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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서 좌담회가 저널리즘의 애완물이 되기 비롯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동경서는 근 년간의 30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한 가지 제목을 가지고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여러분에게 기자가 하나 하나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어다가 함께 쭉 모아 놓았던 모양이다. 다시 말하면 방문기의 하나의 변형적 발전으로서 이러한 형식이 유행하다가 그것이 속기술의 발달과 함게 좌담회로 변해진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현재 간행되는 잡지들은 어떠한 것을 물론하고 모두 이러한 좌담회를 열어서 그들의 잡지의 매상고를 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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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문 잡지도 이것을 때때로 사용하여 왔고 또 지금도 많이 이 형식을 이용하면서 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망각되어 있는 것 같다. 좌담회란 속기술과 함께 발달하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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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속기술이 보급되지 않고 또 그러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조선에서 좌담회가 지상에 펼쳐질 때 늘상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함이 이 탓이다. 이야기한 것이 생략되는 것쯤은 덮어둔다 치더라도 전혀 하지 않은 말, 또는 정반대의 말이 기재되는 것은 비일비재다. 터무니 무슨 말인지 의미가 통하지 않는 개소(個所)도 물론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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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필기하는 기자의 교양 정동에 의하여 제주(制肘되고 다시 기자의 지필(遲筆)에 의하여 멸렬(滅裂)된다. 졸변(拙辯)이 웅변이 되고 웅변이 졸변이 된다. 마치 활동 사진의 필름 같아서 크랭크를 느리고 돌리면 영사된 것은 더 빨라지는 것과 같다. 서투르게 느리게 무교양하게 상말이나 주섬주섬 늘어놓으면 대개가 기록되고 빠르게 체계 있는 높은 지식이 이야기되면 대부분은 기자의 귓등을 무정거 통과하여 이야기는 하나도 필름에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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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가끔 좌담회에 나갔다 이런 성과를 본 자이지만 아마 웬만한 사람치고 이런 느낌을 품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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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저널리즘이 좌담회를 취급하려면 인수(人數)와 이야기될 것과를 세밀히 측정하고 다시 속기할 사람의 능력 교양들도 참작하여 분수에 넘치는 계량은 아예 세우지 말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속기술이 없는 조선에 대담왕방기(對談往訪記) 등으로 좌담회 형식이 옮아가는 것이 이(理)의 당연한 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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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8년 2월 19일, ‘고기도(cogito)’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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