛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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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7. 12. 1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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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시인은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문제의 전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시가 호머의 대영웅시 이래 아름답게 발화할 사회적 근거를 상실한 문학적 형식임에 불구하고 현대가 아직 그를 귀중한 보화와 같이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어떠한 문학적 장르보다도 가장 직감적으로 자기 자신을 제시하여 곧바로 대상의 심장을 꿰뚫는 강미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의 문제를 이처럼 용감하게 내놓은 형식은 시 이외에는 드물다. 보들레르가 자기 분열을 위대하게 표시하여 대시인의 지위에 참석한 것은 지극히 교훈적이다. 자기 자신 속에 꿈틀거리는 유다적인 것을 정면으로 마주 받아 그곳에 불꽃을 드날리는 솔직한 정서를 전개하는 대신 저속한 애상과 인생 관조로 도피하려는 곳에 시정신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諸) 시인은 그들이 계절의 변천 속에 자기를 망각하여 시대의 흐름 속에 몸을 잠그지 않으려는 곳에 피할 수 없는 그들의 불행이 있다 할 것이다. 실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들의 주위에서 저조에 빠진 시정신의 파탄을 보고 있는가! 그들은 시대의 측후소가 되는 대신, 천기 예보의 육감이 되려고 한다. 세상이 무너지든지 문화와 지성이 벌거숭이가 되어 위기에 울든지 춘하추동은 어김없이 교대되리라는 것이 이들의 애상의 원천이 된다. 간혹, 희귀하게 발현되는 타협 없는 시정신은 시인 자신의 문제, 급행열차와 같이 통과해버린 탓에 유다적인 것의 위에 매너리즘에 빠진 관념화한 절규를 올려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시정신은 고정화하여 일정한 궤도를 한결같이 내왕하는 전차의 뾰 - 소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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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유다적인 것과의 항쟁에서 발로되는 문학의 정신은 일찍이 고리끼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한 ‘애와 증’의 두 감정의 극히 아름다운 통일 위에 건립된다. 고발의 대상은 증오에 치(値)한 것 그것 이외에는 없다. 그러나 증오를 무찔러서 그칠 줄 모르는 타협 없는 감정은 증오의 대상이 인간의 힘으로 소탕된다는 높은 긍정의 정신,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의 힘을 예찬하는 아름다운 정서 이외의 것도 아니다. 자기 속에 깃들이고 있는 유다적인 것의 적발은 물론 그것을 끊임없이 증오하는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인간적 개조가 가능하다는 높은 애(愛)의 정서가 없는 곳에는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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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론 소시민 지식인의 얼토당토 않는 자기위안의 감정과는 전연 무연(無緣)이다. 왜냐하면 소시민의 인간적 개조의 방향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역사적 지위의 과학적 인식이라는 이성적 지향과 일치하는 때문이다.
 
55
그러므로 백철 씨와 같이 지식층을 고래불변(古來不變)하는 문화계급으로 설정하려는 자기 애무의 태도에서는 이러한 강렬한 문학 정신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백철 씨는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유다적인 것의 증오와 고발의 위에 사랑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타협과 자기 만족의 위에 자기긍정을 안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교묘하게 지식인의 마음 자체가 매각되는 것이 은폐되었다.
 
56
자기를 주시하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널리 사회 전반의 문제 속에서 해결해야 될 순간을 시대는 우리들 작가에게 통렬히 요청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지금은 자기를 과학적 정신으로 무장하기 전 우선 면밀한 신체검사가 요청되는 순간은 아닌가.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속임 없는 신체검사의 과정이 과학적 무장의 과정이 되는 시대는 아닐런가.
 
57
물론 과학은 건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예술학 혹은 문예학의 가운데 착잡한 고민이 삽입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것을 인정함에 결코 누구보다도 뒤서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창작방법이 과학(이론)과 예술을 작가적 실천의 마당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마찰시키고 반발시키고 통일시키는 국면을 취급하는 부면(部面)인 한, 작가가 지금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지우면서 있는가를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상호 침투니, 고발문학이 부정적 리얼리즘에 몰입하였느니 하는 것을 토구(討究)하는 것은 그 자신 필요한 구명이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에게는 확실히 어떻게 묘사하느냐 보다도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가 보다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던가. 아니 묘사와 생활이 불이 일도록 서로 맞부딪치게 되는 것이 보다 큰 문제가 아니었던가. 이곳에 주체의 건립이 최초의 문제로 제출되는 것은 아니었던가.
 
 
58
[『조선일보』1937. 12. 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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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기 자신을 구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의 개조를 철저하게 실현하기 위한 진실한 노력으로 창작적 실천을 유도하지 않는 이상 사회의 문제는 언제나 사회시평의 복사로, 농촌문제는 언제나 농업이론으로 그리고 연애는 언제나 연애론으로서밖에 제출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는 작가의 창조적 호흡과 열의는 전연 영자(影子)를 감추어버리고 말 것이다. 문제는 주체성에 있어서 제출되며 주체의 재건은 작가 자신의 철저한 자성,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속에 있는 유다적인 것의 적발에서 가능하며, 이렇게 하여서 시행되는 작가의 자기 개조의 방향이 창작적 실천으로 유도될 때에 소시민 출신 작가의 최초의 모랄은 제기되는 것이며 동시에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계급과 전인류의 문제는 비로소 하나의 정당한 왜곡 없는 프리즘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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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리얼리즘을 수미일관성에 있어서 관철하려고 아이디얼리즘의 침범을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는 방향은 사실은 상술한 문학정신의 지향과 분리되어서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이 문학적 실천 속에서 범하고 있는 주관주의나 혹은 관조주의의 극복은 고발의 정신이나 또는 그의 일(一)이론인 작가의 자기 고발의 문학에서 가능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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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기 자신을 박탈하는 문학이 사소설과 하등의 관계도 없을 것임은 중언(重言)을 불요(不要)하는 바이며 그것이 시니시즘과 아무 친척간이 되지 않을 것도 의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소설은 본시 작가가 자기 생활에 대하여 자기 신변의 쇄말기록에 떨어져버리는 것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는 작가를 실내에 유폐해 버리려고 하나 자기 고발은 작가를 실외로 끌어내어 사회와 부딪치게 하는 속에서 자기 개조를 꾀하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피아(彼我)는 정반대의 길 위에 서 있다.
 
63
다시 자조나 페시미즘이나 시니시즘은 고발문학이 하나의 유다적인 것으로 설정하려는 것의 일부분이므로 이 이상의 구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고발문학에 의하여 적발될 하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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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문학에 대한 비판자의 한 사람이 나의 제창을 가리켜 자기로부터의 세계관의 축출이라고 말한 이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얼토당토 않는 하나의 무고(誣告)이려니와 대체 주체의 재건이 되어 있지 않고 그것을 위한 노력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망각의 하상(河床)에 던져버리는 판국에서 세계관의 공허한 염불은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 것일까? 세계관이 작가 자신의 입을 그대로 통과해버리고 심장의 부근에서 콧김 하나 얼른하지 않은 곳에 어떠한 주체와 어떠한 사상의 건립이 가능할런가? 작가가 일일(一日)평론이나 혹은 문학강담 속에서는 훌륭한 세계관의 파지자로 출장하였다가 일조(一朝) 방담(放談)과 수필의 영역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그의 작품 속에서 죽어서 뒹구는 2, 3개의 공식을 씨 등은 무엇으로 설명하려 하는가? 나는 실로 이러한 세계관을 배격한 ‘전과(前科)’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세계관을 자기의 속에 완성시키려는 지향 이외의 것은 아니었다. ‘유다’는 그의 ‘마음’을 은 삼십으로 바꾸는 것으로써 범한 유다적인 것의 승리를 민사(悶死)에 의하여 승화하였다. 이리하여 유다는 겨우 죽음이란 최후의 수단을 가지고서야 그의 심내(心內)에 있는 유다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65
그러나 현대에 사는 ‘유다’의 후예들은 그의 극복수단으로 민사(悶死)를 택하지는 않으리라. 그곳에는 증(憎)과 애(愛)의 가장 높은 통일된 감정이 수단의 일체를 지배한다. 베드로와 같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할는지는 모른다. 아니 더 나아가서 그는 태반 민사(悶死)에 가까운 심내(心內)의 고투를 경멸할는지도 알 수 없다. 여하간 자기 자신의 정립이 가능할 때까지 유다적인 것과의 항재잉 늠름한 흔적을 남길 것만은 사실이다.
 
66
그러나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작가 제씨 중에서 기독의 고발과 유다의 속에 들어간 사탄이 무엇을 의미함인지를 몰라 유다가 전대를 맡았음에 제사에 쓸 물건을 사려하난지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 하는지 알 길이 없어 허둥지둥 눈알을 굴리는 가련한 11제자의 지위를 희망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나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씨 등의 자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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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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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7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 참조
  유다(Judas)
 
▣ 참조 정보 (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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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