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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북방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다. 청조(淸朝)의 선조(先祖)가 여기에서 일어났으니 우리의 북쪽 국경에서 300여 리 쯤 되는 곳이다. 저들은 장백산(長白山)이라 하고 우리는 백두산이라 하는데, 두 나라가 산 위에서 갈라진 두 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그러나 지역이 멀고 거칠어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었다. 임진(1712.숙종 38년) 3월에 청의 황제가 오라총관 목극등과 시위 포소륜ㆍ주사 악세를 보내어 백두산에 가 보고 국경을 획정하게 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폐사군(廢四郡)이 다시는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까 의심도 하고, 또는 육진이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염려도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모(李某)가 홀로 건의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백두산 꼭대기의 절반으로 경계를 정해야 한다.’ 하여, 접반사 박권ㆍ본도 순찰사 이선부를 보내어 국경에서 맞이하여 함께 가서 조사 변정(卞正)하게 하고, 김경문은 통역에 능하므로 따라가게 하였다. 4월 신사일에 극등과 삼수(三水)의 연연(蓮淵)에서 만났는데, 따라가는 호인(胡人)이 수백 명이며, 타마(駝馬.약대와 말)가 200여 필, 소가 20여 마리였다. 무자일에 극등이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二昌), 대통관(大通官) 이가(二哥), 가정(家丁) 20명, 약대ㆍ소ㆍ말 4ㆍ50필과 인부 43명 및 우리 나라의 접반사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 순찰사 군관 조태상(趙台相), 거산찰방(居山察訪) 허량(許樑), 나난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 역관 김응헌(金應瀗)ㆍ김경문, 도자(導者) 3명, 도끼잡이[斧手] 10명, 말 41필, 인부 47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고 포소륜과 악세에게는 그 나머지 사람들을 거느리고 허정령(虛頂嶺)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경인일에 곤장우(昆長隅)에 이르러 비로소 길을 떠나는데, 이때에 박곤ㆍ이선보 두 사람이 함께 산에 올라가려 하니, 극등이 말하기를, ‘내가 보니 조선의 재상은 다니는 데 반드시 가마를 타며, 또한 나이가 늙었는데 험한 길을 걸어서 갈 수 있겠오? 중도에서 넘어지면 반드시 큰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극등과 작별하였다. 임진 일에 동쪽으로 강을 건너서 우리 나라의 강 언덕으로 수리(數里)를 가다가 또 저쪽 강 언덕을 경유하곤 하여, 30여 리 사이에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서 왔다 갔다 하였다. 계사일에 산꼭대기에 이르니 해가 벌써 정오가 되었다. 이 산이 처음에는 서북에서 시작하여 황막한 들로 내려오다가 여기에 이르러 우뚝 솟았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서 몇 천만 길[丈]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사람의 숨구멍[䪿穴]과 같고, 둘레가 2ㆍ30리쯤되며 빛깔이 시커머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는 첫 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아득한 하나의 은바다를 이루었다. 산 모양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흰 독[白甕]을 엎어 놓은 듯한데 꼭대기[顚]에 올라보면 사방이 조금 불룩하고, 가운데는 움푹하여 마치 독 주둥이가 위로 쳐다보는 듯하였다. 외부는 희고 내부는 붉으며 사방의 석벽(石壁)이 깎아지른 듯한데 붉은 흙칠을 한 듯도 하며 또 비단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였다. 그 북쪽으로 두어 자쯤 터졌는데 물이 넘쳐나서 폭포가 되니 곧 흑룡강(黑龍江)의 수원이다. 산마루를 따라 약 3ㆍ4리를 내려오니 비로소 압록강의 수원을 찾게 되었다. 샘물이 산 구멍에서 펑펑 솟아나는데 물줄기가 콸콸 빨리 흘려내리며, 수십백 보를 못가서 산협이 터져서 큰 구렁이 된 속으로 물이 쏟아지는데, 움켜 마시니 매우 시원하였다. 또 동쪽으로 돌아서 짧은 언덕 하나를 넘어가니 샘이 하나 있는데 서쪽으로 3ㆍ40보를 흐르다가[三四十步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한 갈래[一派]는 흘러서 서쪽 샘물과 합하여 동쪽으로 내려가는데 물살이 아주 약하다. 또 동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니 샘이 있는데 동쪽으로 흐르다가 100여 보 가량 가서 중앙에 있는 샘물이 갈라져서 동쪽으로 흐르던 물이 합해진다. 극등이 가운데 샘물이 갈라진 사이 지점에 앉아서 경문 등에게 말하기를, ‘이곳의 명칭이 분수령이니 비를 세워 경계를 정하면 어떻겠오?’ 하니, 경문도 말하기를, ‘매우 좋습니다. 당신의 이번 길의 이 일은 이 산과 함께[與此山而] 영원히 전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물줄기가 ‘인(人)’자 모양으로 갈라졌고, 가운데에 범이 엎드린 것처럼 생긴 작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극등이 말하기를, ‘이 산에 이 바위가 있는 것이 또한 매우 기이한 일이니 이것으로 비의 밑돌을 만들자.’ 하였다. 산에서 내려오니 어두컴컴하여 천막(天幕)에서 잤다. 갑오일에 극등이 말하기를, ‘토문강의 수원과 물줄기가 사이사이 끊겨 땅 속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경계가 분명치 못하여 비(碑) 세우는 일을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하고, 그들 두 사람을 애순(愛順)과 함께 물길을 가서 조사[往審]하게 하였는데 김응헌(金應憲)ㆍ조태상이 뒤를 따라서 6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었다. 두 사람이 돌아와서 물이 과연 동쪽으로 흐르더라고 보고하였다. 극등이 곧 사람을 시켜서 돌을 다듬었는데 넓이 2자, 길이 3자 남짓하였으며, 또 분수령에서 밑돌을 취하여 비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비의 윗면에는 ‘대청(大淸)’이라고 썼는데 글씨가 조금 크고 그 아래에는, ‘오라총관 목 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국경을 조사하는데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며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위에다 돌을 새겨서 표를 삼았다.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 필첩식(筆貼式)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의 군관 이의복ㆍ조태상, 차사원(差使員) 허량(許樑)ㆍ박도상(朴道常), 통관 김응헌ㆍ김경문.’ 이라고 쓰고, 드디어 새겨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