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득한 옛날, 적막한 들에 옥 같은 여자아이가 외로이 나타났다. 아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물었다.
6
“나는 성도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8
“강림들에서 솟아날 때부터 어떤 학이 날아와서 한 날개를 깔아주고 한 날개를 덮어주며 야광주(夜光珠)를 물려주어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왔습니다.”
12
“너는 태어난 날을 모르니 오늘을 낳은 날로 하여 이름을 오늘이라고 하자꾸나.”
13
오늘이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얻고서 지내다가 박이왕의 어머니 백씨부인한테로 갔다.
19
“원천강은 어찌 하면 갈 수 있습니까?”
20
“원천강을 가려거든 흰모래마을 별층당에 높이 앉아 글 읽는 도령이 있을테니 그 도령을 찾아가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21
오늘이는 그 길로 서천강 가의 흰모래마을 별층당을 찾아갔다. 오늘이는 문밖에서 종일토록 서있다가 날이 저물자 성 안에 들어가서 말했다.
23
그러자 청의동자 한 명이 나오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24
“나는 오늘이라는 사람입니다. 도령님은 누구십니까?”
25
“나는 장상이라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분부로 여기 앉아서 언제든 글만 읽어야 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26
“부모의 나라가 원천강이라 해서 그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28
“오늘은 날이 다 저물었으니 올라와서 이곳에 유숙하였다가 날이 새거든 떠나십시오.”
29
오늘이가 올라가서 백씨부인 만난 사실을 말하며 길을 알려주기를 청하자 장상이가 말했다.
30
“가다 보면 연화못이 있는데 연못가에 연꽃나무가 있습니다. 그 연꽃나무한테 물으면 알 길이 있을 것입니다.”
31
그러면서 장상이는 오늘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32
“원천강에 가거든 왜 내가 밤낮 글만 읽어야 하고 이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봐 주십시오.”
33
이윽고 날이 새어 길을 떠나다 보니 과연 연화못 가에 연꽃나무가 있었다.
34
“연꽃나무야, 말 좀 물어보자. 어디로 가면 원천강을 갈 수 있느냐?”
36
“나는 오늘이라는 사람인데 원천강이 부모의 나라라서 찾아가노라.”
37
“반가운 말이군요. 그러면 내 팔자나 알아다 주오. 나는 겨울에는 움이 뿌리에 들고 정월이면 몸속에 들었다가 2월이 되면 가지에 가고 3월이 되면 꽃이 피는데 맨 윗가지에만 꽃이 피고 다른 가지에는 피지 않으니 이 팔자가 어찌 된 것인지 물어봐 주오.”
39
“원천강 가는 길은 청수바닷가에 가면 큰뱀이 누워서 구르고 있을 테니 그 뱀한테 물으면 알 수가 있을 겁니다.”
40
오늘이는 연꽃나무와 헤어진 뒤 길을 떠나 청수바닷가에 이르러 이리저리 구르고 있는 큰뱀을 발견했다. 오늘이는 지나온 사정을 얘기하고서 말했다.
41
“어찌하면 원천강을 찾아갈 수 있는지 인도해 주오.”
42
“길 인도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오.”
44
“다름이 아니라 다른 뱀들은 야광주를 하나만 물어도 용이 되어 승천을 하는데, 나는 야광주를 셋이나 물어도 용이 못 되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는지 물어다 주오.”
45
오늘이가 응락하자 뱀은 오늘이를 등에 태우고 물로 들어가 헤엄을 쳐서 청수바다를 건네주었다.
46
“가다 보면 매일이라는 사람을 만날테니 그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시오.”
47
오늘이가 큰뱀과 작별하고 길을 가다보니 한 처녀가 예전 청의동자처럼 별층당 위에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다. 오늘이가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원천강 길 인도를 청하자 매일이가 쾌히 승낙하면서 말했다.
48
“원천강에 가거든 내가 여기서 항상 글만 읽고 있는 팔자가 어찌 된 일인지 알아봐 주십시오.”
49
오늘이가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길을 떠나려 하자 매일이가 말했다.
50
“가다 보면 시녀 궁녀가 우물가에서 울고 있을 겁니다. 그이들한테 물으면 소원을 이룰 거예요.”
51
오늘이가 앞으로 앞으로 가다 보니 정말로 시녀 궁녀가 우물가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오늘이가 이유를 묻자 그들이 말했다.
52
“우리는 본래 하늘 옥황 시녀였습니다. 우연히 죄를 지어 이 물을 푸게 되었는데 물을 다 퍼내기 전에는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물을 푸려고 해도 바가지에 큰 구멍이 뚫어져 있어 조금도 밖으로 퍼낼 수가 없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53
“옥황의 신인(神人)이 못 푸는 물을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어찌 풀 수 있겠습니까?”
54
그때 오늘이가 문득 생각이 나서 시녀들에게 정당풀을 베어 모아서 덩어리를 만들게 했다. 오늘이는 그 덩어리로 바가지 구멍을 막고 송진을 녹여서 막은 곳을 칠한 다음 하늘에 정성껏 기원을 올렸다. 그러고서 바가지로 물을 푸자 금방 우물의 물이 말라붙었다.
55
시녀들이 죽을 곳에서 살아난 듯 기뻐하면서 거듭 절하여 사례하고서 말했다.
56
“저희가 원천강 가는 길을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57
시녀들이 오늘이를 데리고 길을 가다 보니 어떤 별당이 보였다. 시녀는 그곳을 가리키고는 오늘이 가는 길이 복되도록 해달라고 축도를 하고 제 갈 길로 갔다.
58
오늘이가 별당으로 다가가 보니 주위에 만리장성을 쌓았고 대문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오늘이가 문을 열어 달라고 하자 문지지가 물었다.
60
“나는 인간세상 오늘이라는 처녀입니다.”
62
“여기가 나의 부모 나라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64
문지기가 냉정하게 거절하자 오늘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기가 막힌 오늘이는 문앞에 쓰러져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75
천산 만하(千山萬河) 넘을 적에 외로운 처녀
77
부모는 다 보았나, 내 할 일 다 하였나
79
팔자 부탁 어찌하리, 모든 은혜 어찌하리.
82
오늘이가 이렇게 말하며 연이어서 흐느껴 울자 돌 같은 문지기 심장에도 동정심이 우러났다.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가 부모궁에 그 사실을 아뢰었다.
83
“저의 책임으로 문을 못 열어주었습니다만, 이런 일이 있습니다.”
84
“벌써 다 들었노라. 들어오게 하여라.”
85
오늘이가 천만 뜻밖의 소식에 꿈인 듯 안으로 들어가서 부모 앞에 서자 아버지가 말했다.
86
“너는 어떤 처녀가 왜 이곳에 왔느냐?”
87
오늘이는 학의 깃 속에서 살던 때부터 머나먼 길을 헤쳐 부모를 찾아온 사정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그러자 부모가 말했다.
88
“기특하구나, 이 아이야. 우리 자식이 분명하다.”
90
“너를 낳은 날에 옥황상제가 우리를 불러서 원천강을 지키라고 하니 어느 영이라 거역할까. 할수없이 여기 있게 되었으나, 항상 네가 하는 일을 보고 있었으며 너를 보호하고 있었노라.”
93
오늘이는 만리장성 둘러싼 곳에 곳곳마다 달려 있는 문을 열어보았다. 보니까 문 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춘하추동 사계절이 다 모여 있었다. 구경을 마친 오늘이가 말했다.
94
“저는 이제 돌아가렵니다. 오는 길에 부탁받은 일이 많은데 어찌 된 일인지 알려주세요.”
95
오늘이가 부탁받은 사연들을 말하자 부모가 말했다.
96
“장상이와 매일이는 서로 만나 부부가 되면 만년 영화를 누릴 것이다. 연꽃나무는 윗가지 꽃을 따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전해주면 다른 가지에도 꽃이 만발할 것이다. 큰뱀은 야광주를 하나만 물어야 하는데 세개를 물어서 용이 못 된 것이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두개를 주면 용이 될 것이다. 너는 그 야광주와 연꽃을 가지면 신녀(神女)가 될 것이다.”
97
오늘이가 돌아오는 길에 매일이를 만나 원천강에서 들은 일을 말하자 매일이가 말했다.
98
“하지만 장상이가 있는 곳을 모릅니다.”
100
함께 길을 떠나서 큰뱀을 만나 원천강에서 들은 사실을 말하자 뱀은 야광주 둘을 뱉어서 오늘이에게 주고 곧바로 용이 되어 뇌성벽력을 울리며 승천했다.
101
다음에 연꽃나무를 만나서 곡절을 알려주자 연꽃나무는 꽃이 핀 윗가지를 꺾어 오늘이에게 주었다. 그러자 가지가지마다 고운 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향내를 뽐냈다.
102
다음에 장상이를 찾아가 만나니 매일이와 장상이는 부부가 되어서 만년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103
오늘이는 백씨부인을 만나서 야광주 하나를 선물하여 감사의 뜻을 표한 뒤 하늘 옥황의 신녀가 되었다. 오늘이는 인간세상 곳곳을 다니면서 원천강을 등사(謄寫)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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