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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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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사변의 회고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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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사변도 벌써 2주년의 과거사이다. 중국문제에 있어 팔자가 무슨 인연인지 만주사변이 9월18일, 상해사변이 1월28일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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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대전 중에 버든의 격전을 능가할 만한 전투가 미상에 전개되었으나, 선전포고 없는 전투였으므로 하나의 사변에 그친 것이다. 세계적 도시인 상해에서 열국의 환시리에 일본과 중국의 충돌을 야기케 된 그 원인은 물론 하나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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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씨는 항상 채연해(蔡延楷) 장군의 19로군을 미상에 주둔시키고 안심을 못하였다. 중일의 충돌도 피하려니와 장씨의 지반인 상해에 장구히 주둔한다면 양호위환(養虎爲患:호랑이를 키우는 걱정)의 의구심을 갖게 되어 2,3일내에 철퇴시키고 상해의 치안은 헌병과 교대하라는 내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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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만 경과하여 19로군의 그림자가 상해에서 소멸되었다면 상해사변은 없었으리라는 관측도 없지 않다. 채연해 휘하의 19로군 군대가 당시 상해 주둔군이었더라면 상해사변이 일어났을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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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철혈군을 인솔하고 19로군을 내원하려던 장발규(張発奎) 장군의 통과를 장씨가 윤허하였다면 상해사변이 월여 이상까지 계속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환언하면 상해사변은 장씨의 명령보다도 채씨의 자발적 행동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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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白川[백천]) 대장의 신예가 유하 상륙과 아울러 남경후의 냉락(冷落)은 상해사건의 종말을 촉구한 것이다. 상해사변은 관전자에게 천재일우의 호기를 주었다. 육해공군의 근대식 전쟁이 상해가 아니고서는 완전히 또 무난히 관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조계(租界)관계로 중일 양군이 소주하 이북에서만 군사행동을 국한하였으니 실로 세계에 유래가 없는 제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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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상해사변은 중국 인민에게 일대 시금석이었다. 중국 인민의 심리에 만주 즉 동3성은 변방의 한가한 고장으로 신강이나 서장을 연상하나, 전국의 심장이라 할 만한 상해에서 실전이 외국과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함은 청일전쟁 이후 처음이고, 청일전쟁도 벌써 기억에서 분명치 못할 만치 오래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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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내란만은 단절된 바 없었으나, 외국인과 충돌하여 처음으로 전쟁다운 전쟁을 겪으며 정신상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근자에 항공열로 비행기 헌납식 등이 빈번함이 바로 이 상해사변이 증여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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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193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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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1934년 1월호)
【원문】상해사변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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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呂運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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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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