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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별(餞別)의 연(宴)’이란 것이 있다. 따라서 ‘전별의 배(盃)’란 것이 있다. ‘전별의 선물(膳物)’도 있고, ‘전별의 노래’란 것도 있다.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전별의 병’뿐이다. 그러나 ‘전별의 병’이라고 나 스스로 불러 보아도 귀에는 익지 아니하는 생경함이 있다. 확실히 그것은 생경한 표현이라 하겠지만, 그같이 이름을 달아 보아도 그럴 성싶은 것에 고려자기(高麗磁器)들이 있다. 모두가 세경(細鵛)의 나팔구(喇叭口)를 갖고 있는 주기형(酒器形)의 병으로 병견(甁肩)까지 국화상감(菊花象嵌)을 놓았는데, 그 중의 하나에는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의 시가 흑상감(黑象嵌)으로 기체(器體)에 각서(刻書)되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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渭城朝雨浥輕塵 위성(渭城)의 아침 비가 촉촉이 먼지 적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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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舍靑靑柳色新 객사의 푸른 버들 그 빛이 새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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勸君更盡一杯酒 그대에게 다시 술 한 잔을 권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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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出陽關無故人 서쪽 양관으로 가면 친한 벗도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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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의 병에는 율조(律調)를 달리하는 오언(五言)들이 적혀있지만, 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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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處難忘酒 어드멘들 술 잊기 어려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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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門送別多 청문(靑門)에 송별도 허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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斂襟收涕淚 옷깃을 여미고 흐르는 눈물 훔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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促馬聽笙歌 말은 가자 재촉하고 생가(笙歌) 소리 들려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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煙樹霸陸岸 안개 낀 패릉(霸陸)의 그 물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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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花長樂坡 바람 부는 꽃밭은 장락궁(長樂宮)의 언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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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時無一盞 이런 때에 한 잔 술이 없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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爭柰去留何 갈까 말까 하는 마음 어이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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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다. ‘花’와 ‘留’의 두 자는 자체 (字體)가 매우 이양(異樣)하여 확실하지 않으나 그보다 달리 읽어지지 않으며, ‘何’ 자는 아주 지워져서 도대체 읽어낼 수가 없으나 운(韻)이나 의미로 보아서 임시 추량(推量)으로 설명하려 한다. 지금 이 두 개의 병은 이상과 같이 모두 다 이별의 애정(哀情)을 노래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다시 지워 버릴 수 없는 수법으로써 적혀 있다 할진댄, 그것은 일상의 즐거운 성연(盛宴)에서 또는 축복받을 향연(響宴)에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되는, 다시 말하자면 전별의 슬픈 장면에서만 사용된 병으로서 특히 주의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것은 ‘전별의 병’이고, 우리가 일반으로 말하고 있는 저 ‘마상배(馬上杯)’란 것과 서로 관련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보내는 사람, 떠나는 사람 서로 모두 말을 몰아 고삐를 나란히 하면서 권하는 주배(酒杯), 거기에 술 붓는 이 병, 가는 이는 가자 하되 떠나지를 못하고 남는 이는 남자 하되 머무르지 못하니, 끊어야 할 이별의 기반(羈絆)에다 끊을 수 없는 정을 부어 넣는 것이 이 병이다. ‘위성(渭城)의 가(歌)’는 이때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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芳草城東路 꽃다운 풀 자라난 성 동쪽 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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疎松野外坡 성긴 솔밭 서 있는 들 밖 언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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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風是處別離多 봄바람 부는 이곳 이별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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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帳簇鳴珂 이별 장막 귀인 말들 모여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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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暖鷄呼屋 따뜻한 마을엔 닭은 지붕서 홰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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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晴燕掠波 갠 모래밭에 제비는 물결 차며 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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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分立馬更婆娑 이별 임해 말 세우고 머뭇거리네. 一曲渭城歌 한 곡조 위성가 울리는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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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고인〔故人, 익재(益齋) 이제현(季齊賢)〕도 읊었다. 예로부터 ‘청교송객(靑郊送客)’은 송도팔경(松都八景)의 하나로서 정평이 있었다. 청교(靑郊)는 고려 도읍인 개성(開城) 동외(東外)이다. ‘위성(渭城)의 병(甁)’은 그리하여 익재와 더불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의 병(甁)은 이보다 시대가 더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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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處難忘酒 어느 곳서 술 잊기 어려웠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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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涯話舊情 하늘 끝서 옛 정을 애기 나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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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雲俱不達 청운의 꿈 모두 다 못 이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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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髮遞相驚 백발은 바뀌어서 서로 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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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年前別 스무 해 이전에 이별을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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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時無一盞 이런 때에 한잔 술이 없다 하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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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敍平生 어떻게 평생 회포 풀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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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백향산(白香山)은 노래하였다. 이 조(調)가 고려에서 가장 유행한 것은 예종조(睿宗朝)였다. 예왕(睿王)의 「제곽여동산재벽시(題郭輿東山齋壁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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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處難忘酒 어느 곳서 술 잊기 어려웠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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尋眞不遇回 진인(眞人) 찾다 못 만나고 돌아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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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窓明返照 서재 창엔 저문 빛 되비쳐 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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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篆掩殘灰 옥전 향은 시든 재만 덮이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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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扉盡日開 신선 문은 열어 둔 채 날이 저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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園鶯啼老樹 동산의 묵은 고목엔 꾀꼬리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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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鶴睡蒼苔 뜰의 푸른 이끼에선 학이 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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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味誰同話 도의 맛은 뉘와 함께 얘기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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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去不來 선생은 나가서는 아니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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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思生感槪 생각 깊으니 감개가 생겨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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把筆留題壁 붓 잡고서 벽에 적어 남겨 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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攀欄懶下臺 난간 잡고 더디 대를 내려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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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唫多態度 시 읊으라고 풍광 운치 다양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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觸處絶塵埃 접촉한 곳 속세 먼지 끊어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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暑氣觸林下 더위 기운 숲 아래서 부딪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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薰風入殿陽 더운 바람 전각 굽이 불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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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時無一盞 이런 때에 한잔 술이 없다 하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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煩慮滌何哉 번거로운 생각을 어떻게 씻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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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다. 즉 체(體)는 낙천(樂天)의「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조(調)에서 취하고, 의(意)는 저「심곽도사불우(尋郭道士不遇)」에서 본받았다. 그 시에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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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中乞假來尋訪 고을에서 휴가 받아 방문하러 찾아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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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裏朝元去不逢 골짝 안에 노자 참배하러(朝元) 가서 못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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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院只留雙白鶴 사원 보니 다만 한 쌍 흰 학들만 남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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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門唯見一靑松 문에 드니 오직 하나 푸른 솔만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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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爐有火丹應伏 약화로엔 불씨 남아 단약 아마 굽는 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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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碓無人水自春 구름방아 사람 없이 물만 홀로 찧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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欲問參同契中事 참동계 안에 있는 일들 묻고 싶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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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知何日得相從 모르겠네, 어느 날에 서로 종유하게 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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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왕(睿王)은 지존의 옥체(玉體)로서 도사(道士) 곽여(郭輿)를 찾았다. 그러나 선생은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도사가 돌아와 보니 보련(寶輦)은 이미 없었다. 인생의 서어(齟齬) 또한 이러하니 어찌 일시(一詩)가 없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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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處難忘酒 어느 곳서 술 잊기 어려웠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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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經寶輩廻 임금 수레 헛걸음하고 돌리실 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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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門追小宴 부잣집의 작은 잔치 참석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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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竈落寒灰 신선 부엌 찬 재에 흩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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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飮通宵徑 밤을 새워 향음을 파하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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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門待曉開 새벽 되자 천문이 열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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杖還蓬島徑 막대 짚고 봉래도 길 돌아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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屐惹洛城苔 나막신엔 낙양성의 이끼 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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樹下靑童語 나무 아래 청의동자 말을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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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間玉帝來 “구름 사이 옥제께서 오시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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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馭久徘徊 임금 수레 오랫동안 배회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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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意仍抽筆 뜻 있으셔 붓 뽑아 시를 쓰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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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人獨上臺 사람 없자 누대에 홀로 오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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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能瞻日月 임금님을 우러러 뵐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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却恨向塵埃 세속에 나갔던 일 한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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搔首立階下 머리를 긁적이며 계단 아래 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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含愁傍石隈 시름 품고 돌 굽이에 기대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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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時無一盞 이런 때에 한잔 술이 없다 하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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豈慰寸心哉 어떻게 작은 마음 위로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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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운(韻)에 화(和)하여 드렸다. ‘하처난망주의 병(甁)’은 곧 이 풍류의 영체(詠體)에 의한 것이다. 본래 향산(香山)은 이 체를 가지고서 회회(回會)를 노래하였다. 그런데 같은 체를 갖고서 고려인은 별리불봉(別離不逢)의 애정(哀情)을 읊고 있다. 이(離)와 회(會), 이(理)로 보아서는 별(別)이 있으나 무상(無常)을 슬퍼하는 그 정(情)에서는 차이가 없다. 정에 있어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理)에 있어 별(別)은 있다. 시체(詩體)에는 차이가 없지만 시실(詩實)에는 상이(相異)가 있다. 체(體)와 실(實), 이(離)와 회(會)가 전전윤회(轉轉輪廻)하여 상즉상리(相卽相離), 이회(離會)의 묘취(妙趣)가 이곳에도 나타나 있다. 예술이 갖는 묘미일 것이다. 예술이 갖는 이취(理趣)이기도 하다. 참으로 존귀한 것은 예술이다. 이것은 고려청자의 시정(詩情)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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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가(渭城歌)」의 병(甁)은 대구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씨의 사장품(私藏品)이 되고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의 병(甁)은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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