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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의 영전에 바치는 최후의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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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5.
이석훈(李石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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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영전에 바치는 최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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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훈(李石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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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과 교우 6, 7개 성상, 초로 같은 인생이더라니 그야말로 꿈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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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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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회남의 소개로 군을 알자, 나는 곧 군의 소박하고 순후한 인간미에 반했고, 다음, 채만식, 안회남과 함께 편집을 맡어보든 개벽사의 「제일선」지에 회남을 통하야 투고한 「산골 나그네」를 활자화하기 전에 읽고 군의 문학적 소질에 반해 버렸다. 본래 유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회남이, 기회 있을 적마다, 나더러 입에 침을 발러가며 유정을 추찬(推讚)하야 마지 않았는데, 사실 나 역(亦) 이 한 편을 읽은 뒤부터, 회남과 같이 유정추찬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과연 「산골 나그네」에서 보이는 고은 시정과 어휘 풍부한 간결한 문장, 비범한 인간적 통찰, 득묘한 수법 등에, 나는 무던히 탄복하였던 것을 지금껏 잊지 않는다. ‘예이츠’나 ‘싱그’의 애란문학을 읽은 듯한 시선하고 심각한 감명이, 그 후 불변치 않는 유정에의 애착과 우정을 맺어준 것이다. 그 때의 감상을 솔직하게 군더러 말했더니 대단히 기뻐하면서도 그저 부끄러울 뿐이라고 겸손하는 것이었다. 겸양은 군의 천부의 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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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대단한 침묵가였었다. 그러면서도 점점 친해지자 자기의 흉중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나의 졸작 「이주민 열차」에 대해서도 그 결점과 장처를 말하고 그걸 읽고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애증(愛憎)」을 읽고, 그 수법을 추구하라고 몇 번이나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또 군은 문단에서의 목표가 이태준(李泰俊)씨였는지, 혹은 평가들이 많이 떠들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더 주의를 했는지는 모르되, 가끔 흥분한 어조로 그걸 멀 잘했었다고들 야단이야 제길! 이렇게 코웃음칠 때도 있었다. 이태준이도 무서울 것 없다 이런 기세가, 그 말 속에 엿보이었다. 년전 「조광」에 이씨의 「까마귀」가 발표되자 몇 몇 평가가 호평을 했을 때도, 유정은 역시 흥분한 어조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폐환자를 위해서 활로 까마귀를 쏜다는 등의 이야기는, 먼 고대소설과 다름이 없는 통속소설적이다. 현실성 그것도 고대소설적 현실성은 있지만 ‘금일의 문학’이 요구하는 현대성은 없다. 이런 것은 무슨 현대소설이냐. 그 점을 똑바로 지적하는 평가는 슲을사 우리 문단에는 한 사람도 없구려 유정의 비난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이씨의 「까마귀」를 읽어보지 않었으므로 잘 알 수 없지만 군의 논리는 정당하다고 동감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 문단에는 존경할만한 구안(具眼)의 평가가 심히 드물다. 얼마 전에 최재서(崔載瑞)씨 한 분이 겨우 리얼리티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현대성 모더니티 — 를 금일의 문학에서 요구한 것을 논했을 뿐이었다. 유정의 비평의 안식은, 제로라고 뽐내는 여러 비평가보다 몇 걸음 앞섰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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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유정은 항상 어디서나 ○○한 ○○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와 단둘이 이야기할 때는, 가끔 흥분한 어조로 남의 작품을 비평하군 하였다. 그러나 군의 이러한 비평은 대개 이태준 씨에 한했든 것을 보면 문단서는 이씨를 제일 관심하고 있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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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 3년래. 지금 생각하면 요절하랴고 그랬는지 모르나, 군의 활약은 혜성적이었다. 그러나 <산골 나그네> 등을 발표한 뒤 2, 3년은 군의 존재는 신인으로도 취급되지 않었을 만큼 불우하야, 회남과 더부러 군의 작품을 여기저기 발표케 하랴고 원고를 옆에 끼고 댕기며 암약(暗躍)한 일도 있었다. 어떤 편집자는 작품은 읽지도 않고 덮어놓고 신인이 돼서 좀체 지면의 여유가 없다고 발표해주기를 꺼렸다. 주요섭(朱耀燮) 씨도 「신동아」에 있을 때 군의 「흙을 등지고」란 작품을 가져다 맡겼더니 5, 6개월이 되도록 내여주지를 않길래, 나는 약간 속으로 분개하야 전화를 걸고 돌려달래서 보니까, 표지에다 영자로 ‘좋다’라고 주서는 해 놓았었다. 유정도 적지않게 낙망하였었다. 그래 나는 잠자코 우울해 앉아 있는 유정을 보고 새삼스리 현상 응모도 쑥스런 짓이지만 할 수 없으니 거래도 해보자 권하였다. 결국 톡톡히 화풀이를 할 셈으로 조선, 중앙, 동아 세 신문에 모두 응보를 하기로 하였다. 전기 「흙을 등지고」는 짤막하게 줄여서 조선일보에 보냈는데 혹 <따라지>였었는 듯도 하다. 틀림없이 1등으로 뽑혀 ‘소낙비’라 개제되어 발표되였었고, 다른 두 신문에도 모두 입선이 되어 겨우 문단의 주목을 이끌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이래 유정은 그동안 써 두었던 작품을 ‘저날리즘’의 요구에 응하야 속속 발표하는 한편 열심히 정진한 것이었다. 군의 6, 7년간의 소업(所業)은 양으로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지만 질에 있어서는 평범한 작가의 2, 30년의 소업,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주장할런지도 모른다. 앞으로 군이 30년만 더 살아 주었던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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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그렇게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생활은 극도로 빈궁하였다. 본래 수천 석 하는 강원도 춘천지방의 토호(土豪)의 차남인 군은 조금도 빈고(貧苦)란 것은 모르고 자란 것이다. 그러나 겨우 철들기 시작했을까말까 했을 때에 몰락의 비애를 경험하고, 이래 6, 7년간, 생활의 근거를 잃고 방랑타가, 문단에 활약케 되었으나 너무나 많은 노력에 바하야 드러오는 것이 적었다. 작년 봄, 내가 서울 있을 때, 군은 나한테 놀러오기만 하면 입버릇처럼 직업을 구해달라는 청을 진지한 표정으로 되푸리 하군 하였다. 그래 여기 저기 수소문하다가 도염정(都染町)에 있는 어떤 사립학교에 교원 자리가 하나 나서 알어봤더니 월급이 20원야랴! 한다. 거기 교직자보고 훌륭한 신진소설간데 50원만 내라고 졸랐더니 두 눈이 휘둥거래지며 행낭방 자식들의 핏돈 거두어서 하는 학원인데 그걸 몇몇이서 노눠 먹는다는 기막힌 사정이었다. 좌우간 유정을 맞나서 거래도 해보겠는냐 했더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거 어디 비참해서 하겠소. 병이나 더치겠소. 이러면서 쓸쓸히 웃다가 쿨럭쿨럭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내 안해가 댕기다가 맹장염으로 퇴직한 계동 모 사립학교에 말했더니 거기선 또 훈도(訓導)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몇 군데 알어봤지만 죄다 틀어졌다. 직업과는 원수의 팔잔걸요 제 — 길 유정은 이렇게 중얼거린 다음 영영 나더러 구직타령을 않했다. 내가 농담 삼아서 유정을 부잣집 사위로 중매해얄텐데 — 하면 빙그레 웃으며 정말 하나 구해보수 내 덕입죠 하였다. 겉으론 웃음의 말에 지나지 않었지만 기실 나는 혼잣궁리로 정말 그런 자리가 없을까, 유정의 병은 돈이 없이는 못 고칠텐데 한 것이었다. 결국 이도저도 않돼, 조라들기만 하는 건강을 미천으로 그저 부지런히 원고나 많이 쓰라고 권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 하로는 방송국으로 놀러온 유정을 데리고 밖에 나와, 광화문통 어떤 음식점으로 가서 위선 「신동아 」— 편집자 이무영(李無影)씨를 전화로 불러내다가 점심을 한턱 쓰며 유정을 소개하였다. 무영, 유정의 작품 좀 실어주수 했더니 무영은 어떻게 생각했음인지 딴뚜만하고 “얘 — 쓰, 오어, 노”를 대답치 않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유정의 작품을 「신동아」서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고야니 내 면목뿐만 아니라 유정의 면목까지 상케한 듯 하야 불쾌하고 또 내심 일종의 반발심 적개심까지 느끼었던 것이다. 물론 유정의 글이라고 모든 잡지에서 다 시르란 법은 없지만은, 모처럼 청대었든 것이 통치 않음에 대한 불쾌이었으며, 경멸되는 듯한데 대한 반발적 적개심이었던 것이다. 유정군 신(身)도 적지않이 자존심을 상한 양 여러 번 웅절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무영이여! 지난날 그 한 때에 그랬을 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조금도 거슬리게 생각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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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에게 대해서 꼭 한 번 섭섭하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군이 평소 나에게 진심을 허했고 나 역시 군을 위하야 진심껏 애쓰던 터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할 때 나더러 일언반구의 이야기도 없었다. 우리는 별개의 모임을 갖이자는 이야기가 있던 차다. 더군다나 군은 ‘구인회’의 누구누구를 인간적으로나 예술에 있어서까지 공격하기를 주저치 않었었든 것이다. 첫째로 나는 군에게서 우정의 배반을 당하는 것 같아서 섭섭했고, 둘째로는 군의 행위가 위선적으로 보이어 불쾌를 느꼈다. 그러나 군은 상당히 폐환이 깊었으므로 ‘환자이니’하는 관용한 마음으로 아모 말도 하지 않었다. 아모 말도 말자니 속으로 더욱 거북하였었다. 군이 ‘구인회’에 가입한 이래, 나의 태도에 혹 변화가 있었다고 만일 느끼여졌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군에 대한 우정과 신뢰에 한 때 환멸을 느꼈기 때문임을 군의 영전에 최후로 고백한다. 더군다나 나는 일신상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야 서울을 도망해 오다싶이 떠나왔다. 차려야할 인사도 못 차리고 벗이고 뭐고, 극히 가까운 사람에게까지도 실예를 범하였다. 나의 정신상의 반자폭자기적 반점(班点)이 태양에 흑점처럼 좀먹고 있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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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병이 나아서 다시 문단에 화려한 활약을 전개해 주기를 나는 속으로 기원하고 있었고 또 내가 상처만 쾌유되면 유정을 찾어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나의 소원(疏遠)을 진사(陳謝)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거즛없는 양심적 충정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모든 것이 허사다. 군을 위하야 공연한 사람을 원망했던 일도, 이도저도 다! 이미 과거지사요 허무지사다! 그러나 다못 군의 혜성적 소업 군의 문단적 출세을 위하야 벗의 한 사람으로 다소간의 노(勞)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군과 관련하야 가장 유쾌한 추억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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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沈薰) 죽고, 운정(雲汀)이 가고, 또 이제 반 년도 못돼 유정이 사라지다. 이딴 가난하고 냉혹한 문단은 너무나 무자비하게도 문학지사를 쉬히 죽이는고나! 그러나 존귀한 죽음! 영광스런 죽음이다! 친애하는 유정! 기리 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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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 4월 1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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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5. 백광
【원문】유정의 영전에 바치는 최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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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5년 0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