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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월향(桂月香) · 옥개(玉介) · 채란(彩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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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晋州)의 기생들이 논개(論介)의 자랑을 한다면 평양(平壤)의 기생들은 계월향(桂月香)의 자랑을 할 것이다. 계월향은 논개와 같은 시기— 바로 이조 선조 시대(李朝 宣祖時代) 평양의 명기였다. 일명은 월선(月仙)이니 어려서부터 인물이 절특하고 재지가 비상하여 당시 관서 화류계에서 첫손가락을 뽑을 만치 방명이 자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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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을 당하여 평양성이 불행히 함락되고(壬辰 八月에 平壤 陷落) 성중의 인민들이 모두 일군에 포로(捕虜)가 되니 옥석구분(玉石俱焚)으로 월향도 또한 포로가 되어서 소서행장의 부장 소서비(小西行長 副長 小西飛)의 진중에 유치되었다. 그때에 월향이가 일시에 자기 개인의 의리와 절조만 위한다면 물론 그 자리에서 즉시 자결하여 꽃다운 죽음을 하고 말았겠지마는 원래에 지모가 비범하고 인내성(忍耐性)이 강한 월향은 목전에 단순한 의리와 절조만을 위하여 무명의 죽음을 하는 이보다는 잠시 굴욕을 당하고라도 기회를 엿보아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남에게 조금도 다른 기탄을 뵈지 않고 자기 양심에 허락지 않는 갖은 교태와 아양을 부려가며 소서비의 환심을 사니 소서비도 역시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고 크게 기뻐하며 월향을 사랑하여 항상 친근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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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평양에는 아직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일개 순별초관(巡別哨官)이라는 저급의 군직(軍職)을 가지고 있는 한 용장이 있었으니 그는 김경서(金景瑞)라 하는 분이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응서(應瑞)니 원래 신라 명장 김유신의 후손(新羅 名將 金庾信 後孫)으로 중세에 용강(龍岡)에 와서 살았는데 날 때부터 두 겨드랑이 밑에 새 나래와 같은 이상한 뼈가 있어서 몇 길이 넘는 지붕(屋上)을 날쌔게 훌훌 뛰어넘고 용강에서 평양이 八十여 리의 먼 거리엇마은 날마다 나막신(木履)을 신고 내왕하는 데도 말탄 사람보다 더 빠르게 다니니 그곳 사람들이 모두 비장군이라고 칭찬하고 월향도 또한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경모하였다. 그때에 평양성이 비록 함락되었으나 경서는 조금도 용기가 꺾기지 않고 용강(龍岡), 강서(江西), 삼화(三和), 증산(甑山) 네 곳의 군사를 모집하여 대동강 서편에 유진하고 날마다 서문 밖(西門外)에 가서 말을 달리며 군사정찰(軍事偵察)을 하였다. 그때에 계월향은 소서비의 진중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소서비에게 간청하되 자기는 평소에 연날리기(紙鳶戱)를 좋아하니 서문 위에 가서 연을 날리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소서비는 평소에 월향을 사랑하고 의심ㅎ지 않는 까닭에 일언에 쾌히 승락하였다. 월향은 심중에 홀로 기뻐하며 서문 위(或은 乙密臺라 한다)에서 연을 날리는데 자기 심중에 먹은 묘책을 비밀하게 글로 써서 그 연에 붙여 김경서의 말달리는 곳에다 띄워버리니 경서가 그 연을 잡아보고 월향의 묘계를 자세히 알았다. 그 이튿날에 월향은 또 전날과 같이 소서비에게 연날리기를 청하되 특히 그날에는 소서비도 같이 가서 구경하기를 원하니 소서비는 또한 안심하고 같이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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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향은 소서비와 같이 정다운 듯이 손에 손을 잡고 성 위에서 연을 날리며 성 밖을 내어다 보다가 경서의 말 달리는 것을 보고 별안간 땅에 엎디어 울며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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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봅쇼 장군님 저의 사정을 좀 들어 주십쇼. 저는 원래에 부모도 친척도 아무도 없고 다만 있다는 것이 올애비 한 사람뿐인데 그것도 이번 난리 통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지 못하여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걱정하던 차 지금에 우연히 본즉 뜻밖에 저 문밖에서 말을 달리고 있사오니 장군님의 후덕으로 남매가 한번 서로 만나보게 하여 주신다면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요 죽어도 원이 없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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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소서비는 월향의 그 말을 듣고 측은한 생각이 나서 월향을 어루만지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고 즉시 서로 만나보기를 허락하고 경서에게 사람을 보내었다. 경서와 월향은 원래 그 전날에 피차 약속이 있었끼 때문에 오라는 그 통지를 받고 마음에 기뻐하며 즉시 소비의 진중으로 왔다. 월향과 경서는 진짬 남매 모양으로 서로 울며불며 손을 마주 잡고 반가워하니 소서비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경서를 특별히 후대하며 그날부터 경서를 자기의 진중으로 무상 출입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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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는 그렇게 소서비의 진중으로 출입을 하며 그의 행동도 살피고 월향과 비밀한 획책도 하여 기회만 오기를 기다리더니 하루는 마침 소서비가 자기의 거처하는 대동관(大同館)에서 큰 연회를 하게 되었다. 월향은 그것을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소서비에게 술을 자꾸 권하니 소서비는 소비는 아무 멋도 모르고 그저 좋아라고 부어라 먹자 하는 바람에 술이 아주 망껏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감고 졸았다. 월향은 그 틈을 타 솜뭉치로 휘장의 방울 주둥이를 틀어막고 (소서비가 원래 의심이 많았던 까닭에 휘장에다 방울을 달아서 사람이 출입을 하면 소리가 나서 잘 알게 하였다) 밖으로 뛰어나가서 경서를 불러들이니 경서가 즉시 장검을 빼어 들고 대동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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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소서비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자나 두 눈을 그대로 부르뜨고 얼굴에 홍색이 가득하며 두 손에는 서리 빛 같은 장검을 빼어 들어 마치 사람을 찍으려고 하는 것 같으니 좀체 사람은 감히 근처에도 갈 수 없을 만치 무서웠다. 그러나 김경서는 용감 대담하게 달려들어 소서비를 칼로 치니 그 머리가 벌써 땅에 떨어졌으나 능히 그 손에 있던 칼을 던져 한 칼은 건너편 벽을 치고 또 한 칼은 기둥을 쳤다. (지금도 大同館에 그 칼자국이 있다고 한다) 경서는 그 장수의 머리를 한 손에 들고 월향을 업고 성을 넘어 도망하려다가 일이 중로에 실수될까 염려하고 다시 월향에게 말하되 우리 두 사람이 잘못하다가 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사람이라도 살아나가는 것이 옳은즉 둘 중에 누가 죽는 것이 옳으냐? 하니 월향은 자기의 머리를 흔연히 내밀며 천한 내 목숨이 먼저 죽어야 한다 하니 경서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칼로 월향의 목을 베고 무사히 성을 넘어갔다. 그 뒤에 경서는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부원수(副元帥=光海時)까지 되고 시호(諡號)를 양의(襄毅)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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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이 평정한 후에 모 감사(某 監司)는 월향의 의절을 가상히 여겨 장경문(長慶門) 안에 영당(影堂)을 짓고 그의 영정을 설치하였더니 헌종 을미년(憲宗 乙未年)에 감사 정원용(監司 鄭元容)이 다시 관풍동(觀風洞)에다 의열사(義烈祠)를 창건하여 그 화상을 안치하고 그 옆에는 의열비를 세웠으며 민영휘(閔泳徽) 감사 때에는 또한 그것을 중건하고 그 뒤에 기생 김채란(妓生 金彩鸞)은 또 영당(影堂)을 설립하고 옥개(玉介)와 같이 배향하였으니 옥개는 역시 평양기생으로 임란 때에 굴하지 않고 성에 떨어져 죽은 기생이요 (閔泳徽가 그 碑를 해 세웠다) 채란은 원래 양덕 기생(陽德 妓生)으로 중군 어재연(中軍 魚在淵)의 첩이 되었다가 신미양요(辛未洋擾)에 어씨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할 때에 채란이가 남복을 하고 친히 난군 중에 들어가서 어씨의 형제 시체를 이고 돌아와서 장사 지냈으므로 당시 정부에서 그 의의를 가상히 여겨 숙부인으로 봉한 여자였다. (근래에 재단의 영정까지 월향의 영당에 같이 배설하여 월향 옥개 채란 세 여자의 영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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