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유정(裕貞)의 면모 편편(面貌片片) ◈
카탈로그   본문  
1939
이석훈
1
유정(裕貞)의 면모 편편(面貌片片)
2
이석훈(李石薰)
 
 
3
「유정이 죽은 지도 어언 3년이 된다. 3년이나 되건만 죽어가는 유정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나의 태정(怠情)에 대한 참회가 그를 생각할 적마다 마음 아푸게 한다. 유정이 병상에서 괴로운 마지막 숨을 거두며 얼마나 나를 원망하였으랴? 그러나 그는 나에게 편지할 적마다 병이 위중하다든가 죽게 됐다던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었었다. 내게 그런 하소연을 했자 소용이 없다 하였음인지? 혹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미 죽는 이상에는 태연이 죽으리라 동무에게 ‘폐’끼치지 않고 깨끗이 죽으리라 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고결하고 순진하고 겸허한 인간 유정이었으므로 아마 그랬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이 유정의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나로서 우정을 기우렸어야 하겠거늘 그가 병상에서 기동을 못하게 된 뒤로 나는 한 번도 그의 병상을 찾지 못했다. 그 때 바로 어떤 사건으로 내 자신 위기에 직면해 있어서 나 이외의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유정의 연전에 변명한대도 내 한은 씻어질 것 같지 않다.
 
 
4
○ ○
 
 
5
유정이 살았을 때 일을 이것저것 회상해 본다.
 
6
그때 나와 유정은 사직동 한 구석에서 앞뒷집에 살고 있었다. 유정의 누님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집 뒤에 조그만 기와집 한 채를 사고 있었는데 그 집에 유정은 기류(寄留)하고 있었다. 매부되는 이는 충청도 땅에 금광을 하러 가고 없고 그의 누님 혼자만 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생활이 그리 유족(裕足)치 못한 것 같았다. 혹 군의 매부되는 이가 작은 집이라도 하고 있어서 큰댁은 살들하게 돌보지 않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매부란 이를 본 적이 없다. 유정은 본디 입이 무거운 사람이므로 이러한 내정(內情)까지는 토파하지 않었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었다. 유정도 한때는 매부의 광산에 금(金) 잡으러 가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은 뒤 개천 골목을 지나 그의 집을 찾는 것이 예(例)가 되어 있었다. 그도 가끔 우리집에 왔다. 유정이 있는 방은 키 낮은 대문 옆마루 건넛방인데 서편으로 개폐할 수 없는 적은 영창이 있었고 두꺼운 조선 종이로 봉해 두었었다. 나는 ‘씨ㅅ자’를 붙여
 
7
“유정씨이!”
 
8
하고 찾을나치면
 
9
“네, 어서오십쇼.”
 
10
하는 유정의 심중한 목소리가 창고 안에서 들려오듯이 그 조선종이의 적은 영창을 통해 온다. 또 어떤 때 유정이 엇을 때는 유정의 우울을 띈 커다란 눈과 똑같은 눈을 가진 누님이 웃음은 벌써 잊었다는 양 한 핏기없이 창백하고 싸늘한 얼골을 대문 틈으로 엿보이며
 
11
“밖에 나갔습니다.”
 
12
하고 말 적게 대답한다. 흰 편이 많으면서도 소 눈처럼 검은 인상을 주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 무표정하다. 나는 더 말해 볼 용기를 잃고 말없이 돌아서 온다. 결코 불친절하거나 귀찮게 여기는 빛은 없었으나 어딘지 쓸쓸한 인생의 중하(重荷)에 이즈러저서 모든 기쁨을 잃은 듯한 하염없는 표정을 나는 지금껏 잊을 수 없다.
 
 
13
○ ○
 
 
14
유정이 자니기 어려워함을 보다 못하여 나는 하루는 그에게 용처버리로 우선 ‘하모니카’ 방송을 권하였다. 그때 나는 방송국에 있으면서 연예의 1부와 어린이 시간을 맡어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권한 것이다. 유정이 ‘하모니카’의 명수였었던 것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었으나 그는 중학교 시대에 수년 간이나 ‘하모니카’공부?에 힘써 남의 지도도 받고 ‘레코드’로도 열심히 배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본격적으로 웬만한 곡은 단번에 불어 치웠다.
 
15
나의 권에 대하여 유정은 숨이 차서(그때 이미 폐환이 시작된 것이다) 독주(獨奏)는 못하겠으니 나와 둘이서 2중주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 어디 그럼 연습해 보자 하고 내가 뻬이스를 불기로 하여 하모니카를 산다(그에게는 낡은 것이 있었다) 악보를 구해온다 야단이었다. 어떤 날 저녁 그 조그만 영창이 서쪽으로 향한 어둑침침한 방에서 2중주 연습을 시작하였다. <키스멧트>니 <오리엔탈 댄스>니 <아틀르의 여자>니 헨델의 <라 — 르고>니 하여튼 꽤 어려운 곡들을 골라서 이것저것 불어본다. 그러나 나는 중학시대에 조금 불다 논지 오래서 단 두 절을 정확하게 따러갈 수 없고 유정은 숨이 차서 쩔쩔맨다. 이래서 ‘하모니카’ 2중주는 방송까지 이르지 못하고 팽개쳐 버리고 말었다. ‘하모니카’ 명수 유정의 이름도 결국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고 만 셈이다. 이번에 방향을 돌려 역시 용처버리나 될까 해서 어린이 시간에 이야기 방송을 시켰다. 이야기 방송만은 선선이 응낙했다. 입이 무겁고 말더듬인 유정이 ‘마이크’ 앞에 앉더니 아주 능청스럽게 잘한다. 야담(野談)이나 고담식(古談式)이어서 나는 방송실을 벌겋게 상기돼 나오는 그를 보고 이번엔 야담을 청하야겠어 하고 둘이 껄껄 웃었다. 이야기 방송도 가명으로 했기 때문에 유정의 화술이 얼마나 능하다는 것도 들어나지 않고 말었다.
 
 
16
○ ○
 
 
17
그는 우에서도 말했거니와 여니 때는 대단히 입이 무겁고 말더듬이지만 방송을 할 때와 술 먹은 뒤 — 술좌석에선 아주 능변이오 달변이었다. 시골 오입장이(술 먹으면 시골 오입장이적 풍모로 변한다)적 어조로 가끔 내지어(內地語)를 섞어가며 좌석을 번쩍 들었다 놓는다. 단 누가 대구(對句)를 해줘야 말이지 나처럼 술 먹을 줄 모르는 사람과 단 둘이서는 역시 말이 없다. 유정을 떠들게 하는 좋은 상대자는 회남이오 지금 미국 유학중인 상엽(想葉)이다. 상엽은 주사(酒邪)가 있어서 유정과 처음 인사한 그 자리에서 이놈 저놈하고 떠들다가 나종에는
 
18
“너 같은 놈과는 절교다.”
 
19
하는 바람에 유정이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20
“임마(유정은 술 먹으면 이렇게 말을 한다) 으째서 절교냐?”
 
21
하고 대든다. 그러나 뻐득삐득 웃는 얼골이다. 우뚝하고 크게 잘 생긴 코끝을 버득버륵 움직인다. 당나귀를 연상케 한다. 우리 성미 같으면 농의 말이라도
 
22
“절교하가스문 하러마 새끼!”
 
23
이러고 말텐데 유정은 끝까지 겸허한 호인이었다.
 
 
24
○ ○
 
 
25
한 번은 유정, 회남, 상엽, 그리고 나 넷이서 화신(和信) 뒤 선술집에 가서 잔뜩들 취해가지고 나올 때 딴 손님의 우산을 들고 나왔다. 술 먹으면 망난이가 되는 상엽이(제 것인 줄 잘못 알었는지 작난으로 그랬는지 모르나) 들고 나온 것이었다. 화신 골목까지 이르렀을 때 젊은이 5, 6명이 와르르 따라 나오며 그걸 구실로 싸움을 건다. 나는 워낙 사교성 없는 성격이라 이거 또 ‘미식축구시합’을 아닌 밤중에 하게 되는가부다 하고 뒤에서 구두끈을 얼른 단단히 매고 형세를 보고 섰노라니까 ‘시골 오입장이’ 유정이 쑥 나서며 “노형들!” 어쩌구 저쩌구 그를듯한 수작으로 우산을 돌려주고 험악한 판국을 엄불러서 무사하게 하였다. 술 먹으면 능변이 되는 유정의 덕택으로 창피를 면한 것이었다.
 
 
26
○ ○
 
 
27
벚꽃이 폈다 질 무렵인데 유정은 낡은 검정솜 주의(周衣)를 입고 낡어 빠진 소프트를 뒤 꼭대기에 부치고 방송국으로 찾어 왔다. 며칠째 두고 만나면 걱정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취직 토론이 또 벌어졌다. 내가 이번엔 모처에 말해보자 하니까 그는 뻐륵뻐득 웃으면서
 
28
“자 그럼 내 운수점이나 한번 쳐 봅시다.”
 
29
그러더니 10전 백동화 한 푼을 끄냈다. 던저서 ‘10전’이라 쓴 쪽이 나타나면 되고 그 반면 즉 ‘대일본’이라 쓴 쪽이 위이면 않되는 것으로 작정하고 유정은 그 10전짜리를 방안 높이 던졌다. 돈은 뱅글뱅글 공중에서 돌면서 올라 솟았다가 바닥에 달랑 떠러져서 한 구석으로 굴러가 머물었다. 얼른 주어보니 ‘10전’쪽이 위이었다.
 
30
“됐다.”
 
31
유정도
 
32
“어 취직이 되는가 부다.”
 
33
그러면서 우리 둘은 한참 동안 껄껄 웃었다.
 
34
그러나 이 돈점도 맞지 않었다. 유정은 원고벌이에 나머지 정력마저 소모해 버리고 그해 겨울 드디어 죽음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35
이런 일 저런 일이 어제처럼 생각되나 유정은 이미 간 지 3년이나 되고 나는 부질없는 추억의 글을 여기 되풀이하고 있다. 유정의 죽은 영혼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런지?
 
 
36
1939. 12. [조광] 조선일보사
【원문】유정(裕貞)의 면모 편편(面貌片片)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 통계자료 없음 -
( 신규 )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4) 소낙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유정의 면모 편편 [제목]
 
  이석훈(李石薰)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9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유정(裕貞)의 면모 편편(面貌片片)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5년 0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