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3
'오늘은 왜 이리 갑갑한고? 마음이 왜 이리 두근거리는고?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 같군. 어찌할꼬. 어디 갈까. 말까, 아. 혜숙이한테나 가보자. 이즈음 며칠 가보지도 못하였는데.'
4
그의 머리에 이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갑갑하던 것이 더 심하여지고 아무래도 혜숙이한테 가보여야 될 것같이 생각된다.
8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문 밖에 나섰다. 여학생간에 유행하는 보법(步法)으로 팔과 궁둥이를 전후좌우로 저으면서 엘리자베트는 길로 나섰다.
9
그는 파라솔을 받은 후에 손수건을 코에 대어서 쏘는 듯한 콜타르 내음새를 막으면서 N통, K정 등을 지나서 혜숙의 집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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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부자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경성 중류민의 열에는 드는 혜숙의 집은 굉대(宏大)하지는 못하지만 쑬쑬하고 정하기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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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의 방의 배치를 익히 아는 엘리자베트는 들어서면서 파라솔을 접어서 마루 한편 끝에 놓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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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혜숙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들어서면서, 혜숙이가 동모(同某) S와 무슨 이야기를 열심으로 하다가 자기 온 것을 알고 뚝 그치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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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유 없는 질투가 마음에서 끓어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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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혜숙이는 S로 인하여 나한테 놀러도 안 오는구만. 너희끼리만 잘들 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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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이가 한 번도 자기게 놀러 와 본 때가 없으되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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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엘리자베트 왔니. 우린 이제껏 네 이야기 하댔지. 그새 왜 안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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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이와 S는 동시에 일어나면서,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의 왼손, S는 바른손을 잡고 주좌(主座)에 끌어다 앉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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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아직 십구 세의 소녀이지만 재주와 용자(容姿)로 모든 동창들에게 존경과 일종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재주로 인하여 아직 통학중이지만 K남작의 집에 유(留)하면서 오후에는 그 집 아이들에게 학과의 복습을 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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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라니 무슨? 내 숭들만 실컷 보고 있었니?"
22
엘리자베트는, 앉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억지로 성난 것을 감추고 농담 비슷하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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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과 S는 의논하였던 것같이 잠깐 서로 낯을 향하였다가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입을 비죽하니 하고 머리를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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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이가 감춰 두자 엘리자베트는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차차 노기를 외면에 나타내게 되었다.
27
"내 이야기라니 무엇이야 얘? 안 가르쳐 주면 난 가겠다."
29
혜숙이는 아까와 같은 말을 한 후에 S와 또 한번 마주 향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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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가르쳐 줄라. 참말은 네 이야기가 아니고 저─―── 이환(利煥)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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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난 뒤에 혜숙이는 또 한번 S와 낯을 향하였다.
34
혜숙의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노기와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했다는 감을 함께 머금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
35
엘리자베트가 매일 통학할 때에 N통 꺾어진 길에서 H의숙(義塾) 제모를 쓴 어떤 청년과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닷새에 좀 정답게 생각되고, 열흘에 그를 만나지 못하면 섭섭하게 생각되고, 이십 일에 연애라 하는 것을 자각하고, 일 삭 만에 그 청년의 이름을 탐지하였다. '그도 나를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과 '웬걸, 내게는 주의도 안 하더라' 하는 생각이 그 후부터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서 쟁투하고 있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렇거니와 엘리자베트도 연애―─── 짝사랑〔片戀〕이던─―──를 안 후부터는 벗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뭏지도 않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염세의 생각과 희열의 생각이 함께 마음속에서 발하여 공연히 심장을 뛰놀리며 일어섰다, 앉았다,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일도 없는데 이환이와 만나게 되는 길에 가보았다, 이와 같이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무게도 통사정할 사람이 없는 엘리자베트는 혜숙에게 이 말을 다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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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사람의 비밀을 혜숙이는 S에게 알게 하였다 할 때는 그는 성이 났다.
37
처녀가 학생에게 사랑을 한다 하는 것이 그에게는 부끄러웠다.
38
둘―───혜숙과 S―───이서 내 숭을 실컷 보았겠거니 할 때에 그는 모욕을 당했다 생각하였다. 혜숙과 S가 서로 낯을 보고 웃을 때에 이 생각이 더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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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와 같은 비밀을 혜숙에게 고백하였다 할 때에, 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성을 안 낼 수가 없었다.
40
'이껀 자기를 믿고 통사정을 하였더니 이런 말을 광고같이 떠들춘단 말인가.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고? 아, 부모가 살아 계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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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는, 자기를 압박하는 것으로 유일의 오락을 삼던 부모를 빨리 죽기를 기다리던 그도, 부모에게 대하여, 지금은 유일의 믿을 만한 사람이고 유일의 의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혜숙에게 대하여서는 무한한 증오의 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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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그는 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환과 자기의 새─―──이것이 이제 화제가 되는 것을 그는 무서워하고 피하려 하면서도 그것이 화제가 되기를 열심으로 바라고 있다. 좀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43
자기 말을 듣고 엘리자베트가 성을 낸 것을 빨리 알아챈 혜숙이는, 화제를 바꾸려고 학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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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기하 숙제 해보았니? 난 암만해두 모르겠두나."
46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의 희망은 끊어졌다.
47
'내가 성을 낸 것을 알고 혜숙이는 이렇게 돌려다 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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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도 성을 억지로 감추고 낯에 화기를 나타내고 대답하였다.
49
"기하? 해보지는 않았어도 해보면 되겠지."
51
기하책을 갖다 놓고 셋은 둘러앉아서 기하를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한 이십 분 동안 기하를 푸는 새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혜숙과 S의 우교(友交)에 대한 시기도 없어지고, 혜숙에게 대한 증오도 없어지고, 동창생에 대한 애정과 동성에 대한 친밀한 생각만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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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을 필한 후에 셋은 잠깐 무언으로 있었다. 그 동안 혜숙은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도 다만 빙긋 웃기만 하고 말은 못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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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또 갑자기 희망을 품고 심장을 뛰놀리면서 속으로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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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혜숙이는 안심한 듯이 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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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만 하고 좀 말하기가 별(別)한 듯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또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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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씨느으으은 S의 외사촌 오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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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가운데는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이환이와 직접 대면한 것같이 형용할 수 없는 별한 부끄러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좀더 똑똑히 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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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왜 거짓말이야. S한테 물어 보렴. 이 애 S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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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머리를 S 편으로 돌려서 S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환이가 S의 외사촌이라는 것은 팔구분은 믿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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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속으로 고함을 치고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S에게서 이환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도 너를 사랑한다더라'란 말까지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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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혜숙의 소리에 S는 그렇단 대답만 하였다. 그리고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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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의 웃음. 의미 있는 듯한 웃음. 무슨 웃음일꼬? 거짓말? 이환 씨가 S의 오빠라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참말이다. 그러면 무슨 웃음일꼬? 이환 씨는 나 같은 것은 알아도 안 보나? 아! 무엇? 아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S에게 고백하였다. 아, 이환 씨는 날 사랑한다. 결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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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게 이익한 데로만 생각을 끌어가다가 대담하게 되어서 머리를 들면서, 결심한 구조(口調)로 말을 걸었다.
73
경멸하는 듯이 S는 대답하였다. 이 소리에, 엘리자베트의 용기가 대부분은 꺾어졌다.
75
그는 차마 그 뒤는 말을 발하지 못하여 우물우물하다가 예상도 안한 딴말을 묻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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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왜인지 가슴에서 똑 하는 소리를 들었다. S는 말을 연속하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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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다 알았소이다' 하는 듯이 교활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의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뺨과 목의 윤곽을 들여다보았다.
86
엘리자베트는 또 이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88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아까 집에서 혜숙의 집에 가야겠다 생각할 때에, 참지 못하게 가고 싶던 그와 동 정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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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지르고, 동무들이 '왜 가니?' '더 놀다 가렴' 등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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