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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 현저한 례를 든다면 옛날 가락국(駕洛國은 只今 金海郡)의 시조왕 김수로(金首露)와 그의 왕후 보희태후(普熙太后)다. 그 왕후는 원래 인도의 아유타국(印度 阿踰陁國) 왕녀 (或은 南天竺國 王女라 한다)로 풍랑에 표박하야 조선으로 온 분이다. 그의 본명은 무엇이였던지 알 수 없으나 가락국에 와서 부르기는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하였었다. 그는 처음에 무슨 동기로 고국을 떠났던지 풍랑에 밀니고 밀니여서 온다는 것이 우연이 가락국의 앞바다 지금의 경남 김해군(金海) 앞바다까지였다. 그때(新羅 儒理王 二十五年 戊申 七月, 東漢 建武 二十四年, 西紀 四八) 수로왕은 가락국을 새로 건설하고 아도(我刀), 여도(汝刀), 피도(彼刀), 오도(五刀), 류수(留水), 류천(留天) 신천(神天) 오천(五天), 신귀(神鬼) —이것은 다 그때의 벼슬 일음이다— 등 여러 신하들과 같이 해변가로 놀너 갓다가 바다 우에 이상한 배가 떠오는 것을 보고 류천간(留天干)을 명하야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망을 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을 명하야 승호(乘岵)에서 망을 보게 하였더니 과연 비단으로 만든 붉은 돗에 붉은 기(緋帆茜旗)를 다른 이상한 배가 서남으로부터 북을 향하야 왔었다. 신귀(神鬼)는 급히 달려가서 왕께 알리우니 왕이 크게 기뻐하야 대궐 서편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었다. 왕후는 순풍에 배를 저어 해구(海口)에 드리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잠간 쉬고 입고 온 비단 바지를 버서서 산신(山神)에 치성을 드린 뒤에 왕궁을 행하야 오니 왕이 장막 안으로 맞어 드려서 이틀 동안을 같이 놀다가 연(輦)을 함께 타고 궁중으로 돌아와서 왕후를 삼었었다. 황후는 인물이 비범하고 골격이 장대하야 신장이 구 척이나 되는 수로왕과 체격이 비슷할 뿐 아니라 몸이 극히 강건하야 一百 五十七 세란 놀날 만한 장수를 하고 아들을 아홉 형제를 낳섰는데 그중에 두 사람은 그의 성을 딿어서 허씨(許氏)가 되게 하였으니 조선의 김해 허씨가 그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가 처음으로 와서 배 대던 곳을 그때 사람들이 기념으로 일음 짓되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그의 비단 바지 벗던 곳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붉은 긔로 바다에 들어오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하였으니 지금까지 김해(金海)에 그 지명이 그대로 전하야 오고 호계(虎溪) 옆에는 김해 고적에 하나인 파사 석탑(婆娑 石塔)이 있으니 그 석탑은 오층으로 된 데다가 색이 붉고도 석질이 매우 고흐며 조각이 또한 교묘하니 세상에서 전해 말하기를 그 탑은 허황후가 조선에 올 때에 배에다 실고 험악한 풍낭을 진정(鎭定)하며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릉(陵)은 김해의 군북 귀지산(龜旨山) 동편에 있어서 지금까지 수호하야 온다. — (金官誌 及 輿覽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