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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악기(楓嶽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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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보(徐榮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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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기 (楓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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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명산 가운데 으뜸이 풍악산(楓嶽山)인데, 단풍나무가 많아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또 금강산(金剛山)이라고도 하고 기달산(怾怛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의 자취를 승려들이 발견하였기 때문에 불교어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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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이 동해 가에 있는데, 남북으로 길게 뻗은 것은 만물초(萬物肖) 골짜기이고, 온정령(溫井嶺) 너머에 있는 것은 비로봉(毘盧峯)이다. 변화무궁하게 산줄기가 펼쳐져 있고 웅대한 산세가 구불구불 뻗어 나가다 무더기로 불쑥 솟아서 고성(高城)을 가로지르고 회양(淮陽)까지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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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동쪽을 ‘외산(外山)’, 서쪽을 ‘내산(內山)’이라 한다. 우뚝하게 높은 봉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에서도 비로봉이 가장 높으며 남면(南面)하여 굳게 버티고 서 있다. 비로봉 앞은 중향성(衆香城)이고, 중향성이 뻗어 가다가 다시 우뚝 솟으면 망고대(望高臺)이다. 왼쪽은 구기연(具其淵), 오른쪽은 구룡폭포(九龍瀑布)이며, 그 뒤쪽은 내수점(內水岾)인데, 이를 경계로 내산과 외산이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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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洞天) 가운데 이름난 곳은 다음과 같다. 장안사(長安寺) 골짜기는 내산의 첫째 구비이다. 영원동(靈源洞), 백탑동(百塔洞), 백천동(百川洞)은 온 산의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표훈사(表訓寺) 골짜기인데, 큰 절이 여기에 있다. 그 위쪽은 정양사(正陽寺) 골짜기이다. 또 몇 리를 가서 왼쪽으로 청학대(靑鶴臺), 오른쪽으로 소향로봉(小香爐峯)을 끼고 있는 곳이 만폭동(萬暴洞)이다. 수미수(須彌水)를 지나 또 북쪽으로 올라가면 팔담동(八潭洞)과 가섭동(迦葉洞)이다. 중향성 아래에 있는 것이 백운동(白雲洞)이고, 비로봉 아래에 있는 것이 원적동(圓寂洞)이다. 내수점을 넘으면 효운동(曉雲洞)이고, 여기서 조금 가면 선담동(船潭洞)이다. 또 몇 리쯤 가면 유점사(楡岾寺) 골짜기인데, 골짜기 안이 크고 널찍하며 사찰은 빼어나고 수려하다. 중내원(中內院) 골짜기와 백탑동은 서로 안팎으로 위치해 있는데, 망고대의 맑은 기운이 서리어 만들어진 것이다. 백천교(百川橋) 골짜기와 발연(鉢淵) 골짜기, 신계사(神溪寺) 골짜기 등 여러 골짜기에는 모두 물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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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는 모두 아로새긴 듯한 흰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고, 계곡물은 다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있다. 골짜기는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곳도 있고 깊고 으슥한 곳도 있으며, 환하고 넓어서 놀 만한 곳도 있고 몹시 험하여 아예 오를 수 없는 곳도 있으며, 너무 가팔라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곳도 있으니, 실로 은자가 숨어 살거나 신선이 거처할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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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년(1806, 순조6)에 내가 평강(平康)에서부터 금성(金城)을 지나서 단발령(斷髮嶺)을 넘고, 내산을 거쳐 외산에 이르러 온정령(溫井嶺)을 넘었는데, 모두 이레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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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가 단발령에 이르렀을 때 음산한 가을 날씨에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후리(候吏)가 말하기를 “고개 위에서 멀리 풍악산을 바라보니, 운무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나는 옛날 한자(韓子)가 묵묵히 기도를 올려 형산(衡山)의 운무가 걷히자 스스로 이르기를 ‘정직한 자의 정성이 신명을 감동시킨 것’이라 한 고사를 떠올리며 내심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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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리를 가서 철이령(鐵彜嶺)에 이르자, 멀리 여러 봉우리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침 그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추어, 빽빽한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확 들어왔다. 철이령을 내려와서 큰 계곡물을 만났고,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가 갑자기 또 계곡물을 건넜는데, 곧 하나의 계곡을 거듭 건넌 것이다. 10여 리를 가서 장안사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금강산의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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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남여(藍輿)를 탔다. 벼랑을 오르고 시냇물을 건너서 삐죽삐죽한 돌길을 에돌아가고 빽빽한 수풀을 헤쳐 올랐다. 깊은 골짝을 넘을 때는 허공을 밟는 듯하고 높은 절벽을 딛을 적엔 눈앞이 아찔하였다. 잠깐 사이에 마치 두레박틀처럼 오르내리고 보니, 기이한 봉우리들이 휘돌아 합쳐져서 끝없이 번갈아 나오는데, 가파르게 솟은 것은 무시무시하게 사람을 덮칠 듯하고 불쑥 높이 솟은 것은 눈을 부릅뜬 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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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이제 끝났나 싶더니 홀연 휘둘러 감았고, 맑은 물과 기이한 바위가 마치 사람을 기다린 듯이 나타났다. 산은 순전히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갈라진 틈이 많고, 그 틈새에는 온통 흙이 붙어 있어서 좋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산허리 아래로는 거대한 나무와 늙은 등덩굴이 어지럽게 뒤엉켜서 울창하고 깊숙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는 9월 초순이었는데,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몹시도 화려하여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산의 여러 절과 골짜기들은 내 발길, 눈길이 닿은 곳마다 다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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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향성의 서쪽에 있는 정양사는 산의 3분의 2쯤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래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헐성루(歇惺樓)와 천일대(天一臺)가 중향성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수미봉(須彌峯)과 가섭봉(迦葉峯)에서부터 망고대(望高臺)와 현불점(現佛岾)에 이르기까지 비로봉과 일월봉(日月峯)이 거듭 포개어 등을 맞대고 찬란하게 늘어서서 진면목을 내 앞에 훤히 드러내며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봉우리들이 북동쪽으로부터 동쪽을 거쳐 동남쪽에 이르기까지 20리를 뻗어 있는데, 원근과 고저에 따라 그 형상이 끝없이 변하고, 아침저녁으로 구름이 끼거나 해가 비치면 그 형색이 갖가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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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일만이천이라고 일컬은 숫자를 지금 다 꼽을 수는 없지만 대략 말해 보면 이러하다. 모난 것과 둥근 것, 날카로운 것과 곧은 것, 평평한 것과 비스듬한 것, 굽어보는 것과 우러러보는 것, 듬성듬성 서로 떨어져 있는 것과 붙어서 서로 이어진 것, 내달리며 서로 뒤쫓는 것과 마주하고 읍하면서 서로 양보하는 것, 툭 불거져 튀어나온 것과 불쑥 솟아나 다투는 것, 달려가며 돌아보지 않는 것과 나아가다 다시 돌아오는 것, 천천히 가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기한에 맞추려는 듯이 바삐 움직이는 것, 삐친 듯 뾰로통한 것과 뽐내는 듯 단아한 것, 화장을 한 듯 예쁜 것과 성내어 소리치는 듯 위엄스러운 것 등 종류마다 같은 것이 없고 모양도 제각기 다르니, 신묘한 변화를 이미 다하였고 교력(巧曆)도 능히 헤아려 볼 수가 없으며, 구경을 하려고 해도 이루 다 감상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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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몇 리를 가서 만폭동에 이르렀다. 팔담동과 수미동(須彌洞)의 계곡물이 한데 모여 물을 내뿜고 큰 너럭바위가 그 물을 받고 있는데, 세차게 부딪쳐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에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쪽 골짜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니, 계곡물은 청호연(靑壺淵), 용곡담(龍曲潭), 만절동(萬折洞), 태상동(太上洞), 청랭뢰(淸冷瀨), 자운담(慈雲潭), 우화동(羽化洞), 적룡담(赤龍潭), 강선대(降仙臺)를 지나고, 산봉우리는 청양봉(靑羊峯), 침향근석(沈香根石), 삼난석(三難石)으로 이어지는데, 구비마다 모양이 사뭇 달랐다. 골짜기에 들어가 몇 리를 더 가니, 바닥에 깔린 너럭바위와 옆에 서 있는 절벽은 모두 층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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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리를 가자 수미탑(須彌塔)이 갑자기 불쑥 솟아서, 산에 10분의 1쯤 붙어 있는데, 나머지 부분은 둘레를 빙 돌 만하였다. 모양은 둥글고 조각한 것처럼 주름이 져 있었다. 물굽이에 닿아 있는 층계는 마치 융액이 흘러내리는 듯하고 상륜(相輪)은 하늘에 닿을 듯하며 큰 바위가 받침대가 되었는데, 물이 그것을 감돌아 흐르고 있었다. 근방의 바위는 대부분 층층이 쌓여 있는데, 모난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었다. 모난 것에는 정사각형부터 비스듬히 모난 것, 직사각형도 있으며, 둥근 것은 완전히 동그란 것부터 비스듬히 둥근 것, 타원형도 있었는데, 모난 것과 둥근 것의 변화가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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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지나 나아가자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고, 봉우리마다 교묘함을 다투는 듯이 우뚝 솟아서 주옥처럼 찬란하게 번갈아 빛을 발하는데, 쌓여서 탑처럼 된 것은 더욱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숲은 빽빽하고 길도 없어서 남여에서 내려 옷자락을 걷어쥐고서 잡목을 헤치고 계곡물을 건넌 뒤 물줄기가 다한 곳에 이르자 폭포가 나왔고 폭포 옆으로 돌길을 만났다. 왼쪽은 영랑점(永郞岾)이고, 오른쪽은 수미봉인데, 정양사에서는 아득히 보이던 것이 이곳에 이르자 바짝 다가왔다. 비탈길이 산의 10분의 6쯤 되는 높이에 있었으므로 좌우의 봉우리들이 곁에서 굽어보는 것 같았다. 험준하고 울퉁불퉁한 봉우리의 아로새기고 다듬은 듯한 흔적이 온갖 형상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들쭉날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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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폭동에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청룡담(靑龍潭)과 세두분(洗頭盆), 백룡담(白龍潭)에 이르렀다. 이곳의 물은 매우 맑고 투명하였고 바위는 몹시 희고 깨끗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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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북쪽으로 올라가자 팔담(八潭)에 이르렀는데, 팔담의 이름은 흑룡담(黑龍潭), 비파담(琵琶潭), 벽하담(碧霞潭), 분설담(噴雪潭), 진주담(眞珠潭), 구담(龜潭), 선담(船潭), 화룡담(火龍潭)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10여 리쯤 되고 각기 하나의 바위가 바닥을 이루었는데, 높직하기도 하고 나직하기도 하며, 가파르기도 하고 평평하기도 하며, 움푹 패어 절구처럼 된 것도 있고, 쪼개져서 구유처럼 된 것도 있으며, 깎여서 홀〔圭〕처럼 된 것도 있고, 동그랗게 웅덩이가 된 것도 있으며, 잇몸처럼 울퉁불퉁한 것, 섬돌처럼 가지런하게 꺾인 것 등 실로 천태만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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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감돌면서 바위에 따라 형체를 드러내는데, 부딪혀 솟구치고 꺾이어 굽이치며, 퍼져서 흩어지고 빙빙 돌다 급히 흐르며, 모여서 웅덩이가 되고 떨어져서 여울이 되며, 물병이 쏟아지듯이 마구 치달리고 못물이 넘치듯이 질펀히 흐르며, 흰 무지개가 드리워진 듯, 비단 한 필을 펼쳐 놓은 듯, 밝은 구슬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그 색깔은 맑고도 검푸른데, 금고(金膏)를 모아 둔 것 같고 항해(沆瀣)가 고인 것 같았다. 그 소리는 패옥(佩玉)이 울리고 허공에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데, 홍종(洪鐘 큰 종)을 두드리고 뇌고(雷鼓)를 울리는 것 같았다. 대체로 정양사에서 산을 구경하였으니 산에서 볼만한 것은 다 본 것이고, 팔담을 유람하였으니 수석의 구경거리는 다 구경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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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담을 다 보고 몇 리를 채 안 가서 마하연(摩訶衍)에 이르렀는데, 이 절은 금강산에 있는 여러 절 가운데 작은 것이다. 땅이 더욱 가파르고 골짜기는 더욱 깊은데, 혈망봉(穴望峯)의 신령스러운 동굴을 영롱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 절 뒤쪽은 가섭봉인데, 정양사 동북쪽 봉우리 중에서 세 번째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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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아래 동문(洞門)은 깊숙하면서도 좁은데 계곡물이 양쪽 벼랑에 닿아 벼랑이 다 깎여 있다. 골짜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옷을 걷고 나아가는데, 한 발 한 발 돌을 골라 밟으면서 이쪽저쪽으로 펄쩍펄쩍 뛰어서 건너갔다. 절벽을 만나면 나무를 엮어 사다리를 만들어서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세워서 잡고 올라갔다. 기울어진 돌길에서는 올라갈 때 배를 깔고 기어 올라가고 내려갈 때는 등을 대고 조심조심 내려왔는데, 똑바로 앞만 바라볼 뿐 감히 뒤돌아보지 못하였다. 골짜기 안의 여러 봉우리들은 우뚝 빼어나고 곱게 주름진 모습이 수미탑과 비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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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산에는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있으니, 비유하자면 옥과 박옥의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 정양사 북쪽으로 마하연까지는 바로 옥에 해당하고, 영원동과 백천동은 박옥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은 격이며, 마하연을 지나면 옥이 다하여 다시 박옥에 가까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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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봉 동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면 만회암(萬灰菴)이 있다. 만회암 동쪽은 백운대(白雲臺)이고, 백운대 아래는 백운동(白雲洞)이다. 이곳에서는 앞에 빽빽하게 늘어선 중향성의 진면목을 조망할 수 있는데, 비탈길이 좁고 위태로워서 쇠줄을 잡고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불지암(佛地菴) 골짜기에 감로천(甘露泉)이 있다.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나와 작은 대나무 홈통으로 물을 받아 마셨는데, 물맛이 우유처럼 달고 부드러웠다. 아마도 육우(陸羽)가 이른 혜산(惠山)의 유천(乳泉)이 이와 같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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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리를 가서 내수점(內水岾)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비로봉을 돌아보니, 온통 웅장하게 땅 위로 솟아 중첩된 봉우리들이 빽빽하고 높게 솟아서 아득하고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이곳은 내산의 등이고, 중향성에서 보이는 것이 내산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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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유점사(楡岾寺)에 도착하였다. 고성 군수(高城郡守)의 편지가 와 있었는데, 편지에서 “어찌 삼일호(三日湖)를 먼저 구경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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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에 따라 견구(犬邱)에 올랐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는데, 맑고 푸른 물이 하늘에 닿았다. 바다 가운데 산들이 있어서 구름과 파도 속에 출몰하고 있었는데, 중이 “이곳이 해금강(海金剛)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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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교(百川橋)에 이르러 다시 남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다리는 훼손되었고 단지 오래된 비석만이 남아 있었다. 다리 동쪽에는 외원통사(外圓通寺)의 옛터가 있었다. 그다음 골짜기는 발연동(鉢淵洞) 하류의 두 골짜기이다. 정유년(1777, 정조1) 홍수가 진 뒤로 절(발연사(鉢淵寺))이 문을 닫아 다시는 갈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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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리를 가서 고성의 들녘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외산(外山)을 바라보니, 우뚝 빼어난 여러 봉우리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고장강(顧長康)이 회계(會稽) 산천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일천 바위는 빼어남을 겨루고, 일만 골짜기는 물이 다투어 흐른다.〔千巖競秀 萬壑爭流〕” 하였는데, 내가 여기서 그 말이 사물을 기막히게 묘사한 것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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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호는 영동의 여러 승경 중에서 미목(眉目)에 해당한다. 호수 가운데에 섬이 있고 섬에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신라 때의 사선(四仙)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 호수의 승경은 내가 지은 〈몽천암기(夢泉菴記)〉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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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사(神溪寺)는 구룡연(九龍淵) 아래의 골짜기에 있다. 비스듬히 에워싸고 있는 검푸른 산봉우리가 마치 가을 하늘에 창을 벌여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대체로 외산에는 흙이 많은데, 이 골짜기의 봉우리 중에는 빼어난 바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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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를 따라 물길을 거슬러 20리를 가서 비봉폭포(飛鳳瀑布)와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렀다. 돌길은 더욱 험하고 바위는 더욱 미끄러워 남여를 멘 사람들이 소처럼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렸으므로 남여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발이 시큰거려 더욱 애를 먹었다.
 
32
10리를 더 가서 구룡폭포(九龍瀑布)에 이르렀다. 온 골짜기는 큰 바위가 패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거대한 반석은 만 명이 앉을 만큼 널찍하였다. 절벽의 높이는 머리를 치켜들고 보아야 꼭대기를 볼 수 있는데, 사방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이어 붙인 곳은 볼 수 없었다. 폭포의 높이는 30길쯤 되는데, 두레박줄을 걸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무지개를 머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우레가 울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세차게 부딪치며 쏟아지는 물소리가 마치 귀신과 전투를 벌이는 것과도 같았다. 폭포 아래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환하게 빛나며 출렁이는 물결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데, 황홀하여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사람의 머리털을 쭈뼛 곤두서게 하니, 이곳이야말로 신물(神物)이 깃들어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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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옆으로 절벽이 쌍으로 솟아 있는데, 마치 돌문의 기둥 같았다. 좌우로 촘촘히 감싸고 폭포를 보호하고 있으니, 비록 이 골짜기에 들어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앞으로 곧바로 다가가지 않으면 폭포를 볼 수가 없었다. 폭포에 구기폭포와 구룡폭포가 있는 것은 탑에 수미탑과 백탑이 있는 것과 같은데, 그 두 가지 모두 나는 하나는 보고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하였으니, 지금 감히 우열을 가리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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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초(萬物肖) 골짜기는 온정령 북쪽에 있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기문에서 “그 괴이한 형상들이 온갖 모양을 다 갖추고 있다.”라고 대단스럽게 말하였는데, 뒷사람들은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온정령 길을 따라가다 올려다 볼 수 있는 봉우리 하나뿐이다. 그 크기는 비로봉과 같고, 작은 봉우리들이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으며, 색상이나 모습은 대체로 중향성과 비슷하면서도 정세함은 그것을 능가하였는데, 봉우리의 겉모습만 놓고 보아도 아름다움과 교묘함은 현격히 차이가 났다. 봉우리 안의 여러 골짜기들도 기이하고 빼어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가마꾼을 믿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늙어 감에 따라 마음먹은 대로 다 찾아다닐 수 없을 것이므로 산에서 나오는 날 마음속에 아쉬움이 있었다.
 
35
여러 경치를 기록하면서 중심은 상세하게 하고 주변은 간략하게 하였으니, 이는 큰 것을 거론하면 작은 것은 자연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보덕굴(普德窟)의 구리 기둥과 묘길상(妙吉祥)의 석불, 삼일호의 붉은 글씨가 새겨진 옛 각석(刻石), 여러 사찰의 시주로 받은 보기(寶器) 등도 대단한 구경거리들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므로 다 생략하였다.
【원문】풍악기(楓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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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18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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