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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주의 문학론 음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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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1
권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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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문학론 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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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즘의 예술관적 입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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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朝文)」편자로부터 아나키즘의 예술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기는 고향에 있을 때부터 수삼 차였다. 그러나 발목을 붙들어 매고 싸도는 모든 사정은 이에 응할 자유와 여유를 주지 못하여 부득이 호의에 답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경성각(京城閣)으로 씨를 방문하매 씨의 첫 주문이 예의 이 제목이다. 그의 친절한 호의에 부득이 거절치는 못하였으나 앞으로 체절(締切) 일자가 불과 수일이니 그날 그날의 시간이 신통하지 못한 생활전(生活戰)에 거의 다 허비하는 처지로서 게다가 아무런 예비도 갖지 못하였음에랴. 조그마한 틈을 이용하여 붓을 들기기는 들었으나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추태를 면하기 어렵겠음으로 차라리 초지(初志)를 고쳐 여기에서는 맑스주의의 예술관을 원칙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의 문예상의 입장을 약술하여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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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서 현상을 현상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긍정하면서 그 위에서 인식의 방법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비(非)의 부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긍정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흔히 이 간단하고도 명료한 사실을 망각하고서 덮어놓고 대냥거름이라는 셈으로 배타일관의 외고집들만을 세움으로 잡다무용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조선의 문단씨름이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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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문학론자가 프롤레타리아문학론 그 중에도 맑스주의문학론을 비난하며 “이데올로기는 예술작품의 전적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예술은 맑스주의 명령하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위하여 정치적 도구가 될 아무러한 약속도 갖지 않았다.” 운운하는 것이라든지 맑스주문학론자가 정통파 문학론을 공격하며 ‘예술의 가치는 그 작품이 가진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결정된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위하여 활동하는 작품만이 예술작품의 가치가 있다.’ 등의 논쟁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각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하여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요컨대 전자는 형식 고조론일 것이며 후자는 내용 유일론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형식문제, 내용문제 등만을 가지고서 거의 직업적으로 아당(我黨)의 이론만을 주장하기에 급급하며, 심하게는 모욕적 언설을 던짐으로써 개가를 부르짖는 일방(一方)은 없지 않다.(최근에는 좀 침정(沉靜)된 감이 있다 하겠으나 조선에 소위 계급문학이 주창된 이래 논쟁의 그 대부분이 거의 이러한 류(類)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구누구라고 지명할 것은 아니나 극심하게 육탄전을 시험한 만용문인들까지 있음에서 내하(奈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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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문제는 계급적 대립관계에 귀속시켜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계급 자진영내에서도 이론이 일치하지 못하여 서로 관각(觀角)을 일으키고 있는 이상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간단하여야 할 이 문제가 사실에 있어서는 정반(正反)되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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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상은 어디까지든지 현상이다. 그 원칙을 구명함으로부터 모든 현상은 간단히 설명되며 해결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원칙적으로로 맑스주의의 예술상의 지위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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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는 한 개의 정치학설이나 경제학설이 아니라 일 세계관이다.(그것의 옳고 그른 것은 별문제이다.)그럼으로 맑스주의 작가나 평가(評家)는 단순한 의미의 작가와 평가(評家)이기 전에 먼저 맑스주의자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그의 당면 목적은 조직화한 프롤레타리아에 의하여 부르주아의 정권××하기 위한 정치적 일점(一點)에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역량을 순화집중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을 또한 인식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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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을 정확히 인식한다면 맑스주의가 그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문학예술을 한 개의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에 무슨 이존(異存)이 있을 여지를 가질 것이냐. 맑스주의 문학론자에게 있어서는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적 기준은 어디까지든지 정치적 척도일 것이니, 한 개의 문예작품을 평가함에도 아당(我黨)의 승리를 위한 그 공헌척도의 대소(大小)로써 가치를 결정할 것은 정치적 견지에 있어서 정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이 근본기준을 망각한다면 여하(如何)히 우수한 작가이요 또 평가(評家)라 할지라도 그 순간부터 그는 벌써 맑스주의적 작가와 평가(評家)는 아닌 것이니 맑스주의권 내로부터 퇴장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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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통파문학론자의 주장과 같이 예술문학은 맑스주의의 명령과 지배하에 정치적 의미의 선전적 도구나 요동적 수단이 될 아무러한 약속도 갖지않았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선언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의 ×××××를 절대 목적으로한 정책론적 입장에서 예술문학을 취급하는 이상 예술은 어디까지든지 예술이라는 등의 소위 절대 순수예술론적 태도로써 대항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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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맑스주의의 문학은 예술적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서 문학론으로부터가 아니다! 정치론으로부터 출발한 것임을 거듭 인식하여야 한다. 모든 일체의 것을 희생하면서라도 계급적 대립을 절멸(絶滅)함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을 그 프로그램으로 하고 정치적 일점에 총역량의 집중을 강요하는 맑스주의니만치 예술만을 예술가의 손에 전매특허처럼 허용할 리가 없을 것은 물론이니, 여기에서 한갓 문학이론만을 가지고 시비를 논한다는 것은 도로(徒勞)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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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을 가끔 듣는다. 즉 ‘사회주의문학도 예술인 이상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이어야 한다.’ 이 말은 맑스주의 문예론자 간에도 흔히 논의되는 모양이다. 물론 맑스주의문학도 문학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문코자 하노니 그러면 이 제언은 과연타당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아무런 모순도 발견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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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문학작가도 작가인 이상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가여야 한다.’ 하면 어찌 될 것이냐? 그러나 ‘맑스주의문학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맑스주의자 여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원칙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여야 한다.’는 것과 ‘맑스주의자여야 한다.’ 는 것과의 이 두 가지는 맑스주의의 근본기준을 거절하고 아니하는 데에 따라서 각각 성립될 양개의 상극성을 가진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맑스주의문학도 예술인이상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이여야 한다.’ 는 것을 그대로 허용할 수 있다면 이 경우에 ‘맑스주의문학도’라는 것을 바꾸어서 ‘자본주의문학도 문학인 이상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이어야 한다.’ 이론과 이론상 차이점이 어디 있을 것이냐?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예술의 근본기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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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회주의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그 근본기준으로 하느니 만큼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이어야 한다.’ 이 ‘무엇보다도’ 라는 것부터 기각(棄却)하여야 할 것이며, ‘예술적’이여야 한다는 것을 ‘정치적’ 이여야 한다는 것으로 수정할 것이니 말하자면 ‘사회주의문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주의적 이어야 한다.’는 이 정의가 맑스주의 입장으로서는 가장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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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거니와 맑스주의는 그 강령이 그러하고 정책이 그러한 이상 어떠한 예술론으로써 대항할지라도 그것에는 소호(小毫)의 동요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좀 거북한 예 같으나 오늘날의 법제를 비(非)라 하여 아무리 절규한들 육법전서에 무슨 동요가 있을 것이냐? 육법전서의 각조문은 일일이 정치상 피치 못 할 정책적 수단으로써 규정된 철칙인 이상 문제는 법률조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조문을 낳게 한 정치 그 물건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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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우리는 맑스주의 문학이론의 근본기준을 구명(究明) 하였다. 따라서 맑스주의 문학을 문학의 본질에 모순된 것이라든가 문학의 사도(邪道)라 하는 등의 비난도 그것이 성립될 수 없음을 간파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맑스주의 문학을 상대로 한 제논(諸論)의 초점이 형식과 기교문제 등에 국한 되는 한에 있어서는 문제의 해결은 미해결로써 일단의 해결을 짓는 수 밖에 없는 것도 자명한 일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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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한다고 우리는 결코 맑스주의 문학예술의 불가침적 절대성을 제언하는 것은 아니다. 논의한 여지는 이로부터 있다. 즉 정치적 헤게모니 밑에서 활동하는 맑스주의 작가와 평가의 그 타당성을 긍정하면서부터 문제는 진실성을 가지고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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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스트의 시각으로 볼 때에 예술문학은 한 개의 도구나 수단으로 밖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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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맑스주의 예술관은 가장 완전한 예술관이며 비맑스주의주의 예술관 내지 예술문학은 불완전 또는 무가치한 것일까? 즉 맑스주의적 정치적 가치를 갖지 못한 순수예술작품 다시 말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작품은 아무러한 의미도 갖지 못할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면 그것은 곧 부르주아 사회의 특산물처럼 사유하는 일군(一群)이 없지 않은 모양이나 이러한 이론은 일정한 사회조건 아래에서 항상 반복 된 이론이니 만치 충분히 그 자체의 존재적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거니와 이것은 결코 부르주아사회가 함께 절멸될 최후를 가진 이론이 아니라 사회주의사회에 이르러서도 상상에 족한 존재의 이유를 가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술문학은 반드시 정치적 지명 하에 존립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의무를 그 자신이 가진 것도 아니요, 문예가는 반드시 정당의 명령에 의하여 창작활동을 하지 않으면 아니될 의무를 가진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가 동시에 문예가일 때에는 사회주의에 충실키 위한 한(限)에 있어서 그 창작활동은 사회주의적 실천의식으로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요, 반동주의자는 반동적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문예를 반동적 수단으로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요, 또 민족주의자는 문예창작을 민족주의적인 것으로써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 예술이 일정한 목적의식을 내포하게 되는 것은 그 작자가 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계급적 ×××투쟁의 필요를 의식할 때에 예술가가 동시에 주의자화 함에 불외(不外)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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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더 한번 요약하여 말하면 문학작품을 사회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적 조건에 의한 계급적 투쟁의 필요에서 강요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학의 화해(禍害)도 아니요 행복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의 완전여부는 이 정치투쟁의 필요와 전연 무관계한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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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상의 간단한 이유에 의할지라도 맑스주의 예술관이 가장 완전한 예술관이라는 것은 한갓 독단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맑스주의 예술관이 완전한 예술관이라면 자본주의예술관, 민족주의예술관도 모두 함께 완전한 예술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문학예술을 일정한 목적 아래에 도구로 취급하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것이 없음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이미 지시한 바와 같이 이 모든 것이 상용병존할 수 없으며 또한 완전한 예술론일수 없는 것은 그것이 예술론이기 전에 정책론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과는 관계가 없는 즉 예술적 가치와는 별문제인 각자의 파악한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요구로부터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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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문학예술은 정치투쟁의 필요와 함께 발생한 것이니만치 그 불필요와 함께 소멸할 것은 자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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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맑스주의 문학론을 예술론적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더욱이 완전한 예술론 운운에 대하여서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는 변박(辯駁)할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말하면 혹 성급한 독자중에는 부르주아 예술의 옹호자가 아니냐고 문책할 분이 있을는지도 모르나 우리는 맑스주의 문학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하여 그의 한계와 가치를 정의함에 불외한 것이다. 만일 이것으로 인하여 맑스주의 문학의 존재이유가 조그만치라도 동요될 줄 아는 분이 있다면 그는 맑스주의 본질을 인식치 못한 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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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상의 논 한바 맑스주의의 예술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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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맑스주의 문학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사회주의에의 과도기(?)에 있어 맑스주의 정치××의 필요가 문학을 그 헤게모니 밑에 종속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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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맑스주의 문학은 문학자체가 가진 고유한 예술적 부분 이외에 정치적 부분을 필연적으로 소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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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맑스주의 문학은 정치적 부분을 절대 상위로 하고 예술적 부분을 그 하위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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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맑스주의 문학에 있어서 정치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와의 혼합은 자기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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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맑스주의 문학은 일정한 시기에 있어서 그 특수성과 함께 자멸하고 말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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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곧 우리의 말하는 바 맑스주의의 예술이론은 한 개의 정책론이요, 예술론이 아니며 정치적 방법으로부터 법문학적 방법으로부터가 아니라는 근본이유이다. 이와 같은 목적의식적 문학은 물론 정치적 전위만이 의식을 파악한 문학이니만치 민중적일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예술 그 자체의 자율성에 의한 발육은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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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민중은 어떠한 문학 예술을 요구하는가? 민중과 끝까지 성장 발전하여 나갈 예술은 어떠한 것일까? 이것이 여기에 논의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시간관계상 이것은 차회에 구체적으로 논하겠음을 약속하여 두고 여기서는 우선 이것으로써 각필(擱筆) 한다. (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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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구현(權九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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