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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同友會(동우회)와 李光洙(이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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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3~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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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文壇) 30년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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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友會(동우회)와 李光洙(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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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나 여행을 끝내고, 그 뒤 연여를 건강 회복 때문에 이 온천장 저 온천장으로 돌아다니다가 조금 나아서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둘러보니 이 땅의 문단은 참으로 참담한 형태였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끼던 이 땅의 문단의 형태는 그야말로 참담하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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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조선일보 ․ 중앙일보는 폐간되고, 온갖 잡지도 모두 문을 닫혀서 문학이 의지할 근거지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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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조선총독부 당국의 조선어 박멸책은 더욱 강화되어, 도회지의 아이들은 인젠 집에서부터 일본말을 쓰도록 훈련받고, 조선문의 출판물은 출판을 금지하고, 예전 출판 허가를 받은 것조차 새로 출판하려면 다시 겸열을 받으라는 철저한 방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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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면 반드시 시국적인 글을 써라, 다른 글은 지금 비상시국하에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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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껏 20년간을 민족주의적 지도자로서 자타가 허락하던 이광수가 전향한 것이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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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동우회’의 형사피고인으로 보석은 현재 자유로운 터이었지만 재입옥될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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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우회 형사피고인으로 보석 중에 있던 가형 東元 (동원)이 어떤날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때 나는 북경 여행에서 돌아와서 온천장으로 휴양 다니다가, 평양에 쉬고 있던 때였다. 형은 나더러 잠깐 상경하여 춘원을 만나 춘원의 심경을 좀 따져 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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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의 심경을 짐작하였다. 부자집 맏아들로 아직껏 고생을 모르고 지낸 형ㅡ 그가 예전 소위‘寺內(사내) 총독 암살미수 사건’이라는 세칭 105인 사건에 걸리어 3년간을 감옥 미결수로 2년나마를 있다가 지금 보석으로 출옥해 있기는 하지만, 당국이 ‘동우회’를 처벌할 생각을 가지는 동안은 반드시 언제든 또 고난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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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 이제 또 감옥에 들어갔다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의 선배 동지 도산 안창호는 얼마 전에 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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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회의ㅡ동우회 회원들의 운명은 이제 춘원 이광수의 거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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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당국에게 대하여 전향을 표명하면 혹은 용서될 수도 있겠거니와, 이광수가 버티면 동우회 4, 50명의 생명은 형무소에서 결말을 지을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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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떠난 뒤의 ‘동우회’는 오직 이광수의 전향 여하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동우회의 평남 책임자로서 주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가형의 이때의 심경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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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에게 여러가지의 의논을 하기를 피하였다. 이것이 나의 독단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형이 내게 한 말이 이광수를 전향시키어 동우회 40여 명의 생명을 구해달라는 뜻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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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 북경 여행을 단행하여 문단에 내리려는 박해를 모면케 한 나는, 이에 가형 이하 40여 명 동우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고, 또 다시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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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가 부자유하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하골 이광수를 찾은 것은 이튿날 오정도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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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게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라 한 뒤에, 이광수의 집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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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그때 자하골 산장에 홀로 있고 문안 자택에서 매일 조반 저녁을 배달하여 먹고 있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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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늦은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문이 연해 덜컥 열리면 이광수는 달려가서 문을 닫고 다시 와서 나와 마주 않고,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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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수), 富(부), 貴(귀)를 일생의 복록으로 꼽는데 그대 나이 50이니 이미 수에 부족이 없고 그대 비록 재산이 없으나 부인이 넉넉히 자식 양육할 만한 재산이 있으니 부도 그만하면 족하고, 춘원 이광수라 하면 그 명성이 이 땅에 어깨를 겨눌 자 없으니 귀 또한 족하다. 이제 더 ‘수’를 누리다가 욕이 혹은 더해지겠고 지금껏 쌓은 공이 헛 데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으니, 그대의 수를 50으로 고정시켜서 그대의 뒤가 헛 데로 안 돌아가도록 함 이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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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의 가슴 찔리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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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춘원은 난감한 듯이 연해 한숨만 쉬며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한 시간 기다리라고 약속한 택시는 시간이 되었다고 싸이렌을 뚜우 뚜우 울리어서 나 나오기를 채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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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내 몸을 일으켜 택시로 나왔다. 춘원은 따라 나와서 택시를 붙잡고 서서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다. 한 시간 가량을 이렇게 서 있다가 종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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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잘 연구해서 좋도록 처리하리다. 백씨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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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야 택시를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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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가 그때 어떤 上申書(상신서)를 재판소에 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상고심 재판까지 올라가서, 이광수는 온 책임을 자기가 뒤집어쓰고 자기는 자기의 잘못을 통절히 느낀다는 성명을 하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이 2천만 동포를 진정한 천황의 적자가 되도록 하기에 여생을 바치겠노라는 서약을 하여, 5개년 간 끌던 ‘동우회’사건은, 모두 무죄의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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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춘원에게 권고한 바는, 춘원이 온 ‘죄’를 홀로 쓰고 수, 부, 귀 그냥 지닌 채 자살해 버리라는 것이었다. ‘자살’이란 말을 노골적으로 꺼내지 못하여 춘원으로 하여금 내 말 뜻을 잘못 해석하여 一蓮托生 (일련탁생)식의 전향을 성명케 하여 춘원을 실질적으로 우리 민족운동 사상에서 말살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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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재판소에서 전향을 성명한 이후 그의 성격상 표리가 다른 언행을 할 수 없으므로, 진정한 일본 천황의 적자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아직껏 꺼리고 피해 오던 일본인과의 연회에도 자주 나가고, 총독부 출입조차 자주하고, 大和同盟(대화동맹)의 간부로 지방 강연도 자주 나가고, 집에서는 일본 옷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며, 이러한 생활에 적합한 이론까지 꾸며내어 글로 발표하며ㅡ 지금껏 청년계의 사표로 추앙받던 춘원이 홱 돌아서서 청년 사상 악지도자로 표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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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 징병 등을 위하여 강연을 다니며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부르짖던 춘원ㅡ 그가 과연 예전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외치던 춘원의 후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춘원의 성격은 어디까지든 충직하였다. 겉으로만 부르짖고 속으로 딴 꿈을 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지라 솔선하여 창씨개명도 하였고 대담스럽게 황국신민이 되라고 부르짖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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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당시 춘원의 말을 따라서 지금껏 원수로 여기던 일본을 조국, 모국이라 생각을 돌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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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년 춘원의 전향으로 무죄 석방이 된 40여 명 동우회원은 모두 해방된 내 나라에 자기네들이 바칠 충성을 강구하고 있지만, 춘원은 오직 60의 늙은 몸을 효자동 구석에서 그래도 붓대는 놓을 수 없어서 외로운 심경으로 붓대를 희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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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하건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젊은이가 일본 제국주의의 철봉 아래서 춘원의 덕으로 피하게 되었는가? 춘원이 서둘러서 막지 않았다면 일본의 성난 제국주의는 얼마나 많은 피를 이 민족에게 요구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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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춘원은 이를 막기에 급급하여 ‘民族魂(민족혼)’을 일본에게 넘겨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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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전향의 일부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나는 지금 ‘민족 반역자 처단법’ 에 걸리어 있는 춘원을 보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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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 나에게 향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너 때문이라고 질책할지 라도 나는 변명할 아무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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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인가 17일인가에 苑南洞(원남동) 어떤 집에서 ‘문인보국회’의 統(통) 이은 ‘文化協議會’(문화협의회)의 발족회가 있을 때 벽초에 ‘이광수 제명’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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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좌석에는 兪鎭午(유진오), 李無影(이무영) 등도 있었지만 兪(유)는 보성전문의 교수로 학병추진 등에 불소한 노력을 한 사람이요, 李(이)는 朝鮮總督(조선총독) 文學賞(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라 아무 말을 못하고 맥맥히 있었고, 이광수의 변명을 위해서는 내가 한마디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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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합이 정치단체를 목표로 하든가 良心人團體(양심인단체)라는 목표라든가 하면여니와, 문사의 단체인 이상에는 조선문학 건설의 최초 공로자 이광수를 뽑을 수 없다. 만약 이광수를 뽑는 문사단체일 것 같으면 나도 참가할 수 없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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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퇴석한 일이 있지만 8·15해방 이래로 이광수는 샘이 다분히 섞인 많은 시비를 받고 지금 ‘反民法’(반민법)의 처단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원문】同友會(동우회)와 李光洙(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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