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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유기(東遊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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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李穀)
동유기는 현전 관유기 중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을 구경한 작품으로는 가장 오래된 글이다. 지은이 이곡이 1349년 가을, 개성을 출발하여 천마령을 넘어 금강산을 거쳐 내금강에서 시작, 외금강 까지 탐승한 기행문이다. 8.9월에 관동지방을 유람하고 그 체험을 서술 한 것인데, 이 관동유람의 성격은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일종의 도피성 유람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은 산수유람의 즐거움을 서술 한 글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사대부의 관인의식이 짙게 베어 있다. 그중에서도 민생, 지리, 유적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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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기(東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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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구년(1349) 가을에 금강산에서 노닐고자 8월 14일 개성을 출발하였다. 이후 8월 21일에는 천마령을 넘었으며, 산 아래에 있는 장양현에서 잤다. 이 곳은 금강산과는 30여 리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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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식사를 대접받고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웠다. 마을 사람이 이르기를, "금강산에서 놀러온 사람들 가운데 구름과 안개 때문에 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가 허다합니다."라고 하였다. 동행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근심스러운 표정을 14지었고, 마음속으로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기를 기도하였다. 금강산에서 5리쯤 못 미쳐, 어두운 구름이 점차 엷어지면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고, 배재령(拜岾)에 올랐을 때는 하늘이 맑게 개여서, 산이 마치 칼로 긁어낸 듯 뚜렷하였다. 이른바 일만이천봉을 역력히 셀 수 있었다. 무릇 금강산에 오르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거치는데, 이 고개에 오르면 금강산을 볼 수 있고, 금강산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므로, 이 고개를 '절재'라고 부른다. 이 고개에는 예로부터 집이 없었으므로,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쉴 수 있게 했다. 지정 칠년(1347)에 자정원(資正院) 영사(令使)인 강금강(姜金剛)이 중국 임금의 명령을 받고 와서, 큰 종을 만들어 배재령의 정상에 누각을 지어 거기에 달아 두고는, 그 옆 절에 있는 중으로 하여금 종을 치게 했다. 산 위에 우뚝 선 종의 검푸른 쇳빛이 눈 덮인 산에 쏘이면 그 절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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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못되어 표훈사에 이르러 잠깐 쉬고, 한 동자승의 인도로 산에 올랐다. 동자승이 말하기를, "동쪽에는 보덕관음굴이 있는데, 사람들은 여기를 먼저 구경합니다.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깊고 험하지요. 또한 서북쪽에는 정양암이 있습니다. 이 절은 우리 태조(왕건)께서 창건하셨으며, 법기보살의 존상(尊相)을 모시고 있습니다. 가파르고 높긴 하지만 가까운 편이므로 오를 만합니다. 정양암에 오르시면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관음보살이야 어디엔들 없겠느냐? 나는 금강산의 형승을 보고자 왔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정양암에 먼저 가보지 않겠느냐?"라고 말하였다. 이에 나무를 붙잡고 기어서 정양암에 오르니, 과연 듣던 바 그대로여서 마음이 매우 흡족하였다. 보덕관음굴에도 가려고 하였지만 날이 이미 저물고, 산중에서 머물 수도 없었기에, 신림암, 삼불암 등 여러 암자를 거쳐 계곡을 따라 내려와 저물녁에 장안사에 이르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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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일찍 산을 나왔다. 철원에서 금강산까지가 삼백 리이니, 서울인 개성에서는 오백리여 리인 셈이다. 하지만 강과 고개가 거듭 나타나고 지세가 깊고 험하여 금강산에 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이 산의 이름은 불경에 적혀 있고,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인도처럼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람도 종종 와서 구경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개 보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여서, 우리 나라 사람 가운데 서촉의 아미산과 남월의 보타산을 구경한 이들은 모두 전해 듣던 것만 못하다고 말한다. 나는 비록 아미산과 보타산을 보지는 못했지만, 금강산은 보니 듣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비록 뛰어난 화가나 시인의 손과 입을 빌더라도 금강산의 모습은 제대로 형용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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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 장안사에서 출발하여 천마산의 서쪽 고개를 넘어 통구에 이르러 잤다. 무릇 금강산에 입산하려면 천마산의 두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고개에 오르면 금강산이 보인다. 이 때문에 고개를 넘어 금강산에 입산하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금강산의 험준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금강산에서 나올 때에야 천마령을 넘어 금강산으로 들어오는 길이 험난함을 알게 된다. 서쪽 고개는 좀 낮지만, 오르내리는 거리가 30여 리나 되고 몹시 험준하여 발단령(髮斷嶺)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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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회양부에 이르러 하루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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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철령관(鐵嶺關)을 넘어서 복령현에서 묵었다. 철령관은 우리 나라 동쪽의 요새로 15단 한 명의 군사만으로도 만 명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철령관의 동쪽에 있는 강릉 등을 관동(關東)이라고 부른다. 1290년에, 원나라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킨 원나라 태조의 막내동생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이 중국에서 전쟁에 패하여 우리 나라로 몰려 들어와 개원 등의 여러 군에서 관동으로 쳐들어오니, 우리 나라는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철령관을 지키게 했다. 적은 등주(登州) 서쪽의 여러 주에서 노략질하며 등주에 이르자, 마을 사람을 시켜 정탐하도록 했다. 그런데 나유는 정탐꾼을 보고 적이 온 줄 알고 철령관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이에 적들은 무인지경을 밟듯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흉흉했다.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산성으로 들어가거나 섬으로 피난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행히 원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야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철령관의 험준함을 보니, 이곳은 참으로 한 사람만으로도 능히 천만인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나유는 실로 소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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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등주에 이르러 이틀을 묵었다. 지금은 화주(和州)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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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일찍 화주를 떠났다. 학포 어귀에서 배에 올라 바다로 가서 국도(國島)를 구경하였다. 섬은 해안에서 십리 쯤 떨어져 있으며, 섬의 서남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물가에 흰 모래는 비단 같으며, 그 위에 평지가 200평 정도 된다. 땅의 형세는 마치 반쪽 구슬과 같은데 가운데에 집터가 있다. 어떤 이의 말로는 중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그 위에 산이 고리처럼 둘러쳐 있는데 그리 높지는 않으며 풀들로 덮혀 있고 나무는 없으니 그저 둔덕일 뿐이다. 배를 타고 서쪽으로 조금 가니 해안의 형세가 조금 달라진다. 해안의 암벽은 모두 직사각형으로 머리빗의 살처럼 반듯하게 서 있다. 바닷가의 암석은 둥글고 평평한 것이 늘려 있는데, 한 사람 정도는 앉을 만하지만 다듬어져 있지는 않다. 수 백 보를 더 가니 해안 암벽의 높이가 백 척에 이르고 그 암석의 색은 희며 직사각형이었다. 암석의 길이는 거의 같았고, 모든 암석은 꼭대기에 작은 돌 하나씩을 이고 있었다. 마치 무덤 앞의 망두석(望頭石) 같아서, 눈을 들어보니 놀랍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는 작은 굴이 하나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니, 갈수록 좁아져 배가 들어갈 수 없었다. 굴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으며, 그 좌우의 한 무더기의 암석은 바깥쪽과 같되, 좀더 가지런하였다. 그 위에 돌부리를 늘어뜨린 암석은 모두 바둑판을 뒤집어 놓은 듯, 톱을 잘라 놓은 듯하였다. 이로써 볼 때, 외견상으로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섬 전체가 직사각형의 암석을 묶어 세운 듯하다. 굴은 깊고 험하여 넋이 떨려 오래 머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갔다. 가다보니 한쪽 면이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암석이 있기에, 배에 내려 빙빙 돌아 기어올라 가보니 굴에 있는 암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암벽은 그리 높지 않으며, 암벽의 아래쪽은 평평하였다. 널려 있는 둥근 암석에는 천 명도 앉을 수 있을 듯하다. 구경꾼들은 반드시 여기서 쉬는데, 어떤 사람은 머물러 술을 마시니, 바람이 일어날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여기는 밥을 끓여 먹으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거주할 곳은 못되었다. 암벽 옆으로 동남쪽으로 수 백 걸음을 가니, 암석이 다소 달라졌다. 암석들은 네모난 철망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물에 닳고 닳아서 둥근 모양의 돌이 작아졌다. 그 길이는 오륙십 척이다. 돌기둥들의 모양도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표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암석들은 철망석(鐵網石)이라고 부른다. 국도의 모습은 대략 이러한데, 그 기이하고 괴이한 형상은 필설로는 그려낼 수 없으니, 진실로 조물주가 어떻게 이렇게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 지 못하겠다. 포구로 돌아와 술잔을 들어 서로 치하했다. 하나는 승경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랑16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포구에서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에 이르러 원수대에 오르니 드넓고 맑은 호수에 소라 모양의 섬이 하나 떠 있으니 기이한 풍경이었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머물 수 없기에, 현의 관아(縣館)에 이르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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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흡곡현 동쪽 고개를 넘어 천도에 들어가고자 섬의 형상을 물어보니 섬에는 구멍이 있어서 남북으로 통하며 바람과 파도만 드나들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천도를 거쳐 남쪽으로 가야 총석정에 이를 수 있는데 그 거리는 8, 9리이며, 총석정을 거쳐 남쪽으로 가야 금란굴에 이를 수 있는데, 그 거리는 10여 리라고 한다. 또한 배에서 바라보는 그 곳 풍경은 형언할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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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바람이 약간 불어 배를 탈 수 없었고 때문에 천도에 갈 수 없었다. 해변을 따라서 총석정에 이르니, 통주의 고을 수령인 심군이 총석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석정의 사선봉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개의 암석이 하나로 묶여 있고 그 암석은 직사각형이어서 대개 국도에서 본 것과 같으나 암석의 색이 검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을 뿐이다. 위에서 내려보니 네 봉우리는 제각각 우뚝 서고, 깎아지른 절벽도 우뚝하여, 동으로는 바다가 만리에 닿아 있고, 서로는 고개가 천 겹으로 이어져, 실로 관동의 장관이다. 옛날에는 절벽 위에 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동쪽 봉우리에도 옛 비석이 있는데, 마멸되어 한 자도 알아볼 수 없으니, 언제 세운 것인지 모른다. 어떤 이의 말로는 신라 때 영랑, 술랑 등의 화랑이 무리 3천명을 이끌고 여기에 놀러왔다고 하니, 이 비석이 그들이 세운 것인가? 역시 알 수 없다. 사선봉에 이르니 그 위에 작은 정자가 있기에 술자리를 베풀었고, 날이 늦어 통주에 이르러 잤다. 통주는 옛날 금란현으로 성의 북쪽에는 석굴이 있는데 사람들은 금란굴이라고 부른다. 여기는 관음보살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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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배에 올라 해안을 따라 굴로 들어가 보니, 굴 안에 관음보살의 형상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굴이 깊고 좁아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선원이 말하기를, "제가 여기에 거주한 지도 오래되었지요. 원나라의 사신이나 우리나라의 시골 선비님, 근처에 부임한 나리 등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유람 온 일반인 등 귀천을 막론하고, 꼭 들어가 보고자하며, 매번 제게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지요. 하지만 저는 정말 들어가기 싫습니다. 일찍이 작은 배를 타고 홀로 굴 안으로 들어가 끝까지 가 보았지만, 볼 만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손으로 문질러 보니, 이끼 낀 돌일 뿐이었고, 나와서 돌아보니 뭔가 있는 듯하였지요. 아, 제 정성이 부족했던 지 보살은 보지 못했지요. 하지만 뭔가 있는 듯한 느낌을 얻은 것은 이른바 '오래 생각한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법이다'라는 것이 아닐지요."라고 하였다. 나는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굴 동쪽에는 돌로 된 못(石池)이 있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관음보살이 목욕하던 곳이라 한다. 또 암석들도 있는데, 각각의 크기는 사방 한 치이며 무리를 이루어 넓이가 몇 묘에 이르고 모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사람들이 통족암(痛足岩)이라고 부르는데, 대개 관음보살을 발로 밟아 아프다고 하며, 암석 또한 이 때문에 기울어졌다고 한다. 금란굴에서 나와 임도현에 이르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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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고성군에 도착하였다. 통주에서 고성까지는 150여 리이다. 이는 금강산의 뒤쪽으로 깎아지른 암석과 험준한 산세로 인하여 사람들이 외금강산(外山)이라고 부른다. 대개 내금강산과 더불어 그 기괴함을 다툴 만하다. 동남쪽에는 유점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큰 종과 53개의 동불상이 있다. 사람들의 말로는 신라 때 53개의 불상이 여기 있는 종을 타고 서천축국에서 바다를 건너 고성 해안에 와서 정박하였으며 나중에 여기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고성의 남쪽에는 게방촌이 있는데 실은 산기슭이다. 게방촌에서 가파른 길 60리를 오르면 유점사에 이른다. 처음에 나는 함께 온 사람들과 약속하기를 유점사에 와서 종과 불상을 보기로 하였는데, 여정이 멀고 험하여 말들이 등과 발굽에 상처가 생겨 뒤따르지 못하는 놈들이 있어 산에는 오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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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일찍 일어나 삼일포에 이르렀다. 삼일포는 고성 북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다. 배에 올라 서남쪽의 작은 섬에 이르니 무지개 형상의 큰 암석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돌로 만든 함이 있고 함 안에는 석불이 있다. 세상에서 미륵당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 절벽 동북쪽에는 여섯 글자의 붉은 글씨가 있는데, 가서 보니 세 글자 두 줄이었는데,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고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술랑남석'의 네 자는 뚜렷하였으나 아래의 두 자는 희미하여 알아볼 수 없었다. 옛날에 유람객들의 뒷바라지를 고달파한 마을 사람이 글자를 쪼아버렸으나, 글씨의 깊이가 5촌 쯤이나 되어 자획이 깎여나가지 않았다 하니, 지금 두 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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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배를 돌려 사선정에 올랐다. 사선정은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있다. 정자 위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이른바 서른 여섯 봉우리의 그림자가 호수에 거꾸로 비쳐 있다. 호수의 넓이는 백 경(頃) 가까이 되며 그 물이 맑고 깊고 가득 차 있어 실로 관동의 승경이며 국도에 버금간다. 이 날 마침 군수가 없고 다만 하급관리가 술상을 마련했는데 혼자 마실 수 없어 배를 타고 나왔다. 사람들의 말로는 이 호수는 사선이 놀던 곳이라 하며, 서른 여섯 봉우리에는 봉마다 비석이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2)이 모두 모와 물에다 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호종단은 중국 남당(南塘)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오도(五道)를 순시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비석을 보면 그 글자를 긁어버리거나 부수거나 물에 던져버리고, 유명한 종들은 쇠를 녹이거나 구멍을 막아 소리를 못 내게 했으니, 한송정, 총석정, 삼일포의 비석과 경주의 봉덕사의 종 같은 것들이 피해를 입었다. 사선정은 박숙정이 존무사(存撫使)로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좌주(座主) 익재 이제현 선생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삼일포에서 고성 남쪽의 물을 건너 안창현을 지나 명파역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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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고성에서 자고 하루를 더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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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주인이 선유담에서 작은 술상을 마련해 주어 마셨다. 청간역을 지나 만경대에 올라 한 잔 하고, 인각촌의 한 집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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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영랑호에 배를 띄웠다. 날이 늦어 멀리 나가지 못하고, 낙산사에 이르러, 백의대사(白衣大士)를 뵈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라고 하는데, 산 아래의 절벽에 있는 구멍은 관음보살이 들어간 곳이라 한다. 늦게 양주에 도착하여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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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중구일인데 비가 와서 누대 위에서 국화주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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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동산현에서 묵었다. 여기에는 관란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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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연곡현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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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강릉 존무사 성산 이군이 경포에서 기다렸다. 배를 타고 가면서 춤추고 노래하다가, 날이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 경포대에는 집이 없었는데, 근래 호사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그 곳에는 옛날 화랑들의 돌 화덕이 있는데 이는 차를 끓이는 도구이다. 삼일포와 비견할 만하지만, 툭 트인 전망은 삼일포보다도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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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여기서 하루를 묵었다. 강성을 나와 문수당을 구경하였다. 어떤 이의 말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은 땅에서 솟아난 것이라고 한다. 동쪽에는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이 물에 던져 버리는 바람에 오직 귀부만이 남아 있다. 한송정에서 먹고 마셨는데, 한송정 역시 사선이 놀던 곳이다. 군민들이 유람자가 많이 오는 것을 꺼려서, 한송정을 헐어버렸다. 거기 있는 소나무 역시 불이 나 다 타버렸다. 다만 돌 화덕, 돌못(石池), 두 개의 돌우물만이 그 곁에 남아 있으니, 이 역시 사선이 차를 끓일 때 쓴 것이다. 한송정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이 있는데, 해가 저물어 고개를 넘을 수 없기에 거기서 하루 묵었다.
 
25
9월 14일 일찍 출발하여 안인역을 지나니 동쪽 봉우리가 매우 험준하였다. 등명사에 이르러 일출대를 구경하였고, 바다를 따라서 동쪽으로 가다가 강촌에서 쉬었다. 고개를 넘어 우계현에서 묵었다.
 
26
9월 15일 삼척현에서 묵었다.
 
27
9월 16일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오십천 팔영(五十川八詠)이라는 곳을 구경하였고, 다시 교가역에 이르렀다. 교가역은 현청에서 30리 거리였다. 15리 떨어진 곳 바다 옆 절벽 위에 원수대가 있으니 절경이었다. 한 잔 술을 마시고 역사에 돌아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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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옥원역에서 잤다.
 
29
9월 19일 울진에 도착하여 하루를 더 묵었다.
 
30
9월 21일 일찍 울진을 출발하였다. 현에서 남쪽 10리 지점에 성류사가 있는데, 절은 절벽 아래에 있으며 큰 시내의 위에 있다. 절벽의 암석은 천 척이나 되었고, 거기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성류굴이라고 부른다. 굴의 깊이는 잴 수 없으며, 깜깜하여 촛불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중을 시켜 횃불을 들고 인도하게 하고, 마을 사람들 가운데 잘 아는 자를 시켜 앞서고 뒤따르게 하였다. 굴의 입구는 좁지만, 네다섯 걸음 기어가니 조금 넓어져 걸어갈 수 있었고, 또 몇 걸음 더 가니 세 길은 족히 될 절벽이 나타났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점점 평탄하고 툭 트여 넓었다. 수 십 걸음을 더 가니 평지가 있는데, 몇 묘는 되어 보였다.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기이하였다. 또 열 걸음 쯤 가니 다시 구멍이 나오는데 굴의 입구보다도 좁았다. 엎드려 들어가니, 아래에는 진흙탕이 있어서 자리를 깔아 습기를 막았다. 다시 일고여덟 걸음을 가니 점차 툭 트였고 좌우에 있는 돌이 더욱 기이한 것이 절에 있는 당번(幢幡)이나 부도(浮圖)와 같았다. 또 십 수 걸음을 가니 돌 모양이 더욱 기괴하고 다양하여 식별할 수가 없었다. 당번과 부도 같은 것은 더욱 길고 넓었다. 네다섯 걸음을 가니 불상 같은 암석도 있고 고승 같은 암석도 있으며, 또한 물은 매우 맑으며 몇 묘는 족히 될 정도로 넓은 못도 있었다. 못 가운데는 암석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 같고 하나는 물병 같은데, 그 위와 옆에 축 늘어진 돌은 오색이 찬란하다. 처음에는 이들 암석은 돌고드름이 응긴 것이라서 그리 단단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지팡이로 두드려 보았더니 각기 그 길이에 따라 맑고 흐린 소리를 내어서 마치 편경과 같았다. 다른 사람의 말로는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하다고 했지만, 나는 이곳이 속인들이 함부로 놀 곳이 아니라고 여겨서 급히 나왔다. 굴의 양옆에도 많은 굴이 있는데, 잘못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아무도 그 깊이를 모른다고 한다. 어떤 이는 평해군의 바닷가까지 닿으리라고 한다. 그 거리는 대개 20여 리이다. 들어갈 때는 옷이 더러워 질까봐 종의 옷을 빌려 입고 갔는데,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세수하니, 꿈에 전설상의 이상국인 화서국에 다녀온 듯했다. 일찍이 조물주의 오묘함은 측량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국도와 성류굴에서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정말 저절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고의로 만든 것일까? 저절로 되었다면 그 변화의 공교로움이 이처럼 극에 이를 줄을 어떻게 알며, 고의로 되었다면 비록 귀신의 빼어난 능력이긴 하지만 천만 세에 이처럼 뛰어난 것을 만들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31
이 날 평해군에 도달하였다. 평해군을 5리 쯤 남겨둔 데에, 소나무가 만 그루나 있고 그 안에 정자가 있는, 월송(越松)이라고 하는 데가 있었다. 사선이 노닐다가 우연히 여기를 지나치게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해군은 강원도의 남쪽 경계인데, 강원도는 철령에서 남쪽으로 평해에 이르기까지 대략 1,200여 리이다. 평해의 남쪽에는 경상도가 있는데, 경상도는 내가 일찍이 다녀왔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원문】동유기(東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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