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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신상(一身上) 진리와 모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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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4.17~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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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신상(一身上) 진리와 모랄
 
2
- ‘자기’의 성찰과 개념의 주체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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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개념이 갖는 합리적 핵심이란 그것이 실재(實在)와 일치하는가 안하는가의 여하에 의하여 결정된다. 세계의 인식이나 탐구의 과정에서 압도적인 필연성을 갖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르고 그렇지 못한 것을 불합리적이라고 불러 우리는 그것을 개념이나 범주에서 진리 아닌 영역에로 영원히 처치해 버린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개념이나 논리적인 범주가 합리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실험과 실증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에 의하여 증명되고 판단된다. 아니 이러한 인류의 유구한 실천을 통하여 그 성과로 얻는 것이 합리적인 핵심을 갖고 있는 다름아닌 과학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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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도덕의 문학적 파악」이라는 졸고에서 도달한 바에 의하면 문학이란 이러한 과학적 개념이 표상화되고 감각적으로 형상화된 것을 가리킴에 불외(不外)하였다. 다시 말하면 과학과 문학의 차별, 동일을 성찰하여 그의 교섭을 규명하고 그의 기능을 따라서 본 결과 해단문(該短文)이 얻는 바는 과학적 개념과 논리적 범주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분석된 진리를 일신상의 애스펙트를 거쳐서 재제출(再提出)한 것, 그러므로 이 주체화의 과정을 통과하여 종국적으로 표사화된 것을 가리켜 문학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이 일신상 각도(角度)를 지날 때에 제기되는 것이 ‘모랄’이라는 데 있었다. 결국 졸고의 성과에 의하면 문학에 있어서의 주체 문제라든가 또는 작가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입장의 문제란 이론적 개념이 수행한 바 공식의 기능을 인계하여 이것이 성과로써 물려주는 바 사회적 진리는 구유(具有)한 사상을 문학적으로 여하히 주체화할 것인가의 문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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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랄’에 대한 연구는 창작방법과 세계관의 논의가 달성한 듯 만듯한 철학(이론·과학)과 문학과의 교섭이나 연락을 일층 과학적으로 성찰하는 결과를 낳을 뿐 아니라 어떠한 작가, 구체적으로는 나 같은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공혈(空穴)과 모순과 고민을 구체적으로 명백히 하는 성과까지를 낳을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태반의 작가나 시인이 붓을 들고 또는 놓을 때, 항상 느끼고 마음 저려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자기가 자졌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문학 작품 속에서는 사멸한 개념의 파편으로 나가 뒹군다는 데서 오는 불안과 불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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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라고 불리워지는 우리들이 어찌하여 아이디얼리즘의 침범을 거부하지 못하는가? 세계관의 파악이 불철저한 때문일까. 사회와 개인과의 괴리(乖離)의 결과일까. 그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좀더 문학의 본질에 즉(卽)하여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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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함광 씨는 이러한 갭을 메우려는 작가의 주체성찰은 문학 이전의 문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주체의 분열을 초극하기 위한 문학적 실천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를 문학 이전으로 돌려버린다고 하여도 결코 당면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문학 이전과 문학 이후의 기계적 분리와 생활적 실천과 문학적 실천의 이원적인 절리(切離)의 사상이 남을 뿐이다. 2, 3개의 작품을 쓰는 것으로 주체의 분열이나 객체와의 모순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을 애띠게 보는 것이라고 안씨는 말한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문학은 실재 반영의 일 양식이었다. 작가가 현실적으로 한 사람의 인간일진대, 그리고 그가 현실과 어떤 의미에서든지 싱강을 하며 생활하고 있을 때에 문학이 그것을 반영하는 것은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두 개의 작품을 쓰는 것으로 주체의 분열이 초극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건 많건 주체 초극을 위한 작가의 생활상 노력이 작품 위에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생활과 묘사가 서로 맞부딪친단 말은 구체적으로 이러 것까지를 포함하여 말함은 아니었던가.
 
9
만일 작가의 주체 초극의 노력을 문학이 반영한다고, 그것을 문학의 사도(邪道)라 볼진대 인간 개조의 문학은 씨 등에 의하여 헛되이 거부될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왜곡된 인간성을 개조하는 사업을 회피하면서 시민 사회의 혹종(或種)의 인간이나 정황을 묘사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넌센스나 이른바 통속문학이 이러한 태도 위에 선다. 그러나 성실한 문학은 언제나 어떠한 정황이 어떠한 인간성을 왜곡되게 만드는가, 또한 여하한 성격적 전형이 정황의 개조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자기의 성격을 개조하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가운데서 그 자체를 성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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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8. 4. 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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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판자 한 사람은 이러한 때에 작가를 향하여 현실의 가치를 알라고 권한다. 그러나 나의 우견(愚見)에 의하건대 현실의 가치를 안다든가 생활의 가치를 아는 것만으로써 문학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가치를 안다든가 생활의 가치를 아는 것은 물론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충분한 것은 아니다. 만일 논자의 주장대로 현실의 정당한 인식만으로 문학이 달성된다고 할진대 문학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학자이면 그만일 것이다. 하고(何故)냐 하면 객관세계에 대한 가치의 인식은 과학으로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혹자의 『제국주의론』이나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까지 유구하게 흐르는, 유동하는 현실의 가치인식이고, 생활지표인 경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또한 존재하고 다시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는 문학인 실재 반영의 ‘방법’의 차이에 의하여 과학과 그 본질을 달리하는 때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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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기능과 문학의 성능을 인식 목적의 차별에서 성찰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작가가 자신의 과학적 안식(眼識)이 도달한 세계 직관에서 지극히 원격(遠隔)한 거리 위에 선 자신의 문학적 표상을 발견하여 그 간(間)의 공혈(空穴)을 적게 만들려고 노력할 때에 “현실을 알라”는 구호는 확실히 너무나 범연(泛然)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진리는 구체적인 것을 토구(討究)하는 마당에서 일반적인 구호를 되풀이하는 것에 의하여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것, 원리적인 것을 가지고 개별적인 것, 구체적인 것을 그와의 관련 속에서 해결하는 것만이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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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개념이 구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얻은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인계하여 비로소 그의 성능을 동원하는 것이 문학이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비판자가 말하는 바 “현실을 알라”는 구호는 과학의 종국의 달성이면서 겨우 문학 기능의 최초의 단초(端初)에 대하여 계주봉(繼走棒)을 옮겨 주는 장면을 운위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나 역시 이 두 개의 세계를 대립시키고자 함은 아니다. 과학과 문학을 절대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성찰한 바와 같이 관념론 미학의 입장이었다. 양자의 차별과 통일을 면밀히 성찰한 뒤에 이것을 교섭시키는 것이 다름아닌 ‘모랄론’의 정당한 입장이다. 혹자의 의하면 나는 리얼리즘 발전을 방해하는 자라 한다. 그러나 나는 만인의 앞에서 단언하되 리얼리즘의 일보 전진을 꾀하는 외에 나의 본의는 있지 아니하다. 리얼리즘의 원리나 일반론의 되풀이가 모든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매한 두뇌에는 작가나 혹은 문학 자체가 당면하여 있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성찰하는 태도는 항상 이단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모랄론’의 입장은 고발의 에스프리의 입장이며 동시에 리얼리즘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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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것은 문학이 일신상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천명함이다 과학의 . 대상은 진리다. 이에 대하여 문학의 대상하는 바는 일신상의 진리이다. 일신상의 진리란 과학적 개념이 주체화된 것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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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인식을 일신상의 도덕으로 파악하고 이렇게 하여 주체화된 도덕을 객관적 인신으로 다시 교역(交易)하는 태도가 즉 이것이다. 실천이나 행동을 거쳐서 물질적 논증을 얻은 과학적 범주와 개념을 작가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주체화하여 이것을 일신상의 진리로써 파악하고 이것에다 상상력이나 과장이나 시사, 상징 등등의 성능을 동원시켜 육체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문학적 표상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 대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세계관을 가지라든가, 현실을 알라든가 하는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려주는 곳에 있는 것이다(귀에 홈이 돋도록 우리는 그것을 들어왔다). 진리가 일신화되고 주체화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함인가를 천명하는 데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17
문학이 도덕을 대상으로 할 때, 진리는 과학의 기능이 도달한 곳에서 일층 연장되어 문학의 가운데서 표상화될 수 있다고 나는 전기(前記)의 졸고에서 말한 바 있었다. 도덕은 그러나 풍속, 습관에 이르러서 구체화된다. 이리하여 도덕 ‘모랄’ 풍속 등의 제 관념을 일신상 진리의 문제와 더불어 성찰하는 것은 초미(焦眉)의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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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창작방법의 상호 침투의 문제, 과학적 개념과 문학적 표상의 교섭의 문제가 이곳에서 새로운 국면을 통하여 가장 비비드한 장면에서 토구(討究)될 것이다.
 
 
19
[『조선일보』1938. 4. 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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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도덕이라는 관념을 규정할 때에 우리가 귀에 익히 들은 바는 그것이 선악을 판단하는 고정 불변하는 덕목이나 도덕률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였다. 수신(修身)이래 우리는 항상 사물을 선악에 의하여 판단하는 도덕주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문학적 개념으로서 도덕 혹은 ‘모랄’이란 말이 사용될 때엔 이러한 통속적 관념으로 화한 도덕주의가 연상되어서는 아니 된다. 만일 문학이 도덕을 대상으로 한다든가 또는 어떤 문학에 ‘모랄’이 있다든가 하는 것을 이 문학은 선하다든가 악하다든가 하는 등류(等類)로 해득해 버린다면 이 이상 더 고약스런 공리주의는 없을 것이요. 이보다 더 심하고 저급한 프래그머티즘은 없을 것이다. 본래 이러한 선악의 도덕주의는 문학은 고사하고 과학까지도 엄격히 기피하는 바이다. 사물의 이론적인 토구는 그것의 선악 판단이나 선고는 아니며 어떠한 사회 문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결코 그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말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동은 일체의 사회문제를 항상 도덕문제로 환언해 버린다. 아동은 이론적인 분석 대신에 모든 문제를 선하냐 악하냐로써 결단한다. 이리하여 과학적 검토를 기피하는 수단으로 도덕이 이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관념으로써 도덕이 운위되는 경우에는 그러므로 그것은 반과학적 반이론적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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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관념에 의한 도덕은 물론 상술한 상식적 도덕관을 극복하는 곳에 성립된다. 과학은 우선 도덕을 역사성에 있어서 파악하여 그것을 하부구조 위에 건설되는 상부구조로서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상식적 관념이나 윤리학이 갖고 있던 도덕의 형이상학설은 무엇보다도 먼저 포기되어 버린다. 도덕을 사회의 물질적 근저의 역사적 발전에 의하여 발생한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는 까닭에 그것은 역사적 발전과 보조를 달리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윤리학적 관념은 결국 과학의 의하여 지양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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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도덕은 하나의 사회규범으로 파악되고 따라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익한 것은 도덕적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부도덕적이다. 이곳에 도덕체계는 필연적으로 분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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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개관세계의 분열이 지양되는 날엔 사회과학적 관념으로서의 도덕도 동시에 양기(陽氣)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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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우리가 지금 말하려는 문학적 관념으로서의 도덕이란 상술한 바와 같은 제관념일 수는 없다. 그것은 도덕의 통속적 상식적 관념이나 윤리학적 관념이 지양되고 사회과학적 관념이 종언(終焉)을 고한 뒤에도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확고한 관념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은 족히 하나의 논리적 카테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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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상술한 바와 같은 제 관념에서 자신을 엄연히 구별하고 새로운 문학적 관념으로서 설정될 도덕 내지는 ‘모랄’은 이즈음 각 방면에서 항용 불러오는 바 유행어로서의 ‘모랄’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선 우리는 최근 우리 문단에서도 성히 유행, 남용되고 있는 ‘모랄’의 관념에 대하여 약간의 분석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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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문학주의적 ‘모랄’이다. 이들에 의하면 모랄이란 단순한 도덕의식이나 생활 감정 등을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심리주의에 의한 윤리 같은 것을 운위하는 데 상요한다. ‘양심’이라든가 ‘자각’이라든가 또는 인간학적인 내성(內省) 등을 서로 얽어서 모랄이 있느니 없느니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몰랄 관념을 면밀히 성찰해 보면 그것의 실제적인 뉘앙스는 대단히 형식적인 곳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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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곳에서 잡아가지고 다시 그 형식 자체를 독자(獨自)의 내용으로써 교착시켜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 느낌을 준다. 문학지상주의자에 있어서는 때로는 모랄은 아무데나 있는 것으로도 되어 있다. 작가마다 모랄은 다 가지고 있다든가 세상이 온통 모랄로 된 모양으로 모랄 만능주의에 빠지는 자가 즉 이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기본 원리를 성에다 둔다든가 인간성을 사회적 역사성에서 설명하지 않고 성욕에 의하여 해명하려는 에로티시즘이나 신변소설이나 모두 모랄이 되어버리기도 쉽다. 본시 리버럴리스트나 문학주의자는 일종의 심정(心情)상 ‘모랄’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아무러한 모랄리티도 갖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랄이란 봄날의 아지랑이보다도 맹랑하여 신용할 바 없는 고약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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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8. 4. 2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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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모랄리스트라고 불리워지는 일련의 에세이스트 사상가들에 의하여 불란서 고유의 문학적 전통의 하나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상술한 문학주의적 모랄 개념이 충분히 이의 영향 밑에서 유출된 것임에도 용이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몽테뉴나 파스칼에서 비롯하여 라 부류이엘, 라로슈퓨코를 거쳐 상트 부브, 지드에 이르는 세계의 사상가가 이러한 명칭에 의하여 불리워지는데 이들의 철학이나 사상의 공통점은 일종의 회의주의와 그리고 ‘자기’나 ‘자아’를 탐구한다는 데 있지 아니할까. 이들의 대부분이 그의 사상의 기록을 ‘포르트레’나 ‘막심’나 ‘엣세 -’라는 국한된 형식에 의거한 것은 또한 이유 없음이 아닐 것이다. “모랄리스트란 각자의 윤리감을 수단으로하여 인생을 탐구하는 사람”(河盛好藏[하성호장])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가장 적당한 평언(評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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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으로도 쉬이 알 수 있음과 같이 이들은 사회적 인식과는 비교적 원격한 거리에서 인간의 이름 밑에 ‘자기’라는 것을 탐구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자기’를 정당하게 파악한 것이 못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간학적으로 추상해버린 데 불과하다. 이렇게 될 때엔 ‘자기’라든가 ‘자아’ 는 마치 슈틸러의『유일자와 그 소유』에서와 같이 하나의 피상적인 비굴한 자의식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문학주의적 ‘모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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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우리들이 가지려는 바, 문학적 관념으로서의 도덕 모랄은 과학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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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핵심을 갖고 있는 과학적 개념에 수행한 바, 진리의 인식이 자기 일신상의 문제에까지 이를 때에 비로소 모랄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일순(一瞬)이라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모랄은 사회적 인식이나 그를 가능케 하는 전인류의 실험이나 실천을 무시하는 개인주의적인 회의적 자아 탐구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종의 행동의 시스템이다. 그것은 합리적 개념의 골격을 핵심으로 하고만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물건이다. 역사적 리얼리티의 가공할 만한 동향에 무관심한 자아 탐구나 주아(主我)성찰에 무슨 진정한 모랄이 있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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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랄이라는 말의 어원이 라틴어 ‘모레스 mores’라는 데서부터 온 것이고 동시에 ‘모레스’라는 말의 어의에 관습, 풍성, 성격 등의 뜻이 붙는다는 것을 어원학자에게서 빌려오는 것은 대단히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모랄리스트들이 자기 자신의 유의(流儀)를 가지려고 애쓰고 또 자기를 부단히 성찰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모랄’이 어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습, 품성, 성격 등의 어의(語義)에 비추어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두루두루 생각해 보면 모랄리스트들이 과학적인 사회적 인식을 떠나서 자아를 성찰한 그릇됨은 있다 할지라도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관습화, 성격화, 습성화함에 의하여 일신상에 몸에 붙는 진리에까지 비약시키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확실히 일종의 가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풍속에 이르러 완전히 구현된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과학적 개념이 문학적 표상으로 되어지는 길은 인식을 도덕의 파악에 의하여 일신상화(一身上化)하는 길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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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이란 사회적 습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습과, 습속은 사회의 생산기구에 기(基)한 인간생활의 각종의 양식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결정을 본다. 이리하여 이것은 일방으로 ‘제도’를 말하는 동시에 타방으론 ‘제도의 습득감(習得感)’을 의미한다. 풍속, 습속은 생산관계의 양식에까지 현현되는 일종의 제도(예컨대 가족제도)를 말하는 동시에 다시 그 제도 내에서 배양된 인간의 의식인 제도의 습득감(예컨대 가족의 감정, 가족적 윤리의식)까지를 지칭한다.
 
37
이렇게 성찰된 풍속이란 확실히 경제현상도 정치현상도 문화현상도 아니고 이러한 사회의 물리적 구조상의 제 계단을 일괄할 하나의 공통적인 사회현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기구의 본질이 풍속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전히 육체화된 것을 알 수 있다.
 
38
그러므로 도덕 ‘모랄’의 문학적 관념은 도덕률이나 도덕 감정도 아니고 또한 혹정의 습관, 습속 뿐만도 아니고, 이러한 모든 현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하나의 인식의 입장을 말함이다. 과학적 개념은 이러한 도덕을 대상으로 함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구체화되어 문학적 표상(表象)에 도달하는 것이다.
 
 
39
[『조선일보』1938. 4. 22]
 
 
 

5

 
41
여기서 한번 생각을 돌이켜 본다면, 도덕이란 개인을 떠나서는 무의미한 물건이었다. 이곳에 개인이란 사회와의 관계에서 운위되는 개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개인은 사회과학에 의하여 사회의 특수화된 것으로 성찰될 수 있었다. 사회를 특수화하면 개인으로 된다. 그러므로 개인을 처리할 수 없는 과학이란 본래 과학도 아무것도 아니다. 과학이 인간생활의 실천을 통하여 얻은 개념이나 공식은 사회기구를 설명하고 처리하는 동시에 그 속에 사는 개인의 경우에까지 특수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로 보아 사회에 대해서 개인은 하나의 개성이고 특수물이다.
 
42
그러나 이 ‘개인’도 또한 ‘사회’와는 별개의 의미에서 일종의 일반성이고 보편성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개인’이나 혹은 ‘주체’는 결코 ‘내’가 아니고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43
그러면 ‘자기’, ‘자아’는 과학으로 처리될 수 있는가? ‘개인’을 아무리 특수화하여도 ‘자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과학의 개념과 공식은 인식추구를 종료하고 도덕은 ‘자기’의 것으로 되어 비로소 문학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과학의 기능을 가지고는 ‘자기’의 문제를 주아주의(主我主義)에 빠지지 않고는 도저히 처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성격, 성품, 취미, 교양 등등에 기(基)하여 움직이는 모든 활동을 처리하는 기능은 문학의 소유물이다. 이러한 ‘자기’에 붙은 것을 가질 때, 다시 말하면 모든 문제를 자기의 일신상의 과제로 하여 풀어버릴 수 있는 입장에 이르러서 비로소 개념은 완전히 주체화되고 도덕, 모랄은 하나의 문학적 관념이 된다. 이 입장이 문학의 입장이다.
 
44
그러나 도덕이 ‘자기’, ‘자아’의 것이라고 말한다든가 일신상의 각도로 파악된 진리가 문학이라든가 하는 것은 결코 문학의 사사(私事)에 떨어진다든가 또는 신변(身邊)심리에 구니(拘泥)된다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다. 실로 ‘자기’를 내세우면서 사사(私事)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 모랄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수차 언명한 바 모랄은 과학적 개념의 합리적 핵심이 없는 곳에는 있을 수 없다. 사상성, 사회성이 일신화(一身化)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예술가가 독자적이라든가 개성적이라든가 유니크하다든가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이 갖는 보편성이나 사회성을 일신상 각도로써 높이 획득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고도의 예술성이라는 것도 또한 이것을 말함에 불외(不外)하다.
 
45
임화 씨가 나의 「자기분열에의 성찰」을 그릇되게 오해한 원인도 온전히 ‘자기’나 ‘자아’에 대한 성찰에서 과학적 핵심을 발견치 못한 때문이다. 이리하여 씨는 보들레르나 이상의 자기분열의 제출이나 나의 자기분열 성찰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임씨는 양자의 차이로서 오직 포즈의 다른 것을 발견할 뿐인데 이것만 가지고는 양자를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갑이 과학적 핵심을 가졌고, 을이 안 가졌다는 것이 단순한 포즈의 문제일런가? 아니 그것이 만일 단순한 포즈의 문제라 하더라도 이러한 차별이 객관적으로 아무런 구별을 낳지 못하였을까? 작가가 ‘자기’를 소시민 출신이라고 인정한다고 하여도 결코 그것이 자기 분열의 향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46
실로 ‘자기’의 성찰 뒤에 과학적인 합리적 핵심을 갖고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포즈라고 하면 그것으로도 좋다. 그러나 이 포즈는 하나의 주아주의(主我主義)로 가고, 또 하나는 모랄로 가는 주용한 기점이다. 슈티르너나 그의 비판자나 한가지로 ‘자기’ ‘자아’를 성찰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였는가?
 
47
어떠한 작가가 속일 수 없는 ‘캠프’ 위에 서 있을 때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든가 또는 느끼고도 그대로 평화(平和)하다든가 하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것은 못되는 줄 안다. 이것을 느끼고 이것을 성찰한다는 것이 또한 결코 경홀(輕忽)한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의 성찰 뒤에 과학적 인식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48
과학적 인식이 불성실하고 정확치 않는 작가의 자아는 믿을 수 없는 사소설이나 신변잡사로 간다. 과학적 탐구를 답대(踏臺)로 한 작가의 도도(道道)의 일신상 진리화는 풍속 속으로 들어가 개념의 표상화를 얻을 것이다. 진리는 작가 자신의 ‘자기’의 과제로 비약되어야 한다. 문학은 도덕, ‘모랄’을 주체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이것 없이는 리얼리즘의 전진은 공허한 구호로 그칠 것이다. (4월 상순)
 
 
49
[『조선일보』1938. 4. 24]
【원문】일신상(一身上) 진리와 모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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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8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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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신상(一身上) 진리와 모랄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